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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을 보면서
2024년 3월 22일 / 단 4:28-37
단 4:28-37 / 이 모든 일이 느부갓네살왕에게 일어났다. 29) 열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에 있는 왕궁을 거닐면서 30)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얼마나 웅장한가! 내 힘과 권세와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 보이려고 이 도성 바벨론을 내 제국의 수도로 건설하지 않았던가!' 31)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느부갓네살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네 제국도 그 힘도 이제는 모두 다 끝장났다. 32) 너는 이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들녘에서나 살게 될 것이다. 소처럼 풀이나 뜯어먹고 살 것이다. 일곱 해 동안 그렇게 산 뒤에야 비로소 네가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를 모두 관할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또한 너는 하나님께서 당신 뜻대로 뽑으신 사람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한도 내려주실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것이다.' 33) 이 말씀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에게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난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사람 사는 곳에서 쫓겨나 소처럼 들녘에서 풀을 뜯어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맞으며 살아야 하였고 그의 머리칼은 독수리 깃털처럼 더부룩하게 자라났으며 그의 손톱과 발톱도 새 발톱처럼 자라났다. 34)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왕이 말하였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내가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35) 주께서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시지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수리도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 그 누가 감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랴! 주께서 하시는 일 그 누가 감히 이러실 수 있느냐고 입을 뗄 수 있으랴! 36)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다스리던 이 제국의 영광과 위엄과 영예가 회복되었다. 나를 돕던 관료들과 귀족들도 모두 나를 환영하였고 내 왕권도 되찾았다. 나는 전에 누렸던 영예보다 더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37)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다니엘서 4장을 통해서 구약시대에 가장 권세가 크고 능력이 많았던 느부갓네살 왕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우려 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왕이다. 그리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한 왕이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을 포로로 삼아서 바벨론으로 데리고 간 왕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느부갓네살 왕은 대단히 권세가 큰 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느부갓네살 왕에게 종종 꿈을 꾸게 하셨다. 다니엘서 2장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이 큰 꿈을 꾸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꿈은 황금신상에 대한 꿈이었다. 이 꿈은 앞으로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계시로 보여주신 꿈이다. 또한, 다니엘서 4장의 전반부에도 느부갓네살 왕이 2번째로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땅의 중앙에 있는 한 나무가 크게 성장을 하였다.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 그 키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았다. 나무의 잎사귀는 심히 아름답고도 매우 무성하였다. 심지어 열매조차도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정도로 풍성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4:11-12은 이렇게 기록을 하였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으리라’. 이때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와서 갑자기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이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이상하게도 천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어라! 앞으로 이 그루터기가 7년 동안 이슬을 먹게 될 것이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짐승처럼 지내게 하라!’ 이처럼 너무나도 신기한 꿈을 느부갓네살 왕은 꾸게 되었다. 참고로 우리도 많은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곧 잊어버리고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은 꿈이 많다. 꿈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다루었으면 한다. 꿈에 대하여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에 대부분 잊어버린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기도 하지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하여 알려주심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미리 대비하게 하신다. 꿈을 꾼 직후에 곧 기록해 놓지 않으면 대부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무슨 꿈이든지 곧바로 꿈을 상세히 기록해 놓는 습관을 갖고 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605년부터 562년 죽기까지 바벨론 왕으로 재위. 바벨론 왕 나보포라살의 아들이며 메대 왕의 딸 아무히야와 결혼했고 이름은 ‘경계선을 방어하다’는 뜻이다. 즉위 2년 주전 603년에 꿈을 꾸었는데 큰 신상 꿈이었고 다니엘이 이 꿈을 해몽하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단 2:1-45). 3장에 나타난 풀무불 사건은 그 후 13년 뒤 주전 590년 때 일이다. 4년 뒤 주전 586년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을 배반하므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성전을 불태우고 모든 보물을 약탈하고 귀인들을 노예로 삼아 바벨론으로 끌고 감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였다. 14년 뒤 주전 572년과 568년 두 차례 애굽 원정을 통하여 애굽을 멸망시킴으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겔 29:1-21). 주전 570년 느부갓네살은 두 번째 꿈을 꾸었는데 큰 나무의 꿈이었고, 그것이 그 꿈이 실현된 내용이 다니엘 4장의 내용이다. 4장은 느부갓네살의 조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단 4:1).
반면에 느부갓네살처럼 하나님이 주신 꿈은 깨어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가도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였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왕처럼 이 꿈으로 인하여서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에 큰 번민이 생겨났다. 그래서 왕은 바벨론에 있는 모든 술사를 왕궁으로 불러 모았다. 특별히 꿈에 대하여 해석을 잘한다고 하는 유명한 해몽가들을 집합시켰다. 박수도 모으고 술객들도 다 모았다. 2장과는 달리 자신이 꾼 꿈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고 올바른 해석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왕이 꾼 꿈에 대하여 명확하게 해석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꿈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와 명철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오로지 그 꿈은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만이 풀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비밀이기 때문에 그랬다.
꿈을 꾼 당사자인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을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먼저 그 문제를 풀고자 하였다. 만약에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기억하고 그를 제일 먼저 찾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번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있은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을 기억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 사람은 큰 문제가 다가오면 먼저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통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올바른 성도의 행동이 아니다. 성도는 항상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우선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느부갓네살 왕의 부름을 받은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다니엘은 매우 상세하게 꿈을 해석하여 왕에게 고하였다. 그러면서 다니엘은 왕을 향하여 ‘왕이시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해석을 한다. ‘왕이시여, 그 큰나무는 왕의 나라가 앞으로 번영하고 크게 번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번영이 극에 달할 때에 하나님께서 왕을 치실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들짐승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7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마시게 될 것이고, 거칠고 딱딱한 바위에서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왕권도 빼앗기고 들짐승처럼 방황하는 처량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 광야에서 7년 동안 기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시여, 왕께서는 속히 죄를 깨닫고서 회개하시고 나라의 공의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권면까지 하였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권면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고 여전히 교만한 삶을 살아갔다. 시간이 흘러서 1년이 지나게 되었다. 정확하게 열두 달이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다니엘의 해석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문 28절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다니엘 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앙고백을 조서로 만들어서 모든 백성이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알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였다.
1. 믿기 전의 상황
느부갓네살 왕의 믿기 전의 상황에 대해서 30-31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믿기 이전의 정신상태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29절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왕궁의 지붕에서 거닐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틀림없이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의 땅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룩한 영광을 30절부터 본격적으로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여기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바벨론의 찬란한 영광을 성취하였노라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이 느부갓네살의 표현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영광만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체험하기 이전의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에는 3가지 특징이 있었다.
➊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중심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가 품은 세계관의 중심에도 바로 자기 자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조금도 중요한 분이 아니었다. 오직 느부갓네살 왕 자신만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한 이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어리석게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을 깨닫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37절을 보시면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경고가 있었음에도 교만하였기에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큰소리를 잘 치는 경향이 있다. 결국에 가서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서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은 넘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느부갓네살 왕처럼 말이다.
➋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몰랐다. 사실 느부갓네살 왕에게 모든 영광을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총명도 주시고 권세와 권력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허락해 주셨다. 심지어 느부갓네살 왕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꿈을 꾸게 하신 분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은혜에 전혀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속에는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이 전적으로 자신의 공로라고 하는 자만심만이 팽배하였다.
대부분 사람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을 때는 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의 실패와 역경을 경험하게 되면 그러한 모든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요, 은혜임을 깨닫고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말자.
➌ 느부갓네살 왕은 거짓된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궁과 도성 안에 있으면 영원토록 안전할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는 왕권과 물질과 세상의 높은 권세와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항상 안전하다고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의 권세와 권력과 물질과 부귀영화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것이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지위와 물질이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마음을 들짐승처럼 바꾸어 버리시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순식간에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의 당당함에서 들에 있는 초라한 짐승의 마음으로 바꿔버리셨다. 그 결과 느부갓네살 왕은 33절의 말씀과도 같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되었고, 손톱은 새의 발톱과도 같은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느부갓네살 왕이 믿었던 세상의 권세와 권력과 물질과 부귀영화는 거짓된 안정에 불과하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영원한 안정을 보장해 줄 수가 없다는 진리를 믿기 바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영원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현세도 안전하고 내세도 안전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살아도 축복을 받고 죽으면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세에도 많은 괴로움이 있고 죽으면 더 큰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옥과 도박을 하지 마시기 바란다. 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시는지? 사람들이 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상관없이 천국은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다. 지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없다고 아무리 부정해도 살아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법칙이요 섭리이다. 느부갓네살 왕도 처음에는 이러한 진리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함을 깨달았다.
2. 하나님을 믿게 된 경위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 7년간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소처럼 풀을 먹고 들의 이슬을 마시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되고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의사한테 과연 우리 인간이 이러한 병에 걸릴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병이 있다고 한다. 영화나 책에서 보는 괴물과도 같이 사람이 흉측하게 변하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그런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러자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고, 신하들도 무시하고, 백성에게 버림까지 받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벨론이라는 최강대국의 절대 권력자로서 세상을 호령하던 그가 이제는 광인이 되어서 들에 유배되는 너무나 처량하고도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느부갓네살 왕도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과거에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하여 풀무불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였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시편 119편 71절에도 고백하기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실로 한 인간의 몸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느부갓네살 왕은 무려 7년 동안이나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느부갓네살 왕의 인생에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본문 34절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아쉽다. 기한 전이라도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
고난 중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혹시 우리 가운데에 인생의 큰 문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방황하고 계신 분이 있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자. 아무리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1주일에서 열흘 정도만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기도하자. 반드시 살길이 열리고, 피할 길이 분명 나타날 줄로 믿는다. 느부갓네살 왕도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함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노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고 확실히 믿게 되었다. 이방인에게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났다면 하물며 우리에게는 ….
3. 믿고 난 이후의 변화
이제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게 된 느부갓네살 왕에게 대신 관계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34절을 보면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거에 자신을 왕으로 높이고 자랑하였던 느부갓네살 왕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나라의 권세가 영원한 분이시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언어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도 엄청난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제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였다. 이처럼 고난을 통하여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고, 확실하게 경험하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언어와 모든 행동 양식에 있어서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또한, 느부갓네살 왕은 대인관계와 대물관계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본문 36절을 보면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히 큰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라고 증거하였다. 과거에 누렸던 영광과 권세보다 더 큰 영광과 권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게 되었다. 그가 총명을 다시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자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세상의 물질과 권세와 권력도 찾아왔다. 하지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느부갓네살 왕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자신이 세상의 큰 권세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보다 더 큰 왕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본문 37절은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라고 증거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위대한 신앙고백일까!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면 변화하기 마련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도 그것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을 체험해야만 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4. 신앙고백
35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험한 느부갓네살 왕의 신앙고백이 소개되어 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이 말씀처럼 느부갓네살 왕은 땅의 모든 거민과 하늘의 군사들을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담대히 고백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주권자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일을 금할 존재도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꾸짖을 자도 없다고 느부갓네살 왕은 고백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성경과 목회를 한 내가 지금까지 간단한 한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바로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동안 배우고 익힌 삶의 결론이다. 우리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당신이 7년 동안 들에서 짐승처럼 지내면서 배운 결론이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의 주권자가 되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담대한 신앙고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37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뜻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다 의롭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경험한 이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만물의 주권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전부 다 의로운 일임을 담대히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신앙고백을 조서로 만들어서 바벨론에 사는 모든 백성이 듣도록 선포하였다.
이 시간에도 느부갓네살이 이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한다고 가정한다면 틀림없이 그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진리를 담대히 증거할 것이다.
❶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품고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을 것이다.
❷ 현재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이 직접 7년 동안이나 겪었던 고난을 간증하면서 고난을 통하여 큰 축복을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권면하며 위로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에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시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강조하였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결 론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담대한 신앙고백을 표현한 느부갓네살 왕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가르침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자리보다는 조금 낮은 자리를 잡아라. 남으로부터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올라가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시고 스스로 겸손한 자를 반드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신다.’
겸손은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요소이다. 자신을 살피고 낮추는 사람에게는 실수가 적고, 예절이 바르며 칭찬을 받는다.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라고 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들쥐의 교만 / 수도사 한 사람이 수풀 속을 지나가다가 까마귀가 쥐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발견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까마귀를 쫓아 버리고 쥐를 살려 주었다. 그런데 그 쥐는 자세히 보니 고양이란 놈에게 날마다 쫓기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수도사는 이번에는 개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개가 되면 쫓기는 신세를 면하게 될 줄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범에게 꼼짝 못 하고 도망만 다니는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이번에는 그 개를 범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범이란 놈이 이전의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개를 보면 괴롭히고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를, 들쥐를 보면 들쥐를 괴롭히고 심지어 수도사가 범에게 충고하면 수도사의 말까지 무시를 하고 덤벼드는 것이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기가 산중의 왕이라고 하며 수도사도 아니꼽게 굴면 없애버리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도사는 어느 날 다시 그 범을 원래의 모습인 들쥐로 돌아가게 하여 죽을 때까지 수풀과 들판을 헤매며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였다.
사람은 조금씩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어느 날에는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도 된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도달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과 배은망덕이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기까지 도와준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구소련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라고 했다. 교만은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다. 교만은 고집이 센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교만은 거만한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 큰 슬픔을 느낀다. 테레사는 이러한 현상을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한다.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된다.
최효섭 목사의 글을 보면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쟁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 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트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그렇다. 천국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경하는 새 하늘 새 땅이지만 문턱이 매우 낮은 곳이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아무도 그 즐거움에 들어갈 수 없다. 겸손한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기 때문이다. 성지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 탄생 기념 교회에 가보면 입구가 돌로 낮게 막혀 있어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야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가이드의 설명이 '겸손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였다.
■ 당대에 손꼽히는 신학자이며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영성학자인 헨리 나우엔이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박약자들이 수용된 복지원의 직원이 되었다. 높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지체인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는 궂은일을 맡아하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감당하며 만족해했다.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이유를 물었으나, 침묵으로 일관하였는데, 그 후 자서전에서 ‘그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하였다. 어려서 천재 소리 듣고, 교수가 되어 존경받고,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지체인인 한 소년을 만났을 때 이런 인간의 고통에도 하나님은 동참하시며, 낮은 자리에도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르막길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세상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우러러볼 때 소망이 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을 말한다. 지, 인, 용(지혜, 어진 것, 용기)이다.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쳐 주신다. 가르친 것만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친히 겸손을 보여주셨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주셨다. 그뿐만 아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이었다(빌 2:5).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린다. 겸손하게 빈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넣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 57:15절에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가 있다. ‘지존무상하며(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라고 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머리에 항상 키파(kippah)라는 모자를 쓴다.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항상 기억하기 위함이다. 내 실력, 내 업적, 내가 쌓아 놓은 것들을 자랑하며 스스로 높아졌던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내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겸손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 하나님은 세상 모든 권세를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절대 ‘주어’가 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모세도 겸손하며 온유했다. 신약의 바울은 자기는 죄인의 괴수이며,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도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다. 그는 겸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신다. 교만한 바리새인보다는 겸손한 세리가 더 사랑을 받았다.
■ 미국의 최고의 부흥사인 디엘 무디가 전도집회를 앞두고 있을 때 한 신문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전도집회로 너무 바쁜 나머지 그 인터뷰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날 아침 신문에 머리기사로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마 기자 인터뷰를 거절한 것에 대해 화가 난 기자가 그런 기사를 쓴 것이다. 그 기사를 본 무디의 참모들이 화가 나서 ‘무디 목사님! 이것은 말도 안되는 기사입니다. 이런 기사는 인격살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할까요?’ 야단이었다. 무디 목사님은 그 기사를 가만히 읽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르는구먼. 난 이 기사보다 훨썬 더 교만한데, 이만하면 잘 써줬는데 ….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말씀하시는 사인입니다. 우리 모두 좀 더 겸손하도록 기도합시다.’
R.A 토레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무디를 사용하신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를 말하라면 무디 목사님은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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