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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5.29) 기본정보
성인명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金耆良 Felix Peter)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중인, 상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6-1867년
같은이름 김 펠릭스 베드로, 김펠릭스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펠리체, 피터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Felix Petrus)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그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난 3월 26일, 김기량은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었는데, 동료들은 이미 탈진하여 죽은 상태였다.
이후 김기량은 홍콩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는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이 바울리노는, 김기량을 만난 다음 날부터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김기량은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깊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1857년 5월 31일에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김 펠릭스 베드로는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기 전 1858년 3-4월에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김 펠릭스 베드로는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김 펠릭스 베드로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이윽고 통영 관아로 끌려간 김 펠릭스 베드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더욱이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김기량과 그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이만돌 바울리노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1857년 홍콩에서 만난 두 명의 조선인]
[돌아보고 헤아리고] 1857년 홍콩에서 만난 두 명의 조선인
1957년(철종 8) 홍콩에서 이만돌 바울리노와 복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6) 펠릭스 베드로가 만났습니다. 164년 전 해외에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김기량은 제주 조천 함덕 사람으로 장사하러 배 타고 나갔다가 풍랑으로 표류하던 중 중국 광둥(廣東)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페낭 신학교 유학생 이만돌은 두 명의 동료 신학생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와 함께 페낭에 있어야 했으나, 몸이 아파 홀로 신학교를 떠나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에서 치료받으며 공부하던 중이었습니다.
1857년 3월 이만돌은 ‘조선인이 왔으니 와 보라’는 전갈을 받습니다. “조선인이라니, 신학생도 아닌 조선인이 홍콩 대표부로 왔다니….” 아마 이만돌은 프랑스 신부들이 잘못 알았나 싶었을 것입니다. 김기량도 마찬가지였겠지요. 갖은 고초 끝에 낯선 나라에 와 앞날이 막막한데 조선인을 만나게 해준다니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당시 홍콩 대표부의 루세이유(J.J. Rousseille, 1832~1900) 신부가 파리 신학교 교장 알브랑(F.A. Albrand, 1804~1867)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김기량이 거의 미친 듯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 우리 대표부에 페낭에서 온 조선인 학생 한 명이 있으므로, 표류한 조선인이 어떤 사람인
지 알아보기 위해 그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쉬웠습니다.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튿날 그를 보호할 허락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난파와 구조, 우리를 그와 관계 맺게 한 이 상황,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섭리 같았습니다.”(1857년 4월 14일에 루세이유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루세이유 신부의 표현처럼 이만돌과 김기량의 만남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5명이 함께 표류하다가 혼절하였는데 영국 배가 발견했을 때 그들이 구하면 살 수 있겠다고 판단할 수 있는 숨결이 김기량에게 남아 있던 것(다른 사람들은 죽었다고 판단했기에 영국인들이 배로 옮기지 않았다), 홍콩에 표착했을 때 그를 일본인으로 오해한 관리(가톨릭 신자였다)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프랑스 신부를 오게 한 것, 김기량을 본 신부가 그의 의복을 보고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이 휴양 중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입니다.
김기량은 신학생 이만돌에게 교리를 배워 1857년 5월 31일 성링 강림 대축일에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날 처음으로 성체를 모셨습니다. 루세이유 신부는 김기량에게 제주의 ‘사도’가 되라는 뜻과 ‘행운’이라는 의미를 담아 ‘펠릭스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개종시킵니다. 그리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페롱 신부, 최양업 신부, 베르뇌 주교, 리델 주교까지 만나지요. 행운의 사나이 김기량은 1865년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풍랑을 만나 일본 규슈(九州) 지역으로 표류하였고, 3~4개월 체류하는 관례를 넘어 1년간 나가사키(長崎)에 머물며 오우라(大浦) 성당에서 프티장(B.T. Petitjean, 1829~1884) 신부도 만납니다.
김기량의 중국 표착 기록은 1846년부터 1884년까지 제주도민의 외국 표류 기록을 담은 「제주계록」에 실려 있습니다. 중국, 일본, 류큐(琉球)의 표류 기록 51건 가운데 1건이 김기량의 기록입니다. 좀 더 살펴볼 흥미로운 자료는 ‘대마도 종가 문서(對馬島宗家文書)’에 들어 있는 「구상각(口上覺)」입니다. 「구상각」은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들이 나가사키에 입도하여 쓴 진술서로, 통역을 붙여서 출신지, 출항 시기, 탑승 인원, 항해 목적, 표류 원인 등을 조사하였으며 조선인들에게는 반드시 종교와 호패 소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조선인에게 종교를 물었다는 것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도 조선에 천주교 신자들이 꽤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라도 천주교 신자가 유입되어 막부의 기독교 금교 정책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한 조처였을 것입니다. 전라도 진도와 남해 표류민의 「구상각」(1864년, 1867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도 있으니 김기량의 일본 표착 자료를 찾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소는 설립 이래 교회사 사료(史料)를 계속해서 찾아왔고 영인본과 연구 자료집을 꾸준히 발간하여 교회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1997년에는 복자 김기량 관련 자료도 찾아냈는데, 본 연구소의 최석우 몬시뇰이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페롱 신부의 편지, 『병인치명사적』 등을 발굴했습니다. 최승룡 신부님은 김기량의 영세 증명서를 찾기 위해 홍콩과 파리를 수차례 오가셨지요. 제주교구의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기념관(가칭) 전시를 준비하며 한국 교회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쓴 두 분 신부님과 앞선 연구자들의 절실한 열망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료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한국의 순교 성인께 전구해 봅니다.
[교회와 역사, 2021년 5월호(vol.552),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3.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 124위 열전] (57)
주님 대전에 오른 '제주의 사도'
누구나 인생엔 전기(轉機)가 있기 마련이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 복자에게 삶의 전기는 ‘풍랑’이다. 풍랑이 그를 홍콩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뒤흔든 신앙을 만나고 받아들인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정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복자의 출신지는 제주다. 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일주동로 일대다. 장사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1857년 2월 중순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됐다. 37일간이나 해상을 떠돌던 그는 중국 광둥 해역에서 영국 선박에 구조됐다. 동료들은 이미 탈진해 죽은 상황이었다.
영국 배에 올라 기갈을 해결한 그는 홍콩에 도착한 뒤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난 것이다. 당시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몸이 아파 홍콩에서 휴양 중이던 이 바울리노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그해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부대표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이어 귀국한 그는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나기도 한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고향 제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이웃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했으며, 이듬해인 1858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성사를 받기도 한다.
이후에도 그는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프티장 신부를 만나고 이듬해에 귀국했다.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함께 갔던 사공 2명을 영세시키기도 했다.
당시 그가 불렀던 천주가사가 오늘까지도 전해온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병인 치명 사적」 제3권, 강 마리아의 증언)
제주 복음화에 초석을 놓은 그의 활동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된다. 박해가 일어났음에도 김기량은 여느 때처럼 장사하러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 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풍화일주로에서 체포된다. 그의 배에서 성물이 발견된 것이 원인이었다.
삼도수군통제영 관아로 끌려간 그는 중영, 곧 통제사의 부장이자 참모장 격인 우후 영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다 받아야 했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킨 그는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했으니 그대들도 마음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하며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통영 관장이 대구 경상감영에 “김기량과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그와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고 그럼에도 목숨을 유지하자 관장은 이들 모두를 옥에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이날이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관장은 이들을 교수형에 처한 뒤 특별히 김기량의 가슴에만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김기량이 순교한 뒤 제주에는 신앙의 맥이 끊긴다. 40년 뒤 다시 선교가 시작됐을 때, 예비신자 교리를 받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기량 사후 흩어진 신앙의 씨앗은 40년의 세월을 기다려서야 발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난 사도적 결실은 이제 제주교구 공동체를 통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4월 26일, 오세택 기자]
4. 통영 통제영 중영관아, 옥터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목 졸라 죽이고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꺾지 못한 신앙의 꽃
- 조선 후기 300년 삼도수군을 관할했던 통제영 안내도. 통제영 입구 아래 건물(왼쪽 붉은 점선 부분)이 증거 터인 중영청, 통영시 향토역사관과 통제영 관리사무소 앞 부지(오른쪽 점선)가 순교 터인 중영 옥터 자리다.
오늘날로 치면 육군 기지라고 할 수 있는 ‘병영(兵營) 순교지’가 있다면, 해군 기지 격인 ‘수영(水營) 순교지’도 있다.
경상 좌병영인 ‘울산 병영 순교성지’가 대표적 병영 순교지라면, 충청 수영인 오천성(현 충남 보령시 오천항) 인근 ‘갈매못 성지’와 경상 좌수영인 동래(현 부산시 수영구) 수영 ‘장대골 순교성지’는 대표적 수영 순교지다. 그런데 정2품 무관인 병마절도사(약칭 병사)가 관장하던 병영보다 품계가 한 단계 낮은 정3품 외관 수군절도사(수사)의 군영인 수영 순교지가 더 많다는 점이 이채롭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300년 내내 충청 수영과 경상 좌ㆍ우수영, 전라 좌ㆍ우수영의 삼도 수군을 관할하며 조선 수군의 본영이 된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를 잡았던 통영 또한 대표적 수영 순교지다.
‘제주의 사도’ 순교 영성 깃든 곳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제주의 사도’로 불리는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7)이 삼도수군통제영 내 중영 형소(형리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나서 옥사함으로써 통제영은 교회사와 인연을 맺는다. 이어 1869년에도 부산 동래 수영 출신 신자 8명이 통제영에 끌려와 참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887년 경상우수영이 있던 거제에 신앙의 씨앗을 뿌려 ‘거제의 사도’가 된 윤봉문(요셉, 1852∼1888)이 거제에서 잡혀 통제영에서 문초를 받고 이듬해 2월 진주진영으로 이송돼 순교했다. 이처럼 1895년 폐영되기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순교자만 9명이 피를 흘렸고 더 많은 신자가 잡혀 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은, 한국 교회의 빛나는 순교성지가 됐다.
- 김기량 복자 등이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 중영 정문 형소(오른쪽 건물).
통제영이 순교지가 된 것은 김기량 복자에게서 비롯된다. 김기량은 1857년 2월 무역차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하던 중 중국 광둥 성 해역에서 구조돼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음에도 여느 때처럼 무역하러 동료들과 함께 통영 바다에 나갔다가 그곳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된다. 통영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음에도 굳게 신앙을 지켰고, 통영 관장은 대구 경상 감사에게 이 같은 사실을 보고한다. 경상 감사는 “김기량 일행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행은 관아 포졸들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자 관장은 이들을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한다. 이날이 1867년 1월로, 관장은 특히 김기량에겐 교수형을 집행한 뒤 가슴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순교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통영 하면 ‘예향’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유치환의 시 ‘행복’이 먼저 떠오르고,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이나 김춘수 시인, 「토지」의 작가 박경리,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전혁림 화백 등의 기억이 뒤따른다. 예향답게 소박하고도 운치 넘치는 항구 통영의 동피랑 벽화 골목을 지나 세병로로 들어서니 언덕배기에 그 유명한 ‘통제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헐려 2013년까지 13년에 걸친 복원공사 끝에 겨우 3분의 1밖에 되살리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세병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운주당과 경무당, 병고, 주전소, 열두 공방 등 관아와 부속 시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면적만 4만 6638㎡에 이른다.
그 통제영 입구인 망일루에 들어서기 전 큰길 왼쪽에 자리한 중영(중영청), 곧 삼도수군통제사의 부장이자 참모장 격인 우후(虞侯)의 군영인 우후영이 김기량 복자 등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증거 터로 추정된다.
- 통영시 향토역사관 아래에 있는 통제영 관리사무소 오른쪽 앞 공터와 도로 주변 부지가 김기량 복자 등이 순교한 통제영 중영 옥터다.
통영 향토사 연구자인 김일룡(68) 통영문화원장에 따르면, 현재 복원된 중영 정문 옆 건물이 통제영에 압송된 신자들이 문초를 받던 형소(형리청)인데, 복원이 잘못 이뤄져 중영청 앞 담장 축대 바로 밑에 세워져야 할 건물이 위에 지어져 버렸다. 옛 통영세무서 자리로, 지금의 통영시 간창골1길 64다.
또한 형소에서 문초를 받던 신자들을 가두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중영옥’(중옥)은 형소와 오른쪽 길 건너편으로 70m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지금의 통영시 향토 역사관 아래에 있는 통제영 관리사무소 앞 공터와 길 주변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통영시 세병로 111로 고증되고 있다.
김일룡 통영문화원장은 “통제영 관리사무소 입구 991.73㎡쯤 되는 공터와 도로변이 바로 김기량 복자가 순교한 중영옥이 자리하고 있던 옥터인데, 아직까지는 천주교회의 순교사적 의미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통제영 증거 터나 순교 터는 현재 향토사적 차원에서만 연구나 조명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어서 앞으로 정확한 고증 작업과 함께 치밀한 교회사적 연구 절실하다. 또한 증거 터나 순교 터에 대한 표석 설치나 증거자나 순교자에 대한 현양 운동 또한 필요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통제영 내 역로청 터에 세워진 마산교구 태평동성당 주임 김길상 신부는 “통제영 관장은 사형 집행 권한을 갖고 있었기에 김기량 복자가 신앙을 증거하고 교수형을 당한 통제영이나 옥터는 중요한 증거 현장이자 순교 터라고 본다”며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앞으로 활발한 연구와 현양 운동이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순례를 마치며…
지난해 5월 11일 자(1264호)로 닻을 올린 ‘124위 순교지를 가다’를 9개월 만에 27회로 마무리한다.
기획은 평화신문 창립 26주년을 맞아 시복을 앞둔 124위의 신앙과 삶을 순교 현장에서 체험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윤의병(바오로, 1889~1950?) 신부의 박해 소설 「은화」(隱花)처럼 ‘숨은 꽃’이 드러났고,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이 살아간 행적과 올곧은 믿음 살이, 순교 비화, 새로운 순교ㆍ증거 터도 밝혀졌다. 물론 신앙을 버린 배교자도 있었고, 가혹했던 박해자들의 행적도 낱낱이 드러났다. 그랬기에 마치 ‘꽃과도 같은’ 순교 사화를 하나하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취재 여정은 특별한 눈물, 특별한 감동을 안겼다.
124위의 시복이 단순한 시복으로만 끝난다면, 시복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과 영웅적 성덕, 믿음의 모범을 본받아 내면화하고 그 덕행을 실천하는 순교 신심 현양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124위 복자들의 삶과 덕행은 고스란히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시복은 복자가 되는 당사자들을 위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긴다.
[평화신문, 2015년 2월 8일, 오세택ㆍ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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