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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8권 / 전(傳) /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자는 이름도 성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만 도연명(陶淵明)의 팔운시(八韻詩)에 근거하여 그러한 사람이 있는 줄 안다. 대개 유송(劉宋)ㆍ의희(義熙) 연간에 동방에 은거한 자이다. 이때 연명은 팽택 영(彭澤令)을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선비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서둘러 찾아갔다. 푸른 소나무는 길을 끼고 자라고 흰 구름은 처마 끝에 머물러 있었으니,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었다. 옷은 해져서 온전하지 않았고, 한 달에 아홉 번 식사를 하며 10년에 한 번 관(冠)을 쓴다. 생활이 이렇게 고달픈데 항상 낯빛이 좋고 즐겁게 지내느라 가난도 잊었다. 연명이 일부러 온 뜻을 알고 거문고를 가져다 연주하였는데, 별학(別鶴)과 고란(孤鸞)의 곡조를 타니, 애달파하고 원망하는 내용이다. 연명이 마침내 세한(歲寒)을 보내려는 바람이 있었다. 이것이 아니면 후인이 어디에서 그 천심(淺深)을 살피겠는가.
대저 선비가 천하에 태어나 시운(時運)을 만난 것이 불행하여 사람을 피하고 세상을 피하여 조수(鳥獸)들과 함께 무리지어 살다가 매몰되어 일컬어지지 않는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느낌이 있어 기록한다.
[주-D001] 도연명(陶淵明)의 팔운시(八韻詩) : 《도연명집(陶淵明集)》 권4 〈의고(擬古)〉 9수(首) 가운데 제5수를 말한다.[주-D002] 유송(劉宋)ㆍ의희(義熙) 연간 : 유송 연간은 유유(劉裕)가 세운 남조(南朝)의 송(宋)으로 420~479년이다. 의희는 진안제(晉安帝)의 연호로 405~418년이다.[주-D003] 별학(別鶴)과 고란(孤鸞)의 곡조 : 이별한 학과 외로운 난새라는 뜻으로 모두 악부(樂府) 금곡(琴曲)의 이름이다. 서로 헤어진 부부의 각별한 정을 노래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오세옥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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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8권 / 전(傳) / 빈소 선생전〔顰笑先生傳〕
빈소(顰笑) 선생이라는 분은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 상공(李相公 이원익(李元翼))의 친구이다. 상공은 우리 인조대왕을 보좌하여 난세를 평정하였는데, 그 요령은 어진 이를 쓰고 어리석은 이를 내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상공이 필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어 그렇게 한 것인데 그 사람의 종적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당시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이 집안에서 시종 함께 지냈으므로 사실을 알고 말하기를, “상공이 함께 논의한 자는 단지 승지 강서(姜緖) 및 인의 조충남(趙忠男) 두 사람뿐이다. 강서는 미친 체하였고 조충남은 벙어리인 척하였는데, 모두 괴이하여 세상과 어긋난 분들이다.” 하였다.
선생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밝았다.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어진 자는 웃어 주고 그렇지 않은 자는 얼굴을 찡그렸는데 뒤에 모두 맞는 것으로 검증되었으니, 상공이 인재를 취한 것이 대개 이를 보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 사이에 상공이 관원을 진퇴시키는 잣대가 다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없으니 어떻게 그 사람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 ‘빈소 선생’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 선생은 과연 벙어리일 뿐이었는가. 선생은 바로 정암(靜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형제의 후손이다. 일찍이 도산(陶山)에 가서 이자(李子 이황(李滉))에게 문정공의 행장을 부탁하였는데, 이자가 또 시를 지어 선생이 부지런히 온 뜻에 답하였다. 그 시가 《퇴계집(退溪集)》에 들어 있어 상고해 볼 수 있다. 나는 고금에 재주가 출중하고 학업에 매진한 선비가 이름을 초야에 숨긴 채 살다 죽어서 인멸되어 칭해지지 않는 자가 많음을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 뒤에 붙인다.
[주-D001] 허목(許穆) …… 지냈으므로 : 허목은 이원익(李元翼)의 손자사위이다.[주-D002] 강서(姜緖) : 1538~1589. 자는 원경(遠卿), 호는 난곡(蘭谷)이다.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의 아들이다. 1565년(명종20)에 문과 급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좌승지에 올랐다. 지감(知鑑)이 있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였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오세옥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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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ㆍ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가학을 계승하였다. 조정에서 계속 벼슬이 주어졌지만, 은거해서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그 반대 운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이 강탈된 것에 대한 통분으로 자결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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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1741~1793)는 종실(宗室) 무림군(茂林君 정종(定宗)의 아들로 이름은 선생(善生))의 후예인 성호(聖浩)의 아들로, 자(字)는 무관(懋官), 호(號)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고도 자호(自號)하였다. 청장(靑莊)은, 신천옹(信天翁)과 같이 해오라기 종류의 수금(水禽)으로서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즉 이로써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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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집(所菴集) 이병원(李秉遠)생년1774년(영조 50)몰년1840년(헌종 6)자신가(愼可)호소암(所菴), 삼지자(三止子), 일개산인(一介山人), 소호자(所戶子)본관한산(韓山)특기사항김종덕(金宗德)의 문인. 유건휴(柳健休), 유휘문(柳徽文), 강운(姜橒) 등과 교유
所菴先生文集卷之十五 / 記 / 永平山水可遊者記
踏盡天下好山水。交盡當世好人物。讀盡天下好文字。古人三願。誠吾所寤寐想者。而文字之好。聰明日减。人物之交。形跡殊碍。獨方域窄矣。足跡猶多不及。吾甚愧焉。丙子春。久直東陵。鬱鬱如鳥之籠而縶。不能以飛。乃以天中之日。交付僚者。颺言於衆曰聞永平多奇觀。誰可從者。崇陵僚權子皜諾焉。以初七日約退院店。當日入泮中。崔孺瑞頗欲偕。以無騎不能成。臨發成三律以道恨。七日雨。傍眡者嘲其有天公戱。余曰無爾也。朱先生遇雨解西銘。韓愈氏爲文開衡山雲。今日之行。雨亦可晴亦可。遂乘雨出東小門。天漸爽。纖雲遂捲。馬上拈一絶云能天不能人。吾道古如玆。一雨洗塵埃。山水更逞奇。午後到退院。子皜來待已久矣。相視一笑。日已晏。不可以前。遂止宿。送子皜還崇齋。旅燈殘夢。太半是永平前路矣。八日晨子皜至。發行可十餘里。望見豐壤。大闕遺址宛然。葢太祖晩年。經芳碩之亂。自咸興來御于此云。午憇光陵寺。陵卽世祖珠丘之地。山自白雲迤遭而至。雄渾傑卓。垓子周圍百餘里。蓋當日廷臣有以太廣難之者。上曰後日東郊之民。其將有賴乎。卽文王蒭蕘與共之意也。聖人慮遠之仁若是哉。入上庫。觀古藏雜翫。皆世祖在宥時所服用器物。簡朴堅緻。不似近日華麗輕軟。亦可以想象古今文質之不侔矣。還上房。雨又作。食進而止。促發踰廣峴。少憇抱川場街。乘昏宿萬世橋。距京一百三十里。沿路諸閭落。皆龍州趙氏家云。九日促治行。聞白鷺洲卽八景之一而前距纔數弓近。直沿溪行尋。有巨石蜿蜒伏水中。余登而俯。色白水囓。有剜鑱狀。下數十餘步。有小島石高可三四仞。水環其左右。跨奴背亂流至島。島前高後垂。白石平衍。可坐者數級。至最高處。石皆側立。嶔𡾟攀拊。由石罅而南下。據石臺俯臨之。水淸瀅可意。老松生其頂。蔭覆蒼翠。樵者剪其一枝。蕭索甚可憐也。東墩遇水而止。前結以巖石如帽纛。西墩石壁削立。皆相距未一弓。高下相等。與島巖列爲三巖。兩崖間白沙平分而水左右流。奇秀可觀。有前人刻題在石面。漫漶不可讀。島後未十武。亂石簇簇。水聲中。西岸大石離立。大刻白鷺洲三字。傍書丁卯秋。觀察使東罔書。豈吾嶺金先生。嘗按察是州耶。摩挲久之。坐水中盤石上移晷。呼筆墨大題石上曰葛西山人李愼可。子皜亦自題權子皜三字。子皜曰凡墨題者不能久。况玆石在水中。萬一水爲之呑吐。復有誰人認吾行者哉。余笑曰否否。石而泐墨而洗。其歸於磨滅一也。久近於何有哉。吾將惟名是逃。大懼人之認吾行也。今日之題。聊以呈巨靈。水洗之何傷。應有識字魚龍呑去乎。更沿溪下十里。至羊門店小憇。日已午矣。使村居一人前導。出溪石上。沿溯上下。石上刻居士洞門四字。水傍亂石。往往可坐。然亦未有奇致。溪水自抱川以下。北流至此遇東來者。合而西折。水更大野更濶。五里爲永平邑治。南山石壁嵯峩。長林亘數里。又五里而爲金水亭。亭故蓬萊處士楊士彥所遊。而金友義友所居也。策馬前進。望見有山西走。而一微麓橫出南馳。而東頭直當水之衝。水過邑治後遇盤石。演迤渟滀而下。未及亭一里所爲石灘。灑然有聲。奔到亭之左肘。遇巨石層壁。離立谽谺。水赴觸激撞。聲益壯。迴而復停。若無意於注下者然後。更緣壁彎弓而徐下。往往白石當中流。可據可登。大刻白雲溪釣臺者。主人筆也。刻迴瀾石者。唐天使筆也。刻石門者。楊蓬萊筆也。舍馬從石門而上。南向開村。有高閣榜曰白雲樓。卽金君宅也。余跟子皜入。有老人𩮰冠袷衣。威儀甚簡。余爲其老禮拜之甚敬。其在傍者皆不衣冠。無延賓禮。余亦不禮而坐。頗或欵曲而儀式之褻。見聞使之也。同主人出金水亭。亭在山頂極落處。東向臨大野。爽然開目。然水石舂撞。皆在膝底不可見。乃携主人由石門下。沿溪坐石上觀瀾。更上石門。循石逕而下。沿至亭前。葢山下皆石。或盤或蹲。或累起或陡立。其可登者一一登臨。皆移步換形。窈然各一境也。女婢以午炊聞。入亭中茶畢。更緣南岸而下。則岸下白沙平鋪。水迤出南山下。山之在水南者。逆流直馳。上開爲石屛。乍曲而翼如。當中正面。巖石尤奇秀。正與白雲樓相當。沙上有二大石蹲伏。一曰尊巖。更襯水奇崛。中陷如尊。主人常儲酒而飮。一曰蓮花巖。中巖團圓。環以數三巖。外圓而內曲。狀如蓮花發朶故名云。體皆雪白瀅凈。水洗之更栗如也。二石俱有蓬萊處士草詩刻者。幾漫漶。久乃可認。循溪下數弓。有盤石可坐數十人。又下一里所。渡溪而南。則水復北折。有盤石磧磧可登。但石黝水陋。無甚開眼。上有朴思菴書院安畫像。循院北斷麓而下。遇石屛高可十仞。長可一弓。水出其下。蒼然可對。恨水尙淺。不可以舟。耽翫至夕陽。緩步從大路到主人家。余爲愛溪石。復獨步出巖上觀灘。薄昏還入。子皜昏倒已不省矣。已而月上。余蹴覺子皜曰月白沙明。此豈倒睡時耶。仍携出沙汀。散坐巖石上。一道銀光。俯仰通暎。竟不知三淸靈境。又爭得幾許多小也。夜深宿白雲樓。魂夢擾擾。如艤船急灘中。九日曉蓐食卽發。出石門少坐溪石上。仍向北大路行四十里。逢人問禾積淵安在。有鐵原居民。樂爲之前。舍大路從平原。望西而馳可二里所。巨松千挺。直至前巓。厓斷路竆。別無異見。但見兩岸中坼。水入地底。西岸石壁。俯瞰蒼翠而已。相與瞠然久之。遂下馬尋斷麓。微徑而下未十武。子皜先訝然大聲。余顧視之。滿目駭然。盖此山自中腰以下皆白石。爲風水所齧。或窪或突。或如剜鑱。稍北有石逆走。背長一弓廣四五席。直當水之衝。陡起其兩耳。如老驢擧頭。如巨鰲奮髯。雪皚而纛立。其傍盤石亂布。可散坐數十百人。水北來至石下。滙爲澤可舟也。溪中亂石。如屋簷如伏龜。皆可據而遊。西壁削立蒼然。松檜間生。水東西石色蒼白相並。使人造次奪目。余謂子皜曰金剛之燕有叢石。豈造物者移此二叢耶。此可爲八景之首。而介在畿甸百里而近。而無一人粧點者。豈貴遊者不暇於選勝而樂。幽閒者又無力及此耶。然玆邱之不遇。玆邱之幸也。使其朱甍畫棟。列纛樹旗。如東門之混混。何以得吾輩恣意遊賞。若是之優閒耶。但蕭然茅屋。飄然野服。亦足以管領山水。而今亦無之。吾子其有意乎。子皜頗亦難之。恨吾居太遠。無以爲山水謀也。午後還岐瑟浦。聞三釜淵五里而近。呼店人前導。時雨作。余顧笑子皜曰吾聞釜淵古有占據自號者。今日之雨。爲吾輩淸路耳。卽前行二三里。山高谷窄。不可以馬。步踰一嶺。周遭成一洞。有瀑飛下可五六仞。瀑凡三層。故名三釜云。石色麁厲。水力危險。高不及朴淵。爽不如積淵。乍觀卽出。還至水洞。問白雲臺卧龍潭去處。有溪叟云此去踰一嶺便是。然山峻而谷窄。除是馬行。卽衣冠亦當碍着。如欲往尋。但袒裼露頂方可。問有他條路。曰無矣。從光陵路稍平。遂留爲日後債。還宿羊門店。十日朝飯抱川邑。路見紅門而疊甍者。云是龍淵書院。卽龍洲趙公遺像所在處。而路忙不得一肅。古所謂於人而見者。今亦何處可得。則緬仰遺風。爲一悵然。夕宿西山尹生家。西山卽三角道峯之西麓。光海臣柳於于夢寅。癸亥改玉後。隱於此以全節。當日勳臣不能容。惜哉。十二日食後發行。聞淸潭在路傍。縱馬尋石路。行可二三里。漸見溪石潔白可愛。舍馬沿溪而上。未一里盤石跨兩岸。水左右落。琮琤奇麗。一踴而上。見朱甍翼然在石上。蓋水自三角後障合洞而流。至盤石後始大。以人功疏導之。分左右翼而亭其中。明爽可居也。主人卽今錦伯。困于朱紱。亭廢不修。日已午。驅馬從南大路東折而上。入北漢西門。小憇西巖寺。僧皆戰服鞭弭。無山林寥寂意。葢國制使之然也。人馬飢困。行槖已蕭然矣。遂直向太古寺。諭寺僧使具草蔬。前一僧更出。登山暎樓。樓卽關防形勝之衝。時以鍊兵云。有盤石可供一坐。小憇鎭國寺。歷觀祥雲瀑。將向元曉菴。聞石路懔慄。使僧將前導。披葛緣厓而上。到半程。石壁削立萬丈。微偃而苔掩。將經由其腹。余謂君子不登高。况石路苔滑。性命當寄與巖壑而以賭一快哉。子皜卽橫馳倒走。以示可往。余固以辭。路僧始指示上面石罅處。雖艱於攀附。可仄足而過也。解上衣傴僂而行。子皜屢以膽氣相譏。余曰膽固當大。可惜弄了性命。君子遇刀鉅鼎鑊。能不以死生易其操者。誠貴於膽矣。豈行險僥倖之謂哉。子其戒之。已而到元曉庵。庵在元曉峯西頂極落處。西南朢大洋。似通穌杭界。是日海霾交作。與水光相呑吐。浩浩茫茫。遂不分天海矣。海中島嶼隱隱如黑子。膝下諸山蚓走蛇蟠。若掌上數紋。誠壯觀也。菴與義相窟南北相持。昔日高僧元曉,義相。分山居此故名云。白雲臺在元曉東。又其東爲露積峯。通爲三角寺。僧云兩峯皆石路危險。往往陡斷。蟻附而上。非判命不可到。遂還自西城。從西巖左肩而上。城壕形勝。大略在眼中矣。城蓋以備國家緩急之用。倉庫蓄積甚盛。今皆枵然空矣。射夫砲僧。亂發前後山若兒戱然。山外環而內凹。可爲天塹。然城內崎窄。無鍊兵之地。還宿太古寺。翌朝前馬躡屩。歷行宮觀普光寺。出文殊門西。緣石逕行數弓。有石窟在山中央。安五百羅漢。有一僧供粥飯。小憇道場。南臨景福城形勝。盖山自白頭而來。至金剛逞一大奇。仍抽其一麓。左挾漢江。右挾臨津。千里而馳。挺爲道峯。奇秀靈特。遂頹而下結而上。爲三角。雄偉詭異。孕氣藏精。皆所以盡造化用意之巧。而南起爲文殊峯。則山皆南向而俯列如鉅齒。奔若湫倒。精神之所輳泊。氣力之所驅使。似狂似驚而後結一大咽。聳爲負兒岳。則㥘氣盡而光華浮。奔騰之意隱而雍容之味勝矣。我國家億萬無疆之休。殆所謂天作高山。太王荒之者乎。因拖迤而下。則道逕頗廣而地勢陡陷。往往無住脚處。所謂矩步而繩趍者。於此更着不得矣。行可十餘里。遇一谷水潺湲可沿。白石往往盤溪上。浣紗女高下曬衣。問知爲造紙署。又一曲而爲平倉。居民櫛比。又循麓而下。有臨溪練楮者。卽紙工業紙處。小憇遶麓而瓌。見白石益齟齬。水由石罅下。琮琮可聽。未數弓盤石上。畫閣飄然。榜曰洗劒亭。前臨白石晴川。後有石陡起爲臺。刻鍊戎壇三字。至柳亭下騎馬。出捍北門。卽北漢外城門。北漢之觀止矣。門外有石泉庵。庵傍摩厓刻石佛。巖前削壁上。有滿城妓挾樂而唱。紅綠管笙。隱暎林木間。蓋有藥水生其上云。出弘濟院。踰鞍峴入圯橋子皜家。數間茅屋。蕭然在城市間。相與打話。或亂抽架上書。已而白飯香蔬。蕭灑可口。對案畢卽叙別。入西小門。馳到泮中。盖七日來復矣。由歷二百餘里。領略湖海壯觀。竆洛陽之形勝。覘名園之盛衰。可謂追小魯之轍。跨禹穴之策。自覺烟霞拍拍生兩腋矣。崔孺瑞亟來相問。又就朱張兩先生祝融韻。爲和三首以侈之。且要余作行程記。以資其卧遊。余於山水遊歷。故不喜爲詩若記。獨玆一行。旣有吾子所囑。且以谷口子曾有同遊之約。而今千里而遙。而吾爲之先着矣。不可使不知則記又烏可以已也。若其水石之奇。搜歷之興。復有紀行聯百韻在。是又可以相參互也。嗟夫。古人仁智之樂。吾不得以復聞也。使其有浩然而浮。冷然而返者。豈不誠踈爽可欲。而要亦當約之於道德之林。磨礱其崒嵂。渟滀其洶湧。始可與語夫大方之遊矣。朱先生詩曰濁酒三盃豪興發。朗吟飛下祝融峯。噫微斯人。吾誰與歸。丙子竹醉節。
東方一士記。
순조 | 16 | 1816 | 병자 | 嘉慶 | 21 | 43 | 永平과 水落山을 유람하다. ○ 여름, 비로 인해 목릉이 허물어지자 都監을 설치하여 개수하다. ○ 9월, 義禁府 都事가 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