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가톨릭
베트남에 가톨릭이 들어온 것은 16세기 무렵이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에 이어 두 번째로 전파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오래다. 1533년 프랑스 선교사인 이냐시오 신부가 베트남에 처음으로 가톨릭을 전했다고 하는데, 이후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신자 수가 약 8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프랑스에 의존하고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에 우호적이던 지아-롱 왕조 시대에는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했단다.
4세기 동안의 모진 박해
이렇게 순조롭게 성장하던 베트남 교회는 17세기 초 박해가 시작되면서 고난을 겪게 되고, 19세기 무렵 그 절정에 달했다. 약 4세기 동안의 지속적인 박해로 많은 신자가 고문과 추방, 처형을 당했으며 13만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순교했다.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붕따우 근방에 참혹했던 박해의 모습을 간직한 바리야 성당이 있다.
박해가 극심하던 1862년, 바리야 지역의 관리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자들을 비좁은 감옥에 가두고, 십자가를 밟고 나오면 풀어주겠다고 했다. 누구도 나오는 이가 없자 감옥에 불을 질러 300여 명의 신자들이 모두 순교했다. 이후 프랑스 신부가 시신을 수습해 3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바리야 성당은 이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려고 세운 것이다.
베트남 교회는 1668년 첫 베트남인 사제 요셉 짱 신부를 배출하였고, 1867년부터 백여 년간 지속된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박해에 대한 아픔 탓이었는지 함께하는 종교라기보다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형성하며 발전했다. 베트남 가톨릭 공동체는 이러한 조직력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로서 자유로운 집회를 허용하지 않는 현 베트남 정부가 가장 주목하고 경계하는 세력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북 분단과 공산화
프랑스 식민지 지배 아래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하던 베트남 가톨릭은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된다.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은 북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북베트남 가톨릭 신자의 약 50%인 70만 명이 남으로 이동하였다. 호치민시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동나이시에는 잘 정비된 고속도로 양쪽에 약 100미터 간격으로 50여 개가 넘는 다양한 모습의 성당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북베트남 이주민들이 각자의 고향 소재 성당을 그대로 이곳 남베트남에 세우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이러한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고딘 디엠 정권에 힘입어 학교, 병원, 복지기관 운영 등 각종 교회사업을 확대해 나가면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일례로 1953년에 3개에 불과하던 중고등 미션스쿨은 1963년 145개의 중고등학교와 천여 개의 초등학교로 늘어났다. 하지만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이러한 시설들을 정부가 몰수, 국유화하였다. 최근 베트남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이를 반환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베트남의 성당 옆에는 늘 학교가 함께 있어왔다. 경제 개방과 함께 베트남 정부의 규제가 조금씩 느슨해져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설립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중고등학교 설립은 여전히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최근에는 신자들이 함께 개인병원을 운영한다든지 소규모 교육시설,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정부의 규제를 피해 활동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26개 교구, 640만 신자
현재 베트남 교회는 하노이, 후에, 호치민 3개의 대교구를 포함하여 총 26개의 교구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교구는 하노이 교구로 1659년에 설립되었고, 가장 최근에 설립된 교구는 2005년에 신설된 바리야 교구이다. 베트남 교회에는 1976년 이후, 총 다섯 명의 추기경이 탄생하였는데, 현재는 호치민 대교구의 팜민만 세례자 요한 추기경이 베트남 교회를 이끌고 있다.
신자 수는 약 640만 정도로 베트남 전체 인구의 6.8%에 해당한다. 특이한 것은 가톨릭 영세자들이 대부분 유아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처럼 새 신자 교육이 활발하지도 않고 사회주의 국가인 탓에 가톨릭으로 개종할 경우 자녀교육 등 다른 여러 분야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아 성인 세례자 수가 많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 교회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사제 서품의 제한이다. 교회가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학교 입학을 원하는 이들이 원서를 접수할 때 사전에 베트남 종교성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규제가 없어져 자유로운 입학이 가능하지만 사제 서품에서는 여전히 각 교구마다 연 12명 정도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본당신부를 임명할 때도 정부와 의견을 조율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베트남 교회는 이러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점진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북부 지역 하노이 교구에서는 베트남 공산화 이후 남쪽으로 신자들이 대거 이동한 후에 방치되다시피 한 작은 성당들을 개보수하거나 재건축하는 작업들을 시작하고 있다.
베트남 교회의 밝은 미래
또한 베트남 교회는 다른 어느 나라 교회보다 젊다. 베트남 국민의 70%가 30대 이하이므로 사제, 수도자, 신자들의 연령층 또한 낮으며, 이는 베트남 교회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베트남 교회는 교구 중심인 한국교회와 달리 수도회 소속 본당 등, 수도회 활동도 다양하여 신자들이 영성적인 면에서 폭넓은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교회와 지역사회의 연대와 나눔도 활발하여 대학 입학시험기간 동안 교회는 여러 본당과 수도회를 개방하여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오랜 선교 역사와 많은 순교자, 117위 성인을 배출한 국가답게 신자들의 신심도 아주 두텁다. 젊은 남녀가 결혼할 경우, 같은 신자끼리 해야 하는 가톨릭 신자의 의무가 철저히 지켜진다. 배우자 중 한 명이 비신자인 경우에는 세례를 받아야만 집안 어른들의 허락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 한인성당에는 베트남 신부와 결혼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세례 문의가 아주 빈번하다.
현재 베트남의 한인공동체는 이러한 오랜 가톨릭의 전통과 현 정치체제로 말미암아 제약을 많이 받는 베트남 교회의 이방으로 존재하고 있다. 외국인에 의한 선교가 금지된 나라이기에 한인 성직자들도 체류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한인 신자들 또한 한인공동체를 벗어나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종교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 안에서만 끼리끼리 신앙을 이어가는 상황이지만 베트남에 거주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그 활동영역을 넓히고 베트남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앞으로도 계속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한인공동체가 이방인이 아닌, 이들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이들의 변화에 힘을 보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김현옥 클라우디아 - 베트남에서 산 지 14년째 되는 신자로, 호치민 한인본당에서 홍보분과 일을 맡고 있다. 레반시 거리에 있는 부엉쏘아이 본당 부속건물 4층에 한인본당이 있어서, 작지 않은 성당이지만 늘 자리가 부족해 성당 안마당까지 가득 메우고 미사를 드릴 정도로 열성적인 베트남인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심을 주일마다 목격하며 살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김현옥 클라우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