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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타종교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아주 배타적입니다. 심하면 타종교에 대해 적대감을 가집니다. 어떤 사람은 타종교에 상당히 관대합니다. ‘모든 종교는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타종교인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1. 다종교 사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종교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모든 종교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문화를 초월하지만, 현실의 기독교는 언제나 어떤 사회와 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교회에 소속된 교인이지만, 동시에 특정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입니다.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습니다.
종교와 사회, 혹은 종교와 문화의 관계는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중동의 국가들은 거의 이슬람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신봉합니다. 이슬람 국가나 이스라엘은 국민의 다수가 하나의 종교를 믿습니다. 그 하나의 종교가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나라의 국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가 아주 밀접해서 다른 종교가 거의 침투할 수 없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교로 인정된 종교 외의 타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를 합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종교의 선택권이 거의 없습니다. 타종교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질지에 대한 고민도 없습니다.
유럽, 북미, 남미, 혹은 일부 아프리카의 기독교 국가들도 종교적 갈등은 없는 편입니다. 이 나라들은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등을 국교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모두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에는 대체로 종교의 자유가 잘 보장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가 활동하고 있어도 사회적 분위기는 기독교에 우호적입니다. 과거만큼 교회에 교인들이 가득 차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에 녹아 있는 형태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에 어려움이나 갈등은 거의 없습니다.
기독교와 기존 문화가 가장 갈등을 겪는 나라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가 짧은 국가들입니다. 이 국가들은 기존의 종교가 있는 상태에서 기독교가 들어온 경우입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구조에 많이 해당됩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같은 나라는 기존의 종교가 워낙 뿌리 깊어서 기독교가 잘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들에 타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된 종교는 이슬람이나 불교입니다. 기독교는 매우 작은 소수 종교에 속합니다. 이 국가들에서 기독교인은 어려움이 많고 때로는 고초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곳에 사는 기독교인은 어떻게 생존하며 어떻게 선교할지에 골몰해 있습니다. 아직 기독교가 기존의 종교와 더불어 어떻게 공존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상당히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뚜렷한 고유의 정신문화를 가진 민족입니다. 그만큼 자기의 문화에 대한 정체성도 분명하고 자부심도 강한 민족입니다. 불교와 같은 기존 종교도 상당히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외래 종교인 기독교가 빠르게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2005년 통계청 자료와 최근의 민간 자료를 보면, 종교인구의 명목적 수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원불교, 증산교의 순서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친 기독교인의 수는 단일 종교로는 가장 많습니다. 각 종교의 비율은 종교인구에 대한 것이고, 종교가 없는 무교인은 제외된 것입니다. 무교인의 수도 상당히 많으며, 불교로 분류된 상당수가 무교에 가깝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세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수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사회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도 수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한국의 전통문화와 밀접하기 때문에 나름의 영향력을 가집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 간의 갈등이나 충돌이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 사회는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입니다. 한 민족으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어떤 형태이건 통일이 된다면, 종교 문제는 더욱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 간에 만남을 갖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어떤 형태의 대화와 만남을 해야 할지가 과제입니다.
2. 교리적 모델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의 성격이 강해서 다민족 국가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해외 이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다문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나 어려움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국가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한 가정 안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상호이해는 필요합니다.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의 대화에서 기독교가 어떤 자세를 가질지가 관건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에 대해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정한 ‘입장’은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 설정을 위해 제시한 모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델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는 기독교를 오해하게 만들거나, 오히려 종교 간의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모델이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많이 논의되었고, 지금은 대중적으로도 알려졌기에 먼저 이 모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모델은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구원론’이라는 ‘교리적’ 관점에 따라 나눕니다. 그리고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는지에 따라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로 구별합니다.
첫째, ‘배타주의’는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입장입니다. 예수님 이외에 타종교의 다른 구원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전통적 입장은 배타주의로 분류됩니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는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의 다수는 ‘배타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포용주의’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을 뜻합니다. 타종교에도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이 있다고 보지만, 타종교 안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기독교의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다양한 고등종교는 기독교가 믿는 궁극의 신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 Rahner)는 20세기에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익명의 그리스도론’(anonymous Christology)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총 아래 있다는 시각에서 기독교의 구원과 일반종교의 보편 개념의 구원을 연계시켰습니다. 타종교에도 하나님이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인 은총의 요소가 있으므로 그 종교들 안에도 ‘구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라너는 타종교인으로 살더라도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자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상은 포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공통된 점은 예수님을 구원의 유일한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양한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보는 것은 독단이라고 비판합니다. 각 종교는 각기 다양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으며,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들 중에도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제법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의 ‘뜻’이 다원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다원주의의 입장을 지지하는 구절은 많지 않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경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종교경험과 해석을 모아놓은 역사적 문서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 세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설정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들어서면서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기독교 안팎에서 뜨거워졌습니다. 종교 간 대화에서 언제나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이 공격을 당했습니다.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어서 종교 간의 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종교 간의 대화를 종교다원주의에서 제시한 모델만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최소한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왜 문제가 있는지를 세 가지 점에서 살펴보고, 우리 시대에 맞는 기독교적인 모델을 찾아보려 합니다.
첫째,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기독교의 입장을 세 가지 모델로 너무 단순화시켰습니다. 이 모델들은 기독교의 중요 사상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입장을 단순화시켜 몇 가지 모델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 가지 모델로 나누는 기준이 구원론에 바탕을 둔 ‘교리적’ 관점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이 세 가지 모델은 전형적인 ‘교리적 모델’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교리’는 대단히 예민하며, 같은 종교 안에서도 세심한 과정을 거쳐 논의를 합니다. 교리는 그 종교의 핵심 사상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어나 개념은 물론이고 단어를 선별하는 것조차 주의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초기부터 교리와 연관해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교리적 모델’로 접근하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교리적 모델이 다양한 종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궁극적으로 ‘교리적 모델’이 다양한 종교가 신봉하는 핵심 사상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지도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종교는 성격이 유사하지만, 어떤 종교는 사상적 체계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교리적인 상호성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리적 모델은 충분한 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각 종교의 신도들로부터 호응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 교리적 모델로 접근하는 것은 실패의 가능성이 큽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종교다원주의’가 주도한 대화가 주류 기독교를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둘째, ‘배타주의’라는 용어는 오해하기 쉬운 단어입니다. 잠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화를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문화는 매우 ‘다원적’입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 옷차림, 음식, 취미, 생활 패턴까지 매우 다양하며 다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문화 자체가 어느 하나가 옳다는 배타적 사고를 싫어합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원주의적 문화에서는 ‘진리’가 다원적 성격을 띱니다. 진리의 개념이 절대성을 잃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진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고, 불변하는 것이라는 대중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문화에서는 진리가 유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진리가 불변하다는 인식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금 현대 문화와 진리에 대한 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대의 문화가 가지는 하나의 속성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즉 현대 문화는 세분화되고 다원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타성’이나 ‘획일성’을 거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사상사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나 해체주의가 나타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조화, 통일성, 보편성 등이 중요한 가치였지만, 포스트모던에서는 기존의 가치 체계를 모두 교체하려고 시도합니다. 우리 시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재 속에 놓여 있고, 앞으로 문화와 사상의 다원화는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속한 현대 문화는 다원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문화 자체가 ‘종교다원주의’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현대인들은 ‘배타성’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집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왜 특정 종교에만 진리가 있어야 합니까?” 기독교의 진리가 타당성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독교의 진리가 배타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하면,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문화의 일반 정서는 배타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관용(tolerance)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시대에 포용주의나 다원주의는 관용적이고 대화적 모델로 보이는 반면, 배타주의는 하나의 진리에 매달리며 다른 모든 종교를 적대시하는 구시대적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를 세 개의 모델로 분류하고,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해 ‘배타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배타주의는 기독교인에게조차 거부감이 드는 용어입니다. 기독교를 현대 문화가 말하는 매우 모호한 배타주의로 낙인찍어서는 안 됩니다. 배타주의라는 용어는 기독교 전통주의적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셋째,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을 분류하면서 배타주의로 규정했습니다. 이런 규정이 적절한 것인지 내용적인 측면을 보겠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를 세 가지 모델로 분류하는 기준이 ‘구원론’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지 여부를 문자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모델이 분류됩니다. 이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배타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구원론’은 대단히 넓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주장하는 ‘구원’과 ‘진리’의 개념은 아주 독특합니다. 구원론의 어떤 부분은 결코 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어도 얼마든지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타종교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경직된 구원론적 시각에 의한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면서,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요청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기독교의 구원의 구조를 보겠습니다.
3. 구원의 구조
먼저 기독교에서 ‘구원론’의 위치를 보고, 이어서 기독교 내에서 구원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구원론의 핵심이 뭔지, 어떤 부분을 포기할 수 없는지, 혹은 어떤 부분에 변화가 가능한지를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타종교와 대화를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에 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부터 이 역사를 인도한다는 섭리론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종말론까지 모두 구원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은혜의 행위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한 구원 사건의 시작입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 차원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신자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도 구원에 대한 갈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성육신하였습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이 구원의 주체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있어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구원론과 연관된 논의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정통주의 입장의 구원론에 가장 큰 변화가 요청된 것만 보겠습니다. ‘구원론’과 연관해서 종교다원주의와 유사해 보이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기독교 안에서 만인구원론(universalism)에 대한 논쟁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인구원론’은 정통주의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인 주제입니다. 만인구원론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17세기에 알미니우스주의는 만인구원론과 유사한 주장을 했고, 기독교 안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논쟁의 초점은 구원론에 연관된 성경 해석에 집중되었습니다. 많은 토론과 연구 끝에,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했습니다. 개신교 정통주의는 알미니우스주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현대로 오면서 신학계는 다양한 관점에서 구원론에 대해 연구를 합니다. 과거에는 구원론의 대상이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구원이 모든 피조세계를 포함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론이 인간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정론도 섭리론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누가 구원될 것이며, 구원될 숫자는 정해져 있는지 등의 논의는 모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논의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구원론은 생태계를 포함한 우주적 차원을 가집니다. 구원론에서 자연과 피조세계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구원의 완성에서 이 역사와 자연이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인간과 피조세계 모두를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현대로 오면서 구원론을 대하는 시각이 다양하고 풍요로워진 것입니다. 이 점에서 현대의 구원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원론의 논의에서도 구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는 거의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구원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금세기에 만인구원론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대두되었습니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입장으로는 만인구원론을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가 상당히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바르트(K. Barth)와 몰트만(J. Moltmann)과 같은 신학자가 구원론에서 구원의 범위를 확장하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바르트는 ‘만인화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사실을 믿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보았습니다. 몰트만은 믿지 않고 죽은 자에게도 그리스도의 은총이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몰트만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구원의 큰 흐름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몰트만의 종말론에는 만인구원론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런 연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바르트와 몰트만이 구원의 범위를 넓게 확장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구원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바르트와 몰트만의 구원론에서 구원의 주체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기독교 안에서 나타난 구원론에 대한 다양한 입장에서 볼 때 세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론은 인간만이 아니고 자연과 피조세계 전체를 포괄해야 합니다. 성경도 자연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보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둘째, 구원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구원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론의 확장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입니다. 다만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 확장의 범위와 그에 대한 성경적 토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셋째, 정통주의적 구원론에서 현대의 구원론까지 어떤 형태의 구원론도 구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학자 중에 만인구원론과 종교다원주의는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 중에도 만인구원론과 종교다원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열려 있다는 구원의 ‘범위’만 보면 두 주장이 유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두 이론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만인구원론에서 구원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만인이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반면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예수님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많은 종교들은 각기 구원의 주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구원자들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이제 기독교에 나타난 다양한 구원론이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는 왜 공통된 결론을 내리는지를 보겠습니다. 다양한 구원론이 나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주체라는 것은 동일합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가장 큰 이유는 성경 때문입니다. 성경을 따른다면 구원의 주체가 다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가 구원론이며, 구원론의 중심에 ‘오직 예수’라는 예수님의 인격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이고 경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진리’에 대한 타당성과 검증이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바탕을 둔 구원론의 구조를 보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구원자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려면, 성경의 중심 진술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간의 대화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포기하면 대화가 가능할까요? 자기 정체성이 있는 종교만이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종교의 정체성이 없어지면 타종교와 대화하기 위한 토대도 함께 없어지는 것입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원을 포기한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불교도에게 윤회사상을 포기하고, 이슬람교도에게 알라의 절대성을 포기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에 응하라고 한다면, 지나친 요구일 것입니다.
자기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나 자연종교적 성격을 가진 종교는 다원주의를 수용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 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일부 종교는 다원주의의 주장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원주의에서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구원의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는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기독교에게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라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경전성을 포기하고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포기하라는 요구와 같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배타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주장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주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구원관이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배타적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독특한’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예수님의 성육신, 그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원관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가 ‘오직 예수’라고 한 표현은 강한 표현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듣기에 부담스러운 표현일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지만, 교리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라는 말을 배타적이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사랑과 헌신을 내포한 말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지에만 초점을 맞춰 배타성을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정신에서 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낮아져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 것은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의 신성과 연결시켰습니다. 배타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라는 구체적인 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며, 동시에 구체적으로 구원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는 우선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가리키는 말이지 배타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구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했고, 당시 유대교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창기와 세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모두를 받아들였고,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은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구원의 총체입니다. 성경의 구원론의 기저에는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개방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 연대와 긴장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로서 반드시 종교 간의 만남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종교 간의 대화를 ‘교리적 차원’에서 시작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대화의 유형을 교리적 차원에서 몇 개의 모델로 만드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970년대 이후 종교다원주의에서 주도한 종교 간의 대화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원주의의 구조를 따라가면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다원주의의 관점을 따르면, 성경의 주요 주제들이 해석이 안 됩니다. 구체적인 구원관을 만들어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어떤 ‘~주의’(~ism)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와 같은 어떤 규범에 넣게 되면 기독교의 원래 정신을 살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기독교 사상을 몇 가지 교리적 모델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교리적 접근은 대화를 어렵고 고착화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제시한 모델들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되었지만, 전통적인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종교 간의 대화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대화의 실제적인 열매는 많지 못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대화가 자주 교리적인 논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간의 만남은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기서는 기독교가 타종교와 만날 수 있는 실천적 모델로서, ‘연대와 긴장’ 모델을 제안합니다. 이 모델은 원래 기독교와 타문화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에도 원용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두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와 보편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세계도 하나이고, 모든 현실 종교는 모두 이 하나의 세계 속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로부터 물러나 스스로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오히려 이 문화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의 장으로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계시는 일차적으로 성경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오겠지만, 역사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타종교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함께 간다면, 기독교는 그 종교와 ‘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종교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 부활 신앙,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같은 중심사상이 기독교의 근본 구조를 형성합니다. 기독교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뚜렷한 역사적 지향점을 가진 종교입니다. 불교처럼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가 공간적인 자기 초월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 역사 속에서 찾아가는 역사 지향적 종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현실 역사 속에서 타종교와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와 일정한 ‘긴장’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신이 속한 문화나 타종교가 기독교의 가치와 나아갈 방향성이 맞을 때는 연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문화나 타종교가 기독교의 가치와 맞지 않을 때는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생명 살리기 운동, 기아대책 운동, 평화 운동, 반전 운동, 건전한 공동체 양성, 소외계층의 해소 등은 어떤 종교와도 연대가 가능합니다. 타종교에서 이런 일을 한다면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처한 문화 속에서 타종교와 연대해서 이 사회에 적극적인 봉사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종교 간의 만남은 이렇게 상호 실천적 모델을 찾고 협력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선한 연대를 통해서 우리는 신뢰와 상호 존중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선한 연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역사에 실현시킬 소명을 갖습니다. 기독교인은 타종교인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고, 더 헌신하며, 더 나눌 줄 알아야 하고, 더 겸허해야 하며, 더 희생해야 합니다. 이 선한 연대 위에 성령님이 함께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각자의 종교를 떠나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의 식탁에 함께 앉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