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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
"나는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들을 먼저 들이마셨다. 아니, 들이마신다는 말은 충분치 않다.
나는 모습과 풍경에 몰입했다.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풍경과 아예 하나가 되는 느낌이 된 뒤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종이 위에 재구성하는 작업에는 고통이 뒤따랐다." -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919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했다.
그녀는 곧, 일제 식민 지배에서 신음하는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풍습과 경관에 빠져들었고
깊은 애정으로 이를 그림과 글로 담아냈다. 그러나 한국에서 키스는 오랫동안 '잊혀진 화가'였다.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 작품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화가가 아니라 미술사가들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키스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한 점 두 점 수집했던
송영달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명예교수의 노력으로, 2006년 9월 29일부터 이듬해 5월 6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전'이 열리면서 알려졌다.
궁중 복장을 입은 공주
관복을 입은 청년
무관
雨天時 쓰는 모자
한 농부
장옷을 입은 여인
'팔동기'라는 이름의 남자
갓바치
널뛰기
춤추는 무당
키스는 자신의 그림과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3권 출판했는데,
이 중 <Old Korea, 옛 한국>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
송영달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명예교수가 이 책을 번역해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2006년 출판했다.
아래 그림 설명 중 "큰따옴표" 안에 있는 글들은
엘리자베스 키스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East Gate, Pyeng Yang, Korea_1925 평양의 동문
“1392년에 지은 평양 성곽 중 동쪽에 있는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서울에 있는 동대문만큼
웅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양의 동문은 그 단순한 스타일과 함께 연륜의 은은함이 배어 있는 문이다.
에카르트는 한국의 건축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한국은 그 건축법을 중국에서 들여왔지만,
그것은 한국의 상황에 맞추어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더욱 절제된 형태로 발전시켜
한국 특유의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평양의 동문은 바로 이런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East Gate, Seoul, Moonlight_1919 달빛 아래 서울 동대문
푸른 달빛 아래의 동대문(興仁之門). 이 그림에 보이는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하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하며
키스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목판 원본이 소실되었다.
이 그림은 키스의 저서 <동양의 창>에 실린 것인데, 현재 누가 실물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Wonsan_1919 원산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의 별마저 새롭게 보이는 원산 어느 언덕에 올라서서 멀리 초가집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노라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Riverside, Pyeng Yang_1925 평양 강변
“대동강변의 이 정자는 약 150년 된 것이라고 하며, 그 주변 환경이 너무 완벽하여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정자 터로 선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Two Korean Child_1925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분홍장미 색깔의 넓은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아이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온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 있다.”
New Year's Shopping, Seoul (1921-채색 목판화)
새해 나들이
키스는 자신의 저서 <동양의 창>에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썼다.
Embroidering, Korea (1921-채색 목판화) 자수놓기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은 부드럽다. 인내와 복종이 제2의 천성이 된 듯하다.
하지만 온순하기만 한 한국 여자들에게도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있다.
가령 이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강요한다든지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 든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들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선의 방법은
오직 한국 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하는 것뿐이다.”
Woman Sewing 바느질하는 여자
“중류 가정의 한 여자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습. 그녀의 옆에는 바느질 그릇과
인두가 꽂혀 있는 놋화로가 놓여 있다. 한국 여자들은 세탁과 바느질을 아주 잘해서
아무리 더럽고 거칠었던 옷도 그들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세탁된다.”
The Flute Player_1927 대금 연주자
"이 사람은 과거 국악원 소속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왕조가 망하여 궁중음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잇다. 다행히도 나는 국악원 사람을 몇 명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종묘제례 때 보았던 아주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제일 보기 드문 악기는 다듬지 않은 옥같이 보이는 삼각형의 돌을 여러 개 나무틀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치면 전 음계의 음정을 낼 수가 있었고 소리가 아주 좋았다. 대개는
피리소리의 효과를 높이는 데 사용하였다. 또 오리 모양으로 만든 나무딱따기도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전후좌우로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
북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각기 다른 소리를 냈는데 언제나 피리소리가 제일 고음이었고
또 제일 아름다웠다. 이 대금 연주자는 연주도 잘하지만 행동도 점잖아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이 잘생겼으며, 대금을 부는 사람의
섬세한 손놀림이 정말 보기 좋았다.“
Court Musicians, Korea_1938 궁중악사
Young Korean-1920 한국의 아이들
이 그림은 키스의 초기작 중의 하나인데, 그림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 차림을 한 것 같다.
Wedding Guest (1919-채색 목판화)
결혼식 하객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A Hamheung Housewife (1921)
함흥의 어느 아낙네
“한반도 북쪽에 있는 함흥의 여자들은 서울 여자들보다 키도 크고 자세도 더 꼿꼿하다.
독특한 옷차림으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닌다. 큰 두건 같은 머릿수건은 치마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대낮에 그렸다. 그녀는 땡볕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빨래를 담은 붉은 함지를 이고 있었는데도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옥가락지 두 개를 정성스럽게 끼고 있었다.”
A Morning Gossip, Hamheung, Korea_1921
함흥 아낙네들의 아침 수다
"아침에 빨랫감을 이고 씻어야 할 요강을 들고 냇가로 나가던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있다. (...) 머릿수건을 기술적으로 두르는 것이 풍습이며,
어떤 때는 치마나 아이들 옷으로 머리를 둘러싸기도 한다.
치마는 풍선처럼 넓게 퍼져 있고 저고리는 무척 짧다.“
키스는 그림 그리는 장소를 서울로 한정하지 않았다. 키스는 날씨가 추운 함흥, 원산, 평양 등
북녘 도시들도 열심히 다니며, 그 곳 여인네들의 저고리가 서울보다 짧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렸다. 키스의 그림에 진지함과 꼼꼼함이 배어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Korean Bride(1938-컬러 에칭) 한국의 신부
Korean Bride_1938 한국의 신부
“한국에서 제일 비극적인 존재! 한국의 신부는 결혼식 날 꼼짝 못하고 앉아서 보지도 먹지도 못한다.
예전에는 눈에다 한지를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신부는 결혼식 날 발이 흙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족이 들어다가 자리에 앉힌다. 얼굴에는 하얀 분칠을 하고 뺨 양쪽과 이마에는 빨간 점을 찍었다.
입술에는 연지도 발랐다. 잔치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지만 신부는 자기 앞의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과일즙을 입안에 넣어주기도 하지만 입술연지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디어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온종일 친구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A Daughter of House of Min(1930-컬러에칭)
민씨 가문의 규수
“이 처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살된 명성황후의 친척이다.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에 외교사절로 파견된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었다.
또 그는 내가 만난 최초의 한국 양반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크림색의
얇은 천으로 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버선은 발에 아주 잘 맞았다.
만약 내가 시인이었더라면 그의 멋진 발을 노래하는 시를 지었으리라! (...) 훗날 나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둔 이 여자를 다시 만났는데, 그 모녀에게서 그 아버지의 우아함이나 온화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영어를 잘하고 꽤 똑똑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좋은 배필을 만난 듯해 기뻤다.”
The Widow_1919 미망인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Young Man in Red 홍복을 입은 청년
"이 청년은 자기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입궐할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다.
붉은색의 겉옷 밑에는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백색 옥돌이 들어 있는 자그마한 주머니를 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패옥 소리가 낭랑했다. 거북이 등과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는 꼭 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 위로 둥그렇게 두르도록 되어 있었다. 앞으로 내린 에이프런에는 금으로 된 단추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관직 등급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색 칠을 했고,
신발은 넓적하고 코끝이 뭉특해서 발이 작아 보인다.“
김윤식 대감
김윤식 대감은 고종 때 외무대신을 지냈다. 이 그림은 운양이 일본 등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2년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직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흑갈색의 옷에다 조개모양의
삐죽한 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장신이었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은데다가 덩치도 왜소했다. 그들의 키는
한국 죄수들의 어깨에도 못 닿을 정도로 작았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The Country Scholar (컬러 에칭)
시골 선비
“이 선비는 원산 사람이다.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선비 의상은 8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모자도 옛날식이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는 끝 부분이 백옥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복장과 잘 어울렸다.
선비는 그 부분이 잘 보이도록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옷고름은 연홍색 비단이고 옷은 엷은 옥색이었는데
까만 단하고 훌륭한 색깔의 조화를 이루었다. (...) 이 나이 많은 한국 선비와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좋은 가정교육, 자기 절제, 인자한 부드러움 등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의 매너는 은근하면서도 정중했다. 그는 속세의 근심을 떠나 별천지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939)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중하층 계급에 속하는 한국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추운 겨울이라
머리에는 털이 안으로 달린 남바위를 쓰고 그 위에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쓰고 있다.
하얀 무명옷에는 솜을 넣어 방한을 하고 있다.”
Two Scholar 두 명의 선비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 탓에 조국을 잃었고 황후마저 암살당했으며, 그들 고유의
복장을 입지 못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길을 가다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경찰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흰옷 입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A Game of Chess (1936-컬러 에칭) 장기두기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틀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하다.”
Korean Domestic Interior 한옥의 내부
“비교적 여유 있는 집의 내부 풍경이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는데, 이 집의 가장은 사랑방이 아닌
대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며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준다.
(...)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은 대문 가까이 있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채는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길가에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마당이 있고 부유한 집은
안채 앞마당까지 해서 마당이 둘이다. (...) 한국 사람들은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방바닥은 노란 장판지로 덮여 있는데 항상 반짝반짝 닦아놓고 있다.
사랑방 나무기둥에는 ‘집에 연기가 자욱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써 있는데,
그것은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가리킨다.”
The School - Old Style 서당 풍경
“하늘 천, 따 지, 달 월, 사람 인. 후렴처럼 반복하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여름 해는 따갑게 비치고 있었는데, 서울 성문에서 멀지 않은 그 집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서당 안을 슬쩍 들여다본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글을 외면서 그 소리에 맞추어
앞뒤로 몸을 흔들어댔다. 나이 많은 훈장은 실내용 모자를 쓰고 앉아서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한시를 한 수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훈장은 조금도 학생들의 공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반장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긴 대나무 작대기를 들고 감시하고 있다가
학생의 외는 소리가 끊긴다거나 조는 듯한 동작을 보이면 곧바로 등이고 어디고 내려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 학생은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글 읽는 소리가 조금 커졌다.”
Country Wedding Feast (1921-채색 목판화)
시골의 결혼잔치
한국인의 풍습을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 키스는 결혼식 장면을 여러 장 그렸다.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 더 흥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신부 행렬을 보려고
급히 따라가다가 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림 속 20여 명의 동작과 표정이 아주 사실적이다.
A Temple Kitchen, Diamond Mauntains, North Korea
(1920-채색 목판화) 금강산 어느 사찰의 부엌 풍경
The Eating House 주막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주막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Kite Flying 연날리기
“서울은 연날리기에 최고로 좋은 도시이다. 연 날리는 철이 돌아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온통 형형색색의 연으로 뒤덮인다. 웬만한 가게에서는 각종 크기의 연을 파는데, 값도 싸서
어떤 것은 불과 일전밖에 하지 않는다. 여기에 그려본 것은 전형적인 아이들의 연 날리는 모습이다.”
The Hat Shop 모자 가게
“간판에 ‘높은 모자, 둥근 모자, 리본 달린 것, 세상 모자란 모자는 다 있습니다’라고 써 있다.
이 자그마한 모자 가게의 주인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서
키가 큰 친구들까지도 가게 안에 다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눈다.
한국에서 모자는 중요하다. 학자는 특별한 모자, 그러니까 검은 말총으로 된 모자(갓)를 쓰는데,
오로지 중국 고전을 다 읽은 사람만 쓸 수 있다. 총각은 약혼식에서 노란 짚으로 만든 둥그런 모자를 쓴다.
결혼식 날에는 한 사람이 빨간 모자를 쓰고 손에는 백년해로와 신의의 상징인 기러기를 들고 간다.
이런 옛 풍습은 한국에서 차차 없어져 가고 있다.”
Marriage Procession, Seoul (1921-채색목판화)
혼례 행렬
그녀가 그린 인물들을 보면 농부, 과부, 아낙네, 노인에서부터 왕실의 공주, 궁중의 악기연주자,
학사, 명성황후의 조카딸을 그린 <민씨가의 규수>, 일본 등에 독립청원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2년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직후의 모습을 그린 <운양 김윤식>, 환관과 무인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그녀가 접할 수 있었던 인물들의 생활을 과장이나 폄하 없이
간결하고 진솔하게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당시 한국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키스가 이처럼 다양하게 우리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외국인 선교사한테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소개받으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며 체류하는 동안 한국을 깊히 사랑하게 된 키스는
그녀의 한국이름을 '기덕(奇德)' 이라고 지었다.
아침 안개 (1922-채색 목판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금강산 입구인데, 눈을 들어보면 끝도 없이 산들이 중첩해 있다.
이른 아침에 계곡을 내려다보면 아침 안개, 아니 밥 짓는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소나무 타는 향기가 섞여 있다."
평화로운 바닷가 어촌의 이른 아침, 할아버지가 손주와 함께 소를 타고 아침 안개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바닷물이 푸르게 보이니 짙은 안개는 아니고 산허리를 휘감은 정도인데, 소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할아버지의 등을 꼭 끌어안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재미있게 표현되어있다.
첫댓글 키스 화가는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한 분이군요. 정감이 넘치는 화폭들이어요. 백년 전에 이토록 용기를 내어 전국을 누빈 그녀에게 절로 존경과 감사를 느낍니다. 철저한 작가 정신을 봅니다. 이민혜샘, 귀한 그림들 보여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