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수호지 - 수호지 12
날이 훤히 밝을쯤해서 임충이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몸은 결박을 당하여 크나큰 집 곳간에 눕혀져 있었다. 어인 영문인지 몰라 사람을 부르니 어제 초가집에서 불벼락을 맞은 그 사내들이 몰려와 몽둥이로 임충을 마구 때렸다.
결박을 당한 몸이니 꼼짝을 못하고 욕을 당하고 있을 때,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나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웬 사람을 그리 치느냐?" "예, 어제밤 술 도둑놈이었습니다." "뭐라? 술 도둑?" 주인은 장정들 너머로 임충을 한 번 보자 소스라쳐 놀라며 손수 결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아니, 임 교관님 아니시오." 그제야 눈을 떠보니 소선풍 시진이었다. "부끄러운 꼴을 보여 민망합니다." "아무튼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여긴 내 동쪽 별장이오."
시진은 하인을 시켜 옷을 내오게 하고 따끈따끈한 탕 요리로 임충을 대접했다. 임충의 그동안의 얘기를 듣고 난 시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몸을 깊숙이 숨기는 게 상책일 듯싶습니다. 제가 소개장을 써 줄 테니 산동에 있는 양산박으로 가시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곳은 사방 팔백리나 되는 넓은 곳인데 아무도 못 들어가는 요새라고 합니다. 그곳엔 두령이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왕륜, 둘째가 두천, 셋째가 송만이라는 두령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시진과 작별인사를 한 임충은 등에 짐을 지고, 긴 칼을 차고 산동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그로써 10여 일이 지나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날 저녁, 호숫가에 있는 한 주점을 찾아 들어 술과 안주를 시킨 다음 임충이 양산박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주모가 대답했다. "여기서 양산박이 5리가 채 못 되지만 물길이 되어 배편을 얻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 곧 배 한 척만 얻어 주시오."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사례는 내 후히 할 터이니 좀 수고를 해주시오." "눈까지 심하게 내리니 누군가 갈려고 할 사공이 없을 거요." 임충이 하는 수 없이 술잔만 거듭 기울였다. 광대 무변한 천지간에 몸 둘 곳이 없어, 이렇듯 천 리 타향에 도적의 소굴을 찾는 신세가 된 자신을 생각하자 임충은 불현듯 자신이 서글픈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문득 한 사나이가 등 뒤로 와서 어깨를 툭 치고 물었다. "혹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이 아니시오?" 임충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체격이 장대하고 당당했다. 임충은 은근히 경계를 하며 되물었다. "아니, 누구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오?" "하하하하, 놀라실 건없습니다. 긴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저리로 갑시다."
임충이 그를 따라 구석방으로 들어가자 사내는 예를 갖추고 은근히 물었다. "아까 형씨는 양산박 가는 길을 묻던데 거긴 왜 가려고 하오?" "이 사람이 죄를 짓고 천하에 몸 둘 곳이 없어서 산채로나 찾아 들어가 볼까 그러오." "누구에게 양산박 말씀은 들으셨소?" "창주에 있는 소선풍 시진이란 분의 소개장을 가지고 있소. 그런데 댁은 뉘시오?" "실은 양산박 왕두령 부하 중의 한 사람이오. 이름은 주귀라 하오. 왕 두령의 지령으로 여기서 주막을 내고 있지만, 술장사가 목적이 아니고 오가는 나그네들의 행색을 살펴서 산채로 알리는 것이 내 임무라오. 물론 돈이 있을 듯한 손님이 들면 술에 약을 타 먹이기도 하고, 때로는 칼맛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려. 그러나 배편이 없다니 어떡하오?" "그건 아무 염려 마시오. 다 도리가 있소이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쉬시고 내일 오경에 저와 함께 산채로 가십시다."
이튿날 새벽 주귀는 임충을 깨워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건넜다. 임충이 주귀를 따라 산채에 오르며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은 온통 한 아름씩이나 되는 큰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고, 산 중턱에는 큰 정자가 있었다. 그리고 정자를 지나 올라가니 큰 나무문이 있고, 그 앞에는 칼, 창, 검, 삼각창, 활, 석궁, 갈퀴 등이 쌓여 있었다. 또한 주위에는 싸울 때 던지는 통나무인 뇌목과 돌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두 번째 나무문을 지나가니 비로소 산채 입구에 이르렀다. 주귀는 임충을 산채의 대청으로 인도했다. 가운데 왕륜이 앉아 있고 왼편에 두천, 오른편에 송만이 앉아 있었다.
왕륜은 임충이 비록 시진의 소개장을 가지고 왔다고는 하지만 마음에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을 비롯하여 두 두령들도 무예에 별로 능한 편이 아니어서 그 솜씨가 드러날까 걱정해서였다.
왕륜은 은 50냥과 비단 두 필을 쟁반에 담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임충에게 정중히 말했다. "시진 어른께서 모처럼 우리 산채에 천거했소마는 양식도 넉넉치 못 하고 거처하실 곳도 마땅치 않아 호걸이 계실 만한 곳이 못 되니, 박한 사례나마 허물 말고 받으시고 다른 곳으로 가 보도록 하시지요."
뜻밖의 말에 임충은 당황했다. "이 자가 천 리를 멀다 않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결코 은자나 비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수하에만 거두어 주신다면 삼가 견마의 수고를 사양 않겠사오니 깊이 통찰해 주십시오."
왕륜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다가 주귀와 두천, 송만이 임충을 거들자 이렇게 조건을 걸었다. "그렇다면 우리 패가 되겠다는 투명장을 쓰십시오." 투명장이란 목숨을 버려도 좋다는 결심을 펴 보이는 글을 뜻했다. 임충이 곧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사람도 글을 배워 아는 터라 지필만 주신다면 이 자리에서라도 곧 써서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주귀가 웃으며 일러 주는 말을 들어 보니, 이곳에서 말하는 투명장이란 결코 보통의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산 사람의 머리를 베어다가 두 마음이 없다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이었다. 왕륜이 다시 말했다. "사흘을 기한으로 하고 그 안에 투명장을 들여놓아야지, 만약 그렇지 못한 때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줄로 아시오." 임충은 약속은 했지만 마음은 자못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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