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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2장 수련암(睡蓮唵)에서 생긴 일 ① 이제 제법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단호삼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신 일곱 구와 주인 잃은 횃불 여섯만 이 남았다. 제아무리 화력 좋은 유황(硫黃)으로 만든 횃불이라 하더라도 이 비를 장시간 맞고 견딜 재간은 없으리라. 팟!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횃불이 꺼졌다. 하나 그 최후의 순간 에 횃불은 하나의 그림자를 남겼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청의문사 차림의 그는 바로 황보영우였다. "휴! 비가 오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들킬 뻔했어." 단호삼이 떠나기 전에 자신이 숨었던 곳을 힐끗 응시하던 그는 놀 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엎어져 있는 곽조웅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무형기검(無形氣劍)!" 곽조웅의 미간에 나 있는 작은 혈흔. 그것은 마치 바늘로 찔린 것만큼 작았다. 하나 이 작은 상처가 주 는 의미는 대단했다. 무릇 검도에 있어, 일반적으로 최상승 검도란 검(劍)과 신(身)이 일치되어 검법을 펼치는 신검합일(身劍合一)과 순수한 내공진경으 로 검을 던져 허공에서 자신의 뜻대로 조절하는 어검술(漁劍術)만 알려져 있었다. 하나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검도가 바로 무형기검이었다. 무형기검 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을 검에 실어 쏘아 보내는 것으로 무 형기검에 격중되면 외상은 거의 없으나 내부는 완전히 박살이 나 는 것이다. 이는 검강(劍 )과 일맥상통한 점도 없지 않으나, 그 위력 면에서 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검강은 자르고, 부수고 하지만 무형기검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놀라워. 결코 사하립 못지않은 검귀로군. ……응?" 경악하던 황보영우의 귀가 돌연 쫑긋했다.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음성 속에는 여인의 음성이 섞여 있었다. "모용약란이 오는군." 단번에 모용약란의 음성임을 알아들은 그는 지체없이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단호삼이 간 방향이었다. 잠시 후, 황보영우의 말처럼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개중에 세 명은 기름종이로 만든 유등을 들고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들은 모용약란과 철금도 도곤을 위시한 은검보의 무사들이었다. "여기는 왜 이리 조용하지? 본보의 아이들은 다 어디 가… 엇! 저 건?" 희끄무레한 물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유등의 불빛을 받 아 은빛으로 반사되는……. 중얼거리던 도곤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짐작대로 은검보의 무사들이었으며 모두 죽어 있었다. "놈은 이리로 지나갔어. 잔인한 놈!" 도곤이 치를 떨 때, 한 섬세한 인영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 인영이 바로 모용약란 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뾰족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대가!" '대가……? 그럼?' 도곤의 전신이 태풍을 만난 듯 부르르 전율했다. 잠깐 스치듯 보 았기 때문에 얼굴은 모른다. 그러나 모용약란이 저렇게 슬피 울어 줄 사내는 단 하나! '곽조웅마저 당했단 말인가? 어떻게 기척도 없이……. 놈이 얼마 나 강하기에……!' 하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도무림을 이끄는 지주(支柱) 중 하나인 청성파의 차기 장문인이 그가 있던 곳에서 살해를 당한 것이다. 이 일은 일파만파로 강호 로 흘러 들어갈 것이며, 철금도 도곤이라는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사태를 어렵게 만드는 일은, 최악의 경우지만 어쩌면 청성 장문 복마신검 곽여송이 아들의 죽음으로 은검보에 책임 추궁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곽조웅의 죽음으로 야기될 모든 가능성을 추리한 도곤의 안색은 극도로 창백해졌다. 그는 벼락같이 고개를 홱 돌리며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빨리 신호탄을 쏘아 본보의 무사들을 부르 지 않고!" 애꿎은 수하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도곤은 이를 악물며 모용약란에게 걸어갔다. 그의 고함에 놀란 은검보의 무사들이 일시에 품에서 신호탄을 쏘 아 올리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신호탄 하나에 돈이 얼만데……. 얼마나 놀랐으면. "낭……." 모용약란을 부르던 그는 멈칫했다. 대가, 대가! 하면서 곽조웅의 차가운 시신에 볼을 비비는 그녀의 입술에서 빨간 피가 망울지다 못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 문이었다. 얼마나 즈려물었으면……. 상사(相思)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도곤은 지금 그녀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하니 저려왔다. '모용낭자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놈을 잡아야 돼!' 죽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놈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두리번거리던 도곤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웅 장한 자태로 웅크리고 있는 산 쪽이었다. '산이 있기 때문이다!!' 노강호다운 날카로운 추리력이었다. 하나 그가 어찌 단호삼이 이 곳을 택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불필요한 살인을 하지 않기 위 함이란 걸 알겠는가. ② 쏴쏴……! 어느새 빗줄기는 굵어졌고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콰쾅! 뇌성이 번갯불 가운데 울었다. 날씨는 점차 악천후로 화해가고 있었고, 그 속을 걷는 단호삼은 흠뻑 젖었다. 빗물은 속옷까지 적시고도 남아 가랑이를 타고 흘러 내렸다. 폭우는 단호삼의 흔적을 지워줬지만, 그 자신도 방향을 잃었다. 가도가도 산이요, 나무뿐이었다. 우웅! 거센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귀곡성처럼 을씨년스 럽다. "어디서 비라도 피할 수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 흔한 동굴마저 없었다. 그때였다. "응… 저건?"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빛의 폭이 제법 넓고 그 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민가(民家)는 아닌 듯싶었 다. 민가가 아니면 어떠랴? 비를 좀 피하겠다는데. 단호삼은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보기보다 거리가 꽤 멀었다. 족히 일다경은 지난 것 같았다. 그제 야 불빛을 흘리는 곳이 암자(庵子)임을 알 수가 있었다. 암자치고 는 좀 규모가 큰 담은 여느 사찰보다 높았고 삼 장은 됨직한 대문 위에는 수련암(垂蓮唵)이라 쓰인 낡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편액 위에는 풍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깊은 산 속에 민가도 아닌 불도를 닦는 암자를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은. 설마하니 자비(慈悲)를 신념으로 살아가는 불도인들이 곤경에 빠 진 그를 박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단호삼은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보아하니 비구니들만 있는 암자인 듯한데. 이를 어쩌지?" 비구니란 여승들이다. 그들도 불도인이라 곤경에 처한 중생(衆生)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나 그것은 여인에 한해서다. 물론 지금이 훤한 대낮이라면 사내 들도 상관없으나 단호삼은 나쁜 악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 이다. 폭우가 몰아치는 밤인 데다 사내. 이런 자신을 아무리 비구니지 만, 여인들만 사는 암자에 들인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 는 격이 아니겠는가. "쩝! 밑져야 본전이지, 뭐." 잠시 망설이던 단호삼은 오른편에 늘어져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땡그랑! 한 번의 울림. 단호삼은 잠시 기다렸지만 안에서 기척이 없었다. 그에게는 천둥 소리보다 크게 들릴 정도였으나 비구니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 이었다. 소리가 너무 작았던지, 아니면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지 모를 일 이었다. 다시 종을 치기 위해 손을 가져가던 단호삼은 돌연 콧등을 찡그렸 다. 바람 속에 비릿한 냄새가 배어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피비린내였다. "피냄새다! 안에 무슨 일이……."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삼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목불인견의 대참사에 단호삼은 넋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회랑을 따라 열 개의 승방(僧房)이 있고, 승방에는 두세 명의 비 구니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처참하다는 것은 목이 잘 리거나 팔다리가 끊어져 죽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놀랍게도 비구니들은 하체를 드러내 놓은 채로 죽어 있었고, 여인 의 은밀한 곳에서는 진득한 피가 맺혀 있었다. 또한 한결같이 해 골처럼 뼈와 피부가 바싹 메말라 있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 은 심장이 있어야 할 가슴은 뻥 뚫려 시뻘건 피가 말라붙어 있지 않은가. 간살(奸殺)도 모자라 심장마저 파내어 간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 방안의 기물은 하나도 손상되어 있지 않았고, 비 구니들의 부릅떠진 눈에는 알 수 없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죽음 에 이르게 만든 정사(情事)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문득 시체를 유심히 살피던 단호삼의 뇌리 속으로 번쩍 스치 는 생각이 있었다. "모두 피골이 상접해 죽어 있다. 이것이 혹… 채음술(採陰術)이 아닐까?" 채음술은 정사를 통해 여인의 음기를 섭취해 내공을 높이는 방법 으로 그 수법의 잔인함으로 이미 오래 전에 사장(死藏)된 방문좌 도(傍門左道)의 무공으로 흑도인조차 금기시 여기는 수법이었다. 아무리 실전되었다고 하나 실전된 무공이 다시 나오지 말라는 법 은 없다. 그리고 채음술 말고는 지금 상황을 달리 설명할 말이 없 지 않은가. 그런데 심장은? 단호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강호에 대한 식견이 짧은 그로서는 뭐가 뭔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를 일이다. ……응?" 문득 단호삼의 귀가 쫑긋했다. 잔뜩 억눌린 듯한 나직한 신음. 밤이 아니고 비구니들의 알 수 없는 처참한 죽음에 긴장된 상황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뒤이어 뭔가가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직 가보지 않은 바깥 쪽 건물에서 들려왔다. '생존자다.' 내심 부르짖은 그는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날씨는 더욱 험악했다. 우르르… 콰콰쾅! 뇌성대작(雷聲大作)! 시퍼런 뇌전이 작살처럼 지상으로 꽂혔다. 불과 일 마장 정도 떨 어진 건물로 가는 동안 단호삼은 무려 일곱 개의 번개를 볼 수 있 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곳은 대웅전이었다. 한데 대웅전은 엉망진창이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불단(佛 壇)과 불상이 박살나 있었다. 심한 싸움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단호삼은 거기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있었 다. 다른 여승과 달리 그녀는 간살을 당하지도, 심장을 잃지도 않았 다. 하긴 나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고목처럼 말라 비틀어진 피부를 가진 늙은 여승을 강간할 사람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승복으로 보이는 잿빛 옷은 본래의 빛깔을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찢어지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숨이 붙어 있는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고 있 었다. ③ "스님." 낮게 부르며 단호삼은 여승의 오른팔 맥문을 짚었다. 상처가 얼마 나 위중한지 알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순간, "놔라, 악적(惡敵)!" 다 죽어 가던 사람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여승은 왼팔을 들어 단호삼의 가슴을 후리는 것이 아닌가. 단호삼은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주 잠깐이 지만 여승의 삼대주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까닭에 작은 충격 에도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펑! 그 순간, 단호삼의 가슴에서 작은 폭음이 일었다. 놀랍게도 여승의 장풍에는 범인이라면 단숨에 죽이고도 남을 힘이 실려 있어 마치 쇠망치로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은 충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며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이는 여승이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 하지만 단호삼은 타고난 강골(强骨)에 사하립이 가르쳐준 운기토 납법으로 상당한 내공부가 있는 절세고수인지라 은은한 통증만 있 을 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스님, 나는 스님을 해친 사람이 아니……!" 벌떡 몸을 일으켜 손을 들어 보이던 단호삼은 말끝을 흐렸다. 울컥! 돌연 여승이 시뻘건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 속에 잘게 부서진 내 장 조각들도 들어 있었다. 무리하게 마지막 남은 잠력(潛力)을 불 시에 끌어올린 때문일 것이다. '맞은 것은 나인데…….' 단호삼은 쓰게 웃으며 여승의 등뒤, 명문혈에 장심을 붙여 내공을 불어넣으며 무겁게 외쳤다. "스님,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그 말에 여승의 몸이 움찔했다. "……!" 기실 그녀는 누가 자신의 명문혈에 손을 대는 느낌에 다시 공력을 끌어올리려 했던 것이다. 누군가? 그 악적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장강대해(長江大海) 같은 웅후한 진 기(眞氣)가 명문혈을 통해 들어왔다. 진력은 무더운 여름에 소나기를 맞은 듯 시원한 느낌과 더불어 뭔 가 모를 신비한 기운마저 띠고 있었다. 그녀가 익힌 불문의 패엽신공(貝葉神功)보다 훨씬 뛰어난 듯했다. 그리고 족히 백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듯 진기는 거침없이 그녀의 혈맥을 타고 흐르며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기혈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하나 그뿐이었다. 기의 바다라는 기해혈에서 진력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기해혈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무척 선량한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나직이 한숨 을 쉬었다. "시주, 아까운 진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빈니의 상세는 설사 대 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단호삼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몇 번을 더 시도해 보다 긴 한숨을 쉬며 손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스님." 여승은 흐릿하게 웃었다. 죽음 직전에 이렇게 선한 사람을 만난 것도 어쩌면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존의 자비로 돌렸다. "아미타불, 이 모두 불타의 뜻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시 주." 이어 앉은 자세 그대로 빙글 몸을 돌린 그녀의 눈에 흠칫 놀람의 빛이 일어났다. 굵은 선을 가진 이목구비는 헌원장부를 대변했고, 퉁방울같이 커 다란 눈망울은 영롱했으며 그 깊이를 알 길이 없었다. 언뜻 보기 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모습이나 그녀는 단호삼이 내공을 안으 로 갈무리한 절정고수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토록 젊은 나이에 반박귀진(返璞歸眞)에 이르렀다니! 관세음보 살, 대체 누가 이런 기재를 키웠을꼬?' 내심 크게 감탄을 터뜨리는 그녀다. 만일 단호삼이 무림공적이라 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는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빈니는 이곳의 주지로 있는 무정(無情)이라는 늙은이외다." "!" 순간 단호삼은 움찔 놀랐다. 팽후에게서 무정이라는 법명을 가진 여승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정신니(無情神尼)! 아미파와 더불어 이대여승문으로 불리는 남해(南海) 보타암(寶唾 唵)의 십칠대 주지였으며, 삼십 년 전에 제자인 아라사태(阿羅師 太)에게 보타암을 맡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여승이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린 단호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님께서 혹 과거에 보타암의 주지로 계시던……?" 무정신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그러했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호삼은 급히 몸을 일으켜 포권지례를 올렸다. "말학 후배, 단호삼이 신니께 인사 올립니다."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시간만 있다면, 정말이지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단호삼을 잡아놓고 이것저것 묻고 싶었고, 이 귀한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무정신니에게 주어진 시간은 향이 반쯤 타 들어갈 시간뿐 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도 그 향은 타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④ 무정신니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 인사를 받기 송구스럽소. 그보다 빈니의 제자들은 모두 어 찌 되었는지요?" "그건……." 단호삼이 머뭇거리며 말하기 어려워하자 사태를 대충 짐작한 무정 신니의 눈에서 돌연 날카로운 한망(寒芒)이 뻗쳤다. "죽일 놈이로다!" 버럭 고함을 지르던 그녀는 내심 그 순간에 아차 했다. 하지만 때 는 이미 늦었다. 겨우 가라앉았던 기혈이 노화로 인해 들끓으며 울컥 치솟았다. 한 사발이나 되는 응혈을 토한 무정신니의 안색이 극도로 창백하 게 변했다. 이제 겨우 숨 몇 모금을 들이쉬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그녀는 다급히 단호삼을 불렀다. "시… 시주, 이리로……." 단호삼은 기우뚱거리는 그녀의 상체를 부축하며 나직이 탄식했다. "노선배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녀는 흐릿하게 웃었다. "허허… 이미 늦었소." 이어 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빈니의 말을 잘 들으… 시오. 먼저 제자들이 어떻게 변을 당했는 지 말해 주시겠소?" 단호삼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묻는 데는 필유곡 절(必有曲折)이라. 그는 자신이 본 바를 짧게 설명했고, 말을 들은 무정신니는 분노 한 가운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놈은 사… 령마황(邪靈魔皇)의 진전을 얻은 게 확실해." "사령마황이 누굽니까?" "그 자는……." 말을 흐린 무정신니는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눈을 뜨고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 단호 삼의 얼굴을 보려고 심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리되면 하고픈 말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쉰 뒤에 힘겹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령마황에 대해서 지금 말할 시… 간이 없습니다. 하니 빈니의 말을 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호삼은 말 대신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역시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녁 예불(禮佛)을 올린 후 대웅전에서 혼자 불경을 외우던 그녀 는 갑자기 음산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고, 언제 나타났는지 한 괴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괴인의 모습은 그녀를 아연실색시키기에 족했다. 머리칼이 하늘로 곤두서 있는 괴인(怪人)의 전신은 녹색 광채에 휩싸여 있었고, 괴인의 눈에서는 짙은 암녹색의 광채가 악마의 숨 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무정신니는 그 동안 닦았던 불심이 흐트러지 며 아득한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느꼈다. 크게 놀란 그녀는 재빨 리 패엽신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았지만 은근히 가슴이 떨린 그녀는 내심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누구신데 이 야밤에 비구니만 있는 이곳을 찾아온 게요? 크게 바쁜 일이 없다면 날이 밝으면 찾아와 주시오?" 정중한 그녀의 말에 괴인은 말이 없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이 자의 모습을 보아하니 좋은 뜻으로 온 것 같지… 엇! 저 눈은 혹시?' 암암리에 내공을 손에 모으던 그녀가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였다. "크크크!" 돌연 괴인은 짐승의 울음인지, 악마의 속삭임인지 모를 사이한 음 성을 토하며 허공을 박차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그 빠름이 번개 가 놀라 도망갈 정도였다. 하나 이미 준비하고 있던 무정신니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패엽신 공이 섞인 금강불영장(金剛彿影掌)을 뿌렸다. 꽈릉! 필생(必生)의 진력이 담긴 그녀의 장력은 여지없이 괴인의 몸에 격중됐다. 꽝! 하는 천둥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욱!" 뜻밖에도 신음을 터뜨리며 뒤로 주르르 밀려나는 사람은 바로 무 정신니였다. 기실 괴인의 몸에 금강불영장이 닿는 때 그녀는 자신의 장력이 되 돌아오자 아연실색하여 신형을 뒤로 날렸으나 완전히 벗어나지 못 했던 것이다. "이, 이런 반탄지기(反彈之氣)가 있다니… 욱!" 놀람에 가득한 말을 하던 그녀는 기어이 한 모금의 피를 토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무정신니 같은 절세고수가 자신의 장력에 내 상을 입다니 말이다. 반면 만근거석이라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 금강불영장을 정통으로 맞은 괴인은 허공에서 잠시 주춤했을 뿐이었다. 하나 이도 잠시 괴인은 흉성이 발작했는지 더욱 가공스런 암녹색 광채를 뿜으며 덮쳤고, 당황한 무정신니는 다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으악!" 처절한 비명. 피가 튀는 가운데 인영 하나가 추풍낙엽과 같이 훌쩍 나가 떨어졌 다. 그 인영은 무정신니였다. 위기를 느낀 무정신니가 패엽신공을 끌어올려 괴인의 몸을 후려치 려 할 그 찰나지간 괴인이 냅다 몸통으로 들이박았고, 그 일격에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분수를 쏟아내면서 허공으로 삼사 장을 날아가 나뒹굴고 말았다. ⑤ 향이 다 탔는가, 아니면 몇 모금의 숨을 쉴 시간이 지났는가. 짧 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끝낸 무정신니는 숨을 할딱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괴인은 사령마황의 사혈경(邪血經)을 얻은 것이… 분명… 우 욱! 부디 이 사실을 정도인에게 전달……." 무정신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왼편 벽면에 걸린 불존도를 가리켰다. "저곳에… 욱! 시주께 드리……." 툭! 목이 옆으로 떨어졌다. 덩달아 손도 밑으로 떨어졌다. 일세를 풍 미(風靡)하던 불심 깊은 무정신니의 죽음치고는 너무 초라했고, 처참했다. 역시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가? 제아무리 불법을 닦고, 실천하면 무엇하리. 끝내는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는 것은 우매한 중생과 다름없지 않은가. 단호삼은 숙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날이 밝는 대로 노선배님의 법체와 제자들을 다비(茶毘)할 터인 즉,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 그는 무정신니의 법체가 상할세라 조심스럽 게 몸을 뉘이고 불존도를 걷어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무정신니의 유언에 따르면 자신에게 뭔가를 준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벽에 작은 벽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니까 말이다. 하나 없었다. 두드려 보아도 속이 비어 있지 않았다. 울림이 없다는 게 그 증명 이다. 자연히 단호삼의 머리가 갸우뚱했다. "노선배님이 거짓부렁을 할 리는 없고… 혹?" 돌연 벼락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어 그는 왼손에 들린 불존도를 눈 높이로 들어 자세히 살폈다. 행여나 불존도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불존도는 평범한 탱화에 불과했다. 불과 일여 년 전만 하더라도 단호삼 자 신은 제법 이름 높은 조각가였지 않았던가. 형의 죽음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쩌면 천하에서 손가락 꼽히는 명공(名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문득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 불존도를 쓰다듬는 손끝에 어딘지 모르게 불룩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람이나 강호의 고수라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미세했다. 조각하면서 누구보다 예민한 손을 가진 그 가 아니라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으리라. "여기 뭐가 있어." 고개를 주억거린 단호삼이 조심스럽게 불존도의 귀퉁이를 뜯자, 뒤편에 한 장의 종이가 더 겹쳐져 있었다. "역시……." 그가 쾌재를 부르며 불존도를 분리한 순간 툭! 하고 뭔가 발치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책자였다. 아니 책자라기보다는 양피지 석 장에 불과했다. 색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곰팡이까지 피어 있어 한 눈에도 상당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게 뭐야?" 종이처럼 얇은 양피지를 든 단호삼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양 피지에는 마치 올챙이가 기어가는 듯한 꼬불꼬불한, 글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것이 빽빽이 쓰여 있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양피지가 검법을 기록한 검법서 라는 것이다. 검을 든 사람이 기기묘묘한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아무리 골을 짜내고, 눈알이 빠지도록 들여다보아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기실 그는 상당한 학문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 찌 문인(文人)인 한림원주인 황보유학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가 슴에 담고 있겠는가. 단호삼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거야 원, 춘화도(春畵圖) 속의 미녀일세그려." 이 말은 녹산영웅문도들이 자주 쓰는 말로 보고도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늘 기어코 한 번 써먹고 말았다. 쩝! 입맛을 다신 그는 양피지를 소매 속에 넣었다. 그런 직후에 갑자기 대웅전 밖을 향해 싸늘하면서도 굵직한 음성을 토했다. "어이, 밖에 있는 친구. 이제 그만 들어오시지." 잠시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러다, "하하하하!" 낭랑한 웃음과 함께 한 사람이 대웅전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보다 아름다운 얼굴. 물빛 장삼에 문사건을 두른 그는 다름아닌 황보영우였다. 한데 지 금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비를 맞고 서 있어 그런지 입술이 파리 했고, 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그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였 다. 하나 그를 보는 단호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가 자신 을 해할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미행을 당한다는 건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 "역시 그대였군." 얼굴 근육이 굳어지니 음성마저 딱딱하게 나왔다. 흠칫! 그 딱딱함에 황보영우는 놀라는 기색이다가 이내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오, 단형." 사과하는 마음이 진실인지 얼굴까지 붉힌다. 사내답지 않게. 저러 다 옷고름까지 만지작거릴라.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지만 단호삼은 짐짓 더 차갑게 말했다. "단형이라고? 그 호칭은 친한 사람끼리 쓰는 걸로 아는데, 우리가 그런 호칭을 쓸 만큼 친한가?" "그건……." 숙인 목덜미까지 붉다. 그리고 염려대로 드디어 옷자락까지 만지 작거리지 않는가. 사내야? 계집이야? 아무리 마음이 문약하더라도 그렇지. 소위 문 무(文武)를 겸비한 인물이. 단호삼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 털푸덕 앉았다. "이리 오시오." 한데 그때였다. 땡그랑 땡땡!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 이 깊은 밤에, 이 악천후 속에서 수련암 을 찾아올 사람은 누구인가? ⑥ 벌떡 일어난 단호삼은 황보영우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대의 친구인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 황보영우는 일이 더럽게 꼬이는 구나 하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 누구지?" 짐작한 바가 있는 황보영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마 은검보일 것이오." "……." 단호삼은 말없이 황보영우의 눈을 응시했다. 눈을 들여다보면 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 자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월등히 많거늘. 그 사이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폭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이라 생 각한 모양이었다. 황보영우는 한숨을 쉬었다. "소생은 단형을 해칠 마음이 없소. 이것은 진심이오." "믿어 드리지. 그런데……." 말을 흐린 단호삼은 기이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소?" 가슴이 뜨끔한 황보영우는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대륙선에서 만나지 않았소." 단호삼의 눈이 모호하게 변했다. 기억 저 밑바닥을 더듬을 때 나 타나는 현상이었다. "그걸 잊겠소만… 그 전에 만난 것 같아서 말이오." 그때, 휙휙!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자 단호삼은 재빨리 말했 다. "그들이 담을 넘었소. 어서 몸을 숨깁시다." 하자 뜻밖에도 황보영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들과 충돌을 피하지 않겠다면 모르되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옳 을 것이오." 단호삼은 결코 머리가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 하면 '어' 할 정도로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사하립이 무공을 가 르쳤겠는가. "하지만……." 그는 무정신니의 법체(法體)에 눈을 던지며 잠시 망설였다. 날이 밝는 대로 다비를 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물론, 무정신니와 약조를 한 것은 아니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로써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련암에 남아 있다가는 은검보의 무사들에게 들킬 염려 가 많다. 여승들의 처참한 죽음에 이곳을 샅샅이 뒤질 테니까. 그 동안의 행동으로 이런 단호삼의 마음을 아는 황보영우는 대나 무를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또 무림공적이라는 오명(汚名)을 쓰고 싶소!" 오명이라고? 대체 그대는 누구요? 라고 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 으며 단호삼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고 봅시다." 쏴쏴아아―! 빗줄기는 더욱 기승을 뿌리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 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오 장 가량 떨어진 담 밑에서 수련암을 살피는 단호삼의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 다. 누가 온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비에 젖은 은의가 물고기 비늘처럼 번뜩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은 은하게 빛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칠흑 같다느니 하여도 은의는 약 간의 빛만 있어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은의인들은 신형을 허리 아래로 낮추고서 바람처럼 움직이다가 돌 연 선두의 인영이 멈추자 덩달아 멈추었다. 언뜻 보아도 삼사 십 명. 손에 쥔 검이 이따금 작렬하는 섬전(閃電)에 독아(毒牙)처럼 귀기를 뿌리고 있었다. 선두의 은의인이 뭐라 지시를 내리자 모두 흩어졌다. 날이 넓은 병기를 꼬나 쥔 선두의 은의인은 철금도 도곤이었다. "정말 그들이군." 나직이 중얼거린 단호삼은 못내 아쉬운 듯 잠시 대웅전을 쳐다보 다가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화후가 부족한 까닭에 멀뚱거리며 보고 있던 황보영우는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먼저 몸을 날려 담을 뛰어넘었다. ⑦ 쉭쉭! 전신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 따 갑다. 이는 두 사람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 이다. 얼마나 그 상태로 달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달렸든 시간은 흘렀을 테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호삼에 게는 앞서 달리는 황보영우가 무척이나 신비한 존재로 다가왔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산길을,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 에는 이곳 산세를 잘 아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것이 다. 한데도 황보영우는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도 아닌 듯하였다. 작은 소롯길을 지나 지금은 저 멀리서 화려한 불빛마저 보이고 있 지 않은가. 불빛이 응집(凝集)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아마 대도시 인 듯하였다. 또 얼마나 더 갔을까? 한참을 더 가파른 길을 내려가다 불빛이 보이지 않을 지점에 도착 했을 때였다. 아마 성곽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돌연 황보 영우가 긴 한숨을 쉬며 발을 멈추는 것이었다. 단호삼이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그는 허리를 굽히며 거친 숨결을 토했다. "이제 좀 천천히… 헉헉! 갑시다." '미련하기는! 생긴 건 기생오라비같이 생겨 가지고서리…….' 황보영우의 몸에서 허연 김이 솟구치는 것에 비해 하나도 지친 기 색이 없는 단호삼은 내심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순순히 승낙 했다. "그럽시다. 까짓거 그게 뭐가 힘들겠소." 봐주는 듯한 말투. 황보영우의 휙 돌아간 눈동자에 하얀 망막만 보였다. 그 모습에 문득 단호삼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하하, 그러니 꼭 여인 같소이다그려." 순간 황보영우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 다. 아니나다를까. "멀쩡한 사내 보고 계집이라니요? 확인 시켜 드릴까?" 바지를 벗을 기세다. 여인이면 몰라도 같은 사내 걸 어따 쓰겠는 가. 뜨악한 단호삼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하, 하. 뭐 그럴 것까지야. 내가 실언을 했소." 사과를 하는데 어쩌겠는가. 황보영우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 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는 그런 말씀 말아 주시오!" "알았소." 대답을 한 단호삼은 농 한번 잘못 했다가 망신살이 뻗쳤구나 싶어 쓴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황보형은 고향인 연경(蓮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걸로 아는데 어찌 이곳 지리(地理)를 그리 잘 아시오?" 황보영우의 눈이 샛별같이 반짝 빛났다. '황보형이라고! 드디어 내게 마음의 문을 열었어.' 수련암에서 단호삼이 말했듯이 '형(兄)'이란 호칭은 아무에게나 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기쁨에 몸을 떨었으나 짐짓 이를 감추고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단형의 말씀처럼 소생은 연경을 떠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오. 하지만 천하에서 소생이 모르는 곳은 없다 할 수 있소." 단호삼의 눈이 둥그래졌다. "어떻게?" "혹, 천하지리서(天下地理書)라고 아십니까?" 순간 단호삼은 놀랐다. "천하지리서라면 바로 왕인(王仁)께서 서술한 것이 아닙니까. 그 게 남아 있었단 말이오?" 왕인은 한(漢)의 명재상으로, 한이 초(楚)를 이기고 나라를 건국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초를 이긴 이면에는 바로 왕인이 젊은 시절을 몽땅 받쳐 작성했다는 천하의 산, 강, 들, 해 안을 그린 천하지리서가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하나 초나라를 멸 한 후, 한나라에 해가 될까 싶어 천하지리서를 불살라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황보영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이 그걸 읽지 않았다면 어찌 이곳 지리를 알 수가 있겠소. 비록 세월이 흘러 그 동안 풍경이 좀 바뀌었으나 기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더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왕인이 참으로 대단한 분이 라는 걸 새삼 깨달았지요." 단호삼은 무심결에 소리쳤다. "황보형은 더 대단한 사람이오!" 뜻밖의 말에 황보영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듣기로 천하지리서는 무척 분량이 많아 한 사람의 머리로 외울 수 없다고 들었소. 한데도 황보형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황보영우는 손을 저어 말꼬리를 잘랐다. "그만 하시지요. 낯뜨겁소이다." 정말인지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비는 여전하 고, 날도 어둡지만 상대의 눈을 볼 수 있을 만치 어느덧 날은 밝 아 있었다. "……."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 문득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주 닮은 눈빛이었다. 맑고 선하며, 고집스럽고, 약간의 장난기 마저 있는.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역시 소심한 황보영우였다. "벌써 날이 밝았군요……." 독백처럼 중얼거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쉴 만큼 쉬었으니 어서 갑시다. 단형은 소생께 묻고 싶은 것이 있지 않소." 그건 그러했다. 단호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두 사람은 말없이 성곽(城郭)을 향해 몸을 날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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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