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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성 금요일의순교자들
성금요일의 순교자들
최홍준 파비아노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순시기 수요일에 조선교구 제4대 감목 베르뇌 장(張敬一)주교가 선교사 3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승계권 있는 부교구장 주교이던 다블뤼 안(安敦伊) 주교가 자동으로 후임 교구장이 됐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오직 23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같은 달 30일 성금요일에 그만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을 받은 이들은 오매트르 오(吳)신부와 위앵 민(閔) 신부 등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 장기주 요셉 회장이었다. 성직자들은 거의 모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이때는 형장이 달랐다. 3월 23일 국왕은 이렇게 결정했다.
“이자들을 모두 함께 포도청에서 끌어내어 충청도의 수영으로 호송해 처형하고 효수해서 교훈이 되게 하라.”
다음날 그들은 충청도로 길을 떠났다. 한 선교사가 주교께 아뢰었다.
“주교님, 국왕은 병이 들어 그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고 있어서 우리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해서 굿의 효력이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우리를 멀리 보내서 처형한다고 그럽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국왕이 얼마 후에 혼인을 하게 돼있는데,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왕의 혼사에 부정이 탈지도 모른다고 해서 대원군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250리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상처 입은 다리에 유지만을 처맨 채 말을 타고 죽음을 향해 가는 행진은 다섯 사형수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3월 29일 성목요일에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그날 저녁 잠시 쉬는 틈에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보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처형이 또 늦어질는지도 모르겠군.”
주교는 벌떡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안 될 일이오. 바로 내일 우리를 곧바로 처형장으로 데려가야 하오.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오.”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기념일에 순교하기를 열렬히 희망했던 것이다. 포졸들은 결국 이에 동의하고 성금요일에 행렬을 지었다.
“수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처형장으로 지정된 바닷가 모래밭으로 직접 향할 것이다! 어서 떠나자!”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이곳이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 ‘갈매못’ 순교터〔殉敎聖趾〕다. 조선대목구 다섯 번째 감목 다블뤼 안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세분 선교사와 주교의 복사요 전교회장 격이던 황석두(黃錫斗) 루카와 배론 신학당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 이렇게 다섯 성인들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현장이다.
당시 조정의 사정으로 서울 새남터가 아닌 이곳까지 와서 순교하게 됐으나,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이들 순교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묻어있던 고장이라는 점에서 더 합당한 장소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45년 8월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페레올 고주교를 모시고 강경 부근 익산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딘 그해 10월 12일 이래 다블뤼 주교는 줄곧 이 일대 내포(內浦)지방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사목하고 연구하며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포(浦)라고 하면 배가 드나드는 갯벌로, 그것이 내만(內灣)에 있으면 내포라고 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남해군에 내포현이 있었고, 창원군에 내포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택리지》에 나오는 내포로, 충청남도 가야산 둘레의 10개 현을 총칭하는 지역이다. 삽교천 서쪽에 있는 아산, 당진, 면천, 홍주, 덕산, 해미, 결성, 보령, 서산, 태안지역이 그곳이고, 공주와 부여, 논산, 강경, 서천, 전라북도 함열 등지에 걸쳐 있는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사에 ‘내포의 사도’라 불린 이가 있었으니, 이존창 루도비코로 곤자가(1759-1801)로서, 그의 딸이 김대건 신부의 조모이며, 사촌 누이의 조카딸이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다. 그래서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루도비코의 고향이요 생가가 있던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고들 말한다.
여사울이 초기 충청도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요람이었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모진 박해에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면서도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손자선 토마스는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배교하라고 강요하는 박해자에 맞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기까지 신앙을 증언한 순교 성인이다.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다. 다블뤼 주교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면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를 이 곳 신리에서 작성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해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블뤼 주교가 그 전인 1862년 10월에 이미 순교 기록과 교회사를 정리해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프랑스로 보냈기 때문에 자료 사본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입국 초기 신부 시절 한때 2년 동안에 1,700여 명을 입교시켰고, 피로와 궁핍에 짓눌리며 선교를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 위장병을 얻어 줄곧 고통을 겪어야 했다. 1850년 1월에는 중병이 들어 병자성사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본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님, 몸이 너무 쇠약하십니다. 교우촌을 순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셨으면 합니다”라고 권면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과 한한불사전(漢韓佛辭典) 편찬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그가 라틴어를 가르친 일을 한국 신학교의 시초로 보는 이도 있다.
페레올 주교가 1853년에 세상을 떠난 후, 다블뤼 신부는 남쪽 산골지방에 서 그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1856년에는 조선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신임 감목 베르뇌 장주교를 기쁘게 맞이했다. 보좌주교로 승품된 것이 1857년 3월 25일이었고, 억척스런 일꾼이었던 그는 언제나 관리하기가 힘든 구역만을 골라 맡으면서 교우들에게 다가갔고, 한여름 삼복더위 중에는 책을 썼다. 「영적 생활의 첫걸음」이라는 묵상책과 세례, 통회, 성찰에 관한 소책자들을 썼고, 최양업 신부가 시작했던 「주일기도책」(공과)의 번역을 끝마쳤으며, 「성경에 의한 간추린 역사」 집필은 그가 순교함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위장병 외에 오른쪽 무릎의 류머티즘과 시력 감퇴 등으로 몸이 온전치 못했음에도 그는 온 마음,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했고, 그러기 위해서 주교에게 순명하며 동료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섬기고 사랑했다. 물론 교우들을 헌신적으로 대했지만 엄격한 면도 있었다.
“교리를 배우는 일과 교우로서 본분을 지키는 문제, 서로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천주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사랑을 담은 온유함과 더불어 엄격한 면을 지니면서도 다블뤼 주교는 스스로 성직자, 교우들에게 모범 보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박해를 받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가 교우된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면 천주께서 벌하실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바치고자 십자가를 선택했던 것이지만, 그런데도 그 즈음 조선에서 무기력함과 무감각과 소심증이랄까, 세심증까지 겹쳐서 정신적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있을 때 조선교회 감목 베르뇌 주교는 건강이 몹시 나빠 교회의 책임을 다블뤼 주교에게 넘겨야겠다고 여겨 1865년 11월에 조선대목구장직을 물려주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교황청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명과 함께 자신의 사표가 수리되도록 사도좌에 선처를 청해달라고 파리의 신학교에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있었으니, 수원교구 최 바오로 주교가 건강상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그의 보좌주교였다가 부교구장 주교가 된 이 마티아 주교가 2009년 5월 14일 사도 마티아 축일에 새 교구장으로 착좌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장 베르뇌 주교는 그 당시 사임하고자 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만 상황이 바뀌어 1866년 2월 23일 체포돼 3월 7일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할 때까지 직책을 지니고 있었고, 그 즉시로 다블뤼 주교가 조선교구의 다섯 번째 감목이 된 것이다. 전국적인 대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즈음 수원 근처 샘골[泉谷里]에서 전교하고 있던 오매트르 신부가 찾아오자 삼거리에 있던 위앵 신부도 오게 해서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황 루카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쇠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베드로 오매트르 오신부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 교구 에제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맏아들이었는데, 집안의 자녀가 다섯이었다. 아버지는 자그마한 땅을 경작하면서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으며, 어머니는 어떤 신비스런 예감으로 맏아들에게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훗날 아들이 전교지방으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하긴, 이 일은 미리 각오하고 있어야 했다. 너를 낳기도 전에 그걸 알고 있었으니까.”
베드로 오매트르는 열다섯 살로 중등부 3학년 때이던 1853년 12월 31일 일기에 “나는 성직을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그리로 부르시는 것을 느낍니다.”라고 썼다. 성소, 즉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자각이 리슈몽의 성모 소신학교(小神學校)에서 지낸 그의 생활 전체를 움직였고, 성체와 성모께 대한 신심이 방향을 결정지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소신학교는 철학과 신학 교육과정을 위한 대신학교와 구별돼, 성직자로서의 자질 양성에 중점을 두는 중고등학교 과정의 신학교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2월, 성신고등학교가 폐교됨으로써 소신학교 과정은 완전 폐지됐다.
1857년 10월 앙굴렘 대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영적 지도신부에게 해외 전교지방에 나가 선교사업에 투신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고싶다고 자신의 희망을 밝히자 “그 얘기는 1년 후에 다시 와서 하렴.”이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듬해 5월 그는 걱정하는 아버지께 이런 편지를 썼다. “저는 전교지방에 가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의 뜻보다는 다만 하느님의 뜻이 제 뜻이라고…. 그래서 만일 하느님의 뜻이 제가 먼 나라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기는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방학이 끝나자 오매트르는 영적 지도신부를 찾아가서 다시 대답을 구했더니 이번에는 쾌히 승낙했다. 그가 주교께 외방전교에 대한 원의를 말씀드리자 “교구를 떠나는 것, 허락합니다.”라고 말해주었다. 1859년 방학 때, 8월 15일을 선택해 가족들에게 그는 이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아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전교지방으로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파리로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격렬했다. “하느님께서 그런 생각을 들게 하시다니, 말도 안 된다. 이제는 이 아비가 신앙심을 잃어버리게 되겠구나!”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네가 내 위안이 되기를 바랐는데….”
어머니의 애끊는 소리, ‘이제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흐느끼면서 하신 이 절규를 뒤로 하고 1859년 8월 1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간 베드로 오매트르 신학생은 이곳에서 3년을 지내면서 공부와 기도와 신품(神品), 곧 성품성사(聖品聖事)를 준비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저는 저를 이렇게 파리로 인도해주신 하느님의 섭리를 찬미합니다. 제가 결코 섭리에 항거하지 않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이렇게 쓰기도 한 그는 1862년 8월 3일,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알려드렸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고 찬미하게 하라고 저를 보내시는 나라는 꼬레, 조선입니다.”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1863년 6월 23일 전교지방에 도착한 오매트르 신부는 수원 근방 샘골에서 말을 익힌 후 미리내에서 생활하다가 다블뤼 주교가 활동하는 거더리에서 무척 가까운 곳인 내포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신부님은 퍽 훌륭하십니다. 너그럽고 착한 분이시지요.”
교우들의 평판 못지않게 베르뇌 주교의 평가도 좋았다. “이 작은 초심자는 어지간히 놀라운 일을 곧잘 합니다. 그는 힘이 있고 어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맡은 교우들을 잘 다스리고 그들에게 성체와 성모신심을 가르쳐준답니다.”
병인년인 1866년 이른 봄 베르뇌 주교가 잡혔을 때 그는 불안에 떠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외교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해 소리를 높여 말해줄 때가 왔습니다.”
오매트르 신부는 그의 어른이요 아버지인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체포됐고, 이때부터 함께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교와 같이 처형장으로 갔다.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처형된 두 번째 선교사는 루카 위앵 신부였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랑그르 교구의 기용벨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포도밭을 경작하고 있었고, 아주 화목한 집안으로, 위앵(Hui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르탱(Martin)이라고도 하는 이 아들은 아홉 남매 중 막내였다.
“우리 집안에는 신부님, 수녀님이 끊이지를 않았어. 우리 아이들 중에도 누가 성직자, 수도자의 길을 걷겠다면 말리지 않을 것이야!”
아버지가, 루카 위앵의 아버지가 그랬다. 자녀들 중에 누가 하느님의 일꾼이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면 이를 말릴 생각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었고, 어머니 역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자주 일러주면서 몸소 모범을 보이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당 신부 랑베르가 위앵의 성소를 일깨워주는 데에 큰 몫을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가 라틴어의 기초를 가르쳐 준 열세명의 소년 중에서 열 명이 신부가 됐고, 수도생활을 선택한 처녀들도 적지 않았다.
아무튼 위앵은 랑베르 신부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고, 훗날 섭리회 수녀가 된 위앵의 누이 스테파니도 1884년, 그러니까 동생이 순교하고 난 다음 랑베르 신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제 동생이 기쁘게 순교하는 데에도 그렇고, 제 수도 성소에도 신부님이야말로 크나큰 열성으로 하느님 다음으로는 가장 많이 공헌하신 분이십니다.”
소신학교 중등 과정의 마지막 학년에 올라가게 됐을 때 위앵 소년은 교장 신부로부터 성직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다. 물론 신부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선택한 것이지만, 학교 책임자로부터 이런 권유를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앵은 1855년 7월 8일 수단을 입었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도 품게 됐는데, 이는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 지금은 인류복음화성) 잡지를 읽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는 데에는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이라는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그래, 기다리자. 우선 좋은 신부가 될 자질부터 갖춰 나가야겠지.’
대신학교 신학 과정 첫해에 전교지방 주교들의 강연을 듣고 위앵 신학생은 한 누나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누님에게는 감추지 않고 솔직히 말하지만, 저는 마음이 움직였어요. 복음의 일꾼들과 같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부름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누님, 그 소명을 저에게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해달라고 부탁드려요.”
그런데 몇 달 후 집안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 집이 전부 불타버린 것이었다. 부모에게 이 사건은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가족들 중에는 위앵이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물론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의 사제직 준비가 늦춰지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부모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전교지방으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날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위앵 신학생의 누나들 가운데 프랑수아즈는 그가 공부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가정부로 들어가 일하면서 ‘언젠가는 고향의 본당 사제관에서 동생과 같이 지낼 수 있을 테지…’라는 희망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것도 그에게는 전교지방으로 가고자하는 원의와 상충하는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재난을 당한 부모님의 처지를 뻔히 보면서도 곁에 남아 그분들을 곤궁에서 구해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컸고, 공부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 교구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보아서도 교구에 남아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양심의 문제와 대결하고 있던 신학생 위앵은 차부제가 될 때까지도 이 문제를 말끔히 정리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1972년 이전까지는 사제품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 부제품 전에 받는 대품(大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중 하나로 ‘차부제품’(次副祭品)이 있었다. 이 품은 로마에서 시종직을 받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직책에서 발전한 것으로, 부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교황 바오로 6세 때 이 품을 폐지하면서 이때까지 차부제에게 주어졌던 임무들은 독서직과 시종직을 받은 사람에게 넘겨졌다. 과거에는 삭발례를 받고나서 신품성사(지금은 聖品聖事)까지 일곱 차례의 품을 받아야 했는데, 위로 대품 셋, 아래로 소품이 넷이었다. 시종품, 구마품, 강경품, 수문품이 소품들이다.
위앵은 자신의 사제직 성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전교지방으로 가겠다는 결정은 뒤로 미루고 랑그르 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1861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을 때 그의 장상들은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외양으로는 무엇인가 좀 딱딱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훌륭한 정신과 착한 마음씨를 가졌다.”
겉으로 보이는 경직된 인상은 ‘그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선교사 성소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전기작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1861년 8월 보와제의 보좌신부로 임명된 루카 위앵 신부는 곧 교우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특히 어린이들을 힘껏 돌봐줌으로서 부모들의 마음을 샀다. 그는 아기 예수의 선교사업 단체를 조직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 곳에 가서 하느님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는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를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아니면 부모님을 도우면서 프랑스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그분의 뜻일까를 고민하던 위앵 신부는 어느 선교사의 의견을 좇아 자기 가족의 형편을 알고 있는 신부들과 평신도 두 사람에게 자문을 구했다. 모두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이 명백해 보였고, 부모님의 형편을 고려하더라도 위앵 신부가 그분들 곁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위앵 신부는 확신이 생겨 1862년 11월 4일자로 랑그르 교구장 게랭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제가 교구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전교지방으로 가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의 성소의 유래와 효성의 의무로 해서 난처하다는 점을 적고, 자문을 구했더니 “모두가 제 계획에 찬성했습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그 때부터 제 결심은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졌습니다. 다만 제가 사제품을 받던 날 주교님께 약속드린 복종과 순종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주교는 보와제 보좌신부의 계획과 요청에 동의하면서 다만 “그 본당의 보좌신부 자리를 메울 수 있게 해줄 1863년 6월의 서품식이 있기 전에는 떠나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위앵 신부는 1863년 6월 8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고, 신학교에서는 호의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미 사제품을 받은 상태였지만, 전교지방으로 떠나기 위해서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회 관계의 절차는 모두 끝이 났다. 그러나 가장 힘든 일이 남아 있었다. 가족들에게 알리고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수녀가 된 그의 두 손위 누이들은 선교사를 지망하는 위앵 신부의 뜻을 이미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한 누나는 한동안 동생 사제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생각까지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본당 사제관으로 따라가겠다던 프랑수아즈는 크게 안타까워했고, 아버지 또한 너무나 슬펐지만, 아들의 결심을 크나큰 인종(忍從)으로 받아들였다. 오직 어머니만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1863년 7월 초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이 있는 사제관으로 찾아가서 따지듯 물었다.
“선교사 성소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해? 경우에 따라서는 순교까지도 해야 한단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네가 그럴만한 용기가, 용기가 있느냐구? 흑흑흑…”
선교지에 나가서 순교까지 할 용기가 있느냐고 퍼부었던 어머니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격한 어조로 따지듯 쏘아 붙였다.
“그럼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잊었단 말이냐?”
신부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 하느님이 부모에 우선한다고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자주 자주 가르쳐주신 어머니가 아니셨느냐구요!”
애초부터 싸우자고 말문을 연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듣자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부둥켜안고 소리쳐 울뿐이었다. 이윽고 아들 신부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저희 아홉 남매를 키워주신 어머니께 고통만을 안겨드려서 불효막심한 저로서는, 무어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막내로 태어난 저는 우리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가 없었던 적이 없는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테파니 누나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도 크나큰 자랑거리였죠.”
처음에는 아들의 선교 계획에 그처럼 맹렬하게 반대했던 어머니도 위앵 신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내 아들 뤼끄, 네가 이겼다!”라며 놓아주었고, 문앞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며 말했다.
“나에게 강복을 주렴. 그리고 내가 하느님의 뜻에 반항했던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주고 떠나렴.”
이별의 아픔을 강복으로 달랜 모자는 그런 절차를 거쳐 헤어졌다. 그리고 3년 후, 어머니는 아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즘 같으면 전화나 인터넷으로 즉시 전달됐을 소식이련만, 그때는 기용벨 고향집까지 꽤나 시간이 걸려서 아들의 죽음이 전해진 모양이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아들의 유품이 들어있는 장롱문을 열고 두 팔을 열‘십’(十)자로 포개고 무릎을 꿇어 ‘떼 데움’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성삼위를 찬양하는 라틴어 찬미가인 이 노래는 흔히들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謝恩) 찬미가’라고들 하는데, 그보다 훨씬 전 6세기부터 특별한 전례 예식, 예컨대 축성식이나 서품식,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소리 높여 부르곤 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원하신 아버지를/ 온 세상이 삼가 받들어 모시나이다./ 하늘의 모든 천사, 케루핌과 세라핌이/ 끊임없이 소리 높여 노래부르오니/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엄위하신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도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대열/ 무수한 예언자들의 대열/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
여기서 말문이 막힌 어머니는 아들의 순교 장면을 상상해본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미로서 아들의 죽음의 순간을 떠올린다는 것은 또 하나의 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도착한 아들의 편지 한 대목이 떠올랐다.
“소자가 선교사 대열에 끼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저는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자상하신 어머니, 오늘 저는 두 분을 생각하고 두 분께서 오래 전부터 희생하셨음을 알고 있기에 제 기쁨을 같이하시라고 이렇게 서둘러 이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어쩌면 순교자가 될지도 모르는 선교사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셨기에 하늘나라에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과 저를 두 분 곁에 둠으로써 얻으셨을 일시적 만족과 바꾸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래, 장하구나, 내 아들 뤼끄!’
루카 위앵 신부의 어머니는 “무수한 순교자들의 대열/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 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그지없이 엄위하신 아버지/ 친아드님, 받들어 모셔야 할 외아드님/ 위로자 성령을 찬미하나이다.…”라며 계속해서 기도했다.
사실, 1864년 7월 15일 다른 선교사 아홉 명과 함께 파리를 떠난 위앵 신부는 그 중에서도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와 더불어 조선으로 향했고, 1865년 5월 27일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다블뤼 주교를 만남으로써 이 길고긴 여행이 끝났던 것이다. 위앵 신부는 그해 6월 18일 성체축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었는데, 그곳에서 십리 떨어진 황무실(현재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로 가면서 느낀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나의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유럽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느 회장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는 성체찬미가를 흥얼거렸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는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성체성사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미스떼리움 피데이(Misterium Fidei), 곧 “신앙의 신비여!”라고 사제가 미사 때 말하면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한다. “신앙의 신비여!” 축성 바로 다음 이어지는 이 말로 사제는, 거행되고 있는 신비를 선포하고, 빵과 포도주가 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뀌는 실체(實體) 변화,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실재(實在) 앞에서 자신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성체성사는 탁월한 신앙의 신비로서,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라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제1327항)는 말해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년 반포한 교황권고 「사랑의 성사」에서 “믿음과 성사는 교회생활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두 측면”이라고 전제하고 “하느님 말씀의 선포로 일깨워진 믿음은 성사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은총 가득한 만남을 통해 자라나고 커간다”면서 “하느님 백성의 성찬 신앙이 더욱 활기에 넘칠수록, 그들은 교회 생활에 더욱 깊이 동참하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에 굳건하게 투신할 수 있다”(6항)고 언급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병인박해 때 성금요일의 순교자 선교사들을 만나고, 루카 위앵 신부가 충청도 내포지방 오솔길을 걸어가면서 느낀 ‘성체거동’의 감격에 함께할 수 있는 것 또한 이 거룩한 성사의 신비에 따른 것이리라. 서울에서도 1989년에 거행된 바 있는 세계성체대회의 기원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확산되는 등의 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성체 신심을 한층 더 드높이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 때, 18세기 전반 프랑스 태생인 이들 선교사들이 지녔던 성체성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3월 11일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위앵 신부에게 전갈을 보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고, 바로 그날 위앵 신부는 오랜 시간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준 다음 막 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신부님, 어서 떠나셔야 합니다. 포졸들이 죄여오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합니다.”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미사 성제(聖祭)는 거행하고 가야지요. 여러분이 성사를 보셨으니 성체를 모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가장 슬기로운 신자들의 간청으로 그는 밤사이 높은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앵 민신부가 그날 밤사이 옮겨간 높은뫼는 오늘의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이고, 이곳 양반 교우 신 바오로가 신부에게 숨을 곳을 제공해주었다. 이곳에도 이미 포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오로가 서양인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은 하면서도 양반이라 감히 그의 집에 뛰어들지는 못하고, 하루 종일 집 주위에서 무서운 소란을 피우고는 했다. 그러자 신 바오로의 외교인 친구가 돈을 몇 푼 집어서 포졸들 우두머리에게 건네주었고, 마침내 그들이 그곳을 떠나갔다.
밤이 되자 위앵 신부는 그곳에서 이십리 떨어진 쇠재로 가고 몇 시간 후 포졸 다섯을 동반한 두 교우가 찾아왔다. 그들은 다블뤼 신부가 보낸 심부름꾼이었고, 신부는 편지를 훑어보고 저들에게 말했다.
“주교님이 오늘 아침 체포되셨는데, 나더러 당신 계신 곳으로 오라고 하시니, 그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신부는 곧 주교가 계시는 거더리로 향했다. 이윽고 포졸 한 명이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정말 민신부요?”
“그렇소. 내가 민신부라는 사람이오.”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나 됐소?”
“작년에 왔소.”
“같이 온 사람이 얼마나 되오?”
“여럿이 왔소.”
“그중에 어떤 사람이 본 지가 오래 됐소?”
“요전에 오신부를 보았소.”
“오신부는 어디 있소?”
“모르겠소.”
위앵 민신부는 사슬에 묶여 다블뤼 주교가 있는 곳으로 끌려왔고, 오매트르 오신부도 같은 날 12일 동료와 합류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체포된 이들 세 선교사 모두가 서울로 압송됐다. 3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옥에 갇혔다가 그 다음날인 20일부터 23일까지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왜 이다지도 허무하게 붙잡혀 목숨을 잃고 말았을까?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아깝지도 않으셨던 것일까? 때로 인간의 지혜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하느님께서는 던져놓으신다.
병인년 성금요일 보령 갈매못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한 황석두 루카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 혼인했고, 스물한 살 때 한문 선생의 권고로 교회 서적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입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몹시 심했다.
“어느 양반 가문에서 이런 짓 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천주교 교리공부를 하지 말거라.”
“죽어야 한다면 죽을지언정 교리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자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작두를 가져오게 했다. 볏짚이나 콩깍지 따위의 마소의 먹이를 발로 디뎌가며 써는 연장으로, 칼날이 시퍼렇게 선 것이 여간 날카롭지가 않다.
“네 이놈! 이 아비가 죽인다고 엄포를 놓아도 교리공부를 그만두지 못하겠다니, 이제는 이 작두로 목을 벨 수밖에! 어서 목을 넣어라!”
“아버지, 왜 저에게 그런 명을 내리십니까?”
“목숨을 걸고 천주를 섬기겠다고 하니, 너를 죽이려고 그런다.”
“소자가 천주를 믿기 때문에 죽이시려는 겁니까? 아버지.”
“그렇다!”
“그러면 목을 작두 밑에 들이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입니까?” 하인들은 감히 작두의 발판을 밟아 누르지 못했고, 아버지는 그만 통곡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석두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다. 2년 동안 그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깊은 병에 걸린 줄 알고 온갖 약을 다 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두는 부모가 실의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아뢰었다.
“아버님.”
“아니, 네가 말을 하느냐?”
“저는 벙어리가 아닙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소자가 하고자하는 일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도대체 그 교리가 어떤 것이냐? 내가 좀 읽어보게 그 책들을 가져오너라.”
책을 읽어보고 나서 아버지는 슬픔과 경탄이 가득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교리 선생을 한 분 모셔오너라. 이왕 우리가 이를 믿기로 한다면 몰래 믿을 것이 아니라, 아예 내어놓고 믿자꾸나.”
황석두 루카가 2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한 것은 ‘아버지의 개종을 얻기 전에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결심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그가 청하는 은혜를 내려 주셨다. 아버지가 신자가 되고 루카가 신앙생활에 매진하자 온 집안이 개종하게 됐다. 1839년의 기해박해 후의 일이었다.
갓 서품 받은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다블뤼 신부(당시)와 함께 1845년 페레올 고주교가 도착하자 황 루카는 선교지 일에 전심전력했고, 주교는 그를 사제로 양성하고 싶어했다.
“여보, 내가 천주교 신부가 되려면 먼저 가정생활을 청산해야 한다는구료.”
“그래서 헤어지자는 말씀인가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수덕생활을 하면서 천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정배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지금 같으면 이런 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테지만, 그때는 시도할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석두 루카의 아내가 그와 헤어져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는 정식으로 세워진 수녀원이 없었으므로 교황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사를르 달레의 ‘교회사’는 쓰고 있다.
황석두 루카는 한 동안 다블뤼 안신부의 지도로 신품(神品)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그만 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해 1858년부터 페롱 권신부의 복사(服事)로 활동했고, 이어 베르뇌 장주교와 조안노 오신부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훗날 페롱 신부는 루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황석두는 내가 공소에 가서 성무(聖務)를 수행하는 데에도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그가 교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롱 신부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던 루카는 형의 아들인 황천일(黃千日) 요한을 양자로 삼아 페롱 신부의 복사 일을 맡기고, 자신은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활동을 도우며 함께 교회 서적을 번역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을 때, 석두 루카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자 아버지인 주교를 따라가기를 원해서 포졸들에게 “여보시오, 내가 주교님의 제자요.”라고 말했다. 주교가 말리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했으나 그는“무슨 말씀입니까, 주교님! 세상에서 같이 살았는데 어찌…”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포졸들 역시 귀찮다는 듯이 “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나도 천주교인이고 주교님의 제자란 말이오. 나도 따르겠소.”
“좋다! 그러면 죄인으로 묶어가겠다.”
결국 포졸들은 황석두까지 죄인으로 잡아서 서울로 데리고 갔다. 그의 영웅적인 언동이 관변 기록에 남아있는데, 박해하는 쪽에서 보면 ‘교활하고 악랄한 진술’이었던 모양이다. “황가라는 자는 교활하고 그 악랄한 진술로 봐서 그 자를 만 번 죽여도 부족할 것이옵니다. 이 자들을 모두 군 당국에 넘겨 처형하고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던 형벌)해서 무리들에게 훈계가 되게 함이 마땅하지 않겠나이까.”
병인년 3월 23일 국왕이 선고를 승인하고 충청도에서 처형할 것을 명했다. 처형은 성금요일인 3월 30일 시행됐는데, 처형 전 사형수들에게 제공된 식사에 대해 석두 루카는 이렇게 말했다.
“천주께서 만드신 음식을 먹는 것이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하면서 즐겁게 먹고 나서 기도에 몰두했다.
원래 나약한 인간이기에 누구나 죽음에 직면해서는 그 나약함을 감추기 어렵게 마련이다. 그러나 석두 루카는 어려워하는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에잇, 칼을 받아라!”
다블뤼 주교가 처형될 때, 희광이가 첫 번째 칼을 내리치고는 돈을 더 내라고 하며 흥정을 하고 있는 동안 위앵 신부가 겁에 질려 울상이 돼 있는 것을 본 석두 루카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힘을 내십시오. 잠시만 참아 받고 이겨내시면 천상의 보화가 쏟아질 것입니다. 신부님, 힘을 내십시오.’
신부는 다시 힘을 얻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을 수 있었고, 주교와 두 분 신부들에 이어 루카 자신도 “하느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제 영혼을 주님께 바칩니다.”라며 거룩한 최후를 맞이했다. 54년, 이승의 생애를 닫는 순간이었다.
병인년 성 금요일에 순교한 마지막 사람은 장주기 요셉이었다. 1803년 수원의 느지지, 지금의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문에 밝았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게 됐는데, 이 때 온 가족이 하느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요셉은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1836년 정월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는 서둘러 그를 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는 온 마음, 온 영혼을 다해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회장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낙소(樂韶)라고도 불린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은 박해를 피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산골 이곳저곳으로 네 차례나 옮겨 다니며 살다가 1843년부터는 깎아지른 듯한 구학산과 백운산에 둘러싸인 배론〔舟論, 排論〕골짜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12년이 지난 1855년 메스트르 이(李) 신부가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와서 학생 셋을 가르치며 ‘성 요셉 신학당(神學堂)’을 세웠을 때 요셉 회장은 세 칸짜리 초가 살림집을 교사(校舍)로 제공했다. 이듬해 푸르티에 신(申) 신부가 와서 프티니콜라 박(朴) 신부의 도움을 받아 신학교를 관리해나갔고, 그는 명의상으로는 신학교의 주인이었고, 실제로는 헌신적인 경리 책임자였으며, 한문 선생이기도 했다.
그가 얼마만큼 신중하고 솜씨 있게 학교를 운영했던지, 천주교를 금하고 사형으로 엄벌하는 나라에서 11년 동안이나 신앙의 못자리가 존속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장주기 요셉 회장은 교회에 공헌했고, 이웃에 있는 교우촌에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사제가 어디를 나들이 가거나 병자를 찾아갈 때면 어김없이 따라 나서서 선교사의 오른팔 노릇을 했고, 마치 수사(修士)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 비록 곤궁한 생활을 해나갈지언정 봉사에 대한 보수를 결코 받으려하지 않았고, 틈틈이 일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병인년 3월 2일 두 선교사가 배론 신학교에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될 때 장 요셉 회장도 함께 붙잡혔다. 이 때 푸르티에 신부가 포졸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그를 놓아주라고 해서 즉시 방면됐으나 이튿날 선교사들이 떠날 때 그도 소를 타고 따라갔고, 신부에게 발각돼 쫓겨났다. 울면서 순명하는 마음으로 돌아와, 남은 것이 없는 배론 집에서 닷새를 머물다가 30리 떨어진 노럴골(병인순교자증언록에는 ‘너레골’) 어느 교우 집으로 식량을 얻으러 갔다가 다른 포졸들에게 체포돼 제천 읍내로 끌려갔고, 3월 16일 관장 앞에서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이 선교사들의 집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3월 23일 두 차례 신문을 받은 뒤, “나는 치명해서 예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구나!”라고 3남매 자녀들에게 밝힌 그대로 3월 30일 성금요일 보령 갈매못에서 목숨 바쳐 63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다블뤼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세 분 선교사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이렇게 다섯 순교자의 현양 조각상이 문경새재로 넘어가는 어귀의 연풍 성지에 마련돼 있고, 1968년 모두 복자로, 1984년에는 성인으로 선포됐다.
[2009년 5월 7일 부활 제5주일 - 2009년 8월 27일 연중 제22주일 의정부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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