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천년만년 누려보세'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 새 왕조 개창에 끝까지 반대하며 버티던 정몽주를 구슬리기 위해 이방원이 정몽주와 마주앉아 술 한 잔을 나누며 《하여가》를 읊자, 정몽주가 《단심가》를 읊었다고 하는 일화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몽주는 57세이고 이방원은 25세인데, 30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앉아 저런 시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것은 사실여부가 의문이다. 야사에서 보면 정몽주가 이방원 앞에서 단심가를 읊고 죽임을 당할 줄 미리 알고, 선죽교를 지나기 직전 주막에서 쉬다가 다시 말에 오르면서 말을 거꾸로 말을 탔다고 한다. 이런 야사와 함께 이 시조들도 정몽주가 죽은 후에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고려사’ 등 공식 역사서에는 이 시조들이 나오지 않고, '청구영언'이라는 시조 모음집이나 정몽주가 죽은 뒤에 나온 '포은집'에만 나온다. 정몽주는 고려를 개혁하여 유교국가로 만들어가는 데는 정도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반대했다. 즉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천천히 개혁을 해나가고자 한 온건파 사대부이고,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혁명파(급진파) 사대부였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이색 문하에서 같이 동문수학한 존경하는 친구이자 선배로 깍듯이 대우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는 처지였다. 정도전과 이성계는 어떻게 해서든지 정몽주를 설득하여 함께 가고 싶었고, 조선건국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