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아지트
솔내음 식당과 막걸리
신근식
기쁨이 순간이듯, 고통도 끝이 있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살다보면 기쁨과 슬픔,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한다. 이렇듯 기쁜 일이 있으면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이다. 기쁨의 달콤함을 아는 이가 고통의 쓰라림을 깨달을 수 있다.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신성한 기쁨을 누릴 줄 모른다. 주어진 상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슬퍼서 고통스럽고, 기쁜데 또 힘들어 삶이 피곤해진다. 나는 좋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기분을 잘 풀어낸다. 그때마다 찾는 곳이 나의 아지트가 있다.
아지트의 어원은 “‘아지트 풍크트(Agitpunkt)’라는 러시어로 비합법적 활동가나 혁명가의 은신처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자주 머무르는 곳 또는 즐겨 찾는 곳을 은유적으로 부를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부질없는 삶의 무게에서 빠져나와 자석과 같은 장소로 일하는 곳, 밥 먹는 곳, 술 먹는 곳으로 자석처럼 자동으로 몰려간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즐겨 찾는 공간인 아지트가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감상하고 드라마 속에 나오는 아지트(정희네 퓨전식당)를 부러워하였다. 드라마에서 잘 산다는 사람은 변호사, 의사, 고위공무원, 회계사, 기자, 정치인 등이다. 그들의 생활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어려운 사람들의 생활, 소위 망가진 군상들이 단골로 모이는 퓨전식당이 있다. 망한 영화감독은 형제청소방을 운영하고, 은행부행장 출신은 모텔에 수건을 공급하고 있다. 자동차연구소장은 미꾸라지를 수입하여 장사하고 있고, 제약회사 이사였던 사람은 지금 백수다.
망한 영화감독의 여배우였던 사람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우연히 감독을 만나 망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사람들도, 동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보는 사람은 그래 보이지 않는다. 망가진 인간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심리는 그들보다 못한 인간들 보고 ‘나는 저 인간들보다 내가 낫다’는 자기위로 감을 가진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망가졌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 여배우는 “망가진 사람들은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늘에서 내려준 찬사로 생각하고 한 번쯤 망가져도 되겠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내력이 더 세다. 삶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으로 버텨나간다. 나는 그들에서 배운다.
나의 아지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다. 총각 때는 대구백화점 인근 “가고파 레스토랑”이다. 주인 여자는 고향 성씨를 가져 누님이라 호칭하면서 단골이 되었다. 레스토랑은 건물 5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는 사람만 찾아왔다. 여주인은 선남선녀들 만남의 공간으로 유명하게 알려졌다. 직장인일 때는 향촌동 “또또와 식당”이다. 또래 직원 4총사는 하루 일이 끝나면 예외 없이 또또와 식당을 찾는다. 우리는 거기서 막걸리 잔 기울이면서 청춘을 고민하고 추억 쌓았다.
이제 결혼하고 아이도 셋이나 되고, 중년이 되었다.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지트는 자연스레 옮겨졌다. 용산동에 있는 골목길 식당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골목처럼 길게 돌아가 아늑한 실내가 있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주인은 황 여사다. 후덕하게 보이는 인상에 음식을 잘 만든다. 사람 많이 만나는 직업 가진 친구 집이 식당 근처에 있어서 이 식당을 개발하였다. 처음에는 둘이 자주 갔지만 두 사람은 왕발이라 습관적으로 불러 모으는데 일가견이 있다. 처음에는 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잔 기울이며 인생의 기운을 충전하곤 하였다. 인생이란 그렇게 잔 채우고 또 비우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 뒤 골목길 식당은 문을 닫고 황 여사는 성주에서 펫 장례식장을 운영한다고 들었다.
병원에서는 술을 먹지 말라고 한다. 전립선에다가 허리마저 통증이 심하다. 한때는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은퇴 후 그동안 고질병인 전립선 수술하고부터 다시 술자리가 늘기 시작했다. 이제는 현역이 아닌 은퇴자로서 젊었을 때처럼 호기를 부릴 나이가 아니다. 사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돈 계산, 안주는 어떤 것, 자리는 어디서 등 늘 신경이 많이 쓰인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식당을 새로운 아지트를 찾은 것이다.
솔내음 식당은 반월당에서 지하철 1호선 타고 대명역에 내려서 5분간 걷는다. 막걸리 한 병이 2,000원 한다고 “이천냥식당” 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다른 식당은 3,000원~4,000원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파격적인 가격이다. 안주도 우선 밥집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반찬을 뷔페식으로 마음대로 가져가 먹어도 된다. 안주도 혼술을 하는 사람을 위하여 1인 안주도 만드는 여사장의 배려 깊은 마음이 손님을 사로잡는다. 나는 이때부터 막걸리를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식당처럼 여기에도 울산에서 ROTC회장을 역임한 K씨, 제약회사 영업이사로 잘 나갔던 G씨,, 전에 부동산을 하였고 지금은 미술품을 거래하는 L씨(자칭 이태백), 탤런트(Talent) 이름과 같은 K씨, 모두 중도에 은퇴하고 노후대비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막걸리 먹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 대신 잔 나르고, 음악 틀고, 계산까지 알아서 하는 진정한 단골이자 우리들만의 아지트다.
아무 때나 가도 식당에는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술하는 아저씨, 그리고 주인장과 주방 이모 등이 제각기 살아가는 이 순간을 즐겁게 노래하며 생활한다. 소망과 회한을 담은 이들의 노래는 흥겹게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아마도 막걸리에는 그런 힘이 있나 보다. 세상은 고단하지만 그래도 따뜻한 곳이라며 나이 들어가는 우리의 외로운 어깨를 어루만져 준다. 그곳이 나이 지긋한 우리들만의 이상향이요, 진정 또래의 아지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