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원소발견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초기 과학에서의 발견은 연구를 계획하는 데 이론이고 뭐고 없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은 세 렌디피티 또는 적어도 유사 세렌디피티였다. 과학자의 선구자격이던 연금술사는 여러 가지 것(거의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이 변환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생각 이 미치는 한 온갖 짓을 시도했다. 그들은 결코 성공은 못했을 지언정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치 성공 한 것처럼 납득시키기 위해 전력했다. 연금술사에게 '원소'란 불, 공기, 흙, 및 물이었다. 현재 우리는 '원소'라고 하는 물질의 근 원적 형태가 100가지 정도 존재하며, 그것들이 우주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흔해빠진 원소도 있고 희귀한 원소도 있다. 약 16키로미터 정도 깊이까지의 지각은 주 로(99.5%) 12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5가지 원소가 91%이상이며, 그것들은 많은 것으로 부터 순차적으로 산소, 규소, 알루미늄, 철, 칼슘 순으로 되어있다. 만일에 해양과 대기를 포 함시킨다면 수소와 질소가 가장 많이 존재하는 원소군에 든다(물에는 수소가 11%, 공기에 는 질소가 76% 함유되어 있다). 역사적인 시대 구분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각기 도구나 기구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 물질에 연관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혼합물)이며 때로 는 다른 금속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동과 주석은 넓은 지역에서 채취도어 양자를 녹여 합 하면 각기 원래의 금속보다도 강한 합금이 된다. 동, 주석, 및 그 합금은 공기나 물에 의해 서 부식되지 않으므로 도구, 무기, 식기나 기타 기구류를 만드는 데에 긴요하게 쓰인다. 놋 쇠는 동과 아연의 합금이며 수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다. 철과 강(스틸, 즉 철과 탄소 및 기 타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일은 어려우며 따라서 최근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풍부하고 폭넓게 존재하는 알루미늄은 반응성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단독으로 분리된 '원소'상태로는 산출되지 않는다. 동이나 은, 금과 달리 알루미늄은 다른 원소와 쉽게 화합 한다. 안정된 금이나 은은 원소상태로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금속에 비해서 그 아름다운 광택이 오래간다. 원소상태로는 산출되기 어려운 원소나 결합상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원 소의 발견은, 가장 존재량이 많은 원소인 산소의 경우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산소. 산소(oxygen)의 발견자로는 영국의 조셉 프리스트리와 스웨덴인 칼 빌헬름 셸레 두 사람이 알려져 있다. 셸레가 프리스트리보다 1년 이상 먼저 산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프르스 트리가 1774년에 실시한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새로운 '공기'라고 명명을 하며 독특한 성질 을 보고할 때까지 셸레는 자기의 실험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리스트리쪽에 더 많은 공로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1733년에 영국 리즈 가까이의 필드헤드에서 태어 났다. 엄격한 칼빈교도의 가정에서 자라,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뿐 아니라 칼빈교로부터도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프리스트리는 1767년 34세로 리즈의 비국교회파 소속의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윌리 엄 피트 내각의 국무대신인 셸 번 백작의 사서인 동시에 문학 동호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리스트리는 빈번하게 런던을 여행했으며 한때 그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나 과학에 대한 관심에 눈을 뜨게 되면서 평생 친구가 되었다. 장난삼아 과학에 손을 댔는데 그 즉시 과학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프리스트리는 훌륭한 관찰력을 갖춘 실험가이기도 했으나 과학 적인 소양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실험에서 찾아낸 결론은 기묘한 것이 많았으며 그러 다보니 때로는 오류도 있었다. 그는 리즈의 양조장 가까이에 살고 있었으며, 그 작업 특히 발효중인 술의 액면 위에 감도 는 기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이름지은 '공기'가 액체 가까이에 가지고 간 나무조각의 불을 끈다거나 큰 통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기체와 연기의 혼합물이 '감돌면서 지면으로 가 라앉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는 이 기체(이산화탄소)가 보통의 공기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집 실험실에서 이 무거운 '공기'를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이것을 녹인 물은 짜릿하고 매우 상쾌한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소다수나 다른 탄산이 들어있는 음료를 맛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프리스트리 는 소다수의 발명으로 1773년에 영국학사원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했다. 이 기체에 관한 실험은 그로 하여금 다른 기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 다. 마침 이 무렵 그는 직경 30센치미터의 커다란 확대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햇볕 의 초점을 모으면 물질을 고온으로 가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공기'즉, 기체를 연구 하는 데 있어서 프리스트리의 신기술은 기체를 수은 위에서 응집하는 장치였다. 밀폐된 유 리용기 속의 액체수은 표면에 물질을 놓고 확대경으로 그것을 가열하여 기체가 생겼을 때 그것은 물에는 녹아도 수은에는 녹지 않기 때문에 수은 위에서 응집할 수가 있었다. 프리스트리가 이 방법으로 가열한 많은 물질 중에는 그가 '수은의 붉은 재'라 부른 산화수 은이 있었다. 이 적색의 고체에 열을 가하자 분해되었으며, 액체 수은 위에 무색의 기체가 만들어졌다. 프리스트리는 이 기체를 촛불로 시험해 보았다. 그가 만든 많은 기체는 대개가 촛불을 껐다. 그가 후에 출판한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이라는 책 속에 이 '공 기'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것은 이 공기 속에서 촛불이 매우 격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는 사실이다...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만일 무언가 다 른 목적에 사용하려던 촛불이 눈앞에 없었더라면 그 실험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빨갛 게 된 나무조각은 그 속에서 불꽃을 튕기고, ...그리고 매우 빨리 타버렸다...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당시로서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의 서문에서 프리스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항의 내용은 나의 저서 중에서 몇 번인가 언급한 그 이상의 진실한 의견이라는 분명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연구를 크게 장려한다는 점에서 몇 번씩 되풀이 해도 지 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 의견이란 바로 과학연구에서는 면밀한 계획과 미리 생각했던 이치 보다도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것, 즉 철학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미지의 원인에 의해 발생 하는 우연한 사건의 관찰 덕이 휠씬 크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 장에서 열거한 실험을 시 작할 때에는 실험을 통해 이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가정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 히 인정하며, 만일 누군가에게 이 실험에 관해서 듣게 되었더라도 나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사실로 인해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라도 매우 늦게, 망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새로운 '공기'속에 있는 쥐가, 같은 부피의 보통 공기에 있는 쥐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자신도 이 새로운 '공기'를 들여마시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 폐로 느낀 바, 그것은 보통 공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어쩐지 한동 안 가슴이 가볍고 편한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순수한 공기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것을 마실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은 두 마리의 쥐와 나 뿐이었 다. 2개월 후, 프리스트리는 이 결과를 저명한 프랑스의 과학자 라보아제에게 알리고 라보아제 는 프리스트리의 일을 되풀이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기체에 관해서 더 연구했다. 그 는 이 기체가 새로운 원소라고 인정하여 1778년에 '산소'라는 이름을 재창했다. 산소란 희랍 어로 '산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라보아제는 모든 산이 산소를 함유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라보아제는 정밀한 저울을 사용해서 화학반응의 출발물과 생성물의 중량 변화를 측정한 최 초의 인물이다. 이 방법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하면 산소가 나오면서 무게가 감소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감소량이 바로 기체의 무게라는 것 등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그 반대의 현상인 금속을 공기중에서 가열하면 공기중에서 거두어 들이는 산소의 분량에 해당하는 양만큼 금 속의 무게가 증가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의 이와 같은 관찰결과는 그 유명한 '질량(물질)보 존의 법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물질은 창조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단지 어떤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뿐이다"(현재 우리는 아인슈타인이나 다른 근대과학자 덕분에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것도 첨가하도록 이 법칙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리스트리에 의한 산소의 발견은 연소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프로지 스톤'설을 장사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죽는 날까지 완고하게 프로지스톤 을 지지했었다. 프로지스톤은 연소의 올바른 설명과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세기에 걸쳐 과학을 지배했었다. 연소는 산소와 다른 물질과의 화합으로써 신비적인 '프로지스톤'과 프리스트리가 그의 새로운 공기에 이름 지은 '탈프로지스톤 공기'와의 화합이 아니다. 근대 과학이 정확한 연소이론과 질량보존의 법칙에서 비롯된다고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 다. 프리스트리는 산소와 관련해서 두 가지 더 우연한 관찰을 했다. 그것은 그의 해석의 능 력을 넘어 섰으나 적어도 그는 충분히 주의하면서 기록했으므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게 되었다. 확대경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해서 기체를 만드는 실험 이전에 프리스트리는 연소와 동물의 호흡, 그리고 식물과의 관계를 관찰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촛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태운 후, 다 써번린 공기중에서 한동안 녹색실물을 기르면 다시 연소된 상태를 보충하여 쥐가 살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즉, 그는 이산화탄소를 취하고 산소를 만들어내는 식물의 호흡을 관찰한 것인데, 이 과정이 이해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두 번째 관찰을 프리스트리는 "나의 예상 외의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실험에 사용한 병 의 벽면에 생긴 '녹색물질'에 햇빛을 쬐면 기체가 발생한다는 관찰이었다. 그는 이 기체가 산화수은을 가열했을 때에 발생했던 기체와 같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기가 '광합성'에 의 한 산소의 생성을 최초로 관찰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과정은 태양에 의 해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화합시켜서 유기물질(프리스트리의 녹색물질)과 산소를 생성하는 것으로, 이 광합성 없이 생명은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 (해설) 프리스트리는 종교와 정치 양면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설교에서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로도 발표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단히 곤란을 겪었 다. 종교상 이단이라는 고발뿐이라면 어떻게든 빠져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던 것이다. 특히 마국의 독립에 강력하게 동정을 했기 때문에 폭도에 의해서 버밍햄의 그의 교회와 집은 불태워지고 말았 다. 프리스트리는 가족을 런던으로 이사 시킨 후 3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결국 1794년에 미 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뉴욕으로 간 그는 클린턴 지사와 다른 고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신학자, 과학자,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명성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갓 탄생한 식민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니테리언 교회는 성직자의 지위를,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화학교수 직을 그에게 주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대학의 설립에 대해 그에게 상의해 왔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그 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는 목사와 교수직을 거절하고 펜실바니아 중부의 개척지 노덤버랜드에서 조용한 은거생활 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원생활과 그를 위해 마련된 연구실에서 실험 삼매로 보냈다. 그는 결단코 프론지스톤설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혹시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갖고 있긴 했다. 그는 친구인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1804년에 세 상을 하직했다. 라보아제의 빛나는 생애는 유감스럽게도 프리스트리가 미국으로 건너간 같 은 해에 파리의 기로틴(단두대)에서 종말을 고했다. 그는 과학자인 동시에 귀족지배계급을 위한 징세 청부인이었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반 혁명주의자에게 박해당했으므로 프랑스인도 영국인도 이들 위대한 두 과학자를 생애 절정시 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영예를 칭송하게 된 것은 모두 사후의 일이었다. 요오드. 요오드(iodine)는 화학적으로는 염소에 가까운 원소이다. 소독약으로 사용되어 온 옥 도정기는 이 요오드를 알콜에 녹인 것이다. 버나드 크르토와는 우연히 이 요오드를 발견하 였다. 크르토와는 화학자 교육을 받고 파리의 공과대학에서 수년간 연구했으나 1804년 부친 의 뒤를 이어받기로 하고 초석 공장을 파리 가까이에 건설했다. 나폴레옹이 탄약을 만드는 데에 초석(질산칼륨)을 필요로 했으므로 그의 사업은 번성했다. 질산의 칼륨성분은 보통 목 탄에서 취하며 질산성분은 식물을 썩혀서 만들었다. 크르토와는 보다 값싼 칼륨원을 찾아 헤메다가 프랑스의 대서양에 밀려 올려진 해조 속에 이것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조의 재에서 칼륨을 추출할 때 사용하는 탱크에는 찌꺼기가 고이므로 이따금 산으로 씻어야 했다. 1811년 어느 날, 탱크를 씻는데 평상시보다 진한 산을 사용했더니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탱크에서 보라색 연기가 나면서 그 연기가 탱크의 차가운 면에 닿아서 검은 금속 광택의 결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매우 진기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좀더 잘 조사하기 위해 이 기묘한 결정을 조금 모았다. 그는 이것이 산소하고는 화합되지 않으나 수소와 인하고는 화합된다는 것과, 암모니아와 결 합시 폭발성 화합물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업이 분주했으며 또한 실험설비도 없어서 크르토와는 이 새로운 물질에 관해서 그 이상 연구하지 못하고 파리의 공과대학에 있는 두 사람의 친구 데조름과 크레망에게 연구를 인계 했다. 두 사람의 연구자는 1813년 12월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 해조에서 얻은 흥미로운 새로 운 물질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때 우연히 험프리 데이비 경이 파리에 있었으므로 클레망은 이 불가사의한 물질을 데이비 에게 조금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매우 유명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게이 루삭이 그것 을 듣고 어쩌면 중요한 발견을 영국인이 먼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크크토와에게 가서 결정샘플을 얻어갔다. 게이 루삭은 서둘러 연구에 열중한 결과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 게 되었고, 희랍어로 보라빛을 뜻하는 이오드(iode)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데이비도 새로운 원소의 발견을 확인하여 이미 그 전에 명명되어 과학적으로 연관이 가까운 염소와 어미를 합해서 요오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해조 속에 들어있는 요오드의 발견을 이해하는 데는 바닷물이 염화나트륨 이외에 다른 성분 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들 속에는 매우 소량이기는 하지만 요오 드화나트륨과 요오드화칼륨이 함유되어 있다. 요오드화물의 소금은 생화학적 과정에 의해 해조 속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에 해조가 태워지면 더욱 농축된다. 크르토와가 탱크의 세정 에 사용했던 산이 옥화물의 소금을 원소상 요오드로 변환시키고 산과의 반응열에 의해 보라 빛 증기가 되었으며, 증기가 차가운 표면에 닿자 직접결정이 되어 응축했던 것이다. 1813년 이 새로운 원소의 발견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하게 응용되기도 하였다. 1820년 제네바의 외과의사 장 프랑소와 코인데는 해조에서 채 취한 요오드를 갑상선종의 치료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갑상선종은 음식 물 중의 요오드의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병으로서, 갑상선 호르몬(티록신)의 생합성은 요오 드를 필요로 한다. 갑상성 호르몬은 생체 내의 많은 화학반응의 속도를 제어하며, 일반적으 로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체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식물 중에 요오드가 결핍되면 다량의 갑상선 호르몬을 만들기 위해 갑상선이 확대되면서 보 충하려고 한다. 이 갑상선의 확대를 갑상선종이라고 부른다. 갑상선종은 해안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드문데, 그 이유는 해산물에서 요오드를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 에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갑상선종을 예방하기 위해 보통의 소금(염화나트륨)에 요오드화 나트륨을 소량 첨가하는 일은 현재 일반화 되어있다. 헬륨 및 기타 희귀가스. 헬륨이 발견된 곳은 지구상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태양에서다. 이 발 견은 인류의 우주비행보다 휠씬 이전인 1868년으로 그것은 우연이었다. 1859년 하이델베르 크대학에서 화학자 빌헬름 분젠과 물리학자 로버트 키르호프 이 두 사람의 독일 과학자가 분광기라는 광학장치를 발명했다. 이 장치는 원소를 백열로 가열했을 때 발생하는 밝은 선 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장치를 사용해서 그들은 주기표의 '나트륨족'의 두 가지 새로운 원소인 세슘(cesium)과 루비듐(rubidium)을 1860년과 1861년에 밝혀냈다. 프랑스 무돈에 있는 천체물리학관측소 소장 피에르 옌센은 1868년 8월 18일 인도로 가서 일 식을 관측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그해 10월, 런던의 왕립과학대학의 천체물리학 교수 J. 노 먼 록카는 특수한 망원경을 사용함으로써 일식 때가 아니더라도 태양 주의에서 빛을 발하는 가스인 스펙트라를 관측하여 이것을 측정, 기록했다. 또한 그는 태양에서 분출되는 막대한 양의 기체 중에서 수소로 보이는 스펙트럼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나트륨의 특징으로 알려진 2개의 황색선도 보였으나 그 이외에 그동안 알려진 어느 원소에도 해당되지 않는 3번째의 황색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스펙트라가 태양을 에워싼 기체중에는 존재하지만 지구상 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원소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것을 관측한 날인 1868년 10월 20일, 이 발견을 왕립학회에 전했다. 3일 후 와렌 드 라 루는 록카의 발견 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보고했다. 한편 옌센은 8월 18일 인도에서 기록한 스펙트라를 연구하여 같은 새로운 황색 선을 발견하 여 10월 20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으나, 록카의 편지가 드 라 루에 의해 서 전해진 것보다 불과 몇 분 늦게 전해졌다. 관측은 옌센이 빨랐고 발표는 록카가 빨랐다. 이것 때문에 영예의 선취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천문학자는 서로 선취권 을 주장하지 않고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두 사람의 옆얼굴과 이 름을 함께 새긴 기념메달을 만들었다. 록카는 맨체스터대학의 화학교수인 프랑크랜드의 도움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새로운 스 펙트럼선이 새로운 원소에 속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서 희랍어로 태양을 뜻하는 헤리오스 (helios)에 연유시켜(helium)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지구상에서의 헬륨 탐색이 시작되었으 나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한 채 23년이 지났다. 1891년 미국 지질조사소의 W.H. 힐레브랜 드는 우라늄 광석을 가열할 때 발생하는 기체의 스펙트럼을 관측했다. 기체는 거의가 질소 였으나 스펙트럼 중 몇 개의 선은 질소의 성질이 아니었다. 런던의 윌리엄 렘지 경은 힐레 브랜드의 보고서를 읽고 이 미지의 스펙트라선은 그와 레일리 경이 1년 전에 공기 중에서 발견한 진귀한 불활성 기체상인 원소 아르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다른 형의 우라늄 광 을 입수하여 힐레브랜드가 했던 것과 같이 처리해 보았더니 예상했던 대로 아르곤이 발견되 었다. 그리고 질소에도 아르곤에도 없는 또다른 황색의 스펙트럼선이 관측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 선이 불활성 기체 크립톤(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에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것을 아르곤과 관련이 있는 또다른 불활성 기체로 생각했다. 그러나 좀더 정 확한 스펙트럼 사진의 측정을 부탁하려고 이 기체의 샘플을 록카와 윌리엄 크록스 경에게 보냈더니 두 사람 모두 이 황색선의 파장이 태양 대기 중에 헬륨과 똑같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렘지는 1895년 3월 26일 영국의 학사원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양쪽에 지구상에 서의 헬륨 발견에 관해서 편지를 보냈다. 윌리엄 렘지 경은 아르곤과 헬륨(지구상에서)등 기 타 희귀가스의 발견으로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895년부터 1898년에 걸쳐서 크립톤, 제논, 네온을 발견하여 헬륨의 동족들로 주기율표의 제로족(새로운 정의로는 18족) 의 행을 메웠던 것이다. 원소가 원자번호와 순환적(주기적)인 유사성에 의해서 배치되어 있는 주기율표에서 제로족 의 행은 희귀한 가스원소에 해당된다. 원소의 주기율표를 고안한 주된 공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인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게 돌아갔다. 이 전에 제로족의 원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되지 않으며, 결합력 즉, 원자가가 제로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이들 원소도 쉽지는 않지 만 다른 원소와 결합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헬륨은 그야말로 '희귀한' 가스였으나 1905년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세 렌디피티의 등장이다. 미국 캔자스 주 덱스터 가까이에 있는 천연가스를 증기발생기의 연료 로 쓰기 위해 분출구에 두껑을 덮고 파이프로 운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스는 연소되 지 않았다. 캔자스태학의 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그 가스는 주로 질소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약 2%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텍사스 주, 뉴멕시코 주, 유타 주 및 캐나다의 몇 개 주에 있는 많은 분출구에서 산출되는 가스가 소량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헬륨의 주요 산출지는 텍사스 주 애머릴로의 가까이에 있다. 헬륨 함량은 약 1.8%로 낮지만 이 지방의 가스량은 매우 많아 세계의 헬륨 주요 공급원으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해설) 금세기 초엽부터 독일은 공기보다 가볍고 단단한 배를 개발하여 이를 설계한 페르디 난드 폰 제펠린 백작의 이름을 따서 제펠린이라고 불렀다. 이들 비행선의 부양력은 수소에 의한 것이었다. 이 비행선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정찰과 폭격용으로 사용되었으며 1930년 대에는 상업 승객 수송에 사용되었다. 비행선의 수소 사용은 1936년 미국 뉴저지 주 레이크 허스트에 착륙하려던 힌덴부르크호의 대화재로 인해 막을 내렸다. 이 사고는 대기의 전류가 방전되어 수소에 점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6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고는 상업 항공 사상 최초의 재난사고였다. 이와 유사한 비행선이 후에 독일에서 설계되어 헬륨으로 운행하도록 개량되었다. 그러나 국 제정세의 긴장 때문에 헬륨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은 헬륨의 수출을 거절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연식 소형 비행선을 대잠수함용과 연안 순시용으로 사용했으며, 이 부양력은 전부 헬륨에 의한 것이었다. 헬륨의 부양력은 수소의 93%로 다소 약하지만 헬 륨자체는 스스로 타거나 연소를 돕지 않으므로 화재의 위험은 전혀 없다. 공기보다 무거운 현대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여객수송용으로서 공기보다 가벼운 탈 것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 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축구경기장의 공중에 떠있는, TV카메라의 훌륭한 촬영기지로 마련 된 연식소형 비행선을 올려다 볼 때마다 태양에서 또 이후에 지구상에서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된 진귀한 원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