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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죽음의 덫 [1] "으음! 장구안의 팔을 잘랐단 말이냐?" 등조민이 망해파에서 고혜원을 도와준 상황을 듣고 등인탁은 안색 이 굳어졌다. 그는 장구안을 살려준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 놈을 죽일 줄 알았는데... 배신한 게야.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니.......’ 비록 방법은 치사했어도 그는 그러한 모욕이 드센 고혜원으로 하여 금 쉽게 마음을 정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었다. 등조민은 그런 내용을 모른 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예. 그 동안 혼사문제를 생각해 본 결과 공감대를 형성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강요할수록 그녀가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은 것이 었다. 등인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늘한 안광을 발했다. "아암, 자주 접하다 보면 정이야 드는 법이지. 하나 장구안을 빨리 정리해라. 그런 소문은 혼담에 장애가 되는 게야." "예." "그래 조화산장 일은 어찌 되었느냐?" 등조민은 주요 사항을 간추려서 말했다. "아무래도 고일두가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지하밀실의 정황을 짐작 할 때......." 등인탁은 얘기를 듣고 난 후 살벌한 안광을 뿜어냈다. '요극초가 망쳐놓았어! 혈광마검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건만.... ...’ 문제는 사라진 서하경이었다. 예지력이 뛰어난 그녀는 한 번은 엉겁결에 당했을망정 두 번 다시 걸려들 여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납치를 당하고 가만히 있겠는 가? 돌연 그는 아들이 놀랄 만한 말을 꺼냈다. "조심해라. 청풍이란 놈은 단궐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유청풍이 공력을 회복한 사실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만일의 사태를 위해 아들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등조민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등인탁은 시치미를 뚝 떼고 추정한 것처럼 설명했다. "화절은 단궐과도 교분이 깊었다. 화절은 제자를 시켜 청풍을 보호 한 것이다." 등조민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얼른 물었다. "그것이 요극초가 화절을 납치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리석게도 그 자는 전광신공과 화절을 교환할 생각을 한 게야." "전광신공은 단궐과 함께 사라졌지 않습니까?" "하지만 청풍이 뇌운진기를 지닌 이상 방법이야 있을 수 있겠지. 음양의 이치란 묘한 것이니까." 얼추 이해한 등조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서 혜원 누님이 청풍을 가까이.......’ 그의 뇌리에는 조화산장에서 유청풍과 나란히 서 있던 고혜원의 모 습이 떠올랐다. 그때 등인탁이 단호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공절을 만나거라." "예......?" 등조민은 갑자기 혁련달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졌다 . 더불어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회의감으로 꽉 차있었다. '그가 비급의 내용을 알아 올 것도 아닌데......?’ 혁련달이 비록 고일두의 사부라 해도 그가 와호장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을 행세할 것 같지 않았다. 등조민은 부친의 의도를 다시 확인했다. "혁련달을 회유하려는 목적이......?" 아들이 슬며시 말 끝을 흐리자 등인탁은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혈광마검을 우리 지하에 보관할 작정이다." 어느새 그는 여유를 되찾고 마검각 쪽을 바라보았다. 마검각은 바로 수리마제 단궐의 혈광마검을 보관한 전각이었다. 순 간 등조민은 난생 처음 감탄사를 발했다. '아......! 그럼 은밀히 토목공사를.......’ 비밀리에 진행될 그 공사가 끝나면 마검각에는 가짜 혈광마검이 놓 여 있을 것이다. 등인탁은 아들이 말귀를 빨리 알아듣자 만족스러웠다. "타인이 지닌 능력을 잘 활용해야 조직을 수월하게 이끄는 게야." 언뜻 듣기 좋은 말 같은 그 속에 비열함이 배어 있었다. 등인탁은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직만이 최선인 줄 아는 모양인데, 세태에 물든 자들과 접촉하면 뭔가 느끼겠지.’ 그가 굳이 아들을 내세워 혁련달을 포섭하려는 이유도 비정한 세계 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등조민은 왠지 개운치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부친의 사업에 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 난 삼 년 동안 무공을 배우고 이제 귀가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 엇보다 무인은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저는 단궐의 전인과 정당하게 대결하여......." 등인탁은 아들의 말을 냉정히 잘라 버렸다. "사소한 사항이야 나중에 상의하기로 하고 좀 쉬거라." "예." 등조민은 대답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름대로 복안을 수립한 터였다. '일단 여유가 있으니 지시를 수행하면서 대책을 마련해야겠구나.’ 아들이 물러간 후 등인탁은 안면을 찡그렸다가 환하게 폈다. '가만, 청풍은 아직 내막을 모르지? 녀석을 이용해 홍오간의 짓이 라고 만들면? 어디 모염정에게 맡겨 볼까? 으흐흐.......’ [2] "커허허... 장하다!" 고헌부는 비급과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와호장의 본 채 지붕이 들썩거릴 것만 같 았다. 약관(弱冠)인 아들이 도가 최고의 심법을 쉽게 획득한 것은 한 마 디로 쾌거였다. 마주 앉은 고일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 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환한 유등불 아래 그들 부자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 찼다. 고헌부는 아들을 대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암, 누구 아들인데. 설사 혈광마검을 갖지 못한다 해도 무림 최 강이 될 것이다. 커허허......." 그것은 혈광마검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금 최강의 공력을 보 유한 다음 차분히 방도를 세우자는 뜻이었다. 고일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구결이 간단하여 이미 암기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가 최고의 심법 금황옥진비결은 고헌부 의 손에서 재로 변해 날아갔다. 그도 내용을 이미 머리 속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목에 힘이 들어간 고일두는 어깨를 좍 폈다. "앞으로 본가의 사업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그도 고혜원처럼 아버지가 큰 사업가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지 실 상 사업내용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풍요 속에서만 살던 그가 무공연마를 마치고 이제 돌아 왔으니 무엇을 알겠는가? 고헌부는 아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물론 그래야지." 이어 그는 건너편 밀실을 향해 무거운 음성을 발했다. "대족삼." 곧바로 건넌방에서 나타난 한 인물이 허리를 구부렸다. "예!" 놀랍게도 그는 우측 팔이 헐렁한 대족삼 장구안이었다. 장구안은 망해파에서 고혜원을 겁간하려다 등조민에게 팔이 잘린 그 자였다. 하지만 고혜원은 그가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설령 그녀가 알아도 당시의 수치스런 일을 거론할 수는 없을 것이 다. 장구안은 여자의 그러한 심리를 익히 아는 터라 대담하게 투항한 것이었다. 고헌부는 아들에게 장구안을 소개했다. "대족삼도 우리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흐뭇한 눈빛으로 장구안을 바라보았다. 고일두는 다소 못 마 땅한 음성을 토해냈다. "네에......." 아들의 심중을 눈치 챈 고헌부는 당부를 덧붙였다. "이제 정해단을 떠났으니 우리가 은밀히 보호해 줘야 한다. 네 누 나에게도 그리 알려 주거라." "누님은 다시 남해로 간 모양입니다." "으음......." 고헌부는 침음성을 발한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해단이 화절을 납치하고 우리 아이들까지 공격하다니. 수장인 대통좌를 필히 죽여야 한다. 놈이 무림의 시선이 내게 쏠리도록 조종 한 거야.’ 장구안은 짐짓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청풍과 함께 잡아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아가씨가 먼저 나타나는 바람에. 정작 별일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유청풍을 잡으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투항한 입장에서 그가 고혜원에게 저질렀던 음행을 얼 버무리려고 미리 둘러댄 것 뿐이었다. 그의 말에 고일두는 깜짝 놀라 물었다. "누님을......?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나?" "상관인 요극초였습니다." 그는 시종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섣불리 얘기했다간 내 생명만 단축될걸?’ 만일 그가 등인탁이 지시한 짓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비등원과 와 호장은 단숨에 원수지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외형상 부탁지교를 나누는 그들은 조용히 대처할 것이 분명 했다. 그럴 경우 비등원에 의해 그는 당장 노출될 뿐만 아니라 창피 한 일을 감춰야할 와호장 또한 그를 살려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죽은 요극초를 이용한 것이었다. 고일두는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자가 청풍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뭐지?" "저는 모릅니다, 단지 명을 받았기에......." "하면 요극초에게 지시한 자가 있을 것 아닌가?" "저... 탐화몽포는 점조직이라 상하좌우만 알 뿐입니다." 완벽한 답변에 고일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이 든 전대를 건넸다 . "알았네. 자, 이것으로 팔을 맞추게." 잘려진 팔에 의수(義手)를 끼우라고 준 전대 속에는 십여 개의 진 주가 들어 있었다. 그 값어치는 웬만한 장원을 구입할 거금이었다. 장구안은 감복한 척 하며 길게 읍(揖)했다. "도련님, 큰 은혜를 베푸셔서. 꼭 공을 세워 보답하겠습니다." 고일두는 의젓한 자세로 장구안을 바라보았다. "어려워하지 말라고 주는 걸세." "예, 그럼. 저는......." 장구안은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관직과 탐화몽포에서 터득한 생존 방법이야. 운 좋게 청 풍이 혁련달과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고일두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믿음이 안 간단 말이야. 천천히 관찰해야겠어.’ 와호장주 고헌부 역시 음산한 눈빛을 발했다. '저 장구안이란 소모품을 잘 이용하면......?’ 그때였다. "장주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고헌부는 더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왔느냐?" "예!" 대답과 동시에 비쩍 마른 호미취골 갈곤태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 그는 장주와 고일두에게 연이어 허리를 굽힌 다음 그 자세로 보고 했다. "장주님,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고헌부는 묵묵히 갈곤태를 바라보았다. 갈곤태는 더욱 허리를 굽히며 장주의 귀에다 속삭였다. "예상하신 대로 천락무예단의 무각이 바로 청풍입니다. 한데 놀랍 게도 엄희채가 단주를 맡고 있습니다." 고일두는 영문을 몰라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고헌부는 들릴락 말락한 어조로 말했다. "만미당의 그 말썽꾸러기가......." 그는 매부리코를 쓰다듬으며 살계표(殺計表)를 작성했다. '닭싸움으로 본가를 망신시키더니 자금줄까지... 대체 누가 그 녀 석에게 제련 비밀을 알려 주었을까?’ 제련 비밀이란 혁련달이 몰래 가공한 금을 처분하는 것으로 이는 국법을 어긴 불법 행위였다. 이들은 급장수 원개가 그 사실을 유청풍 에게 알려 준 인물임을 모르고 있었다. 고헌부의 눈에서 칼날 같은 살광이 번뜩거렸다. "그 녀석이 살수 행각을 한다면 다음에 노릴 인물이 또 있을 게야. 빠른 시간 안에 그 인물과 협조하여 깨끗이 정리해. 인원은 살루문 에서 동원하도록." 이제 서하경을 찾는 일은 뒷전이었다. 생명과도 같은 비자금의 출처를 아는 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 그 래야 사업이 번창하는 가운데 발뻗고 잘 수가 있을 것이다. 갈곤태는 공손히 인사한 후 돌아갔다. "예! 명을 거행하겠습니다." 고일두는 충격을 받았다. '아아! 아버님이 바로 살루문주구나. 아니면 그 무서운 단체를 수 하 부리듯 지시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로 판단하되 경솔히 묻지 않았다. 사활이 걸리지 않은 이상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부친의 성격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일두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 청풍의 뒤를 봐주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삼 년 전 원개가 살려한 점도 그렇고, 제가 사혈을 짚었는데도... ...." 고일두는 조화산장 일을 얼버무리려다 유청풍과 음양야혼귀가 거론 되자 심각한 느낌이 들어 그 일을 상세히 말했다. 고헌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그는 너무나 속이 떨려 아들이 속이려던 사실마저 문책하지 않았다 . 짧은 순간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색을 가다듬은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뇌운진기가 일으키는 현상이야. 단궐이 턱 밑에서 교묘하 게 전인을 양성했어......." 긴장하기는 고일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수리마제가 살아 있단 말입니까?" 고헌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가장 무서운 적인 수리마제! 그 맥을 말살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고일두도 살기를 드러냈다. "청풍을 제가 없애버리겠습니다. 반드시......." "오냐, 대족삼을 데리고 가 변동사항에 대처하거라. 한 가지 명심 할 점은 녀석이 혈광마검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살펴야 한 다." 바야흐로 생과 사의 본격적인 승부가 펼쳐진 셈이었다. 고헌부는 검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강적 유청풍만 없애 버리면 살루문주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무림 의 정상을 향해 치달릴 전도가 양양할 것 같았다. 뻐꾸기 울어대는 유 월 초의 밤, 살인 임무를 띤 인영들은 날렵하 게 와호장을 빠져나갔다. [3] 강서성(江西省)에서 가장 유명한 고서점이라면 역시 구강부(九江府 )에 있는 춘추고서점(春秋古書店)일 것이다. 파양호( 陽湖) 서북단에 위치한 그 고서점은 노부부가 단둘이서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작아도 웬만한 문헌들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 이었다. 이 가게에서는 중원뿐만 아니라 조선(朝鮮), 왜(倭), 천축(天竺), 심지어 대진(大秦:로마)의 발간물도 취급하고 있었다. 점주(店主) 갈상태(葛想態)는 모두가 수입이 시원치 않아서 기피하 는 고서점을 악착스럽게 운영해 온 이 방면의 귀재였다. 세인들은 얇은 종이처럼 비쩍 마른 그를 지서귀(紙書鬼)라 불렀다. 그는 오늘도 저녁을 먹은 후 유등을 들고 곧장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에는 서적과 문서를 보관한 궤짝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갈상태는 궤짝에서 허름한 문서 한 뭉치를 집어들고 먼지를 툭툭 털어낸 후 소중히 쓰다듬었다. "에, 또 이 정도면 금년도 무난히 목표를 초과 달성하겠군." 궤짝 안에 있는 서적과 문서들은 한결같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낡아 서 모두 끈으로 철(綴)이 되어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주름 가득한 손이 증서 묶음을 한장 한장 넘겼다. 한순간 낱장을 넘기던 갈상태는 흠칫 놀랬다. 그는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펴며 물었다. "거, 누구요?" 문 앞, 싸늘한 느낌을 풍기는 훤칠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차갑게 말했다. "유청풍이다." 순간 갈상태의 눈빛이 흉악하게 돌변했다. '오라, 곤태가 말한 그 녀석이군.’ 와호장의 총관 갈곤태는 그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이틀 전 그는 은밀히 갈상태를 방문했었다. 그 동안 그는 유청풍이 노릴 만한 자들을 알아봤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의논하 러 왔었다. 그는 형 갈상태가 유청풍이 암살할 다음 대상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정을 말했던 것이다. 갈상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창고까지 직접 오시다니... 대체 손님은 어떤 것을 찾으시오?" 유청풍은 차곡차곡 쌓인 궤짝들을 흩어보았다. "이게 모두 금전 차용증서 아닌가? 보증인의 서류도 보관하겠군?" 갈상태는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문서를 사러 오셨소?" 유청풍은 냉랭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지서귀! 갈곤태가 네 동생인가?" 그는 유령처럼 성큼 다가섰다. 갈상태는 내심 놀랐다. '이 녀석이 내 신상을 상세히 알고 왔구나.’ 그가 갈곤태와 형제간이라는 사실은 거의 비밀에 속했다. 한데 그 런 관계가 들통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청풍은 그의 비굴한 행동을 해부하듯 날카롭게 추궁했다. "너는 빚 보증을 서 주었던 추양건을 되려 음해했지?" 이제 시치미를 떼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갈상태는 예 리한 안광을 뿜어내며 허리를 쭉 폈다. "이십 년 전에 죽은 자의 서류를 찾다니, 대체 그와 어떤 사이냐?" 유청풍의 눈에서 오싹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널 정리하러 왔다. 음모의 하수인, 탈명색혼대의 강서지대장(江西 支隊長)." 비밀에 싸여 있던 살루문의 신분이 모조리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갈상태는 정색을 하며 펄쩍 뛰었다. "어떤 놈이냐? 그 따위 허튼 소리를 하는 자가......." 유청풍은 차분히 정곡을 찔렀다. "친구를 빚더미에 앉도록 조작한 후 살루문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바로 너니까." 마침내 갈상태는 빙긋이 웃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많이 아는군. 으흐흐......." "추양건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문득 갈상태는 커다란 의문을 느꼈다. '혹시 정해단의 요극초가 죽기 전에 공모한 사실을 말해 준 것이 아닐까?’ 그는 사건의 내막을 알려준 인물을 알고자 일부러 궁금증을 유도했 다. "누군가? 그의 자식을 이제 와서 찾는 사람이? 자식은 당연히 아이 어미에게 물어봐야지." 산서 출신 진성검 추양건은 대강 이북에서 의협을 행하던 무인이었 다. 어느 날 죽마고우인 갈상태가 그를 찾아왔다. 그는 창업자금으로 쓸 자금을 융자받는 데 보증을 서 달라며 사정 했다. 마음씨 착한 추양건은 친구를 믿은 나머지 선뜻 응해 주었다. 당시 전장(錢場)은 신원과 주거가 확실한 자가 보증을 서주면 고리 로 대출해주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갈상태는 추양건이 사는 산서의 한 전장에서 금화 오백 냥을 대출 받았다. 문제는 그런 그가 그 날로 행방을 감춰버린 것이 었다. 이럴 경우 그의 아내가 대신 대출 금액과 이자를 갚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갈상태와 짜고 이혼한 상태라 변제할 의무가 없었다 . 결국 보증인인 추양건이 모든 채무관계를 정리해야 될 판국이었다. 몇 달 후 채권채무대행업체인 살루문은 추양건에게 갈상태의 부채 를 상환하라는 독촉장을 보냈다. 금액은 보증 섰던 원금과 이자를 합하여 금화 이천 냥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추양건은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에 살루문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내용인즉, 이 년 동안 살루문을 위하여 봉사할 경우 부채관계를 정 리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독촉에 시달리던 추양건은 그 제의를 받아들인 바, 이것이 그가 초대 탈명색혼대의 대장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일 년 후 어느 날 갈상태는 함께 빚을 갚겠다며 추양건을 찾아왔다 . 추양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그마저 악명 높은 탈명색혼대가 되는 것을 적극 만류했다. 하나 갈상태는 이를 무시한 채 탈명색혼대의 지대장이 되었다. 그 는 그때부터 대장인 추양건의 이름으로 가난한 채무자들과 보증인을 닥치는 대로 죽여버렸다. 추양건은 살루문의 악랄한 조치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이를 제 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자 추양건이 살루문을 배신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마침내 갈상태는 상부지시라는 명분을 내걸고 정해단의 요극초 등 다른 네 명과 공모하여 친구인 추양건을 암살하고 말았다. 이때 추양건의 아내와 두살배기 외아들은 실종되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이십 이 년 전 벌어진 사건이었다. 유청풍은 분노에 찬 음성을 터트렸다. "야비한 살루문, 정해단의 요극초를 끌어들이면 영원히 이목을 속 일 줄 알았느냐?" 갈상태는 오히려 당당하게 반박했다. "당한 자가 바보지. 날 요극초처럼 알면 오산일걸?" 유청풍은 상체를 큼지막한 나무궤짝에 기댔다. "그의 부인을 바람잡이로 이용한 죄를 함께 묻겠다." 자신 만만한 갈상태는 음산하게 웃었다. "네 투겁법에 관한 대비책을 충분히 연습했다. 널 죽여 승진 좀 하 자. 으흐흐......." 그는 공격자세를 갖추며 슬며시 옆으로 한 걸음 비켜났다. 유청풍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환갑을 모르는 출세욕이군. 좋아, 그의 부인은 어디 있나?" 바로 그때 표독스런 여인의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여기다." 동시에 꽈지직! 하며 궤짝 속에서 돌연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 긴 손톱이 흉측하게 자란 여인의 양손은 유청풍의 흉부를 노리고 칼 끝처럼 파고들었다. 순간, 유청풍은 어느새 양손에 단검을 빼어 든 채 우수로 그녀의 손목을 후리는 한편 좌수로 궤짝을 쑤셔댔다.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인 독부(毒婦)!" 사악! 예리한 음향과 함께 여인의 손목은 잘려나가고 궤짝은 산산조각으 로 부셔졌다. 동시에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꺄아악......!" 이어 목이 잘린 시신이 바닥에 뒹굴었다. 놀랍게도 시신의 손목과 목에는 값비싼 보석들이 잔뜩 달려 있었다 . 바로 그런 것들이 그녀가 가난한 추양건을 배신한 이유였다. 유청풍은 시신을 노려보며 싸늘한 음성을 토해냈다. "양장수미( 長手媚) 나야봉(羅若鳳), 진성검에게 사죄해라." 나야봉은 바로 진성검 추양건의 아내이자 갈상태의 정부였다. 허영심 많은 그녀는 보석 낀 손가락을 무기로 사용하는 여인이었다 . 자신의 아내인 그녀가 옆에 서 있다가 갑자기 마혈을 짚는 바람에 추양건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살인이 이루어지자 갈상태는 그만 어어... 하다가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새 유청풍은 단검을 피대에 꽂은 다음 그를 향해 돌아섰다. 갈상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문서철을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 "그... 그 안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 유청풍은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못난 지서귀야. 폐자재(廢資材)를 이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나무 로 만든 것이 실수였어." 그러고 보니 다른 궤짝들은 모두 강철로 된 제품이나 나야봉이 숨 어있던 궤짝만 목재였다. 수많은 궤짝 중에서 그것을 발견한 유청풍 의 안목은 실로 놀라웠다. 갈상태는 이마를 험악하게 찡그렸다. '눈썰미가 대단하구나. 저러니 문주가 없애려들 수밖에.......’ 그는 고함과 함께 서류철을 뜯어내 암기처럼 뿌려댔다. "이놈! 이곳이 죽음의 덫인 줄 알아라!" 쐐애애애액! 강기가 담긴 수천 장의 종이들은 날이 선 도끼마냥 날카로운 파공 음을 내며 유청풍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낱장이 된 종이가 스칠 때 마다 쌓아 놓은 궤짝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뿌연 먼지와 수천 장의 종이가 휘몰아치는 속에서 갈상태의 음산한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이것이 이름도 유명한 지폭만장(紙瀑萬 )이야. 으흐흐......." 지폭만장은 지엽상인(枝葉傷人)을 원용한 암기술로 동시다발적인 무서운 공격력을 발휘했다. 유청풍은 장심에 진기를 최대한 끌어 모았다. 그의 몸이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순간 위맹한 강기가 쏟아져 나갔 다. "차앗! 비상천개(飛翔天開)!" 청룡이 하늘을 향해 두 발을 휘젓는 듯한 모습은 그가 천락무예단 에서 검무를 출 때 사용하던 동작이었다. 콰지지지직! 그가 쏟아낸 강기와 갈상태의 공력이 실린 서류들이 무섭게 충돌했 다. 일순 종이뭉치는 주춤하면서 나비 떼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곧 바로 유청풍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갈상태는 흥분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흐흐흐! 공력의 차이는 곧 죽음이란 사실을 실감할 게야." 그는 마치 부채질하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양손을 휘저어 종이뭉치 에 점점 더 많은 공력을 쏟아 보냈다. 콰르르르! 종이뭉치는 요란한 파공음을 내며 유청풍을 휘감았다. 유청풍은 살을 에는 듯한 고통으로 인하여 이를 악물었다. '으윽, 견약어적(見弱於敵)은 참는 자가 승리한다. 저 자가 전신진 기를 사용할 때까지.......’ 견약어적은 자신의 약한 면을 보여줌으로써 적을 자만에 빠트리는 일종의 유인전술이었다. 유청풍의 야행복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갈라 진 살갗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언뜻 그의 그런 모습은 간신히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우세를 점한 갈상태는 연신 종이뭉치를 찢어서 날렸다. 무서운 강풍을 동반한 종이뭉치는 거대한 바위처럼 뭉쳐져 유청풍 의 눈 앞 넉 자 앞까지 쇄도해왔다. 승리를 낙관한 갈상태는 목에다 힘을 잔뜩 주었다. "이놈아, 시신조차 보존하지 못할 줄 알아라!" 바로 그때 유청풍은 벼락치듯 일갈을 터트렸다. "불(火)!" 순간 그의 손에서 찬란한 섬광이 번쩍거렸다. 그것은 여덟 자루의 단검이 발산하는 눈부신 빛이었다. 화염을 동 반한 단검들은 일직선을 이룬 채 나사처럼 회전했다. 뜨거운 와류(渦流)는 수만 장의 종이들을 삽시간에 태워 버렸다. 희희낙락하던 갈상태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으헉! 저건... 차화투선술(借火投旋術)......?’ 그때 와류는 열기를 뿜어내며 갈상태를 향해 맹렬히 쏘아갔다. 갈상태가 공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거세진 화염은 점점 빨리 다가왔 다. 여덟 자루의 단검은 불과 일 장여 앞에서 팔방을 차단하며 사방 으로 갈라졌다. 차화투선술은 이처럼 상대방의 공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다시 단검 에 실어서 회전시키는 고도의 투검술이었다. 단, 이는 육 성 이상의 뇌운진기를 소유한 자만이 가능했다. 혼비백산한 갈상태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으으, 저리 괴물 같은 놈일 줄이야. 내 진기로 역공하다니....... ' 쏴아아! 그는 쌍장을 발출한 후 재빨리 신형을 뽑아 올렸다. 막 지붕을 뚫고 탈출할 찰나, 빛살 같은 여덟 줄기 섬광이 그의 하 체를 통과했다. 허리 아래가 뭉턱 사라진 갈상태는 처절한 비명을 터 트렸다. "끄아아악......!" 바닥에 떨어진 시신은 동강난 채 얼마 동안 허우적거렸다. 강한 화염이 갈상태의 피를 모조리 말려버려 바닥에는 단지 뿌연 먼지만 휘날릴 뿐이었다. 살 타는 노린내가 번질 즈음 궤짝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실내는 삽 시간에 매캐한 화염으로 가득 찼다. 유청풍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역시 대단해. 뇌운진기는.......’ 뇌운진기는 수리마제 단궐의 전광신공에서 비롯되었다. 단궐은 이를 혈광마검에 실어 정해단과 살루문의 고수들을 태워 버 림으로써 북망지겁의 쾌거를 이룬 바가 있었다. "......." 밖은 총총히 빛나는 별빛과 창고의 화광으로 인해 대낮처럼 환했다 . 유청풍 역시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야행복이 갈기갈기 찢어져 쩍 쩍 갈라진 상처 부위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줄줄 흐르던 피가 신속히 응고하여 상처로 인한 고통은 별 로 심하지 않았다. 그는 창약(瘡藥)을 바른 다음 천락무예단이 있는 남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으음, 이제 둘 남았군." [4] 산을 아는 사람은 절강성에서 제일 유서 깊은 산으로 삼왕산(三王 山)을 꼽는다. 성(省) 중심부에 위치한 삼왕산은 항주를 통과해 남해 로 흐르는 절강(浙江)의 발원지였다. 그 산은 중원의 시조인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노닐다 가서 더욱 유명하며, 정상에 돌로 쌓은 조그만 성이 있어 석성산(石城山) 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명소에 관광객을 빼앗겨 그저 한산한 유적지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오 무렵이건만 산 중턱에 위치한 보리암(菩提庵) 은 쓸쓸해 보였다. 보리암주 무연사태(無緣師太)는 두 칸짜리 모옥인 한운거(閑雲居) 에서 기거하며 그 중 한 칸을 접객실로 사용했다. 엄희채가 한운거를 찾은 시각은 이른 새벽 막 동틀 무렵이었다. 암자 안에서 나지막한 불호(佛號)가 새어 나왔다. "아미타불, 왔느냐?" 열려져 있는 불당(佛堂) 문으로 오십 세쯤 됨직한 노니(老尼)가 모 습을 드러냈다. 비록 그녀는 삭발하여 탈속한 모습이지만 아직도 속 세의 아름다움이 은은히 배어 나왔다. 바로 그 노니가 보리암주 무연 사태였다. 무연사태는 예불과 새벽수행인 조범(朝梵)을 방금 마친 모양이었다 . 엄희채는 반갑게 소리치며 손을 잡았다. "예, 어머니." 접객실의 기물은 매우 단출하여 한쪽 구석에 쌓아 놓은 몇 개의 대 나무 방석과 한 조(組)의 다구(茶具)가 전부였다. 그러나 엄희채의 눈에는 이러한 구조와 기물이 낯설지 않았다. 무연사태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앉거라." "예." "무예단을 운영하느라 힘들겠구나." "할 만해요." 무연사태는 천천히 차호(茶壺)를 집어들어 화로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뜻 모를 옅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엄희채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왜 갑자기 부르신 거죠?" "이 에미가 하나뿐인 딸이 보고 싶더구나." 이따금 듣는 말이지만 엄희채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연사태는 어제 딸이 머무는 객잔에 만나자는 쪽지를 남겨 놓고 왔던 것이다. 어언 차호에서 뜨거운 김이 화르르 솟아올랐다. 무연사태는 차호를 기울여 천목다완(天目茶豌)이라는 찻잔을 한 번 씻어낸 다음 다시 화로 위에 올려놓고 끓였다. 투명한 수증기가 좁은 방안에 가득 찼다. 잠시 후 무연사태는 마른 차 잎을 조금 집어 다호 속에 넣었다. 엄희채가 코를 흠흠거리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 불국보타(佛國普陀)는 정말 향기가 진하네요?" "그래도 자이호(紫泥壺)에 끓여야 제 맛이 난단다." 불국보타는 당나라 때부터 유명해진 백차(白茶)로 일명 보타불차( 普陀佛茶)라고도 불리는 귀한 명차였다. 원래 그 차는 절강성 보타현(普陀縣) 불정산(佛頂山)에서 스님들이 재배해왔었다. 무연사태는 그 차씨를 환경이 비슷한 삼왕산에다 뿌 렸다. 불국보타는 무색이며 폐부를 녹일 듯한 시원한 향기를 발한다. 그러나 차란 끓이는 도구에 의해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무연사태가 소지한 자이호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고온에서 구워낸 유명한 다호였다. 백차는 바로 이런 자이호로 끓여야 무색 투명한 색 깔을 띠며 심혼을 빼앗을 듯한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그윽한 향기가 실내에 가득히 배일 즈음 무연사태는 찻잔에 따라주 었다 "마셔라. 심신이 개운해질 테니......." 엄희채는 천목다완을 두 손으로 감싸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아! 정말 전신에 차향이 스며드는군요." 그녀는 향긋한 맛에 도취된 듯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가끔이나마 모녀가 짧은 시간을 이렇게 함께 보내는 것이 그녀에게 는 무엇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무연사태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더니 찻잔을 입에 대었다. 향비유회취(香鼻有回取)라는 말처럼 무연사태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코로 차 맛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즐겁게 차를 마시던 엄희채가 돌연 정색을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녀는 어머니 무연사태의 습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고민이 있다는 증거였다. 사실 엄희채는 명차의 운치 있고 특이한 향기를 음미한다는 소위 초취미(焦臭味)보다 은근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중이었다. 무연사태는 품 속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비등원주가 부탁한 서신이다." "어떤 내용인데요?" "직접 읽어보거라." 엄희채는 봉투를 뜯고 쪽지 한 장을 펼쳐들었다. 비등원주 등인탁이 보낸 서신은 글자 한 줄과 간단하게 그려진 도 형뿐이었다. 글자는 부탁할 내용이며 도형은 어느 장소를 표기하는 약도가 분명했다. 엄희채는 서신을 흩어본 후 아미를 찌푸렸다. "망혼단(亡魂丹)을 제거해 달라는 거예요." 무연사태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망혼단은 어린아이 시신과 다섯 가지 희귀한 독초를 배합하여 제조 한 것으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사악한 약이었다. 엄희채는 불만이 가득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언제까지 그 자에게 끌려 다녀야 하죠?" 무연사태는 열어 놓은 한운거 밖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동북쪽 멀리 삼천 사백여 척의 흐릿한 천태산(天台山) 주봉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산을 너머 바다로 나가면 관음보살을 모신 유명한 보 타사(普陀寺)에 당도하게 된다. 울창한 숲으로 가려진 이곳 보리암은 이끼가 끼고 옹색한 암자지만 엄연히 보타사의 일맥이었다. 무연사태는 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답답하더라도 그리 생각 말아라. 그는 이 에미가 몸담고 있는 사 문의 은인이 아니더냐?" "정해단의 손에서 구해준 걸 저도 고맙게 여기지만... 이런 일은 자신이 할 수 있잖아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저에게 무예단 구입 자 금을 대준 점도 그렇고......." "남을 함부로 의심하면 못쓴다. 네가 살수로 지내는 환경을 안타깝 게 여긴다더라. 아마 그도 더 이상 부탁하지 않을 것 같구나." 엄희채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신중히 계획을 정리했다. '천상 약도에 있는 홍오간의 제약소를 뒤질 수밖에. 내가 못 갔으 니 사형은 지서귀 암살계획이 연기된 줄 알 테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어요. 약은 제가 없애버리죠." 벌써 그녀의 신형은 새처럼 삼왕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무연사태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불호를 암송했다. '나무아미타불....... 성정이 비명에 간 아비를 닮아서....... 더 이상 피를 묻히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