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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 백만인 구령 운동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고종마저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당하는 민족의 위기를 만나면서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가장 어두운 터널에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눈감아주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눈감아주기로 양국 사이에 양해각서 <가츠라-태프트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 정부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한국 주재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이 이와 같은 미국의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자 아예 그를 강제로 소환해 갔고, 고종의 특사로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려던 헐버트(Homer Hulbert)의 계획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고, 일본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정부마저 부패의 늪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적 위기 극복은 어느 쪽을 봐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을 살릴 남은 유일한 세력은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민족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가슴으로 쓸어안았던 것입니다. 그 외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 교회가 놀라운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본분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따로 있고 민족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이 기독교에 있다고 확신한 이들은 민족 복음화를 염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만 명을 주께로 인도하자는 소위 백만인 구령 운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태동하였습니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일어난 백만인 구령 운동은 평양 대부흥 운동의 영향권 속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날 연보’(preaching day)를 정해 일정한 기간 복음화를 위해 가까운 동네는 물론 전국을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였습니다. 성서공회는 마가복음을 100만 권 인쇄해 이 기간에 70만 권을 배포했습니다. 처음 이 운동은 자연스럽게 태동하였지만, 전개 과정에서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려는 인위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하는 일종의 전도 캠페인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민족 복음화라는 시대적 사명을 깊이 인식한 것입니다. 영적 각성 운동이 민족애와 깊이 연루되었던 역사는 기독교사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1. 선교사들의 간절한 기도
고종이 퇴위를 당한 두 해 후인 1909년 여름 송도 주재 12명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현재의 한국의 종교적 상황을 깊이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이 발흥한 이후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놀랍게 일어나 한국교회 안에 영적 대각성운동이 전개되었지만, 1908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그 열기가 급속하게 식어가는 듯했습니다. 이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이 민족과 한국교회를 살리는 원동력이 바로 영적 각성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1909년 7월 12일 기도 모임을 함께 가졌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송도의 남감리교 선교회 소속 15명의 선교사가 7월 12일부터 일주일간 기도회를 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현장에 영적인 능력이 결핍된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회 겸 사경회를 함께 갖고 기도하다 돌아가고 리드(W. T. Reid), 스톡스(Marion Boyd Stockes), 갬블(Foster Kirk Gamble) 등 세 명은 남아 성령 세례와 거룩과 성결을 위해 새벽 4시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모두가 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스톡스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다른 간격을 두고 우리는 심령에 성령의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은 민족의 영적 각성을 간절히 염원했던 세 명의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심령을 사랑의 띠로 단단히 묶어주었고, 과거에 알지 못했던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하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국인들도 여기에 합류하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개성에 있는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간절한 염원이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정대로 1909년 9월 2일부터 6일까지 남감리교 연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스톡스를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이 나라에 다시 성령의 계절, 그리스도의 계절이 도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효율적인 복음화를 위해 히브리서 10장 35~36절에 근거해 20만 명의 영혼을 금년에 구령하자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남감리교 선교회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0만 명 구령 운동을 채택하고 민족복음화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2. 장대현교회 새벽기도
민족 복음화의 움직임은 장대현교회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장대현교회 담임 길선주 목사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같은 교회 박치록(朴致祿) 장로와 함께 새벽에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새벽 기도는 소문에 소문으로 이어지고 많은 교인들이 이들의 새벽기도에 합류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성숙되자 길선주 목사는 주일 오전 예배 때 “누구든지 원하면 몇 일 동안 새벽 4시 반에 모여 기도할 수 있다”고 광고하였습니다. 새벽 2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새벽 4시 30분이 되자 500여 명이 모였습니다. 며칠 후에는 새벽기도 참석자가 6, 7백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길선주의 능력 있는 설교와 참석자들의 기도 열기는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와 박치록이 시작한 새벽기도는 급속히 한국교회에 확대되어 191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사경회와 전도 집회를 통해 더욱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경회가 열리는 곳마다, 부흥의 역사를 사모하는 교회마다, 부흥회와 전도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새벽기도가 반드시 중요한 순서로 포함되었습니다.
3. 세계적인 부흥사들의 입국
백만인 구령 운동을 촉발시킨 또 하나의 사건은 외국 부흥사들의 입국이었습니다. 1909년에 상당수의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윌버 채프먼(J. Wilbur Chapman) 목사, 찰스 알렉산더(Charles M. Alexander)부부, 로버트 학니스(Robert Harkness), 데이비스(G.T.B. Davis)와 그의 어머니, 노톤(Norton) 부부,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이 입국,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부흥의 열기를 고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민족 복음화에 대한 염원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가운데 1909년 10월 8일과 9일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간 서울에서 제5차 복음주의연합회공의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연합공의회는 남감리교 연례 모임에서 채택된 “금년 20만 명” 구령 운동을 받아들여 “금년 100만 명” 슬로건을 채택하였습니다. 백만인 구령 운동은 이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출범하였습니다. 노블이 지적한 대로 백만인 구령 운동의 골격을 제공해 준 것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암울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던 그때 교파를 초월하여 교회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하나로 뭉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교회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신앙의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교파와 지역과 연령과 신분을 초월하여 하나로 뭉쳤기 때문입니다.
백만인 구령 운동을 위해 세 가지가 특별히 강조되고 실천되었습니다.
첫째는 민족 복음화를 가장 시급한 사명으로 삼고 있던 한국교회는 각 지역에서 대중집회를 열어 구원의 복음, 능력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정치적인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 복음화라는 사실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었고, 그것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한일합병이라는 쓰라린 치욕을 경험하고 있는 일반 민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폭음전도를 위한 전도 집회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둘째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바치겠다는 “날 연보”가 널리 행해졌습니다. 은혜를 받은 이들이 1주일 혹은 10일, 아니면 2주일이나 그 이상을 전도에만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주를 위해 물질을 바치는 것처럼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이웃과 동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널리 유행했습니다.
셋째는 날 연보를 작정한 이들이 시간만 드리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쪽 복음이나 전도지를 구입하여 전달하는 일도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와 전도지가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백만인 구령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마가복음이 100만 부 이상이나 배포되었습니다.
이처럼 백만인 구령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중 전도 집회, 날 연보, 복음서 배포가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시행되었습니다. 권찰제도가 한국교회에 정착된 것도 백만인 구령 운동 때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날 연보를 작정했고 이들이 거리에 나가 혹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서와 전도 책자를 나누어주며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시대 한국을 방문하여 백만인 구령 운동의 지도자로 쓰임 받으며 그 현장을 직접 목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는 1910년 3월 코리아 미션 월드에 “기독교회사에서 가장 놀라운 선교 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기고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백만인 구령 운동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발견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하고 인도하고 있었고, 반면 한국인들은 여러 날을 연보로 드리고, 무한한 열심과 열정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복음서를 구입했습니다.”
이 시기에 정착되기 시작한 금요 심야기도회와 새벽기도회는 그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주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토요일에도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하고 두 명씩 마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다음 날 주일에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당시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는 교인들을 향해 힘있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이 입을 열고 무엇이든지 말하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은 그의 외침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길선주는 1910년 초 미국의 조지 매큔 선교사에게 감격에 겨워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멘. 나는 그의 영광의 놀라운 현시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흐르는 눈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 지금 이 시간에 대학생들과 중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있으며, 그리고 소학교 학생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데 열정이 넘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7살 난 작은 아이들도 모여 돈을 가지고 와 전도지와 복음서를 삽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거리로 가지고 나가 돌리며 전도합니다. 이 작은 아이들이 불타는 열정으로 충만한 채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이야기를 사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개인에게 가서 팔을 붙잡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간청합니다. 어제까지 불과 3박 4일 동안 약 400명이 그리스도를 새로 영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은 어린 소년들이 자신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죄를 깨달았다며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그와 그의 은혜의 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당시 민족 복음화의 염원이 가장 불타고 있던 세대는 역시 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1910년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북부에 있는 한 오래된 불교 사찰 진관사에서 제1회 YMCA 학생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언더우드, 이상재, 김규식, 길선주, 에비슨, 왓슨 등 지도적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곳에 참석한 젊은이들에게 민족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었습니다. YMCA 학생 사경회가 열리는 진관사에는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 대신 간절한 기도 소리가 산속의 정적을 깨고 고요한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습니다.
스님들은 학생들을 위해 자신들의 방 대부분을 양보해야 했고, 반면 외국인 강사들과 대표자들은 이교 신들로 둘러싸인 사찰안에서 천막을 치고 간이침대를 놓고 모기장을 매달았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위한 간절한 기도 소리가 부처의 발밑에서부터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집회는 때로는 사찰의 막사로 사용하고 있는 한 커다란 한국인 방에서 갖기도 하고 때로는 불상 앞에 있는 대형나무 그늘에서 갖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리며 염불을 외는 노승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후 그들의 불상 앞에서 심벌 소리가 울리고 드럼 소리가 울려 나는 가운데 전통적인 기독교 찬양을 부르고,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사역을 논의하는 이 열렬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바라볼 수 있어 어제의 한국과 오늘의 한국 사이의 대비가 매우 생생하였고, 한국의 장래에 관한 생각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비록 10개의 학교를 대표하는 46명의 학생만 참여한 집회였지만 전국에서 모인 이들 학생은 한일합방을 통해 민족의 주권을 상실한 이때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백만인 구령 운동의 결과에 대해 해리 로즈는 북장로교 선교사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아무도 백만 명의 새 신자가 백만인 구령 운동 기간 동안 생겨났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몇 사람은 그 슬로건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백만인 구령 운동이 매우 유익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의 심령에 찾아든 어둠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함으로 퇴치되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교회의 엄청난 힘이 대단히 그리고 영속적으로 증가되었다.
돌이켜볼 때 백만인 구령 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첫째, 유사 이래 우리가 만난 가장 혹독한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민족의 에너지를 한데 묶어내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한국교회와 민족에 민족 복음화를 통해 절망 가운데 희망을, 정치적 독립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민족의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민족의 희망이다”라는 말이 당시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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