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나무일까?
Park view Inn Karibu의 지난밤은 포근했다. 편안하게 잠을 자고 아침 산책을 하는데 저 먼발치의 구름 뒤로 웅장한 킬리만자로가 그 형체를 살짝 드러내고 있다. 모두들 환호하며 사진 찍기에 바쁘다. 산세를 관찰하고 아무 탈 없이 산행을 잘 하자고 다짐하는데 친구는 지난해 킬리만자로에 도전했던 선배가 체력이 가장 좋았는데도 고산병으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를 전한다. 순간 나보고 조심하라는 뜻인가? 그래 조심조심해야지. 식당으로 이동하여 계란, 빵, 열대과일, 쥬스로 아침식사를 한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는데 식충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의 생태계는 풀, 나무, 식물성 플랑크톤, 미역 같은 생산자와 이들을 식용으로 하는 초식동물인 1차 소비자, 육식동물인 2차 소비자가 있고, 지렁이, 세균 , 곰팡이같이 이들을 분해하는 분해자가 있다. 식충식물은 물질의 순환 과정에서 생태계의 역전현상을 가져온다. 옛날 숲속 탐험가들은 식충식물을 발견하면 간식거리 삼아 먹기도 했는데 단백질 보충도 된다고 한다. 어쩜 역전현상이 주는 잇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질서는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나서 다시 흐러듯 흘러간다. 흐름의 질서는 정상을 향하는 발걸음에도 적용된다. 내 발로 한 발 한 발 뚜벅뚜벅 걸어야 오를 수 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킬리만자로 대장정을 위한 출발점에 섰다. 09시 킬리만자로의 관문 마랑구 게이트를 향해 버스가 출발한다.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더니 장터가 나온다. 장날인가 오토바이와 차량이 가득하고 사람도 붐빈다. 차창을 스치는 길가의 둑방에는 일자형 긴 낫으로 풀을 베는 청년이 있다. 풀을 베는 모습을 보니 건성으로 손놀림을 하고 있다. 베고 지나간 자리도 반듯하지 않다.하는 둥 마는 둥,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다. 순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리나>에 나오는 레빈의 풀베기 장면이 연상 된다.지주인 레빈은 농부들과 벽이 있음을 절감한다. 농부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었다.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 동안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30분 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그러나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소통의 수단으로 신분을 벗어나 농부들과 일체가 되는 것 밖에 선택이 없다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일에 빠져 시간의 흐름을 잊은 레빈 .풀베기 과정에서 자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이다. 원하는 무엇인가에 빠져 시간을 잊고 산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첫걸음으로 등산 수속을 밟기 위해 버스로 약 2시간 남짓 이동했다. 마랑구 게이트에 도착하여 킬리만자로 정상 모형물과 안내 간판을 두루 살펴본다. 총을 든 군인이 있다. 장난삼아 "마시이족을 아느냐" 물으니 "내가 마시이족의 후예"라고 한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마사이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다. 저 앞의 공터에는 가이드와 짐을 나르는 청년들 5~60명의 무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하쿠나 마타타(할 수 있다), 폴레폴레(천천히 천천히), 잠보(안녕)”를 외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통닭과 빵으로 채워진 푸짐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다가 뒤를 돌아보니 족히 70m나 되는 키가 큰 카리나무가 몇 그루 있다. 저렇게 장대하게 자라도록 남게 두었으니 나무로써 쓸모없는 나무일까?
<나무사진>
장석이 제나라에 가다가 곡원에 이르러 사당에 심어진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크기가 수천 마리 소를 가릴 만 하고 둘레는 백 아름을 헤아리며 높이는 산을 내려다 볼 정도라 열 길 위에 비로소 가지가 있어서 수십 척의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처럼 많았다. 장석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제자가 실컷 구경하고 나서 장석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끼를 가지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토록 아름다운 재목을 아직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살펴보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장석이 말했다.”아서라 아무마도 하지 마라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이나 곽을 만들면 빨리 썩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대문이나 방문을 만들면 수액이 흘러나오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먹으니 이 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다. 쓸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수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匠石之齊 至於曲轅 見櫟社樹 其大蔽數千牛 絜之百圍 其高臨山 十仞而後有枝
其可以爲舟者旁十數 觀者如市 匠伯不顧 遂行不輟 弟子厭觀之 走及匠石曰
自吾執斧斤以隨夫子 未嘗見材如此其美也 先生不肯視 行不輟何邪 曰已矣 勿言之矣
散木也 以爲舟則沈 以爲棺槨則速腐 以爲器則速毁 以爲門戶則液樠 以爲柱則蠹
是不材之木也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
장석지제 지어곡원 견력사수 기대폐수천우 혈지백위 기고림산 십인이후유지
기가이위주자방십수 관자여시 장백불고 수행불철 제자염관지 주급장석왈
자오집부근이수부자 미상견재여차기미야 선생불긍시 행불철하사 왈이의 물언지의
산목야 이위주칙침 이위관곽칙속부 이위기칙속훼 이위문호칙액만 이위주칙두
시부재지목야 무소가용 고능약시지수<인간세 13>
곧게 자란 나무는 크기에 따라 책꽂이, 지팡이, 기둥, 서까래 용도로 베어지지만, 뒤틀리고 굽은 나무는 살아남는다. 크레타 섬에는 3,000년이 된 올리브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뭘까? 속이 비었기 때문이다. 속이 찬 다른 올리브나무들이 베어질 때, 이 나무는 속이 비어 목재로 쓸모가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쓸모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쓸모는 주체자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쓸모가 고정된 것도 아니다. 용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와 생각에 따라 쓸모가 있던 것이 쓸모가 없어지고, 쓸모가 없는 것에 쓸모가 생긴다. 누구나 환경에 맞는 쓸모를 스스로 만들어 가면 될 일이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이건 자신의 주관적이고 편견적 관점이건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고정된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쓸모 있는 것들과 쓸모없는 것들은 모두 상호작용을 통한 끝없는 변화 속에 있다. 알고 보면 쓸모없는 것도 없고 쓸모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장자는 쓸모 있슴과 없슴의 중간에 서겠다고 했다.
장자가 쓸모 있슴과 없슴의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쓸모 있슴과 없슴의 논리를 멀찌감치서 바라본다는 뜻이다. 사이, 틈새가 바라보는 자리이고, 반성의 자리다. 내 위치가 어디이며, 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관조하듯 바라보면 답이 보인다.
특히 요즘처럼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때는 그 요구가 더 급할 수 있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진다. 쓸모없던 것이 쓸모 있어지거나 쓸모 있던 것이 쓸모없어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 대응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