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치한 47개의 서원은 ‘묘(廟) 1, 원(院) 27, 사(祠) 19’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설총 등 16인이 주향인 서원 15개와 충절 대의로 파악된 32개의 묘·서원·사우였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도 12, 충청도 5, 전라도 3, 경상도 14, 강원도 3, 황해도 4, 평안도 5, 함경도 1곳이었다.
7. 신곡서원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 심곡서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상현1동 203-2)
8. 옥산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9. 필암서원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379
10. 도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680)
11. 문회서원 황해도(현재의 황해남도) 배천군 치악산 기슭
12. 파산서원 경기도 파주시 파산서원길 24-40(파평면 늘노리 235)
13. 돈암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14. 강한사 경기도 여주시 하동 200-1
15. 흥암서원 경상북도 상주시 연원1길 34(연원동 769)
16. 봉양서원 황해도(현재의 황해남도) 은율군 장연면 동부리에
17. 충렬사 경기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18. 현절사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9. 우저서원 경기도 김포시 중봉로25번길 90(감정동 492)
20. 용연서원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2리 165
21. 사충서원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22. 덕봉서원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23. 노강서원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24. 행주산성(별칭:기공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127(행주외동 162)
25. 창렬사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금사남로 78(금사리 519)
26. 표충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6-11
27. 노강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오강길 56-5]
28. 충렬사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진산로 356-10
29. 포충사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947-1
30. 금오서원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유학길 593-31(원리 276)
31. 옥동서원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32. 병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33. 충렬사(별칭 ; 안락서원)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
34. 창렬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212-8
35. 충렬서원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길 603
36. 포충사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37. 창절서원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영흥리 1063-1)
38. 포충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39. 충렬서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118
40. 태사사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의 동쪽 태백산성에 있는 옛 사찰터
41. 청성서원(별칭:청성묘) 황해남도 해주시 수양산 기슭 태백산성 내
42. 노덕서원 함경북도 북청군 북청읍 동리
43. 삼충사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면 영덕리에 평안
44. 충민사 평안남도 안주시 등방산동 북문부락
45. 수충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46. 무열사 평양직할시
47. 표절사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신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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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華 忠烈祠 忠州 忠烈祠。 固城 忠烈祠、 金化 忠烈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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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사太師祠
태백산성사우(太白山城祠宇), 성황사(城隍祠)
요약
북한 황해남도 해주시에 있었던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유금필 등 4인을 제향한 사당.
내용
고려 건국에 공로가 큰 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黔弼)·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온 사우이다. 태백산성사우(太白山城祠宇) 또는 성황사(城隍祠)라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태봉(泰封) 말년에 궁예(弓裔)의 폭정이 심해지자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의 대업을 이룬 공신이었다. 고려 왕실에서는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태조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 중에서 신숭겸과 유금필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어서 고을 사람들은 그들의 덕망을 추모하여 태백산(황해도 평산에 위치한 산)에 사당을 세우고 토속적으로 숭앙해왔다.
처음에는 이들을 성황신으로 추앙하여 그 사당의 명칭을 성황사라 하였으나, 뒤에 산 이름을 따서 태백산성사우라 하였다.
그 뒤 1796년(정조 20) 태사사로 사액되었고, 세상에 사표(師表)가 될만하다고 하여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신숭겸을 주향으로 하기 때문에 장절공사(壯節公祠)라고도 부른다. 그 후손인 신익성(申翊聖)이 세운 공덕비에는 사당의 내력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사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인조 때에 신익성이 평산신씨(平山申氏) 문중에 통문을 돌려 자금을 마련해서 새로 건립했다고 한다.
“당초 서원(書院)의 일로 하교하실 적에 갑오년(1714, 숙종40) 이후에 여쭈지 않고 멋대로 사원(祠院)을 세우거나 추향(追享)한 경우에는 감사는 파직하고 수령은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향현사(鄕賢祠)와 영당(影堂)을 멋대로 세운 때에는 도신은 엄히 추고하도록 다시 하교하셨습니다. 또 지평 권우(權祐)의 상소에 ‘처분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라는 말로 인하여 연석에서 하교하여 ‘당초 사원의 「사(祠)」 자는 곧 충렬사(忠烈祠) 등을 가리키니 일의 체모가 서원과 다름이 없다. 향현사는 이와는 다르므로 도신에 대한 추고는 그간에 처분이 바뀐 것이 없으니 그리 알고 효유(曉諭)하라.’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지금 듣자니 관서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계본(啓本) 가운데 충렬사가 있는데, 그때 도신에 대해서 추고만 하라는 전지를 봉입했다고 합니다. 이는 하교한 본래의 뜻을 자세히 살피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파직하라는 전지로 고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명구(洪命耈, 1596~1637)로,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619년(광해군11)에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으나 시골에서 은거하다가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등용되어 이조 좌랑, 우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해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도중에 김화(金化)에서 적병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50년(효종1)에 김화 고을 사람들이 홍명구가 순절한 터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는데, 1652년에 의열(義烈)이라 사액되었다. 여주(驪州)의 기천서원(沂川書院), 평양(平壤)의 충정서원(忠正書院), 자산(慈山)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