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주에서 본 지구는, 먼지나 티끌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작은 세포같은 지구일지라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석가가 크게 깨달아 우주크기(宇宙大)로 된 뒤,
다시 작은 오체(五體)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도,
자기의 의식은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의식은 존재하고 있으며,
신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사는 태양계(太陽系)는,
대우주의 눈으로 보면, 현미경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극미(極微)한 일점(一點)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속하는 은하계에는,
약 천억 개의 항성( 恒星)과, 그것에 딸린 혹성(惑星)이 존재한다.
지구는 그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은하계를 섬우주로 해서, 그러한 별들을 끌고 있는 섬 우주, 성운군(星雲群)은,
이것 또한 약 천억 개에 이르러, 대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대우주에서 본 지구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세포체(細胞體)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체의 세포는 약 60조(兆)이며, 각각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원자(原子)의 구조와 같다.
그런데 인간은, 인체인 세포와,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 의식,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꼭, 대우주의 구성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어져 있다.
다만 대우주가,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 비해서 인간은,
그 대우주를, 지상을, 보다 좋게 조화시키기 위해서 신불(神佛)과 마찬가지로,
그 의사(意思)와 자유(自由)가 부여되어,
사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불(神佛)의 마음으로 되어,
지상에서의 생활을 보낸다면, 지상의 조화는 몰론이고,
의사(意思)와 창조(創造)와 자유(自由)의 전개는,
무한하게 확대되어 인간으로서의 기쁨,
불교에서 말하는 법열(法悅)의 경지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하면,
지구에 낮과 밤이 있듯이,
암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어서 재해(災害), 조사(早死),
천변지이(天變地異) 따위의 사람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재앙(災殃)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있는 곳의 모든 환경은,
인간의 의사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악(惡)의 의사(意思)가 작용하면 악(惡)의 결과가,
선(善)의 의사(意思)가 작용하면 선(善)의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대우주는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지상의 인간계도, 그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의사와 자유성은, 그 대우주의 법을 잘 운용하여,
보다 나은 조화를 구현해 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때문에, 조화를 벗어난 악(惡)의 의사(意思)와 행위가 있으면,
자기 자신의 육체의 부조화를 가져오고,
그 부조화가 집단적(集團的)으로 되면,
인간이 사는 환경은, 인간의 의사(意思)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물질세계에도 부조화를 가져와, 재해(災害)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념은, 사물을 낳고, 창조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이 하늘과 땅을,
그 의사(意思)와 위대한 능력으로 창조한 것과 같이,
신의 자식인 인간에게도, 그 의사와 창조와 자유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법칙인 전생윤회(轉生輪廻)라고 하는 순환의 법을,
올바르게 살려 가는 것에 의해서만이,
“기쁨과 자유”
라고 하는 마음의 해방이 있는 것이다.
상념에도 순환의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악(惡)에는 악(惡),
선(善)에는 선(善)
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우주에서 본 지구는, 작은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세포 자체도, 소우주를 형성하여, 생명과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1 그램의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면,
1 마력(馬力:746 와트)의 모타를,
약 3,800년 동안 회전시킬 수 있다.
태양을 부수어 지구를 만든다고 하면, 33만 3천개이다.
이와 같이, 세포, 물질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 인간은, 그러한 에너지라는,
생명의 큰 바다 속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인간 자체도,
그러한 에너지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음을 인식해 주기 바란다.
(주; 선(善)의 의사(意思)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어서,
길 위에서의 안전 주행의 원칙을 선(善)의 의사로 생각합니다.
(바로 자연의 운행의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운행하다가 설 때는 무리없이 서고, 가야할 때는 부드럽게 가고,
곡선 길에서 속도를 줄여야 할 때는, 무리없이 속도를 줄여서,
부드럽게 돌아 (부딪치는 것 없이...)가겠지요.
하지만,
악(惡)의 의사는, 급하게 운행하여. 설 때는 급브레이크.
곡선 길에서는, 길 옆에 부딪치고, 차도 만신창이, 길도 만신창이,
수행은, 안전운행의 %를 높이는 공부.
인연있는 이여,
선(善)의 의사를 1% 씩 올리도록 합시다.
저는 창피한 말이지만,
한 밤의 반성 참선을 하기 싫을 정도로, 올리기가 힘들답니다.
이렇게 다카하시 신지님의 글을 올리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지요.
넓으신 아량으로 헤아리소서.
5. 법화경(法華經)은 법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다.
지구라고 하는 장(場)이 신의 의식(意識)의 나타남이라고 하면,
지구!
그 자체는 대신전(大神殿)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살고있는 환경은, 도시이건 시골이건 대신전입니다.
그 대신전 속에, 무슨 까닭에서인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들여 온갖 신전을 세우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2,540여 년 전, 붓다는 인도의 쿠시나가라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1세기에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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