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지극히 주관적 학문입니다. 신학의 주제 자체는 하나님과 성경에 관련된 내용이지만, 개인이나 학파의 주관적 견해가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신학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 따라 같은 주제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학의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환영할 수는 있으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을 통해 검증하고, 나에게 유익한 지식인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 매기는 것에 찬성합니다. 단지, 제가 부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부자라면 이 문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분노할 수도 있겠죠. 성경은 정승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고 명령합니다. 창기의 번 돈, 개같은 자의 소득 다시 말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소득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법과 원칙, 신앙양심을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것만 소득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모든 재산의 환원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이 조건 때문에 슬며시 도망갑니다. 삭개오같은 부자는 참된 구원을 경험했을 때 자발적으로 재산을 환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헌금도 받으십니다. 요컨대, 헌금이나 재산환원 등은 강제보다 자발성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소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파격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생명 주시고, 힘 주셨기 때문에 소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십일조를 넘어 초대교회 성도들이 실천했던 "다 팔아 헌금"까지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 팔아 헌금"이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자발적 헌금이었다는 점입니다. 헌금뿐만 아니라 사회환원은 결코 강요에 의해서 실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자발적인 영역이죠. 실제로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하고,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 등의 수고보다 헌금의 필요성, 헌금의 가치 등을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성도들의 자발적 헌금이 가능합니다. 사회 환원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법이나 제도 같은 강제적인 수단보다 사회환원의 필요성과 다양한 방법들, 여러 캠페인들을 통해 사회환원의 가치들을 소개한다면, 훨씬 더 적극적인 사회환원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