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탁은 나의 힘
새 글감을 얻은 다음날의 얘기였다. 둘은 ‘영원을 인지하지 않을 때 영원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수면 위로 서서히 몬탁이 떠오르는 주제였다. 둘은 몬탁,을 나란히 발음했다.
그때 그 단어를 다시 들었을 때, 즉 단어의 약 서른 번째 발화에서 나는 알았다. 그건 다른 차원의 힘임을, 그것은 또 다른 세계임을. 뱃고동이 울렸다. 그것은 그렇게도 멋지고 훌륭해서 내가 차마 잊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몬탁이라 부른다. 몬탁은 나의 힘이다.
내가 고찰한 힘에는 두 쪽이 있다. 그러니 나를 거듭하는 힘의 형태도 자연스레 두 갈래로 휜다. 하나는 한쪽으로 한 곳을 향해 뾰족히 솟은 탑 모양이며, 다른 하나는 태양의 코로나와 같은 원 모양에 가깝다. 판이 아닌 세계 안의 힘은 공간 내에서 작용하니 서열은 없다. 대신 자세와 방향이 있다. 약 하루 간 나의 행위들을 자전하며 건져낸 힘의 종들은 다음과 같았다. “망각은 나의 힘, 멸망은 나의 힘, 낙관은 나의 힘, 보류는 나의 힘, 방황은 나의 힘, 동경과 야망은 나의 힘, 목마름은 나의 힘, 터무니없음의 위대함을 믿는 것은 나의 힘, 이상(이상함과 이상한 시인 이상)은 나의 힘.” 그만 관측하자, 싶던 차에 메모장에 모여 있는 이 모든 단어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심지어 그를 자칭하는 생각들의 나열이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방향성에 대해 나는 다분히 억지를 느꼈다.
왜 몬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미지의 울림이 앞섰을까. 울린 순간 나는 그것이 진정한 내 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내 그것을 ‘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졌다. 그는 앞서 내가 기록한 기존의 힘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 다름은 내가 다른 어떤 힘보다도 몬탁을 단번에 떠올리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앞서 작성한 긴 목록 속 힘들의 역동성은 관제탑의 군상을 모티브로 삼은 듯이 가파르다. 그런 힘에 기대어 살아가기란, 평생을 어떠한 종목에 계속해서 나를 던지는 일과 같다고 느껴진다. 한 번은 장거리 달리기, 언제는 단거리 달리기, 때때로 장대 높이뛰기, 그것들을 소화하기 위한 삶의 힘 말이다. 그걸 모조리 다 취한다고 상상해봤을 때 정신과 몸의 체력이 창창해지긴 커녕 쇠퇴를 실감한다. 반면 몬탁의 힘은 해방과도 같다. 해방의 내음은 식욕을 돋군다. 그 운동성은 조화로운 원 형태이다. 그것의 숨겨진 얼굴을 상상하면 웅웅대는 빛과 소리가 들이친다. 이제부터 내 안의 몬탁을 꺼내 설명해보려 한다. 어떻게 그 정체를 밝힐지 기대감에 즐겁다. 이 글은 몬탁의 첫 정의이다.
-
어느날 몬탁은 나에게 입수했다. 내가 몬탁을 인지하게 된, 비물질을 물질화하게 된 계기라기보단 솟아나거나 뚫린 정체불명의 오목한 구멍을 발견한 기분을 느낀 건 그날의 지하 작업실에서였다. 이후로 다양한 몬탁들이 나를 찾아왔다.
3월 2일, 간만에 라쿠나의 Montauk을 들으며 나는 깨달았다. 멀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3월에 있었다. 물론 몬탁의 날짜는 11월, 혹은 12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일의 나는 몬탁에 와 있었다. 황급히 일기를 들춰보니 몬탁의 날짜는 정확히 11월 28일이었다. 들춰본 일기는 3월 2일의 페이지에 다시금 들어왔다. 한 시가 거기에 묻혀있다.<주입했던 흔적도 없이 단 한 코의 주삿바늘도 없이 넌 우영하는 부드러운 강풍과 같이 거리를 유지하는 온풍과 같이 날 따라 걸으며 내 안에 가즉 메워져. 계속 가즉 메워져. 그보다 치닫고 그보다 뭉개진 순간이 앞날의 내게 존재할까. 의뭉스러워. 그 밤은 최고의 재산이 되어 나의 발걸음을 감싸고, 손가락은 다시 홀몸이 되어 이리저리 찬바람을 갈라 훑지만 다시 돌아 걸어 그 지하의 집 문 앞에서 본다면 그 거울 알지. 거기에 뺨을 두고 차가운 인사를 하자. 다시금 가죽은 차갑고 식도는 뜨거운 바닥을 구르는 식사를 하자. 지하 몬탁의 낮> 그리고 오늘은 3월 19일이다. 몬탁은 저마다 하나의 조소작품처럼 뭉쳐있다.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작년 11월 28일, 난 지하 작업실에서 하룻밤 잤다. 그곳에 함께 있던 이들과 함께, 난 그곳을 우리의 작업실로 부르고 인지했다. 그곳에 사는 하룻밤이라는 존재가 눈치를 보지 않고 제 몸을 늘려댄다는 건 이미 익숙한 소문이었다. 그곳에선 항상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아무도, 먼지조차도, 그날의 내가 몬탁을 가질 사태를 몰랐다.
그 날 거기서 낮과 저녁과 밤과 새벽과 죽어있는 아침과 넘겨진 다음의 낮 시간을 보냈다. 그 루즈한 시간의 형세 중 지금 내가 언급하고 있는 몬탁은 아마 새벽의 일이다. 몬탁을 상징하는 조소가 새벽의 표정과 이미지, 색깔을 선보이고 있는 걸 보면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의내리는 순간 다시 모르겠다. 새벽의 색을 한 아침도 저녁도 낮도 있을 터인데, 그게 몬탁이라면 더욱이 가능함이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 날짜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않고 위의 시로 대체하고 싶다. 몬탁을 해체시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몬탁은 분리된 낱개이거나 홀몸이 될 수 없는, 불어난 혼합체이다. 분류작업 시 그것은 고운 입자의 플라스틱 잔해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질 순간에 놓여지게 될 테니 부족해도 단축을 택한다. 불친절한 설명에 잦아드는 미약한 민망함을 만회하려 한사코 덧붙이자면, 그날엔 빨간 초가 켜져 있었다. 한 순간엔 공간은 잔뜩 어질러져 있었고 마음은 어제쯤 세탁한 쿠션 같았다. 켜놓은 스피커에서 라쿠나의 Montauk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해당 몬탁의 조소에는 멜로디도, 미셸 공드리의 연출도 밀려붙어 있다. 또 그래서 그날의 몬탁 뒤로 따라 생긴 여느 새로운 몬탁보다도, 나의 몬탁의 정체성은 거기에 있다.
그날 이외의, 이후에 내가 몬탁을 만진 경험은 다음과 같다. 내게는 I라는 사람이 있다. 그와의 대화 중 나는 두 번쯤 제대로 된 몬탁을 경험했다. 어떤 밤에 우리는 추상에 추상을 얹으며 밤을 새며 대화한다. 보통의 대화는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래서 대화에는 스킬이란 게 있고, 사회성은 능력으로 칭송된다. 하지만 그런 밤에 우리의 대화는 오르락내리락이 아닌 끝없는 상승세를 띈다. 치솟기만 하는 비행운이 중력을 가르고 나아가다, 마침내 중력을 벗어나서도 불안하고 꾸준한 대각선을 자랑한다. 잡히지도 떠나지도 않는 그것의 주변에 흔들림이 미세하게 작용하더라도 주위는 고요하다. 내 발은 중력 안에 있으니 너머의 고요에도 불안한 게 사뭇 아쉽다. 그런데 나는 아예 발을 떼어본 적도 있긴 하다. 발을 구르게 하는 몬탁은 작업실에서의, I와의 대화에서 찾은 몬탁과 성향이 좀 다르다. 나는 그걸 전부 밴드 공연에서 느꼈다. 바로 내가 속한 우리가 아닌 ‘타인’의 몬탁에 내가 입장할 때이다. 이때 몬탁의 주도자는 아주 강력한 타인이어야 한다. 환상과 초현실을 똑똑히 응시하는 사람. 그로서 믿음은 더 이상 기운이 아닌, 여즉 단언된 실제이다.
도합 열 번 이하일 내 기억 하의 몬탁에서 공통적으로 나는 꿈을 노닌다. 우주정거장 같은 그곳은 부드러이 태워가고 운영되지만 부른다고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출입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출입증은 쓸모없지만 나오는 길에 나는 매번 열쇠를 얻어온다. 열쇠 꾸러미의 형형함은 늘 은빛으로 찰랑일 순 없지만, 감촉만은 단단하다. 몬탁의 특이점은 몰입, 초월, 그리고 “비”이다. 몬탁에는 깨고 나서 인지하는 꿈이 아니라 루시드 드림처럼 말그대로 정신을 관통하는 자각이 있다. 하지만 꿈을 운전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개인이 입체적인 아우라의 몬탁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다반사가 합세하여 잠 자지 않는 꿈인 몬탁을 만든다. 그간의 공기, 공간, 시간, 사람. 그것들이 한 데 모여 ‘지금,여기’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 더해져 몬탁에서는 몰입과 초월에 기대어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 한곳의 양상은 구와 같다. 어디서 어떻게 시선을 던져도 허용된다. 날이 날인 날,인 것이다. 또한, 몬탁의 압도 불가의 긍정성과 행복성 희망은 초과된 비긍정으로부터 나온다. 몬탁에는 소리치는 非가 내린다. 아닌 것들의 치사량은 웃음이 나오게 한다. 또 몬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상관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 날 몬탁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극도로 중요하다. 그들이 그들인 것은 아주 중요하고 동시에 아주 소진될 계획이다.
몬탁과 비슷한 것을 구별해줄, 몬탁의 증거는 명료하다. 사라질까봐 두려워진다면 몬탁이 아니다. 몬탁은 그 자리 그대로 있는다. 그 온전함은 보통의 무게일 수 없다. 몬탁은 쉬이 사라질 톤 단위가 아니며, 충만한 거스름이다. 온 세상이 내 것 같다가도,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겠다 싶은 날이 있다. 이 중 전자가 몬탁에 가깝다. 그리고 전자일 때 우린 태생이 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로 거슬러 간다. 이런 몬탁에 발을 들이는 것 만으로 온 몸이 흐물대고 정신이 마냥 부풀어오를거라 생각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몬탁을 처음 만났을 때, 초반엔 경직될 수 있다. 몬탁은 긴 텀을 두고 불쑥 찾아오니 실은 매번 경직되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상황이나 위기에서만 경직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현실과 비현실 중 어느 쪽에서 더 경직될까, 그리고 그 경직은 서로 얼만큼 다르고 어디가 같을까, 그것은 납작한 꿈일까 사실일까.
그래서 이 몬탁이라는 힘이 나를 어떻게 만드는지, 후에 어떻게 삶에 작용하는지 묻는다면 다음 문장을 바라보고 싶다. “장 자크 루소-감성은 이성의 길잡이이다.” 이를 변형하며, 몬탁의 효용성은 다음과 같다고 본다. “초현실은 현실의 길잡이이다.” 그것은 잠에서 깬 지팡이이다. 그것은 자주 혁명의 물결을 띈다. 삼킨 꿈은 언젠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다. 계속 삼켜댄다면 말이다.
나는 마침 몬탁을 둘러싼 속설을 비추어 보기도 한다. 초현실에 가담한 사람들은 어른답지 못하고, 어엿함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어디선가 온 코앞의 이야기로부터. 하지만 내가 몬탁에서 본 진짜 행태는 현실 가운데서 현실과 가장 멀어지며, 그로 인해 누구보다 밀접히 성숙에 닿게 되곤 한다. 그런 식의 고리를 가진 성숙은 후에 대체불가한 어엿함, 고유의 단어로 탈바꿈했다. 경화는 유약으로부터 오듯이, 몬탁을 거쳐서 성숙이 되었지만 역으로 그 성숙이 몬탁을 증명하고 표현해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하다. 애벌레와 완성체를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숙고이다. 하지만 몬탁의 아무도 몬탁을 잊지 않으니 다행이다. 잊지 못하고 섬짓대는 기억에 사로잡혀 매번 찬사를 접어 엽서를 보내올 나비와 그의 과거들. 그리고 그 원액은 시간에 휩쓸려 가 한동안 띄지 않아도, 어딘가에 몰려있다가 지친 후손을 위해 가만히 번득인다.
당신도 몬탁을 만나길 바란다. 그 만남은 재회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힘보다도 온전하게 퍼져온 몬탁을, 글감을 받았을 때의 내가 가장 먼저 헤아리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얼만큼 오래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각자의 조소와 각자의 향으로 나보다 멀쩡히 숨 쉰다. 세계의 지분은 눈알 선상보다 그 외의 공간이 더 광활함을 믿는다. 몬탁은 그곳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좀처럼 우리는 현실의 땅인 토지를 사는 바램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땅을 사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처럼 현실을 제쳐두고 몬탁을 응시하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몬탁이 현실로 걸어왔을 때, 현실에는 몬탁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시끄럽다고 귀를 막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말하는 현실의 바를 나의 사전에 도입할 의지도 없다. 현실은 사실 저마다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입에서 나온 현실에 집중하라는 말이 여가시간에 집중하라는 말과 같이 들릴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현실은 각진 채로 세분화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한다. 더 왕왕 울리는 허공의 간주까지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아님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작은 반점일 수도 있다. 나에게 몬탁은 초현실과 현실, 실존하는 시재와 시대의 전반이다. 현실이 몬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몬탁이 현실임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방하는 그곳에 발바닥을 댈 수 있다면, 불안은 커녕 걸음이 강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