성령에 매여가자
-2024년 송구영신 예배-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에게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23절). 바울이 가는 곳에 사람들이 환영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음성입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22절)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에 매여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2024년은 성령에 매여 가는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는 길이므로 성령에 매여가야 한다.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 23).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결박’은 줄로 묶고 조이는 것으로 바울이 감옥에 갇힐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환난’은 고통억압역경시련이라는 뜻입니다. 행 21:13 절을 보면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고 가지 말라며 울면서 만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매여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매여”란 ‘성령에 사로잡혀’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령에 잡혔다,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성령에 잡혀 환난과 싸우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했듯이, 사람이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있으며, 층간 소음으로 이웃 간에 칼부림이 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러할 때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령에 매여가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고전 2:21)라는 말씀처럼 사람의 사정을 아시는 성령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뭐가 필요한지를 아시고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8장을 보면 에스라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가는 길에 강도 떼가 매복해 있었습니다. 31절에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 해석가는 이들을 강도 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길을 통과하려면 이들을 지켜줄 군인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한 명이 없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천만 용사보다 강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에스라가 아하와 강가에 도착하자 그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간구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 8:21). 하나님은 에스라의 기도를 받으셨고(23절), 강도떼는 두려워서 줄행랑을 쳤는지 잠들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무사히 고국에 도착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는 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길을 다닐지라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주는 나의 방패”(3절)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18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있는지,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에 매여가는 자는 천만 원수가 에워싸 진 친다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만지지도 못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과 우리 교회를 성령님이 매여가시도록 성령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2024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에 매여가야 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것도 달려갈 길을 다 가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달려갈 길”이란 바울이 예루살렘에 다녀와 로마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한 노정(路程)을 말합니다.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이란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끝까지 완주(完走)하기 위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주일학교 교사구역장찬양대 등을 맡기면 힘이 들어 못 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 탈진이 온 것입니다. 영적 탈진은 기도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려는 데서 오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만일 목회자가 하루 30분 기도로 설교심방상담을 한다면 2~30%밖에 충전되지 않은 기도 배터리로 일을 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목회에 회의(懷疑)를 느끼거나, 가족과 사모에게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도 학교 선생이라 해서 아이를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가수라 해서 찬양 대원의 자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는 말씀처럼 주의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최선을 다해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보다 똑똑하고, 지식 있고, 재능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목사장로권사교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하다’ ‘능력이 없다’ ‘시간이 없다’라며 고집부릴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을 붙들고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에게는 성령님도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일지라도 충성하는 자를 매여가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탈진이 되지 않도록 성령의 힘과 능력을 구해, 받은 사명 능히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인지 자기 뜻인지 분별할 수 없으므로 성령에 매여가야 한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디모데가 아시아에 가려고 애쓰는 내용이 있습니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바울이 아시아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울로서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면 여비도 주고 순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하는데 오히려 막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는 자기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무리 애를 썼고, 돈을 투자하고, 시간을 들였어도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는 말씀처럼 자기가 생각한 것이 죽음의 길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내 의지내 고집을 내려 놓고 성령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자를 성령님이 순탄하고 안전한 길로 매여 가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성령에 매여가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주야로기도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