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 13 장 신복(神卜) 강호천하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것은 두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무자천서가 단궁비의 손에 들어갔다. -열화신군 염사가 목숨을 잃었다. 단궁비가 누구야?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이다. 금시초문의 인물이 무자천서를 소유했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원에서 단궁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하간 단궁비가 무자천서를 지녔다는 소문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불과 한 달 만에 단궁비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그는 세인들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무자천서에 욕망을 품은 인물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단궁비에 대한 단서를 수집했다. 그 결과 그가 세외이대천의 하나였다가 의문의 멸망을 당한 일해무룡의 소문주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열화신군 염사가 하루밤새 시체로 변했다는 소문은 초강풍으로 무림을 강타했다. 전 무림이 들끓었다. 누가 구천의 일좌(一座)인 그를 죽일 수 있었을까? 범인은 무슨 이유로 열화신군을 살해한 것일까? 열화신군 염사가 중원무림의 배반자라는 소문이 은밀히 떠돈 것은 염사의 죽음이 공포된 그 다음 날이었다. 염사는 천 년 전 백만마종주 나백의 후인으로 현재 수면 밑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비밀 세력의 주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아울러 염사를 죽인 인물도 발표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단궁비였다. 중인들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젊은 영웅이 탄생한 것인가? ---창해일룡(蒼海一龍)! 푸른 바다에서 솟구친 한 마리 용! {{ 血王破(혈왕파) 2권 }}창해일룡이라는 명호가 단궁비의 이름 앞에 붙고 모든 사람들이 창해일룡을 화제로 삼을 때 중원 무림의 암저에 흐르던 고름이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천향루였다. 천향루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천향루에서 무림인들을 중독 시킨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아울러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원 무림의 핵심인 구파일방(九派一 )에서 제자들을 파견해 천향루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는 소문 역시 난무했다. 나머지 한 가지는 저 멀리 중원의 변방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무림사 이후 언제나 중원무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변방무림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파죽지세로 변방 무림을 일통하는 바 그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포악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애꾸에 그 무공도 무섭게 패도적이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호는 알려졌다. 사율(死律), 죽음의 율법! 그 휘하에 모인 변방무림의 기세는 욱일승천이라는 것이다. 기억하는가? 전설의 시구! ---흑풍(黑風)은 만마(萬魔)를 제압한다. 만마, 전설의 만마는 사율을 상징하고 있었다. 중원인이 모르는 가운데 운명은 천하 곳곳에서 봉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사건들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대륙 전체를 강타하며 천하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예민한 사람들은 벌써 그 징후를 알고 있었다. 엄청난 피와 죽음과 멸망을 부를 무림의 암운을! 그들은 오직 이제 한껏 발아한 악마의 촉수(觸手)가 그들을 피해 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 * * 하늘 아래 무엇이 그의 이목을 벗어날 것인가? 좌시천리(坐視千里), 직시만리(直視萬里)라!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는 만 리를 본다. 강호의 대소사,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수를 찾으려면 그에게 가라! 그가 당신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 줄 것이다. 천문세가(天門世家). 점성학(占星學)과 천복술(天福術)의 제일인자! 천문세가는 단맥으로만 이어져 천 년을 이어왔다. 당대 천문세가의 가주는 능곡자(凌谷者)였다. 그는 천 년 천문세가가 배출한 최고의 점성술사였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는 몇 년 전 가솔들을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한 후 그 자신도 은거하고 말았다. 험한 산의 중턱에 누군가 터를 닦고 삼 층 석탑을 세워 놓았다. 그 석탑의 옆에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가 하나 우뚝 서 있었다. 끼리릭! 폐가의 문이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며 열렸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휜 노인이 폐가에서 나왔다. 비록 육신은 피폐했으나 정신적인 수양은 대단한 듯 노인의 두 눈에서는 전광이 형형이 뿜어졌다. 노인은 손에 든 작은 깃발을 석탑에 걸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것은 홍색의 작은 깃발. 깃발엔 아무 표식도 없었다. 노인은 잠시 그 깃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년의 영화를 보았으니 무에 부족할 것이 있겠냐만… 그것이 오히려 악업이라. 영웅의 말로를 재촉할 요물임에도 불구하고, 천기를 알려줄 수밖에 없음은 이 또한 하늘의 뜻!" 이때 옷자락이 스치는 파공음이 일며 한 여인이 허공에서 날렵하게 떨어져 내렸다. 태양도 빛을 잃을 천하절색의 미소녀는 놀랍게도 천향루의 청미였다. 노인은 짐작하고 있었는지 파공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능곡자인가요?" 능곡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청풍이 상당(上堂)에 깃들고 봉의 정령이 심(心)에 깃들기를 원하는도다. 그러나 악신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으니 그 일생이 평탄치 만은 않을 터! 사내를 쫓는구나!" 청미는 잠시 멍하니 능곡자를 바라보았다. 현기가 내포된 말이었으니 일시지간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청미는 능곡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한 사람의 행방을 알고싶어요." 능곡자의 두 눈이 돌연 형형한 빛을 뿜었다. "정(正)이냐 사(邪)냐!" 청미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능곡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노부는 네가 이미 천향루의 여인임을 알고 있다. 넌 정을 찾는 게냐 아니면 사를 찾는 게냐?" 청미의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정말 할아버지의 능력은 하늘에 닿은 것 같군요. 제가 찾는 사람의 진실한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정의 인물을 찾는군! 진흙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연꽃을 피우려는 고운 심성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의 뜻을 하늘이 헤아려 줄지는 모르는 것!" 청미는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단궁비란 분의 행방입니다." 능곡자는 천천히 돌아섰다. "노부 너의 청을 들어줄 수 없노라!"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듯 청미는 능곡자 앞에 한 가지 물건을 불쑥 디밀었다. 그녀가 내민 물건을 본 능곡자의 두 눈에서 시퍼런 빛이 번뜩였다. "황금천향패(黃金天香牌)!" 황금천향패! 천향루에서 당주 이상급의 인물들만이 지닐 수 있는 신패다. 능곡자가 그런 것을 모를 리 없다. "고연지고. 천향루로 나를 위협하려는 게냐?" 청미가 고개를 저었다. 황금천향패가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신패를 부심은 곧 그 문파에서 스스로 떠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 능곡자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허허!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연후 그는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단궁비란 놈! 얼굴이 반반하다고 도처에 정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니 훗날 정의 사슬에 얽매여 고생 깨나 할 것이다. 그러나 장차 놈의 후손들이 이 중원을 떠받들 기둥이 될 것이니 그것도 하늘이 정한 인연! 들어가자!" 청미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말투는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말하는 것이 아닌가! '됐어!' 청미는 단궁비를 떠올리자 또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 * 중원의 제일 거부는 누구인가? 만금장(萬金莊). 흑금벌(黑金筏). 이 두 곳이 중원의 상권을 양분하고 있었다. 만금장의 수입원이 양지(陽地)라면 흑금벌의 수입원은 주로 음지(陰地)였다. 그리고 이 두 세력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는 오직 신(神)만이 알고 있었다. 만금장주(萬金莊主) 황충산(黃忠山)은 천하 상권의 삼분의 일을 움켜쥔 중원의 거상이었다. 흑금벌주(黑金筏主), 그는 지하 상권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흑금벌이 취급치 않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흑금벌주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풍문에 의하면 만금장주 황충산과 흑금벌주가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것이다. 만금장주 황충산의 거처는 고도 낙양의 중심가에 있었다. 지금 황충산은 자신의 거처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이 오십에 천하를 석권한 제일의 거상! 그는 중원의 상권만이 아니라 천산북로를 통해 서역과도 교역을 하고 있었다. 먼 여정이니만치 취급하는 품목의 종류도 엄청났고, 한 번 교역이 성사될 때마다 황금산의 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금 그가 살피는 물건들은 이번에 서역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유리공예의 명품들이었다. 아마 북경의 고관대작이나, 황실의 군왕들과 거래를 트면 막대한 이득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음?" 유리공예품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다른 철궤를 연 황충산의 눈빛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이것은 각경(角莖)이 아닌가?" 커다란 철궤에서 꺼내 든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 살피던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흉측한 물건이로세." 거무티티한 묵빛의 길쭉한 물건, 그것은 짐승의 뿔을 정교하게 깎아서 만든 남근(男根)이었다. 표면은 흡사 실물같이 힘줄이 툭툭 불거져 울퉁불퉁 양각되어 있었다. 그러나 손으로 만져지는 느낌은 무척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탱탱한 고무처럼 탄력과 유연성도 있었다. "만년교룡의 척추뼈로 만들었군!" 이러한 탄력과 유연성을 가진 뼈는 만년교룡의 척추뼈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뼈로 만든 이 각경은 최상품으로 여겨 적어도 은자 일천 냥의 값어치는 있었다. 은화 열 냥이면 네 사람이 한 달은 호의호식할 수 있는 액수. 세상에는 돈은 많으나 자신의 욕구를 주체치 못하는 골빈 인간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각경은 바로 그런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될 것이다. 황충산은 철궤 속으로 각경을 도로 집어넣었다. 각경은 이화대부인(二花大夫人)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녀는 만금장으로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주요 고객이었다. 물론 이렇게 은밀히 이런 물건을 부탁할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는 또 다른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십면체(十面體)로 이루어진 청옥패(靑玉佩)였다. "천년한옥(千年寒玉)으로 만들어진 행기옥패명(行氣玉佩銘)!" 모두 마흔 다섯 자로 이루어진 도인행법(道人行法)을 음각(陰刻)시켜 놓은 것이 바로 행기옥패명이었다. 천년한옥은 열기를 막아 주는 공능이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휴대품이었다. 이 옥패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만들어진 매우 귀한 기보였다. "이것도 최소한 수천 냥은 호가하겠군!" 이때 문 밖에서 총관 막세기(莫世基)의 음성이 들렸다. "장주님, 막총관입니다." 황충산은 물건 살피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문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귀빈께서 오셨습니다." "귀빈?" 황충산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총관인 막세기는 좀처럼 귀빈이라는 표현을 사용치 않는다. 설령 북경에서 고관대작이 방문해도 손님이라고 표현하는 인물이 막세기였다. "누구라 하더냐?" "이름이 단궁비라 합니다." "단궁비?" 황충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중원에 나도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 무자천서를 얻은 인물, 구천의 하나인 염사를 제거한 청년 협사! "창해일룡이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을 귀빈이라 칭한 이유는 그분께서 묵죽패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황충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에 그는 벌써 대청을 벗어나고 있었다. 묵죽패, 그것은 불패괴옹이 단궁비에게 준 신물이었다. 그런데 묵죽패가 무엇이기에 천하의 황충산이 놀라 뛰쳐나가는 것일까? * * * 대청으로 들어선 황충산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서역의 진기한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진열장을 바라보는 청년의 모습! 세상에 저렇게 멋진 인물이 있단 말인가? 황충산은 시선을 접었다. 외모에 현혹 당할 나이는 이미 지난 것이다. 그가 보는 것은 상대의 기품과 품성이다. 아울러 관상을 살피는 것 역시 필수다. 최고였다. 외모나 관상이나, 심지어는 그가 지닌 무공도 최상급일 것 같았다. '창해일룡 단궁비. 정녕 인물이구나!' 인기척을 느낀 단궁비는 천천히 돌아섰다. 황충산을 본 단궁비 역시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산을 본다고 할까? 중원 상권의 삼할을 쥐고, 서역과의 교역을 독차지하고 있는 거인의 웅자는 그렇게 대단했던 것이다. 황충산은 느긋한 걸음으로 단궁비를 향해 다가갔다. "묵죽패를 지닌 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노부에게 신패를 보여 줄 수 있는지요!" 단궁비는 품 속에서 묵죽패를 꺼냈다. 잠시 묵죽패를 응시하던 황충산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비각 이십팔(二十八)대 제자 황충산이 총령(總領)을 뵙습니다." 신비각의 총령! 그건 불패괴옹이 아닌가? 단궁비는 당황했다. 신비각에 대해서는 염사에게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묵죽패 하나가 황충산을 부복케 할 위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단궁비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황충산은 여전히 부복한 자세로 신비각과 그 외 여타 제반사항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신비각의 정체를 알게 된 단궁비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신비각은 말 그대로 천하였던 것이다. 묵죽패가 신비각 총령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물(神物)일 줄이야! 불패괴옹에게 묵죽패를 받을 때는 이런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위력이 있는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황대인도 알다시피 이 묵죽패는 소생의 물건이 아니외다. 그러니 황대인이 나를 총령이라 칭하는 것도 잘못이고, 이렇게 예를 취함도 잘못이오. 어서 일어서시오!" 그러나 황충산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자에게는 총령의 신패 또한 총령의 존체나 마찬가집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재차 입을 떼었다. "그리고 총령께서 묵죽패를 단공자께 양위하신 건 그분의 모든 직위도 물려주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궁비는 어이가 없었다. 불패괴옹의 뜻은 알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을 만들어 놓았을 줄이야. "심하다고 생각지 않소?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당신들의 꼭두각시놀음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오!" 황충산이 번쩍 고개를 들어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말씀에 어폐가 있습니다. 신비각은 중원 무림의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마야가 천하를 지배하든 말든 우리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각이 목숨을 걸고 그들과 대결함은 오직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단궁비는 씩 웃었다. '뛰어난 인물이군! 신비각이 명성을 날리는 게 우연이 아냐!' 단궁비는 황충산을 떠본 것이다. 그는 일해무룡의 소궁주로 바닷가를 오가는 수많은 상선들을 보아 왔다. 상인은 신용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결국 이문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막대한 이문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혈육조차 외면하는 냉혈인들이다. 황충산은 중원 제일의 거상이니만큼 신비각을 돕는 데 어떤 내막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궁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궁비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자 황충산이 결단을 내렸다. "막세기! 단공자께 만금장의 위력을 보여 드려라!" 장장 두 시진, 만금장의 곳곳을 둘러본 단궁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가 황충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표현이 합당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자 황충산이 웃으며 물었다. "어떠십니까?" 단궁비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황충산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소신이 이렇게 처음 보는 단공자께 부복해 요청하는 것은 공자에게 특별한 힘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단정하건대 현재 신비각이 처해 있는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공자 뿐입니다." 황충산은 단궁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 저를 의심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저는 상인입니다. 공자께서 신비각을 외면하면 저는 만금장의 모든 힘을 이끌고 혈궁의 마야에게 투신할 것입니다." "!" "소신의 자랑이 아니라, 만금장이 마야에 투신하면 천하무림은 불과 삼 일 만에 마야의 수중에 들게 될 것입니다." 단궁비는 쓰게 웃었다. "별 수 없군! 그대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그런데 한 가지 물을 게 있어. 신비각의 젊은 문주는… 미녀인가?" 황충산은 씨익 웃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장담하건대 만일 공자께서 주약란 문주의 치마폭을 벗어날 수 있다면 소신 전 재산을 총령께 쾌척하겠습니다." 어쭈? 가소롭다. 나를 어떻게 알고? 색마신의 색색지색공을 익힌 이후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주약란의 치마폭을 벗어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단궁비는 지필묵을 불쑥 내밀었다. "써! 아울러 공증도 받자고!" 두두두두두-! 한 대의 사두마차(四頭馬車)가 만금장을 황급히 빠져 나왔다. 눈처럼 새하얀 백설총(白雪 )이 이끄는 화려한 마차였다. 사두마차는 자욱한 흙먼지를 날리며 순식간에 동남쪽으로 사라져갔다. 황충산이 단궁비를 불패괴옹에게 안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귀영처럼 등장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현기가 감도는 검은 문사복을 입은 노인과 가공할 마기를 뿜는 회의를 입은 열 명의 삼십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안색은 모두 시체처럼 창백했고 두 눈에서는 음산한 전광이 끊임없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백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음침한 안색에 풍기는 기도는 일류고수 이상이었다. 마뇌 제갈사는 손에 든 섭선을 부드럽게 부치며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친구! 혈궁과 대적하면 파멸이라고 그렇게 누누이 일렀거늘…! 자네는 최악의 선택을 했군! 혈궁십사(血宮十邪)!" 제갈사가 부르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열 명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부복했다. "하명하소서!" "호남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낙안애(落雁厓)란 절벽이 있다. 그곳에서 결정을 지어라!" "카카카! 염려 마십시오. 우리 혈궁십사가 나선 이상 단궁비와 황충산은 범 아가리에 든 고깃덩이에 불과합니다." 제갈사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아득한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혈궁십사---!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한 번도 중원에서 활약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마야가 십 년 폐관에 들 때 같이 선발된 기재들로 혈궁의 십대비전 절기 중 다섯 가지 이상을 극성의 경지에 이르도록 수련한 인물임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단궁비를 사냥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중원무림에 등장한 것이다. 혈궁십사의 창백한 얼굴에 사이한 미소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섬뜩한 죽음의 미소였다. "카카카카! 가자." 이윽고 혈궁십사를 선두로 수백 명이 사두마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 * 서역의 풍물 중에 으뜸이 무어냐고 단궁비가 물었다. 황충산은 되묻기를, 인생의 쾌락을 묻는가,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보조하는 도구들을 말하는가, 아니면 살상무기에 관해 듣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단궁비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쾌락!" "카하하핫! 그렇습니까? 솔직하군요!" "사실 속마음을 감추는 데 익숙하지 않아. 내가 보고 자란 건 거대한 바다였고, 바다는 늘 있는 그대로를 내게 보여주었거든! 속이는 건 인간 이외에는 없었지!" "쾌락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쾌락을 원하십니까?" 단궁비는 확 황충산을 째려보았다.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해? 알잖아?" "백마(白馬)?" "백마가 뭔데?" "하얀 말이란 뜻입니다. 우리 상단의 인물들은 서역 여자를 그렇게 말하죠!" 그 말을 듣자 단궁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일해무룡은 동남해 뱃길의 중심이다. 예전에 서역을 오가는 배가 태풍을 피해 일해무룡에 정박한 적이 있었다. 서역 여인을 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여인들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겼었다. 푸른 눈에 칼날같이 선 코, 밀가루처럼 흰 피부. 그런 그녀들을 보며 저들도 사람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하하하핫!" 황충산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좋소이다. 흥미가 있으신 모양인데 제가 설명해 드리죠." 음담패설, 그건 어딜 가나 사내들의 공통된 관심사인 모양이다. 단궁비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황충산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황충산의 설명이 워낙 기기묘묘해 그 말을 듣는 단궁비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는 데 있다. 설명을 마친 황충산이 묘한 눈으로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한 번 직접 보시겠습니까?" "엉? 지금 이곳에 있단 말이야?" 되묻는 단궁비의 입가에는 벌써 침이 질질 흐르니 타고난 바람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있습죠." 황충산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끼기기긱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단궁비는 경악한 얼굴로 눈 앞의 사태를 바라보았다. 진정 묘한 일이었다. 이 작은 마차가 일순간에 거대하게 변한 게 그랬다. 처음의 크기에 비해 다섯 배는 거대해진 것이다. "신기한데?" "후후! 속하는 우연히 제갈공명이 사용했던 특이한 물건들의 설계도를 입수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신비한 마차에 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설계도를 가지고 서역에 가 비밀리에 한 대의 마차를 제작했습니다. 마차가 완성되었을 때 전 이 마차에 대륙풍(大陸風)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대륙을 누비는 바람! "이름이 멋지군!"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대륙풍은 철옹성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는 마차입니다. 아울러 이 마차에는 지금 열 다섯 명이 타고 있습니다." "알았어. 그런데 뭐야? 고작 이 마차를 보여주려던 거야?" 황충산은 다시 한 번 껄껄껄 웃었다. 그가 손뼉을 치자 마차의 벽면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금발의 푸른 눈의 이국여인을 본 순간 단궁비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크카카카! 그래 이거야. 이게 여행의 재미가 아니겠어?" 황충산의 처음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대륙풍의 신비한 점을 보여주고 아울러 대륙풍에 비밀리에 설치된 각종 암기와 화탄의 사용법에 대해 가르쳐 주려던 것이었는데, 일단 여자를 본 단궁비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에는 어떤 설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멀고 귀멀어 버린 것이다. 쪽쪽 입술을 빠는 소리! 훌렁훌렁! 옷을 집어던지는 소리! "아흐흥!" 이역 여인의 기묘한 콧소리! 황충산은 눈을 감고 말았다. 마치 미친 말이 날뛰듯 대륙풍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단궁비를 보며 문득 황충산은 오싹한 공포를 느낀 것이다. '총령이 여자만 보면 저리 미치는 걸 보니… 아니지, 저 계집들이 총령에게 완전히 뒤집어지는 걸 보니… 만일 주약란 문주가 저 녀석의 포악함에 그대로 함몰되고 나면…!' 나면? 쪽박을 차는 게 아닌가? 황충산은 귀를 막았다. "안돼. 저런 색마에게 만금장을 물려주면 일 년 안에 거덜나고 말 거야!" * * * 대륙풍은 호남성(湖南省)을 향해 일로 질주했다. 누런 황진이 대륙풍의 꼬리에서 일어나 관도를 자욱하게 덮었다. 장안성을 떠난 지 닷새가 흘렀을 때 저 멀리 기암괴봉(奇巖怪峯)의 구의산(九疑山)이 보였다. 사위는 달리는 말발굽 소리만 지축을 뒤흔들 뿐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륙풍은 무서운 속도로 낙안애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단궁비의 나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황충산! 백장(百丈) 밖에 수백 명이 십면매복(十面埋伏)을 펼치고 있다." 황충산이 행동을 멈췄다. '십면매복이라면 한나라 한신이 항우의 군사를 섬멸하기 위해 펼쳤다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이다.' 황충산은 급히 내력을 돋궈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놀라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백 장 밖의 매복을 감지할 정도면 무공이 입신조화지경(入神造化之境)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달리는 마차의 굉음 속에서 적의 매복을 감지해 낸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패괴옹이 총령직을 맡겼을 때 알아봤지만 역시 인물은 인물이었다. '신비각에 서광이 비추고 있다. 혈궁, 너희들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정도 더 전진하자 황충산에게도 은신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황충산은 막세기에게 명을 내렸다. "적이 매복하고 있다. 이 기회에 대륙풍의 위력을 보여주도록. 혈궁의 놈들이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막세기가 명을 받고 물러났다. 끼리리리릭! 괴이한 소음이 연이어 울리며 마차의 사방에서 조그만 창문이 열렸다. "비익환(飛翊幻)을 준비하라!" 비익환, 훗날 혈궁의 인물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불린 이 신비한 암기가 첫 선을 보이는 것이다. 비익환은 특별히 제련한 비도에 천잠사를 연결한 암기로 절정의 고수가 내가진력으로 투척하는 암기였다. 일반 암기와 달리 한 번 투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투척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암기였다. 낙안애. 수백 길에 달하는 거대한 절벽이 십여 리에 늘어선 장관, 또 낙안애는 삼 개 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혈궁십사는 세 군데에 매복하고 있었다. 일대(一隊)는 광서성(廣西省)으로 통하는 관문인 흥안현(興安縣)에서 동정호로 흘러드는 상강(湘江)을 낀 남쪽에 매복했다. 이대(二隊)는 안휘성으로 이어진 벼랑을 끼고 매복하고 있었다. 삼대(三隊)는 멀리 광동성으로 향하는 남로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열 군데 매복해 각자 비장의 무기를 꼬나들고 대륙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땅이 거세게 진동했다. 지축이 울릴 정도로 대륙풍이 달려오건만 매복한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개입니다." 막세기가 보고했다. 황충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은 십면매복진에 다른 진을 배합해 펼쳤을 것이다. 즉 눈 앞의 이 안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십면매복을 펼친 자들이 누군지 알겠군. 막세기, 조심해라. 혈궁의 정예인 혈궁십사가 나선 것이다. 대륙풍의 속도를 최저로 늦춰라!" "예?" 안개지역을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는 게 유리하다. 그런데 황충산은 오히려 속도를 늦추라는 것이다. "오늘 이곳에서 십면매복을 펼친 혈궁십사를 단 하나도 살려 두지 않겠단 뜻이다." "존명!" 막세기가 예를 취하고 물러섰다. 그러자 단궁비가 명했다. "창문을 열지!" "위험합니다!" "상관없어!" 황충산은 별 수 없이 대륙풍의 창문을 열었다. 안개는 지독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독을 품었는지 은은히 누런 색을 띠고 있었다. "말들이 위험하겠군!" 단궁비의 말에 황충산은 빙긋이 웃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해독제를 미리 복용시켰습니다." 설명을 하던 황충산이 돌연 비릿하게 웃었다. 누런 안개를 양단하며 날아드는 열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의 신법은 유령처럼 은밀했지만 황충산의 이목을 벗어나진 못했던 것이다. "죽음을 찾는 불나방들! 비익환!" 황충산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쇄액 소리가 울렸다. 대륙풍의 측현에서 무언가 발출된 것이다. 콰우우---! 안개를 찢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대륙풍을 노리고 날아들던 선두에 선 인물이 한순간 멈칫거렸다. 혈궁십사 제 일대소속 삼조의 조장인 조현(趙現)!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그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안색이 이내 시커멓게 변했다. 그의 뒤에 선 동료들이 가슴이 뻥 뚫려 시뻘건 피를 폭포처럼 뿜고 있는 것이다.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인물은 갑자기 뒤에서 들려 오는 가공할 파공음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는 보았다. 대륙풍을 향해 몸을 날린 다른 조의 죽음을! 팍, 팍, 사방에서 뇌수가 터졌다. 화살모양을 한 세 치 길이의 화살이었다. 그 화살의 활촉을 닮은 부분에는 비익이 달려 있었다. 그 비익이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면서 고기를 꿰는 작살처럼 사람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익과 연결된 가는 천잠사는 대륙풍과 연결되어 있었다. 슈슈슈슉! 비익이 날개를 떨었다. 가공할 속도로 폭사해 오는 비익환을 향해 그는 사력을 다해 손을 떨쳤다. 그러나, 콱 손목이 부서져 나가고 팔이 부서졌으며 이내 머리가 빠개지는 섬뜩한 공포를 맛보아야 했다. "크아아악!" 백 명의 피를 머금은 안개는 잠깐 동안에 핏빛으로 변했다. 그 사이를 대륙풍은 느리게 이동했다. 붉은 혈무가 이동하는 대륙풍을 따라 물결처럼 출렁였다. 스스슥! 늘어진 가는 쇠줄, 그것은 금강석조차 가루로 만들 정도로 예리한 날이 서 있었다. 비련삭(悲戀朔)이라 불리는 이 쇠줄은 미랍대평원의 혈전에서 신비각의 수백 고수를 죽인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련삭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도합 열 명. 비련삭은 대륙풍의 진로를 향해 놓여져 있었다. 다그닥 다각! 대륙풍이 다가오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열 사람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대륙풍을 끄는 네 마리의 말이 비련삭을 넘어 선 순간! "당겨!" 짧은 명령과 함께 비련삭이 힘껏 당겨졌다. 당연히 피가 튀어야 했다. 금강불괴조차 반 토막으로 잘라 버리는 비련삭이니까! 그러나 끼리리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혈궁십사의 제 일조의 조장 혈사검(血邪劍) 독비(獨匕)는 눈을 부릅뜨고 말발굽 쪽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놀란 모양이군!" 낭랑한 외침이 울렸다.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양팔에 비련삭을 친친 감고 웃고 있었다. 단궁비는 적의 공격방향을 미리 예측하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사하게 말을 노리면 쓰나!" 단궁비가 비련삭을 감은 손을 맹렬하게 휘저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비련삭의 끝을 감고 있던 매복자들의 팔이 잘려 나간 것이다. "후후후! 이게 마지막 선물이네!" 단궁비가 비련삭에 강한 내가진기를 실어 뿜었다. 순간 비련삭은 쾌속무비한 속도로 사방으로 날았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기도 잠깐 목이 댕강 잘려졌다. 그 중에는 독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륙풍은 느리게 전진했다. 매복한 자들은 단궁비를 비롯한 황충산 등이 발하는 내가탄기에 숨졌다.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매복조에게는 영락없이 비익환이 날아 수급을 잘라 버렸고, 측면에서 암기를 날리는 자들에게는 수백 종의 암기가 오히려 우박처럼 날았다. 사람의 손으로 던지는 암기와, 기관에 의해 발사되는 암기의 위력은 천지차이였다. 십면매복을 펼쳤던 자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대륙풍! 그건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이 괴상한 마차는 주변에 매복한 사람 하나도 살려 두지 않고 느리게 전진하고 있었다. 혈궁십사의 둘째인 귀낭조(鬼狼爪) 당소염(唐少炎)의 눈빛은 피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전멸이다. 전위에 매복을 했던 다섯 조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전멸하고 만 것이다. "와라! 이번에는 박살을 내 주마! 사망시(死亡矢)에 불을 당겨라!" "명을 받듭니다." 귀화가 일렁인다. 누런 안개 속에서 시퍼런 귀화를 발하는 수백 발의 사망시! 그 화살에는 화약이 매달려 있었고 살촉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화염에 살아남아도 독에 전멸하고 마는 것이다. "놈들이 십 장 밖까지 접근했습니다." "좋아! 발사!" 수백 개의 귀화가 일제히 느리게 전진하는 대륙풍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침착하던 황충산이 당황하고 있었다. 대륙풍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발의 사망시를 본 그의 안면이 급격히 떨리고 있었다. "사망시! 저건 흑금벌의 비밀무기! 믿을 수 없다." 그랬다. 그의 친구이자 흑금벌을 운용하는 흑금벌주가 그를 노리고 공격을 가할 줄은 미처 몰랐던 황충산이다. '그런가? 제갈사, 네가 흑금벌의 우두머리였던가? 그래서 혈궁이 이렇게 천하를 노리고 대계를 펼칠 수 있었던 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인가?' 생각에 잠긴 황충산을 본 단궁비가 빠른 소리로 물었다. "뭐해? 이대로 전멸하고 말 거야?" 단궁비의 질문에 황충산은 비릿하게 웃었다. "절대로 당하지 않습니다. 이 황충산은 누가 뭐래도 천하제일의 거상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당신이 천하제일의 거상이 아니래?" 황충산은 쓰게 웃었다. "전속전진, 아울러 벽력탄을 발사해라. 되로 받고 말로 돌려준다." 황충산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네 마리의 말이 히히히힝 요란하게 울었다. 대륙풍은 한줄기 바람처럼 변했다. 우박처럼 날아드는 수백 발의 사망시에 격타당하면서도 대륙풍은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가공할 폭음! 수십 발의 벽력탄이 귀낭조 당소염이 진을 친 진영에 작렬한 것이다. 낙안애의 절벽이 굉음을 울리며 무너져 내렸다. 그 사이로 대륙풍은 바람처럼 전진했다. 혈궁십사의 대형인 적사장(赤沙掌) 찰극(刹克)은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수하들 뿐이었다. "대단한 마차군! 그러나 끝장이다!" 쾅! 굉음이 울리며 위풍당당하게 전진하던 대륙풍이 멈췄다. 놀란 황충산이 막세기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하하하핫!" 단궁비가 배꼽을 쥐며 웃었다. "이런 아깝군! 나는 재주는 없나? 저 말들이 천마로 변해 하늘을 나는 재주는 없는지 궁금해." 황충산 역시 웃고 말았다. 대륙풍이 아깝긴 하지만 설계도가 있는 이상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것! "포기하죠!" 황충산의 기죽은 목소리에 단궁비는 벌써 일어나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이제야 내가 활약할 때가 된 모양이군!" 그 순간 황충산은 음유(陰幽)한 한기가 뼈 속까지 긁어낼 듯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의 전신근육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히 긴장되었다. 그 기분은 생전 처음 맛보는 짜릿한 전율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오늘 생애 최초로 후회 없는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스으으으읏! 단궁비와 황충산은 허공에서 표표히 날아 내렸다. 단궁비는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휘류류류류! 기분 나쁜 음향과 함께 매서운 경기가 두 사람을 향해 휘몰아쳐 왔다. "귀신 놀음을 하자는 말이냐?" 황충산이 호통을 치며 쌍장을 휘둘렀다. 퍼퍼퍼펑! 통렬한 굉음과 함께 장력과 경기가 부딪치는 여파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황충산은 내장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크윽! 이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그는 솟구치는 기혈을 억눌러 참으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전면, 거구의 찰극이 서 있고 그 뒤에 열 사람이 쭉 도열해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그들에게서는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짙게 풍겼다. "시작해 볼까?" 까 소리가 울렸을 때 단궁비는 벌써 찰극의 면전에 당도해 있었다. 단궁비의 쌍수가 허공에서 맹렬한 회전을 일으켰다. 한순간, 수백의 장영들이 무섭게 몰려오는 경력을 향해 마주쳐갔다. 감아치고! 베고! 찍고! 장영들의 동작과 형태는 모두 달랐다. "음마파천수?" 찰극의 혼비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찰나지간, 두 개의 장력이 맹렬한 기세로 충돌하며 천붕지괴(天崩地壞)의 굉음을 토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가고 풀뿌리가 통째로 뽑혔다. 허공 가득히 피어오른 희뿌연 먼지는 장시간 온통 시야를 가렸다. 단궁비는 손목이 얼얼해지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치사한 인간들. 합격회선공(合格回旋功)을 펼치고 있지? 넌 지금 열 사람의 힘으로 나를 대적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적사장 찰극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숨결을 고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은 음마신과 어떤 사이냐?" "그건 알 필요 없고, 저승사자라는 사실만 알려주지!" "건방진 놈!" 적사장 찰극의 몸에서 한순간 시뻘건 혈광이 번갯불처럼 폭사되었다. 전신의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적사천붕(赤沙天崩)!" 쿠우우우---!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살인적인 강기가 단궁비의 전신을 휘감아 들었다. 한순간, 무지막지한 기세의 강기( 氣)는 일척간두(一尺竿頭)로 들이닥쳤다. 가히 태산도 뒤엎어 버릴 수 있는 가공무쌍할 기세였다. 단궁비의 쌍장이 비쾌한 회전을 일으켰다. 동시에 낭랑한 일성(一聲)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절금혼!" 하늘도 쪼개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황금빛의 장력이 그의 두 손에서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꽈꽈꽈꽈꽝-! 또다시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굉음이 터졌다. 단궁비와 찰극의 공세는 막상막하였다. "크크크, 야마신의 절기까지 익혔단 말인가?" "그것만이 아냐! 이것도 있지!" 단궁비의 쌍수가 은은한 홍광(紅光)을 띠었다. 그는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빠른 동작으로 신형을 회전시키며 쌍장을 쭉 내뻗었다. "혈마단천공!" 홍광이 번뜩이며 십방(十方)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갔다. "혈마신의 혈마단천공까지…! 네놈은 이제 보니 오마신의 절기를 모두 익혔구나." 찰극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끝장을 내자고!" 단 일 초였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