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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최흥원(崔興遠)의 문인. 남한조(南漢朝)와 교유. 영남 남인의 석학
立齋先生文集卷之三 / 詩
순조 | 2 | 1802 | 임술 | 嘉慶 | 7 | 65 | 9월, 남한조와 曦陽, 仙遊 등의 승지를 유람하다. 이때 원근의 儒士 수천 명이 모이다. |
東坡赤壁之遊。膾炙千古。誦其賦者。莫不想像而艶歎之。每遇壬戌之秋七月旣朢。則思欲泛舟弄月。以辦勝遊。吾商道院。正臨洛水之上。江山曠幽。號爲嶺中勝區。粤自創設以後。先輩縫掖之凡依歸於此者。苟遇是年是日。或雖非是年而遇是日。則必相與泛舟前江而遊。又用赤壁賦分韻賦詩。以寫其興。蓋至去壬戌而遵古無廢。至於今日則我正考終祥甫過於前月。故臣民之情。感涕未已。不忍遽事遊遨。而泛月故事遂廢焉。非盛德至善。有使人沒世不忘者。何以如是。聊賦一律以識。
昔年江院遇玆秋。先輩相招泛月遊。坡老文章誰得似。嶠南形勝此爲尤。傷心縞制身纔闋。無意滄洲跡更留。試唱美人歌一曲。西風回首淚難收。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0
동파의 적벽 놀이는 천고에 회자되어 그 부를 외우는 자가 상상하고 부러워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매번 임술년 7월 기망(旣望 16일)일을 만나면 배를 띄워 달을 감상하며 좋은 놀이를 마련하고 싶어 한다. 우리 상주의 도남서원은 바로 낙동강 가에 임하여 강과 산이 넓고도 그윽하니 영남의 좋은 구역이라고 부른다. 아, 서원을 창설한 이후로 선배 유자들 가운데 무릇 여기에 의귀한 이들이 진실로 이해 이날을 만나거나 혹은 임술년이 아니더라도 이날을 만나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앞 강물에 배를 띄워 놀이를 하고, 또 적벽부로 분운하여 시를 지어 그 흥을 적어 내었다. 대개 지난 임술년에 이르기까지는 옛일에 따라 폐함이 없었는데 금일에 이르러서는 우리 정조대왕의 삼년상이 겨우 지난달에 지나갔기 때문에 신민의 마음에 감읍하여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차마 대뜸 일삼아 노닐지 못하고 배를 띄우는 고사를 마침내 그만두었다. 정조대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몰세토록 잊지 못하게 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했겠는가. 애오라지 율시 한 수를 지어 적음〔東坡赤壁之遊 膾炙千古 誦其賦者 莫不想像而艶歎之 每遇壬戌七月旣朢 則思欲泛舟弄月 以辦勝遊 吾商道院 正臨洛水之上 江山曠幽 號爲嶺中勝區 粤自創設以後 先輩縫掖之凡依歸於此者 苟遇是年是日 或雖非是年而遇是日 則必相與泛舟前江而遊 又用赤壁賦分韻賦詩 以寫其興 蓋至去壬戌而遵古無廢 至於今日 則我正考終祥 甫過於前月 故臣民之情 感涕未已 不忍遽事遊遨而泛月故事遂廢焉 非盛德至善 有使人沒世不忘者 何以如是 聊賦一律以識〕
예전에는 강가 서원에서 이 가을을 만나면 / 昔年江院遇玆秋
선배들이 서로 불러 배 띄워 달을 감상했네 / 先輩相招泛月遊
동파의 문장에야 누가 비슷할 수 있겠는가 / 坡老文章誰得似
교남의 좋은 풍광은 여기가 더욱 좋아라 / 嶠南形勝此爲尤
마음 아픈 호제에 상복을 겨우 벗고 / 傷心縞制身纔闋
뜻 없이 푸른 물가에 자취 다시 남기네 / 無意滄洲跡更留
시험 삼아 미인가 한 곡조를 부르며 / 試唱美人歌一曲
서풍에 머리 돌리니 눈물 거두기 어려워라 / 西風回首淚難收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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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齋先生別集卷之一 / 詩 / 聞東江泛月。謾叙所懷。
泛月滄江五夜過。少年高興也應多。試看閒卧虛堂老。本地風光較若何。
憶曾江院泛舟過。滿目風烟領略多。是日夢魂招不得。卻疑身世入無何。
입재집 별집 제1권 / 시(詩)
동강의 달빛 아래 배 띄웠다는 소식을 듣고 느낌을 부질없이 펴다〔聞東江泛月 謾叙所懷 〕
창강의 달빛 아래 배 띄우고 오야가 지났으니 / 泛月滄江五夜過
소년들의 고아한 흥취 또한 응당 많았겠지 / 少年高興也應多
시험 삼아 텅 빈 집에 한가히 누운 늙은이를 보라 / 試看閒卧虛堂老
이곳의 풍광이 동강에 비해 어떠한가 / 本地風光較若何
일찍이 강원에서 배 띄웠던 지난날 추억하니 / 憶曾江院泛舟過
눈에 가득한 풍광이 대부분 생각나네 / 滿目風烟領略多
이날 꿈속의 혼도 초대받지 못하였으나 / 是日夢魂招不得
도리어 몸은 무하에 들어간 듯하네 / 卻疑身世入無何
[주-D001] 강원(江院) : 도남서원을 말하는 것으로, 서원이 낙동강가에 있기 때문이다.[주-D002] 무하(無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유무(有無)와 시비(是非) 등 모든 대립적 요소가 사라진 이상향(理想鄕) 혹은 선경(仙境)을 뜻하는 말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지금 자네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쓸모가 없다고 걱정한다면, 어찌하여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無何有之鄕]의 광막한 들판에다 심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이미진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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凝窩先生文集卷之二十二 / 行狀 / 成均進士上洛金公行狀
金養楨 | 1785 | 1847 | 安東 | 濟彥 | 定菴, 南州下士, 沙眞軒 |
壬申負笈于愚山。亟蒙奬詡。丙子陪往道南講中庸。留侍對山樓月餘。又受大學。以詩言志。有道院千年瞻壁屹。山樓一月坐春深之句。及歸先生跋武夷圖屛以寵之。
鄭宗魯 | 1738 | 1816 | 晉州 | 士仰 | 立齋, 無適翁, 愚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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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대산루(對山樓) | 조선 중기의 학자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독서 강학하던 곳으로,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46(우산리 193-1)에 있다. | 입재집(立齋集) |
2 | 대산루(對山樓)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독서 강학하던 우산서원(愚山書院) 부속 건물로,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에 있다. | 입재집(立齋集) |
3 | 대산루(對山樓)에서 …… 우암 | 대산루(對山樓)는 정경세(鄭經世)를 제향했던 우산서원(愚山書院)의 문루이다. 우암은 대산루 앞을 흐르는 이안천[현 행정지명]에 있는데, 지금은 나무가 둘러 있어 대산루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 입재집(立齋集) |
4 | 산루(山樓) | 대산루(對山樓)를 가리킨다. 대산루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1600년(선조33)경에 고향 상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독서 및 강학하던 장소였다. | 입재집(立齋集) |
5 | 산루(山樓) | 대산루(對山樓)를 가리킨다. 대산루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1600년(선조33)경에 고향 상주로 돌아와 지은 건물로, 독서 및 강학하던 장소였다. | 입재집(立齋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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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1권 / 소(疏)
우산서원(愚山書院)을 복설(復設)할 것을 청하는 의작(擬作) 소(疏) 기사년(1869, 고종6) 〔擬請愚山書院復設疏 己巳〕
삼가 생각건대, 신(臣)이 거주하는 경상도의 신하였던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는 곧 선조(宣祖) 때 유신(儒臣)입니다. 공이 이룩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과 사직을 일으켜 세운 정충(貞忠) 그리고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에 대한 업적이 역사책의 기록과 제현(諸賢)들의 찬술(贊述) 등에 두루 보이니, 신 등이 전하를 위해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경세는 어릴 때 일찍이 선정(先正) 신(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제자인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습니다. 일심으로 도(道)에 향함이 마치 모든 물길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는 것 같았으며, 화살이 과녁을 향해 적중하는 것 같았습니다. 낙양(洛陽)과 건양(建陽)에 학문의 근원을 탐구했고,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 그 여운을 접하였습니다. 앞서 나열한 이것이 바로 공의 도학 연원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부(君父 임금)께서 몽진하는 것을 보시고는 분발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의병을 창도하여 왜적을 참수하고 포획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관직과 상을 내려 주었습니다. 경연관으로 재직함에 이르러서는 임금에게 진대(陳對)하였으며, 상소문으로 경계하는 글을 올려 임금을 이끌어 도(道)에 당면하게 하는데 진심을 다하였습니다. 구언(求言)에 응함과 시무(時務)를 진술함, 그리고 재이(災異)를 논함과 상례(喪禮)를 논술한 여러 가지 설(說)들은 모두 삼대(三代) 명신(名臣)들의 훈고(訓誥)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조정과 재야에서 공의 풍채(風彩)를 생각하고 우러름이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 교외의 숲에 있는 것과 같으며, 의젓한 봉황이 천길 절벽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공이 사직을 부지(扶持)한 정충(貞忠)입니다.
이치를 궁구하여 앎을 극진히 하고〔致知〕 몸에 돌이켜 실천하였습니다. 《사문록(思問錄)》을 저술하고 《주문작해(朱文酌海)》 등의 책을 편찬하였습니다. 만년에는 예학(禮學)을 더욱 정치하게 연구하여 인정과 예문〔情文〕을 헤아리고 따졌으며 고금을 고증하며 바로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국조(國朝)의 전장(典章)과 사가(私家)의 상변(常變)에 있어서 모두 근거를 두어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공이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한 업적입니다.
오호라! 정경세의 도학 연원과 사직을 부지하는 정충, 그리고 계왕성개래학하는 업적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공을 높이고 보위하는 방법에 있어서 임금의 빛나면서도 은혜로운 사액을 내리는 일을 마땅히 나라 안의 다른 사액 서원보다 늦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제현인 문충공(文忠公) 신(臣) 유성룡(柳成龍)의 병산서원(屛山書院)과 문목공(文穆公) 신(臣) 정구(鄭逑)의 회연서원(檜淵書院), 문강공(文康公) 신(臣) 장현광(張顯光)의 동락서원(東洛書院) 같은 곳은 모두 이미 편액에 임금의 은총이 극진히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정경세의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주된 이 서원은 신등(臣等)의 정성과 힘이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지금까지도 명칭이 국승(國乘 나라 역사책)에 오르지 않았고, 사안이 나라의 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찌 무진년(1868, 고종5) 가을 나라 안의 서원이 훼철될 때, 그 가운데 섞여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등은 교서를 받들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하기를 “우리 전하의 현자와 덕 있는 사람을 숭상하는 뜻이 어찌 문장공 정경세를 돌아보지 않으신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이 사액을 청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르니, 신등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 조의를 표하면서 스스로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오호라! 서원은 곧 삼대(三代) 당서(黨序)의 유제(遺制)로, 도학(道學)을 밝히기 위해 설치된 것입니다. 도학은 국가(國家)의 원기(元氣)이며, 성현(聖賢)은 도학의 종주(宗主)입니다. 도학이 밝아지면 인심이 선해지고, 인심이 선해지면 풍속이 아름답게 됩니다. 풍속이 아름답게 되면 자식으로 아버지에게 효도할 줄 알고,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성할 줄 알며, 유자(儒者)로 의리와 이익, 왕도와 패도를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이에 백성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맥을 잘 유지하게 되니, 이것은 어찌 도학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유(先儒)들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노(魯)나라에 들러 공자(孔子)의 사당에 제사를 드린 것이 400년 동안 왕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터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송(宋)나라에서 사대(四大) 서원(書院)을 설치하였고, 남송 이후에 국난이 많았지만 오히려 서원의 건립을 숭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태평성대에는 천하에 두루 설치되어 사원(祠院)이 많은 선비들이 귀의할 곳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헛되이 설치된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실로 국기(國基) 사업의 장단(長短)과 정치 교화의 성쇠, 그리고 인심의 향배에 관련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도(吾道 유교)가 동방으로 옴에 우리나라의 학교 설치는 한결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또 선유(先儒) 신(臣)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으로 인하여 임금께서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하셨으며, 또 경서를 하사하시고 학문을 권장하셨습니다. 이에 크고 작은 고을들이 풍문을 듣고 흥기하여 앞다투어 서원을 건립하여 가르침과 학업을 깊이 숭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절의(節義)가 성대해지고 도학이 밝아져서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아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덕을 숭상하고 공(功)을 보답하여 사기(士氣)를 배양한 교화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로 세도(世道)가 날로 쇠퇴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날로 비루해져서, 각각 자기 조상을 존숭하고 각자 자기 선생을 끼고 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하나의 경전을 밝히고 한 집안을 가지런히 다스린 공로가 있으면, 모두 사당을 만들어 서원이라 통칭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서원이 지나치게 번성함을 염려하여 갑자기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셔서, 삼천 리 온 국토를 하루아침에 깨끗이 청소하듯이 쓸어버렸습니다.
아! 저 무부(無父) 무군(無君)을 추구하는 천암(千巖) 만학(萬壑)의 임궁(琳宮)과 범우(梵宇)는 오히려 여전히 전성 시대를 구가하는데, 우리 유림들이 수양하고 공부하는 장소〔藏修〕는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경서를 들고 도를 구하는 선비들을 허둥거리며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무궁한 근심거리입니다. 신등은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모아진 분이고 나라에서 종사(宗師)로 받드는 분은 전하께서 비록 지금 그분의 서원을 훼철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복설(復設)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리(天理)의 공변된 것에 합치되고 진실로 인정의 바름에 흡족한 것이니, 참으로 석개(石介)의 이른바 성덕(盛德)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태조(太祖))가 화가 나서 추성(鄒聖 맹자(孟子))의 위패(位牌)를 없애 버렸는데, 전당(錢唐)의 극간(極諫)으로 인하여 철거 명령을 취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효종(孝宗)께서도 신축년 이후 새로 지은 서원을 철거하라고 하명하셨으나, 김창흠(金昌欽)이 상소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복설하였습니다.
신등은 당시 서원을 훼철하라는 엄한 어명이 내려졌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한마디 상소문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김이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불행하게도 어버이의 마음이 혹 기뻐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되면 자식은 결단코 마땅히 자기를 꾸짖고 죄를 주면서, 우선 어버이의 뜻을 이어받아 따르면서 기쁘게 해 드린 뒤에 자기의 생각을 다 털어 놓아도 늦지 않을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공손히 오늘까지 기다렸다가 이에 감히 마음을 피력하고 심혈을 쏟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저의 신분은 미미하고 정성은 얕아서 위로 전하의 마음〔淵衷〕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은 국가를 위하고 사문(斯文)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명나라 고황제의 넉넉한 법전을 앙모하시고, 우리나라 열성조의 대덕(大德)을 체찰(體察)하시어, 정경세의 우산서원을 복설하는 것을 특명하시는 일에 조금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비단 전하께서 가까운 이의 의견을 살피고 추요(芻蕘)의 말도 취하는 덕은 앞의 훌륭한 성인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는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 사문(斯文)의 행운에도 원대함을 경영하고 영원함을 기원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상소문을 씀에 재단하지 않고 함부로 썼으니, 죄가 만 번 죽는데 합당합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유의하셔서 밝게 살펴주십시오.
[주-D001] 우산서원(愚山書院) : 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던 서원이다. 1796년(정조20)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경세(鄭經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정종로(鄭宗魯)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고, 그 뒤 복원되지 못한 채, 현재는 부속 건물인
대산루(對山樓)만 남아 있다.
[주-D002] 정경세(鄭經世) :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19)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수찬, 사간,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대제학에 이르렀다.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로 불렸으며 시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등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우복집(愚伏集)》이 있다.[주-D003]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 : 과거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들에게 열어서 보여 주는 일을 말한다.[주-D004] 선정(先正) : 돌아간 유현(儒賢)을 일컫는 말로, 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을 지칭한다.[주-D005] 이황(李滉) : 1501~1570.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다. 1534년(중종29)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으로 대제학과 외직으로 단양 군수, 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주자학(朱子學)을 깊이 연구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조종(祖宗)이 되었고, 특히 만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과 강학에 힘썼으며 많은 문도들을 배출하였다. 문묘(文廟)와 선조(宣祖)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예안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주-D006]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유운룡(柳雲龍)의 동생이며 이황(李滉) 문인이다. 1566년(명종21)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고, 왕을 호종하였다.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서애집》과 《징비록(懲毖錄)》이 있다.[주-D007] 모든 …… 것 : 중국의 지형은 서쪽은 산이 있어 높고 동쪽은 평지이다. 그러므로 모든 강물은 서쪽에서 발원하여 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萬折必東〕 즉 만사귀정(萬事歸正)의 뜻이다.[주-D008] 낙양(洛陽)과 건양(建陽) : 정자(程子)는 낙양(洛陽) 출신이고, 주자(朱子)는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뜻하니, 곧 우복이 정주학에 근원하여 연구했다는 말이다.[주-D009]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두 강 이름인데, 공자가 이 사이에 문도를 모아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공맹(孔孟)의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주-D010] 구언(求言) : 임금이 신하에게 정사(政事)의 득실에 대해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주-D011] 상서로운 …… 것 :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기린과 봉황이 교외의 숲에 있고, 황하와 낙수에서 하도와 낙서가 나왔네〔麟鳳在郊藪 河洛出圖書〕”라고 하였다.[주-D012] 사문록(思問錄) : 정경세(鄭經世)가 《역학계몽(易學啓蒙)》과 그 주석설(註釋說) 가운데서 의심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설을 덧붙여 답을 제시한 글로, 《우복집(愚伏集)》 별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역학계몽》과 《예기》를 읽다가 의심이 생길 때마다 깊이 생각하고 그러한 사색 끝에 얻어진 새로운 깨달음을 기록한 것이다.[주-D013] 주문작해(朱文酌海) : 정경세(鄭經世)가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긴요한 부분의 글만을 뽑아 엮은 책으로, 16권 8책의 목판본이다. 1648년(인조26) 이만(李曼)이 발간하였고, 그 뒤 1653년(효종3) 송시열(宋時烈)이 발문을 썼다. 내용은 봉사(封事)ㆍ주차(奏箚)ㆍ의장(議狀)ㆍ서(書)ㆍ잡저ㆍ서(序)ㆍ발 등으로, 그중 잡저 부문에 학술적인 내용이 많다.[주-D014] 상변(常變) : 상(常)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변(變)은 변하는 것이니,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례(常禮)와 변하는 변례(變禮)를 말한다.[주-D015]
병산서원(屛山書院)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613년(광해군5)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유씨(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겼다. 1620년(광해군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이황(李滉)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유성룡의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7)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고, 그의 셋째 아들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配享)하였으며, 1863년(철종14)에 ‘병산’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주-D016] 회연서원(檜淵書院) :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이다. 1622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0년(숙종16) ‘회연(檜淵)’이라 사액받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주-D017] 동락서원(東洛書院) : 경북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서원이다. 1655년(효종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76년(숙종2) ‘동락’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1932년 다시 서원으로 복원되었다.[주-D018] 무진년 …… 했겠습니까 : 무진년(1868, 고종5) 가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린 것을 말한다.[주-D019] 당서(黨序) : 옛날의 학교 제도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교육기관으로 숙(塾)은 25 가구가 모인 규모의 고을 학교이고, 상(庠)은 500 가구 규모의 고을〔黨〕 학교이며, 서(序)는 2500가구 규모의 고을〔州〕 학교이고 그리고 나라에 국학(國學)이 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주-D020] 주세붕(周世鵬) : 1495~1554.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ㆍ무릉도인(武陵道人)ㆍ손옹(巽翁)이다. 1522년(중종17) 문과에 급제하였고, 1541년(중종36) 풍기 군수가 되어 향교를 이전하고, 또 1543년(중종38)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과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주-D021]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38)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건립한 서원이다. 중국의 주희(朱熹)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설립한 것으로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했던 순흥 출신의 안향(安珦)을 배향하였다. 배향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주-D022] 소수서원(紹修書院)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원래는 이곳에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는데, 1543년(중종38)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였다. 그 뒤 1548년(명종3)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명종5)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1633년(인조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그대로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주-D023] 무부(無父) 무군(無君) : 무부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겸애설을 주장한 묵적(墨翟)을 말하고, 무군은 나라의 임금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楊朱)를 말한다. 《맹자 등문공 하》에 “양주는 자신을 위하니 이것은 무군이고, 묵적은 겸애이니 이것은 무부이니, 무부와 무군은 모두 금수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是禽獸也〕”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불교와 도교를 말한다.[주-D024] 임궁(琳宮)과 범우(梵宇) : 임궁은 도가(道家)의 사원이고, 범우는 불교의 사찰이다.[주-D025] 수양하고 공부하는 장소 : 장수(藏修)는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데, 후세에 서당이나 서원을 장수하는 장소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원전에서는 ‘장수(莊修)’로 되어 있으니, 아마도 오자인 듯하다.[주-D026] 석개(石介) : 송(宋)나라 노인(魯人)으로, 자는 수도(守道)이며 호는 조래 선생(徂徠先生)이다. 학문에 독실한 뜻을 가졌고 일을 당해선 과감했으나,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몸소 조래산 아래서 밭 갈고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주역》을 가르쳤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조래 선생이라고 불렀다.[주-D027] 전당(錢唐) : 명(明)나라 초기 사람으로 자는 유명(惟明)이며 절강(浙江) 상산인(象山人)이다. 박학하고 행실에 돈독하여 홍무(洪武) 1년(1368) 명경과(明經科)에 천거되었다. 그 뒤에 대책문(對策文)을 지음에 임금의 뜻에 부합하여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특진되었다. 태조(太祖)가 《맹자(孟子)》에 “임금이 신하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면, 신하는 임금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맹자를 문묘배향에서 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조치에 대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불경(不敬)의 죄로 다스리겠다고 조칙을 내렸다. 이때 전당이 상소문을 올려 충간하기를 “신은 맹가(孟軻)를 위해 죽을 것이니, 그렇게 죽으면 저의 영광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맹자의 배향을 회복하게 하였다. 《獻徵錄 卷44》[주-D028] 전하의 마음 : 연충(淵衷)은 연못처럼 깊은 마음이라는 말로 임금의 마음을 일컫는다.[주-D029] 추요(芻蕘)의 …… 덕 : 땔나무를 하는 천박하고 비루한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에게도 일을 묻는다고 하였다. 《시경》 〈판(板)〉에 “옛날 어진 사람의 말에, 추요에게도 묻는다 하네.〔先民有言 詢于芻蕘〕”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