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천의 장락리 일대에도 매미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긴 여름날이 저물고 있었다.
"똑똑똑 또르르르..."
야트막한 농가들이 이어지는 길에 노승이 나타났다.
두타행의 탁발승이었다.
"객승에게 시주하시어 인천(人天)의 복을 지으소서."
나이 이미 환력을 넘었음직한 탁발승이
해거름 농가를 차례로 방문하는데 저마다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한 줌 씩의 곡식을 시주하는 모습이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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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施主)란 반드시 절을 찾아가
부처님 전에 공양물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어서
가가호호 방문하는 탁발승에게 밥 한끼 곡식 한 줌을 내는 것도
무량복덕의 인연을 짓는 공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대
시주를 하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청정해야 하고
그 공양물을 받는 사람 역시 청정한 마음으로
시주자의 행복과 소원성취를 불보살님께 빌어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스님들은 시주자의 시주행위가
삼생(三生)을 두고 좋은 복록이 되길 빌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만 인연인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시주도 좋은 인연과 발복의 소원성취를 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반드시 교육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순수하고 청정한 믿음에 의해 세간과 출세간에 공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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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리 농가도 이제 홀연히 찾아 온 노스님에게 형편이 닿는 대로
한 줌 씩의 곡식을 시주하며 농사의 풍년과 가정의 화평을 빌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게 몇 집을 방문하고 어느새 어둠이 내릴 즈음
스님은 마지막 한 집의 문간에 서서 시주를 청했다.
"먹고살기도 녹녹찮은 판에 왠 시주란 말인가."
주인은 우락부락한 목자를 앞세워
스님의 목탁소리가 귀찮다는 듯 역정을 냈다.
그래도 단월의 시은을 바라는 지극한 마음으로
스님은 그 문간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객승에게 시주하시어 인천(人天)의 복을 지으소서."
요지부동의 스님.
그리고 여전히 불평스런 농부.
늙수그레한 그 농부는
마당에 물이라도 뿌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스님도 쉬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객승에게 시주하시어 인천(人天)의 복을 지으소서."
스님이 그렇게 같은 말을 거듭하며
조용히 목탁을 치는 장면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사람은
그 집의 며느리였다.
전장(戰場)에 나가 목숨을 잃은 지아비를 위해
한줌의 곡식이라도 시주하고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야 굴뚝같았지만
노기를 보이는 시아버지로 인해
그저 부엌 쪽문 틈 사이로 스님을 보고만 있는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시아버지는 바가지 하나를 들고 스님께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 드디어 마음을 고쳐 드시고 시주를 하시는구나."
며느리는 안도의 긴 숨을 내 쉬며
지아비의 명복과 시아버지의 무명장수를 빌었다.
그런데 순간
스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건 곡식이 아니라 모래가 아니오.
탁발승에게 시주는 못해도 좋으나 이렇게 삼보전에 악업을 지어
그 화를 어찌 면하시려고 이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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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했다.
그러나 시아버지도 만만치 않게 대꾸를 했다.
"중이 되어 수도를 한답시고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집을 돌아다니며 곡식이나 빌어 가는 터에,
다 저문 저녁답에
남의 집 대문을 지키고 서서 어쩌자는 거냐."
시아버지는 모래를 한 바가지 퍼다가
스님의 바랑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며느리는 순간 황당하고 무서운 생각 뿐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
두 어른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며느리는
재빨리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를 퍼냈다.
"스님, 저희 아버님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쾅' 하고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후 스님께 달려가 용서를 빌었다.
스님은 언제 화를 냈더냐는 듯
인자한 모습으로 며느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무관세음보살.
부인의 정성이 시아버지의 불량한 마음을 고쳐주길 바라지만
이미 그 업보는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소이다.
부인, 오늘밤 이 집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시오."
노스님은 표표히 사라졌고
순간적으로 발생한 황당스런 일 때문에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며느리는 한동안 마당가에 서 있었다.
왜 이 집을 피하라는 것인지도 알 길이 없거니와 지아비를 잃고
늙으신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살아 온 자신이 이 집을 나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며느리는 스님이 마지막 남긴 그 말을
'포악스런 시아버지와 살지 말고 어디 좋은 혼처라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착한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버릴 수도 없거니와
집을 나갈 수는 더욱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
그날 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오려나. 날도 덥고 논물도 말라 가는데
시원하게 한 줄기 쏟아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
시아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나기를 반겼다.
그러나 구름이 몰려드는 기세가 한줄기의 소나기를 위함이 아닌 것 같았다.
며느리는 스님이 남기고 간 말이 다시 생각나 조금씩 불안해졌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도 없는 일이었다.
"우르르 쾅, 우르르르...."
검은 구름이 두텁게 내리 깔린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번쩍번쩍' 번개도 요란했다.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제 그 천지가 개벽을 하는 듯한 굉음에
문을 열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사납게 하늘이 울부짖고 있었다.
며느리는 아마 시아버지가 스님을 해꼬지 하여
하늘이 큰 벌을 내릴 것이란 생각에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밤새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이어졌다.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고 물통의 물을 쏟아 붓듯이 비도 내렸다.
사람들은 누구도
을 열어 볼 엄두를 못 낸채 그날 밤을 지새워야 했다.
☆☆☆
다음날 아침. 세상은 과연 변해 있었다.
"아니, 밤사이 왠 탑이 저렇게 솟아났는가. 하늘의 조화로다."
"그런데 저 곳은 심술궂은 노인네가 살던 집터가 아닌가.
집은 없어지고 탑이 하나 생겼네 그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구먼."
"천지가 개벽을 했어.
밤새 벼락치고 천둥치더니 저런 조화를 부렸구나."
"그런데 탑 앞에 돌덩어리는 또 무엇인가.
마치 그 집 며느리의 모양새를 빼 닮아 있으니
이 또한 무슨 조화 속이란 말인가."
"탑 옆에 깊은 못도 생겼어.
어제 밤에 내린 비가 다 저 연못으로 고인 듯하군.
마을 냇물은 전혀 불어나지 않았잖아."
사람들은 날이 밝아 오는 순간부터 술렁거렸다.
무서워서 못살겠다고 이사를 가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하늘이 심술궂은 노인에게 벌을 준 것이라 믿는 사람도 있었다.
☆☆☆
그러나 그 전날 해거름 무렵
그 노인이 스님에게 모래를 퍼다 준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탑이 솟아오르고 집터와 시아버지 그리고 며느리가
사라져 버린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탑과 함께 생겨난 연못은 깊고 맑았다.
수초도 없고 물고기도 살지 않을 듯한 맑은 못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 못에는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음이 발견됐다.
☆☆☆
마을의 한 아이가 연못을 들여다보며
붕어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했는데
아이는 어느 날
꿈속에서 붕어를 만났다.
"아니, 너희들은 연못 속 붕어가 아니냐."
"얘야. 우리는 본래 붕어가 아니었다.
지난 날 갑자기 솟아 오른 탑이 있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 심술쟁이 할아버지 말이니."
"그래. 나는 그 노인이고 이 쪽은 며느리이다.
탑이 솟아오르던 그날 밤 우리는 죽었다.
시주 온 스님에게 해꼬지 했던 과보를 받은 거란다.
그러니 너는 사람들에게 시주의 은공이 무량함을 알려주고
다시는 우리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없도록 이 일을 알려야 한다."
☆☆☆
아이는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꿈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꿈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그 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으나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형이 그 붕어를 잡아먹겠다고 벼르더니
어느 날 정말 잡아먹고 말았는데 그날 밤 아이의 형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연못과 탑과 붕어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시주의 공덕이 큰 만큼 잘못된 시주의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