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5월 16일(화) 욥기 6:1-13 찬송 352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개역 개정)
6장과 7장은 4-5장에 걸쳐 소개된 엘리바스의 1차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을 다룬다.
그 가운데 전반부인 6장은 욥이 자기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부분인 1-13절과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에 대해 원망하는 부분인 14-30로 되어 있다.
원인 모를 재앙으로 비탄에 잠겨 있던 욥은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이 오자
그들의 위로를 기대하며 그의 비탄의 심정을 토로했다.(3장)
그러나 욥의 기대와는 달리 엘리바스는 오히려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죄에 있는 듯이 냉정하게 말하는가 하면
다분히 훈계자의 태도로 그를 대할 뿐 동정과 위로의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감정이 격발한 욥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4절)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1-7절), 이어 다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그 방편으로 죽음을 사모하고 있다.(8-13절)
욥이 처한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 욥의 신앙적 한계를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즉 욥은 비록 엘리바스의 주장과 같은 고난당할 만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부패하고 죄악된 본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주장하며
자신의 도덕적 삶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특히 이는 욥기 전체가 가지는 특징적인 주제 전개를 알게 해주는데,
즉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렇듯 자기 의를 변호하며 불평하던 욥이
점차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이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구원에의 확신에 이르게 됨으로써
더 큰 신앙 성숙과 축복에 이르게 됨을 보게 된다.
이에 욥은 본서 결론부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며 불평하던 것에 대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인간의 한계성을 통감하며 회개하게 된다.(40:6-42:6)
그러므로 본문에서 얻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비록 전적으로 옳은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요소를 발견한다.
만약 욥이 보다 겸손했다면 엘리바스의 말이 비록
전부 올바르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 자신 속에 내재된
인간으로서의 죄성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그에 온전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입술과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보여질 수 있음을 깨닫는 영적 겸손함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영적 순전함을 가져야 한다.
10절)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이 죽음을 구한 자체는 옳은 것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러한 간구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욥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놓여나기를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고백에는 자기가 당장 죽는다는 가정하에
그 죽음에 복의 요소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의 죽음이 의인으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죽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성결, 결백에 대한 선언이다.
물론 그가 극심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다소간 거친 말을 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을 뺀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행복이다.
자기 이름이나 신앙을 더럽힐 만한
아무런 과오도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은
자신의 죽음이 의인의 죽음 같기를 구했다.(민23:10)
그러나 성경에서 보듯이 그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성경은 그가 캄캄한 어둠속으로 들어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민31;8, 수13:22)
이와 유사한 사례는 성경에 수없이 많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의인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종말을 불의한 자로서의 죽음이었다.
가룟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도 시작은 잘했지만 악인으로서 최후를 마쳤다.
이렇듯 의인으로서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이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며,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을 유난히 강조한 것도(딤후 4:7)
사실은 이것의 어려움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한 것도(딤후4:8)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끝까지 지켜낸 데 따른
일종의 해방감, 만족감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대하는 우리는
욥과 같이 혹은 사도 바울과 같이 마지막이 의인의 죽음이 되도록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말에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사도 바울과 같이 알지 못해서 시작을 잘못할 수도 있다.
과정상 많은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실수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마지막이 좋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더욱 신앙 생활에 힘쓰며, 신앙의 순결을 지켜나가야 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