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북망산(北邙山)의 풍운(風雲)
사방이 모조리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껍고 얇은 책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온통 퀴퀴한 책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 집비전(集秘殿)은 바로 그런 곳이다. 마무쌍은 벌써 일주일째 집비전 안에 파묻혀 있었다. 일주일이란 결코 긴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일주일이란 시간에 마무쌍은 천하대소사를 모조리 손바닥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현재도 구류방은 많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강력한 문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집한 정보는 천하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범위는 중원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외, 변방, 해외에까지 미치는 실로 방대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분류집계하는 기록원만도 십 오명이었는데 단 일주일만에 마무쌍이 그 모든 것을 읽어내리며 정리하자 턱이 빠져 의원을 찾을 판국이었다. 그들은 그 자료에 평생을 바치다시피 하고 있었건만…… 당금 천하는 정사무림(正邪武林)이 은연중에 대치하며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다. 정파(正派)에는 구대문파와 개방이 가장 강력하며 그 중에서도 삼대문파가 뚜렷하다. 소림(少林). 전통적으로 무림의 태두(泰斗)인 소림사는 백여 년 전부터 강호활동을 제한, 내실을 기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수가 얼마나 되는지 추측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당금 방장인 고경선사(古鏡禪師)는 무려 오십 구 종의 절예를 터득한 고수라고 전해진다. 무당(武當). 고래(古來)로 천하제일검파(天下第一劍派)로 인정되는 명문. 구대문파 최하위의 몰락에서 조사동(祖師洞)의 개방과 함께 흥륭기(興隆期)를 맞고 있었다. 당금 장문인인 운양자(雲陽子)를 위시한 무당오검(武當五劍)이 펼치는 동심오행검진(同心五行劍陣)은 천하무적이다. 곤륜(崑崙). 실전되었던 태청보록(太淸寶錄)이 발견되면서 무서운 힘이 생겼다. 곤륜의 전대고수인 곤륜이자(崑崙二子)는 입신경지의 대종사(大宗師)이고, 그들의 공동전인인 곤륜옥룡(崑崙玉龍)의 무공은 장문인조차 넘볼 수 없다고 전한다. 구파일방 외에는 많은 문파 중에서 일문이가일장일보(一門二家一莊一堡)가 뚜렷하다. 검성문(劍聖門). 중원검성이라 불리는 백리종도가 이끄는 수백 년 전통의 검술명가. 남궁세가(南宮世家). 천애유신(天涯儒神) 이래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전통의 검도명문. 사천당가(四川唐家). 부언할 필요없는 독과 암기의 명문(名門). 가주(家主) 만수귀견수(萬手鬼見愁)를 보면 귀신도 기절한다고 전한다. 벽력장(霹靂莊). 화기의 명문인 산서(山西) 벽력당이 발전한 세력이다. 그들의 화기(火器)는 태산이라도 날려버릴 정도로 가공스럽다. 일월보(日月堡). 정사의 구분이 애매한 세력. 보주인 일월신군(日月神君)의 정체를 아는 이조차 없는 신비에 싸인 방파, 그런데도 강호에서는 그들을 주목하고 있다. 사파(邪派), 통털어 마종(魔宗)이라고도 불리는 사파의 세력은 정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 중 오십 년 전부터 나타난 사대세력이 가장 강하다. 사령교와 마왕전은 이름만 전하고 아무 것도 전하지 않을 만큼 신비하다. 마왕전(魔王殿). 전주인 마왕신군(魔王神君)은 최고의 마공고수라고 하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사령교(邪靈敎). 교주 사령신군(邪靈神君)은 사공이학(邪功異學)의 최강이라 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모든 것이 신비하고 총단 등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묘강 독황곡(毒荒谷). 예로부터 묘강(苗彊)은 독문의 발원지라 전한다. 독황곡은 묘강 전역의 독문을 통합한 독문의 제일파(第一派)다. 칠절방(七絶 ), 이들은 방주가 일곱이나 되고 또 제각기 남이 따를 수 없는 절기 하나씩을 지니고 있었다. 그외에 염혼사루와 마검문 천랑단 등 많은 문파가 있고 그 힘 또한 막강하다. 염혼사루(艶魂死樓), 여인의 집단, 그녀들은 천하의 어떤 남자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누주인 절세마교(絶世魔嬌)의 아름다움은 구천에 사무치고 그 치마폭에 싸인 백골은 지옥에 이른다고 전한다. 그외에 수백 년 이래 전설로만 전하는 양대신비문(兩大神秘門)이 있었다. 빙천성모궁(氷天聖母宮). 희마랍아산(喜馬拉雅山) 최고봉인 성모봉(聖母峯=에베레스트)에 위치한다는 전설의 신비지궁(神秘之宮), 여인천국이라 전한다. 그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불로장생한다고 전하고 있었다. 마곡(魔谷), 마인천국(魔人天國)이라 전하고, 어린아이의 마공도 강호 일류고수를 장난감으로 만든다는 마문(魔門)이다. * * * 마무쌍은 구류대전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유물인 옥비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빙옥차(寒氷玉 )…… 그동안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것은 신비지궁인 빙천성모궁의 삼대신물 중의 하나다. 어머님께서 빙천성모궁의 사람이셨던가?" 한빙옥차는 아무런 대꾸없이 차고 맑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빙옥차는 화기(火氣)를 쫓을 수 있는 기보였다. "빙천성모궁을 찾기 전에는 이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으리라……" 마무쌍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한빙옥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손에 목걸이 하나가 만져졌다. 설명하기조차 곤란한 기이한 목걸이, 거무스레 기이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목걸이에는 어떻게 보면 악마상(惡魔像)이고 어떻게 보면 부처상인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마치 거울같이 매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또 하나의 유물(遺物)이다. "이것이 설마 천마호심경(天魔護心鏡)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마교 출신이던가?" 마무쌍의 눈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기가막힌 일이었다. 마교삼보의 하나가 그의 몸에 있었다니! 천마존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이 되겠는가? 마무쌍은 집비전에서 마교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었는데 그 속에 마교삼보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구류방의 능력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알 수 없다. 마교삼보의 하나와 빙천성모궁 삼대신물의 하나가 같이 있다니……" 마무쌍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지자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즈음 신산귀유는 마무쌍이 찾아낸 구류신군의 유학을 연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 * 망산(邙山). 낙양 북쪽에 있다 해서 북망산이라 불리는 이 산은 그 이름만으로도 죽음이 연상되는 곳이다. 한(漢)나라 이후 역대 제왕과 귀인들의 무덤이 생기면서 공동묘지의 대명사화 되어 버렸기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북망산은 해가 지기도 전에 으스스한 기운이 돈다. 북망산상열분영(北邙山上列墳塋), 만고천추대락성(萬古千秋對洛城), 성중일석가종기(城中日夕歌鐘起), 산상유문송백성(山上惟聞松栢聲), '북망산 위 수 많은 무덤이 천년 만년 낙양을 대하고 있다. 해지자 성중에 노랫소리 일어나건만 북망산엔 송백에 스치는 바람소리 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북망산중에 나직한 읊조림이 들려왔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덤과 노송들을 쓸고 소리치며 지나가는데, 한 인영이 노송에 그린 듯 기대서 있었다. 마무쌍이었다. 마음이 답답하자 바람 쐬러 나온다는 것이 북망산에 오르게 되었고, 사방에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두덤들을 보자 한 가닥 비감(悲感)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귀기어린 무덤이 즐비한 곳에서 두려움은 커녕 쓸쓸함을 느낀다는 것은 마무쌍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흐흐흐…… 고경천(古敬天)! 또 어디로 가겠느냐?" 어디선가 음침한 괴소가 들렸다. "으하하…… 마검경천(魔劍驚天) 본인이 와도 내 앞에서 큰소리칠 수 없거늘, 네 따위가 감히!" 한가닥 분노의 빛이 깃든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으하하하하…… 병든 닭같은 신세에도 입만 살았구나!" 예의 음침한 음성이 비웃음을 띠고 들려왔다. 펑! "으--- 윽!" 한 마디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분노한 외침이 터졌다. "어떤 개새끼냐?" "크흐하핫핫…… 네놈의 눈에는 노부가 개로 보이더냐?" 벼락치는 광소가 들려왔다. '대단한 공력이군?' 마무쌍이 흠칫 소리난쪽을 바라보았다. "으--- 헉! 다, 당신은……" 처음에 들리던 음산한 목소리가 경악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휘--- 익! 마무쌍의 몸이 한 줄기 백영으로 화하며 번개같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몸은 한가닥 질풍과 같이 무덤 위의 잡초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잡초는 미동도 않았다. 그가 지나갔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고릉(古陵), 하나의 언덕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무덤의 사방에는 퇴락하고 무너져 형태만 갖춘 담이 둘러있다. 전면에는 무너져 잡초가 무성한 문 안쪽으로 석조 십이지신상이 겨우 형상을 갖추고 있는데, 그 무너진 십이지신상 중 하나에 피투성이의 노인이 기대서 있었다. 나이는 약 육 칠십세 정도였으나 전신에 한 가닥 정기(正氣)가 흐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손에는 한 자루의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있는데 신형이 매우 불안정했다. 그의 주위에는 사 오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고, 그 앞에는 검을 든 오순의 노인 하나가 만면에 경악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눈길이 미치는 곳에는 전신이 마치 장작개비와 같이 괴이하게 깡마른 사람이 서 있었는데, 얼굴에 주름살이 괴이하도록 많아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괴인이었다. "고, 고죽선배…… 이번 일은 본 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소. 문주께서도 곧 도착하실 것이오." 검을 든 노인이 약간 음산한, 그러나 은은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른노인이 히죽 웃었다. 웃는다고는 하나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마치 마른대나무가 우그러지는 것 같아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마검경천이 이 자리에 있어도 과소로운 판에 네놈이 마검문의 이름으로 노부를 겁주려는 것이냐?" 마른 노인은 얼음을 뱉아내듯 말하며 검을 든 노인에게 다가갔다. 검을 든 노인은 마른노인의 기세에 살기가 있음을 느꼈다. "머, 멈추시오! 마검문과 고목선배와는 원수진 일이 없거늘……" "너는 철면신판과 원수진 것이 있더냐?" 마른노인이 또 소름끼치게 웃었다. 검을 든 노인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 그럼…… 당신도 그것을? 야--- 합!" 감을 든 노인은 말도 끝내기 전에 마른노인에게 덮쳐갔다. 싹--- 싸악! 검빛이 매섭게 번뜩이며 악독한 검세가 일어났다. 순간, 마른노인이 번개같이 검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팍! 퍼--- 엉! "으--- 악!" 검이 날아오르고 검을 들었던 노인이 피를 뿜어내며 나가 떨어졌다. 그는 원래 깡마른노인 보다 약한데다 마른노인의 암습을 받은 상태였기에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다. 노인의 가슴은 박살이 나 부서진 뼈가 드러나 보였다. "겨우 칠성의 마왕군림검을 가지고 설치고 다니다니……" 마른노인은 남이 말하듯 중얼거리며 석상에 기대선 피투성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피누성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피투성이 노인은 가슴이 서늘했다. 상대는 그가 완전해도 이긴다고 할 수 없는 노마(老魔)인 것이었다. "머…… 멈춰라!" 마른노인이 멈추며 입을 열었다. "고경천, 기보는 임자가 있다. 내 놓아라!" 피투성이 노인, 그는 철면신판 고경천(鐵面神判古敬天)이라 불리는 백도대협객이었다. 육십사수 염왕필법(六十四手閻王筆法)으로 악인이라면 결코 용서치 않는 철담호협(鐵膽豪俠)이 바로 그였다. 철면신판 고경춘이 냉소를 떠올렸다. "기보에 임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고죽노괴(枯竹老怪), 너에겐 자격이 없다!" 그의 말은 힘이 없었으나 마른노인의 분노를 터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고죽노괴(枯竹老怪)가 누구인가. 괴이한 사공(邪功)인 고죽신공을 이루어 전신에 창칼을 두려워않는 희대의 노마두가 아니던가? "크크크…… 간단히 죽여주려고 했더니……" 고죽노괴의 눈에 흉광이 번뜩였다. "분수도 모르는 놈! 고경천의 말은 사실이다! 네놈에겐 자격이 없다!" 그 순간, 냉랭한 음성이 고죽노괴의 말을 잘랐다. 동시에 장내에는 낙엽보다 더 가볍게 흑의노인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마검경…… 천……!" 고죽노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자가 어떻게 벌써 쫓아왔단 말인가?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긴 다 틀렸구나……' 철면심판 고경천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나타난 흑의노인이야말로 당대 마검문의 문주인 마검경천 장검운(章劍雲)이었다. 그의 검공(劍功)은 마검문 사상최고라고 알려지고 있었다. 스스스--- 그 뒤를 이어 흑의검사 넷이 바람같이 날아들었다. "마검문의 마검칠웅(魔劍七雄)이 모두 출동했군." 철면신판 고경천이 나직이 신음했다. 그는 이미 마검칠웅 중 둘을 처치했고 방금 고죽노괴가 또 한 명을 처치했으니 여기 나타난 네 명을 합하면 마검문의 최고세력은 모두 출동한 셈이다. 마검경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죽어 넘어진 시체를 보더니 살기를 떠올렸다. "고죽노괴의 몸은 도검을 두려워 않는다더군, 과연 그런가 시험해 봐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 왕(魔王)!" "군…… 림(君臨)!" 차가운 호통과 함께 마검칠웅 중 네 명이 한꺼번에 고죽노괴에게 덮쳐들었다. "네깟 놈들이 감히!" 고죽노괴가 코웃음치며 마치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손을 휘둘렀다. 그들이 격돌하는 순간에 마검경천은 철면신판 고경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고죽노괴는 그것을 보고 다급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고경천, 철면신판의 위명은 결코 헛 것이 아니었구나. 너로인해 삼웅이 죽었고 본 문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제 내 놓아라!" 마검경천은 다가가는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말했다. 철면신판은 그의 기세에 눌려 판관필조차 들 수 없음을 느꼈다. '끝났다…… 전신의 진력이 모두 바닥났구나!' 그러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알고 이토록 집요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너도 자격이 없다!" "흥!" 마검경천은 냉랭히 코웃음쳤다. 두 말도 필요없는 것이 그의 성미였다. 팟! 그의 어깨에서 검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검세는 소름끼치게 악독했고 빨랐다. 철면신판은 이미 그것을 막을 힘도, 피할 힘도 없었다. 피가 튀려는 순간이었다. 쨍---! "으--- 음!" 매서운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면서 마검경천이 흠칫 물러났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철면신판이 판관필을 들어올려 그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과연 철면신판답군! 또 막을 수 있는가 보자!" 마검경천은 뜻밖인 듯 경악이 어린 눈빛으로 철면신판을 보더니 음산하게 외쳤다. 쓰쓰쓰--- 악독한 검세가 폭죽과 같이 일어나며 우박처럼 철면신판을 덮쳤다. 마왕군림검법의 절초인 마왕강세(魔王降世)였다. 철면신판은 눈을 감고 말았다. 그때, 그의 팔이 움직이며 판관필로 세 가닥 필화(筆花)를 그려냈다. 쨍--- 쨍---! "윽---!" 잇달아 날카로운 소리가 터지며 마검경천은 또 다시 물러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하마터면 검이 손아귀를 벗어날 뻔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이럴 수가?" 마검경천의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면신판이 온전해도 나를 이렇게 간단히 진퇴시킬 수는 없다!' 그는 살기를 뿜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요? 어떤 고인이 장난을 치는 거요?" "아하하하……" 그 순간,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신비하도록 맑은 눈을 지닌 백의공자, 그의 이름은 마무쌍이었다. "그대가 나를 불렀는가?" 마무쌍이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검경천은 어이가 없었다. 거창한 절세고수가 나오는 줄 알았더니 이건 어디서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가 아닌가? "네 놈이 방금 수작을 부렸느냐?" 말투가 대번에 달라졌다. 마무쌍의 안색에 한 가닥 서리가 스쳤다. "저런 건방진 주둥아리! 네 사부인 마검노인(魔劍老人)이란 애송이가 살아있어도 감히 노부 앞에서 그따위 주둥이를 벌릴 수는 없거늘……" 한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노부라니…… "노부? 네녀석이 오십 년 전에 작고하신 선사를 안단 말이냐?" 마검경천은 어이가 없는 듯 얼떨떨해 마무쌍을 쳐다보았다. "네놈이 끝까지! 네 사부를 대신해 존장을 능멸한 치죄(治罪)를 하리라!" 마무쌍의 신형이 흐려졌다. 마검경천이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검을 세우는 순간, 짝! "윽!" 그는 눈 앞에 별이 튀는 것을 느끼고 신음을 토해냈다. 어이도 없게도 눈을 멀건히 뜬채로 따귀를 얻어맞은 것이다.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부풀어 오르며 입 속에서 부러진 이빨이 뱉아졌다. 골이 횡 한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언제 이런 일을 당하기는 커녕,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하하하…… 장검운, 이 어린 녀석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마무쌍이 크게 웃었다. 그의 신형은 철면신판의 옆에 그대로 있었다. 마검경천은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도록 대노하고 있었다. 가히 노화삼천장! "이 죽일 놈의 꼬마!" 마검경천은 울부짖듯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쏴쏴--- 쉬--- 익! 절정에 달한 중원십이대검법의 하나인 마왕군림검법이 무섭게 펼쳐졌다. 하지만, 산더미같은 검광이 악독히 덮쳐오는 것을 보고도 마무쌍은 태연히 웃었다. "쯧쯔…… 태산을 보고도 모르니 혼이 나야 알게 되겠군! 요즘 아이들이란…… 이 붓 잠시만 빌리세!" 마무쌍은 손아래 사람에게 하듯 말하며 철면신판의 손에서 판관필을 뺏아 들었다. 그 순간에 검이 서른 여섯 개의 환영이 되어 그의 몸에 떨어졌다. "백 년 전의 네 사부는 너보다 못했었다. 네가 마검문 최강이란 말은 헛것이 아니군!" 그 와중에도 마무쌍은 태연히 말하며 수중의 판관필을 들어 번개같이 그 중 한 검영에다 대고 찔렀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세가 흩어졌다. 검이 퉁겨지며 막강한 반진력(反震力)이 느껴지자 마검경천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마왕--- 현신(魔王現身)!" 그는 마무쌍의 무공이 기고(奇高)함을 느끼고 대번에 군림마왕검의 삼대절초를 펼치는 것이다. 튕겨나간 검이 검화를 뿌려내며 십여 장 부근이 삼엄한 검기에 휩싸였다. '천랑마효에 못지 않군.' 마무쌍은 육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수중의 판관필을 비스듬히 그었다. 그 단순한 한 동작은 엄청난 마검경천의 검세의 맥을 여지없이 잘라놓았다. 쨍--- 쨍---! 마검경천은 검초를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또 다시 물러서고 말았다. '으…… 지독한 공력이다! 도대체 이 꼬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마검경천은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오자 간담이 서늘해 마무쌍을 쏘아보았다. 마무쌍은 빙그레 웃었다. "어떠냐?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노부의 육성의 공력에도 검을 쥐고 있으니 제법이다. 노부가 행도할 때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유…… 육성? 노부라고? 나야말로 믿지 못하겠다!" 마검경천은 부르짖듯 외치더니 벼락같이 검을 떨쳤다. "마왕--- 파천(魔王破天)! 마왕--- 멸절(魔王滅絶)!" 마검경천이 전력을 다해 이대절초를 펼치자 그 검세의 무서움은 극에 달했다. 마무쌍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신검합일(身劍合一)? 마왕군림검이 정말 제대로군……" 마무쌍은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며 수중의 판관필을 벼락치듯 찔러냈다. 필영(筆影)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대단한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빠르고 정확할 뿐이었다. 캉! 캉! 카--- 앙! 매서운 금속성이 잇달아 터지며 마검경천은 사색이 되어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으…… 으…… 이럴 수가?" 그의 검 끝에는 콩알만한 구멍이 다섯 개가 뚫려있었고 진동을 견디지 못한 손아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무쌍은 크게 웃었다. "노부의 팔성 공력을 받아내다니 제법이다! 네가 얼마나 견디나 보겠다! 기문혈(期門穴)!" 판관필이 불쑥 마검경천의 기문혈을 노리고 찔러왔다. "헉!" 그 기세는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빨랐기에 마검경천은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검을 들어 기문혈을 방어했다. 쨍! 불똥이 튀며 마검경천이 한 걸음 물러났다. 검에 구멍이 또 하나 생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좌우 장문혈(章門穴)이다!" 동시에 판관필이 또 덮쳐ㅎ다. 쨍! "윽!" 마검경천은 또 한 걸음 물러났다. 마무쌍은 또 한 걸음 다가서며 외쳤다. "잘한다! 구미(鳩尾)! 좌우 신봉(神封)!" 쨍! 쨍! 마검경천은 이번에는 두 걸음 무러났다. "하하…… 결분(缺盆)! 천돌(天突) 중완(中腕)……" 마무쌍의 판관필은 무섭게 번뜩였다. 그 기세는 눈이 돌만큼 빠른데에다 물 흐르듯 유연해 끊어짐이 없었다. 그때마다 마검경천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무쌍이 노리는 곳을 호명하며 공격하지 않았다면 그는 방어조차 못할 것이었다. 그저 죽을 힘을 다해서 검을 휘둘러 그가 외치는 방위를 막을 뿐이었다. 철면신판은 상처의 아픔조차 잊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죽노괴와 마검사웅도 손을 거둔 지 오래였다. 마검경천은 이미 수십초나 마무쌍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마무쌍이 지적하는 부위만 공격함을 알게되어 이제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중이었다. "곡지(曲池)! 견우(肩禹)!" 마검경천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들어 막아냈다. 한데, 검과 부딪친 판관필이 슬쩍 퉁겨지면서 벼락같이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런 지적도 없었다. 마검경천은 놀랍고 당황하며 손 발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습관적으로 지적하는 곳만 막다가 아무 말도 없으니 어디를 막아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이다. "윽!"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제압되고 말았다. 그 순간 마무쌍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아! 노부가 삼백 년을 살다보니 건망증이 생겼군…… 미처 말을 않해 줬으니…… 이번 것은 무효로 치자!" 그는 태연히 중얼거리며 마검경천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마검경천은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그는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무쌍이 소년인지, 노인인지……? 한데 멍청하게 서있는 마검경천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다. "옥당(玉堂) 중부(中府)!" 마무쌍이 번개같이 판관필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마검경천은 움직일 염두도 내기 전에 또 제압되고 말았다. 마무쌍이 히쭉 웃었다. "어떠냐? 이제는 제대로지? 불만 없겠지?" 마검경천은 어이가 없고 기가막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무쌍과 같은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다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마무쌍의 무공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다는 것 뿐이었다. 마무쌍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노부는 반노환동하기 전에 네 사부 마검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지…… 네 녀석의 대가리가 둔하지 않다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마검경천은 마무쌍의 웃음에 마음이 괴이하게 진동됨을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마른 대나무는 창칼을 안받는다니 한 번 시험해 보자." 마무쌍이 중얼거리며 번개같이 몸을 돌렸다. "으-아-악!" 고죽노괴가 처참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의 어깨에는 판관필이 뼈를 뚫고 박혀 있었다. 원래 고죽노괴는 모두의 신경이 마무쌍과 마검경천의 괴이한 대결에 쏠린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철면신판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철면신판조차 고죽노괴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가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막 철면신판을 덮치려는 순간, 마무쌍의 판관필이 그의 도검불침의 몸을 꿰뚫고 박힌 것이다. "마른 대나무 쪼개는 소리치고는 제법 시끄럽군?" 마무쌍은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고죽노괴는 혼비백산해 전 공력을 집중시켜 고죽수(枯竹手)로 마무쌍의 가슴을 갈겼다. "후생소배(後生少輩)가 감히 어르신네의 몸에 손을 대려하다니……" 마무쌍이 사부의 의형제세수(意形濟世手)로 간단히 고죽노괴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고죽노괴는 무서운 공포를 느꼈다. 그 자신도 왜 이런 공포를 느끼는지 몰랐다. "노…… 노선배…… 님……" 그의 입에서 공포에 찬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무쌍이 나타나자마자 반노환동에다 삼백 살 운운하자 그는 그것을 완전히 믿게 된 것이다. 하긴 마무쌍의 무공을 보고 약관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에 족하리라. "마른 대나무에는 불이 제격이지!" 마무쌍은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순간, 화르르르…… 그의 몸에서 무거운 마기(魔氣)가 뻗어나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시뻘겋게 달아 오르며 불꽃이 일어났다. "으악! 으-아-악!" 고죽노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쓰쓰쓰…… 마무쌍의 손을 통해 그의 손으로 마기어린 화염이 무서운 속도로 치밀었다. 순식간에 고죽노괴의 온몸은 불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재 뿐이었다. 가공할 수라분천마염신공(修羅焚天魔焰神功)의 위력이었다. 마무쌍은 안색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고죽노괴…… 너의 죄상으로 보아 네가 구십 둘까지 산 것은 하늘이 무심한 것이었지." 마무쌍은 석상에 기댄채 경악에 찬 눈길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철면신판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철면신판은 마무쌍의 미소에 마음이 기이하게 끌리면서 안정됨을 느꼈다. 정녕 신기하지 않은가? 똑 같은 미소가 어떤 때는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어떤 때는 편안케 만들어 줄 수 있음이…… 마무쌍의 기도는 상상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상처는 별로 대단치 않군……" 마무쌍은 철면신판의 몸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대단치 않다고……?' 철면신판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전신에 십 구개소의 검상을 입었고 삼장을 격중당해 진력을 모을 수 없는 상태일뿐 아니라, 출혈이 심해 눈앞도 잘 안 보이는 상태였다. 웬만한 사람이면 시체가 되어 있을 치명적인 상세인 것이다. 철면신판이 어이없어 할 때 마무쌍은 그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의 삼십육개 대혈을 찍었다. 순간, 철면신판의 온몸이 격렬히 진동되는 것 같더니 전신의 출혈이 멎으며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어…… 어떻게 이런 수법이?" "아직도 내 말을 못믿겠는가?" "아…… 아닙니다. 노선배님!" 철면신판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젠 그도 노선배다. 마무쌍은 잠시 장난끼가 인 것이 사실이 되어가자 괴이한 기분이 되었다. "당신은 내가 노선배로 보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철면신판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노선배님!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한 인영이 크게 외치며 마무쌍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검경천이었다. 그의 혈도는 일각만에 풀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제 알았는가?" 마무쌍이 그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알았습니다! 깨우쳐 주심으로 인해 마왕군림검법은 두 배 이상 강하게 되었습니다!" "알았으면 되었다. 가라!" "예?" "그대가 철면신판에게 무엇을 노렸는지는 모르나 그 정도 소득이면 돌아가도 섭섭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가 마검문주이면서도 양민을 괴롭히지 않은 댓가이다!" 원래 마무쌍은 좀전에 그를 놀리는 듯 하면서 마왕군림검법의 결점을 보완시켜준 것이다. 마검경천은 마검문 최고의 고수였기에 대번에 그것을 깨달아낸 것이다. 그러나 마검경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부는 한 방울의 물도 그냥 신세질 수 없습니다. 길을 알려 주십시오?" "진심인가?" "마검경천이 거짓을 모름은 천하가 압니다!" "그렇다면 네 목숨을 내게 맡길 수 있는가?" 마검경천은 고개를 들었다. 눈(眼), 그의 눈과 마무쌍의 눈이 마주쳤다. "으…… 음……!"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마무쌍의 눈에서 깊은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무쌍과 비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 것이다. "마음대로 하소서!" "좋다! 가서 문을 닫고 명을 기다리라!" 마무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면신판은 지금까지의 일을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마검문이란 문파 하나가 단숨에 한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그것이 마무쌍의 의중대로 되고 있음은 더욱 몰랐다. 집비전에서 전 무림인에 관한 모든 것을 파악한 마무쌍인 것이다. 마무쌍,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존…… 호를 알고자 합니다." 몸을 일으킨 마검경천이 물었다. "마무쌍(魔無雙)!" "마…… 무…… 쌍……?" 모두의 눈에 괴이한 빛이 떠 올랐다. "생각해도 소용없다! 내 나이는 삼백이 아니라 약관이니……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무쌍이란, 마를 지배하는 최강자라는 뜻만은 알아둠이 좋으리라!" 이 얼마나 광오한 외침인가? 자신이 약관임을 밝힌 이 마당에는 더더욱…… "그…… 말 뜻은 마중지존(魔中至尊)이 되고자 한다는 뜻입니까?" 마검경천은 나이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마무쌍은 크게 웃었다. "믿지 못하겠는가?" 그의 웃음을 보고, 그의 눈빛을 보고 항거할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도 없으리라! 마검경천은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믿습니다! 당신만이 마중지존의 자격이 있음을……} 마검사웅이 따라 무릎을 꿇었다. '으으…… 마중지존이라니? 마중지존의 전설이 사실이란 말인가? 저 노선배…… 아니 저 공자가 정년 마중지존의 화신이란 말인가?' 그 광경을 보고 철면신판은 파랗게 질려 식은 땀을 흘려냈다. 마중지존이 출도(出道)하면 천하가 피(血)에 잠기리라! '오오…… 하늘이여!' 철면신판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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