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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800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 윤 4월 23일 임진 31/33 기사 1735년 雍正(淸/世宗) 13년
규장각원본국역
○ 乙卯閏四月二十三日巳時, 上御宣政殿, 晝講入侍, 知事金在魯, 特進官李眞淳, 參贊官洪尙賓, 侍讀官尹彙貞, 檢討官兪健基, 假注書李象靖, 記事官鄭東說, 記事官宋儒式, 宗臣海春君栐, 武臣申思冏。上講前受正月章, 至胡爲虺蜴。彙貞伏讀, 自瞻彼坂田, 具音釋分章。上讀新受, 自瞻彼坂田具音釋分章。上曰, 正月之正, 當作何聲讀? 在魯曰, 當作上聲讀。彙貞曰, 作詩之人, 必是當世望士, 有難進易退之志, 而一入亂世, 畢竟狼狽, 故有慨恨之意。健基曰, 彼求我則如不我得, 言人情始勤終怠, 書所謂未見聖, 若不克見, 旣見聖, 亦不克由聖之意也。在魯曰, 此章一節, 深於一節, 辭愈懇而意愈切矣。上曰, 然。彙貞曰, 屢顧爾僕四字尤好, 太平之基, 一人覆之, 將亡之國, 一人能扶, 此四字, 自上體念則幸甚。上曰, 此言甚好。在魯曰, 以魚在于沼章觀之, 則在沼之魚, 卽君子之處亂邦, 亦孔之灼, 喩雖欲晦藏而終難免於禍患也。上曰, 因此章而有推思者矣。語云水淸無大魚, 卽今世道刻急, 民生困極, 如在沼之魚, 廟堂諸臣, 所宜惕念處也。在魯曰, 此詩, 本詩人自悲之辭, 而聖敎推及於民之疾苦, 豈不美乎? 上曰, 以此意, 分付廟堂, 各自體念, 可也。出擧條 健基曰, 載輸爾載, 將伯助予, 言庸人無遠慮, 只恃目前之安, 及到顚倒, 收拾不上。以我朝言之, 江都之事, 何等危急, 而金瑬·李敏求輩, 方且盃酒談笑, 自以爲快, 畢竟自招陷沒之患, 可不痛哉? 上曰, 然。在魯進曰, 連日法講, 昨又再座, 聖體若何? 上曰, 已向差完矣。在魯曰, 今日晝講, 以巳時爲之, 日氣差涼, 而御供似晩伏悶。上曰, 予無點心事, 只進二時耳。在魯曰, 殿下特眷顧嶺南, 旣累官金聖鐸, 又親問李槳, 又命新及第, 留作假官。夫王者一視之道, 無間彼此。今湖南新及第李徵奎, 乃宣廟朝名臣靑蓮居士李後白之孫, 關北新及第朱杞, 亦北方大家有文學。伏乞一倂收用, 如何? 上曰, 王者同仁之道, 奚特嶺南? 但金聖鐸旣是安東人, 且安東本是鄒魯之鄕, 故特問諸及第耳。在魯曰, 小臣昔帶銓長, 自謂頗加意嶺南及按節本道, 益有遐遺之歎, 若更帶銓職, 當不失人材矣。上曰, 昨已下敎, 而近來政格甚窄。先近要而後遐遠, 至於堂后假官之命, 亦不擧行, 使嶺人, 反爲見欺於予。北道韓宗愈, 乃神德王后旁孫, 而亦不得假官, 舊之敦寧, 異於今之敦寧乎? 直講李槳, 亦因入侍而後, 知其爲安東人, 不然則予何以知之? 在魯曰, 嶺南新進之先已下去者, 以其雖有下敎, 而不出於擧行條。故或急於榮覲, 或拘於所忌, 而然分館後, 則諸新進, 以免新事, 皆當上來矣。上曰, 何榜無可用之人, 而觀今番榜目, 則頗爲開眼, 別樣申飭, 速爲分館, 可也。出擧條 彙貞曰, 小臣奉使無狀, 僨事辱國, 於使事, 惶愧不敢復有所論, 而有一二所懷, 敢此仰達矣。彼中有大小公幹使, 臣只管大略而已。若其與彼人相接, 從便周旋, 專在譯舌輩, 而卽今譯舌中, 幹事之人絶少, 只有李樞·金時瑜等若而人, 而李樞, 老, 時瑜, 新。故前頭如或有事, 彼中則無可任使, 誠非細慮。臣意以爲, 另揀譯舌中有材幹勤實, 可以辦事者十人。使之日會本院, 講習淸漢語, 使提調及兼敎授, 時加考校勤慢, 明示賞罰, 有齎咨等役, 則以次差遣。使之明習彼中物情, 漸次陞爲首譯, 委以大小公幹, 似或得宜, 而若於生徒中抄選, 則必致奔競紛紜。只於已經譯科, 有等第人中, 使首譯以下圈點, 取其點多者, 提調兼敎授, 更加另擇, 務得其人, 以備日後任使。恐不可已, 故相臣閔鼎重, 陳達榻前, 別選譯舌, 時加勸奬, 後皆得力。今亦依此例爲之似好, 後日都提調·提調入侍時, 下詢處之如何? 上曰, 儒臣所達良是。令司譯院, 依此, 申飭金時瑜則令該曹, 恤典擧行, 可也。出擧條 上曰, 卽今所可憂者, 在北胡, 天運循環, 復見中原, 有眞聖人出, 豈不是大快事。彙貞曰, 臣近奉使燕京, 聞蒙古四十八部落, 遍在長城外, 兵强勢固, 設有神人者出, 或可保守南方, 江以北則必長爲腥膻之窟矣。在魯曰, 今時勢如此, 淸學·蒙學·漢學, 尤不可不勸講也。小臣新及第時, 亦常習漢語, 以爲應講之資, 今則此事亦絶無矣。彙貞曰, 彼中所納方物, 是小事大之儀, 有國家表咨, 事體至重。因循襲謬, 苟且塡充, 判度支招, 當行首譯及兩通事, 以毋得生事之意, 受證狀任譯輩, 不敢拒逆, 知其品劣難用, 而俛首署狀, 及北入納府, 主者詬罵却退, 任譯輩遜辭煩乞, 捐貨行賄, 始黽勉受之曰, 常大人有言, 不敢違也。常明久領內務府, 內務府如我國尙方, 方物多納內務府, 雖納他庫者, 常明已有囑托。故竝得無事彌縫, 而事體苟簡, 極爲寒心, 歲米出於關西各邑, 始納萬包, 漸次蠲減, 今只納四十包, 一包之價, 例給四包, 欲極其精鑿。故優其價値, 今反爲防納者規利, 灣府都管其事, 亦不致勤, 粒細色惡, 比前漸益不及, 度支所管, 亦皆類此, 大小好紙, 尺量僅滿, 斤數略同, 而其紙品則大減, 文席疎薄益甚, 臣之入去時, 退十三張, 雖卽還受, 爲辱極矣。淸人有事, 動輒索賂, 藉令各物完善, 無遜於前, 賂門一開, 不可復塞, 而在我事體, 則無損爲弊, 亦不至此, 況今常明在? 故彼人敢怒而不敢言, 一朝常明死, 群憾齊起, 生事辱國, 必至之勢, 豈特此也? 凡因常明, 行賂圖事, 已成謬習, 苟冀目前之無事, 不計日後之巨弊, 公齎私斂, 行行增加, 識者之憂, 誠爲不少, 行賂之事, 雖不可猝塞, 方物各件則各別申飭於戶曹及平安監營·灣府等處, 使之精揀物件, 勿復如前苟充, 恐或得宜。在魯曰, 白綿紙, 古則好矣。而今則甚薄, 其他如關東人蔘, 無一本如舊者, 唐材黃蓮·肉桂等物, 亦不如前, 天之所生, 無可奈何? 而人之所造紙席等物, 若別樣申飭, 則有效矣。上曰, 此事前已屢有申飭, 儒臣奉使, 在於申飭之後, 而猶復如此, 誠爲非矣。當該堂上及平安監司, 從重推考, 更加申飭宜矣。出擧行條 彙貞曰, 臣頃使燕京, 得一冊子上入, 或已下覽耶? 上曰, 已覽之矣。彙貞曰, 雍正政事文辯, 皆在其中, 好處文理縝密, 卑處令人失笑, 使譯官輩, 續續求覽, 則亦有益矣。上曰, 雍正終是自尊, 不似康熙矣。上曰, 大司成鄭羽良疏本, 卿等已見之耶? 士子之習, 豈容如是? 在魯曰, 士習則誠非矣, 而旣罰士林, 則陳疏似涉煩瀆矣。眞淳曰, 頃者入侍時, 奏達良役除減事, 則有本冊上入之敎。故敢此持來。上曰, 納之。健基·彙貞等曰, 眞淳苦心積功, 做得此書, 變通之道, 各有次序, 若蒙採擇, 必當有益於國家矣。上曰, 此書予當從容披覽矣。上曰, 御將以本職未付, 拜將二日, 命召尙未傳授, 事之未安, 莫此爲甚, 吏曹堂上, 竝從重推考, 斯速擧行。榻前下敎 上曰, 注書李象靖進。象靖進跪。上曰, 爾四祖, 覽試紙封皮, 已知之, 先世有達官否? 象靖曰, 麗末牧隱文靖公穡, 實爲臣鼻祖。自是厥後, 世有衣冠, 臣高祖弘祚, 以宣廟朝宰相文忠公柳成龍外孫。仍家安東, 崇禎丙子, 爲義兵大將, 仕至懷仁縣監矣。上曰, 爾做讀幾何? 象靖曰, 臣少多疾病, 不得肆力, 只隨村師長, 學經書一遍, 科工亦不能多做矣。上曰, 因金聖鐸, 聞汝名矣。在魯曰, 聞受學於外祖李栽。栽卽戊申年, 拜掌樂院主簿者也。與參奉李槾, 爲從兄弟矣。健基曰, 象靖小科, 亦於今年爲之。上曰, 小科後, 仍留在京中耶? 參幾等幾人。象靖曰, 參進士第三等第三人, 小科後, 仍留在泮村矣。上曰, 牧隱麗末名臣耶。在魯曰, 牧隱當勝國末, 能守自靖之節矣。健基曰, 入我朝, 嘗奉使於天朝矣。在魯曰, 健基言失實, 牧隱奉使, 在麗朝, 我太宗, 嘗以故人召之, 牧隱以白衣來謁, 仍示不臣之心, 國初嘗躋祀文廟, 以多作佛家文字。故旋罷黜, 然實爲東方文學之祖矣。尙賓曰, 牧隱大節卓犖, 實無異於圃隱矣。上曰, 孔子曰殷有三仁焉, 正謂此也。在魯曰, 我朝士大夫, 無非爲牧隱子孫也。上曰, 然乎? 在魯曰, 在京諸大族, 亦多有爲子孫者矣。諸臣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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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1년 을묘(1735) 윤4월 23일(임진) 맑음
11-윤04-23[27] 선정전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재로 등이 입시하여 《시경》을 진강하고, 신진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일, 역관을 양성하는 일, 청에 바치는 방물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사시(巳時)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주강을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지경연사 김재로(金在魯), 특진관 이진순(李眞淳), 참찬관 홍상빈(洪尙賓), 시독관 윤휘정(尹彙貞), 검토관 유건기(兪健基), 가주서 이상정(李象靖), 기사관 정동열(鄭東說), 기사관 송유식(宋儒式), 종신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무신 신사경(申思冏)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읽었는데 〈정월(正月)〉 장(章)의 ‘호위훼척(胡爲虺蜴)’까지였다. 윤휘정이 엎드려 ‘첨피판전(瞻彼坂田)’부터 장이 나누어지는 데까지 음과 뜻을 갖추어 읽었다. 상이 새로 배울 대목인 ‘첨피판전’부터 장이 나누어지는 데까지 음과 뜻을 갖추어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정월(正月)의 ‘정(正)’ 자는 무슨 성조(聲調)로 읽어야 하는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상성(上聲)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이 시를 지은 자는 분명 당세의 명망 있는 선비로서,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뜻이 있었으나 한 번 난세에 접어들어 끝내 낭패를 당했으므로 개탄스러운 마음이 든 것입니다.”
하고, 유건기가 아뢰기를,
“‘저가 나를 구하여 법으로 삼으려 할 때는 나를 얻지 못할 듯하더니[彼求我則 如不我得]’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이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마지막에는 나태해진다는 것으로, 《서경》에서 말한 ‘성인(聖人)을 보기 전에는 보지 못할 듯이 여기다가 이미 보고 나서는 또한 성인을 따르지 못한다.[未見聖若不克見 旣見聖亦不克由聖]’라는 뜻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 장은 한 단계 한 단계 깊어질수록 말이 더욱 간절하고 뜻이 더욱 절박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너의 노복을 자주 돌아본다면[屢顧爾僕]’이라는 4자는 더욱 좋습니다. 태평성대의 터전도 한 사람이 뒤엎을 수 있고 장차 망하게 될 나라도 한 사람이 부지할 수 있습니다. 이 4자를 상께서 유념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물고기가 못에 있으니[魚在于沼]’의 장으로 살펴본다면, 못에 있는 물고기는 곧 군자가 어지러운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고, ‘또한 매우 밝게 보이네[亦孔之灼]’라는 말은 아무리 숨고 싶어도 끝내 화란을 면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장 때문에 미루어 생각난 것이 있다. 옛말에 ‘물이 맑으면 큰 물고기가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세도가 각박하고 민생이 곤궁하여 마치 연못에 있는 물고기와 같으니, 묘당의 신하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 시는 원래 시인이 스스로 비통해하는 말인데 성상의 말씀이 백성의 질고(疾苦)에까지 미쳤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내용으로 묘당에 분부하고 각자 유념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유건기가 아뢰기를,
“‘너의 짐을 떨어뜨리고서야 남에게 청하여 나를 도와 달라 하네.[載輸爾載 將伯助予]’라는 구절은 용렬한 자가 앞날에 대한 사려 없이 목전의 안일에만 의지하다가 낭패를 당하여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로 말씀드리자면 강도(江都)의 일이 얼마나 위급하였습니까. 그런데도 김류(金瑬)와 이민구(李敏求)의 무리는 술잔을 들어 담소하며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다가 끝내 나라가 함락되는 우환을 자초하고 말았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김재로가 나아와 아뢰기를,
“연일 법강(法講)이 계속되어 어제 또 두 차례 전좌(殿座)하였습니다.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회복되고 있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오늘 주강은 사시에 행하여 날이 조금 서늘합니다. 그런데 어공(御供)이 늦어질 듯하니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점심은 먹는 일이 없다. 두 끼만 먹는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돌보아 주시어 이미 김성탁(金聖鐸)에게 누차 관직을 제수하시고 이장(李槳)에 대해서도 친히 물어보셨으며, 또 새로 급제한 자들을 머물게 하여 가관(假官)으로 삼도록 명하셨습니다. 무릇 왕자(王者)가 백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도리는 피차간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호남 사람으로 새로 급제한 이징규(李徵奎)는 바로 선묘조(宣廟朝) 때의 명신인 청련 거사(靑蓮居士) 이후백(李後白)의 후손이고, 관북(關北) 사람으로 새로 급제한 주기(朱杞) 또한 북방의 대가(大家)로서 문학이 뛰어납니다. 삼가 바라건대 모두 수용(收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자가 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도리가 어찌 영남에만 해당하겠는가. 다만 김성탁이 안동 사람인 데다 또 안동은 원래 유학(儒學)의 고장이기 때문에 특별히 급제한 자에게 물어봤을 뿐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소신은 예전에 이조 판서였을 때 영남에 꽤 신경을 썼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는데 본도의 감사가 되자 멀리 있는 자를 버린 데 대해 더욱 탄식하였습니다. 만약 다시 전조의 직임을 맡는다면 인재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이미 하교했듯이 근래 정사의 격식(格式)이 매우 협소하여 가까이 있는 자를 먼저 쓰고 멀리 있는 자를 뒤로 미룬다. 심지어 당후 가관(堂后假官 가주서(假注書))에 제수하라는 명도 거행하지 않아 영남 사람이 도리어 나에게 속게 만들었다. 북도(北道)의 한종유(韓宗愈)는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방계 후손인데도 역시 가관이 되지 못하였다. 옛날의 돈녕(敦寧)이 지금의 돈녕과 다르단 말인가? 직강 이장 또한 입시하고 나서야 안동 사람인 줄 알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영남의 신진(新進)들이 벌써 먼저 내려간 까닭은 비록 잠시 머물라는 하교가 있기는 했지만 거행 조건(擧行條件)에는 나오지 않았으므로 근친(覲親)하는 데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꺼리는 바에 구애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관(分館)한 뒤에는 면신(免新)하는 일로 신진들이 모두 올라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방목(榜目)엔들 쓸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이번 방목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꽤 있다. 별도로 신칙하여 속히 분관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윤휘정이 아뢰기를,
“소신은 사명(使命)을 형편없이 받들어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사신의 일에 대하여 황공하고 부끄러워 감히 다시 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두 가지 소회가 있기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저쪽에서 해야 할 크고 작은 공무가 있는데, 사신은 대략적인 업무만 관장할 뿐 저들과 서로 접촉하여 형편에 따라 주선하는 일은 전적으로 역관(譯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역관들 가운데 일을 주관하는 자가 매우 적어 이추(李樞)와 김시유(金時瑜) 등 몇 명밖에 없는데, 이추는 나이가 많고 김시유는 신진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저쪽에서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역관 중에서 재주 있고 근실하며 일을 잘할 수 있는 자 10명을 별도로 뽑아 매일 본원에 모여 만주어와 한어를 강습하게 하고, 제조와 겸교수에게 근실한지 태만한지를 때때로 고과(考課)하게 하여 상벌을 분명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문(咨文)을 가지고 가는 등의 일이 있으면 차례로 차임하여 보내어 저쪽의 물정을 확실히 익히게 하여 점차 수역(首譯)으로 승진시킨 뒤 크고 작은 공사를 맡기는 것이 혹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만약 생도(生徒) 중에서 역관을 선발한다면 틀림없이 분경(奔競)하러 다니느라 시끄러울 것입니다. 오직 이미 역과(譯科)를 거쳐 등제(等第)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수역 이하에게 권점(圈點)하게 하고 점수를 많이 받은 자들 중에서 다시 제조와 겸교수가 별도로 가려 뽑아 적임자를 얻는 데 힘을 씀으로써 훗날에 맡겨 쓸 수 있게 대비하는 일은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은 탑전에서 진달하여 특별히 역관을 선발하고 이들을 때때로 권장하였는데 훗날 모두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예에 따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훗날 도제조와 제조가 입시할 때 하문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이 아뢴 말이 참으로 옳다. 사역원에서 이대로 신칙하게 하고, 김시유는 해당 조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지금 걱정스러운 점은 북쪽 오랑캐이다.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중원(中原)에 진짜 성인이 나오는 것을 다시 본다면 어찌 크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윤휘정이 아뢰기를,
“신이 근래 사명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가서 들으니 몽고(蒙古)의 48개 부락이 장성(長城) 바깥에 두루 퍼져 있는데 병력이 강성하고 세력이 굳건하다고 합니다. 설사 신인(神人)이 나온다 해도 혹 남방은 보호하여 지킬 수 있겠지만 장강(長江) 이북은 틀림없이 오랫동안 오랑캐의 소굴이 될 것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지금 시세(時勢)가 이러하니 청학(淸學), 몽학(蒙學), 한학(漢學)에 대한 강학을 더욱 권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신이 막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도 한어를 익혀 응강(應講)의 바탕으로 삼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이 일 역시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하였다. 윤휘정이 아뢰기를,
“청나라에 바치는 방물(方物)은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예의로서 국가의 표문(表文)이나 자문(咨文)과 함께 일의 체모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종래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여 구차하게 방물의 수량을 채워서 보충하였습니다. 호조 판서는 해당 수역과 두 통사(通事)를 불러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는 내용으로 증명 문서를 받았고, 임역(任譯)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여 그 물건의 품질이 저열하여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를 조아리며 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청나라로 들어가 내무부(內務府)에 방물을 바치자 담당자가 욕을 하며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에 임역들이 공손한 말로 번거롭게 청하면서 재화를 거두어 뇌물로 건네자 비로소 마지못해 받으며 말하기를 ‘김상명(金常明) 대인(大人)이 한 말이 있어 감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상명은 오랫동안 내무부를 통괄하고 있는데 내무부는 우리나라의 상의원(尙衣院)과 같은 곳으로 방물은 대부분 내무부에 바칩니다. 비록 다른 창고에 바치는 방물이라 해도 김상명이 이미 부탁을 해 놓기 때문에 모두 무사히 미봉될 수 있는 것이니, 일의 체모가 구차하고 소홀하며 지극히 한심합니다.
세미(歲米)는 관서(關西)의 각 고을에서 나오는 것으로, 처음에는 1만 포(包)를 바쳤다가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40포만 바칩니다. 1포의 값으로 으레 4포 값을 지급하는데, 이는 최대한 정밀하게 도정(搗精)하기를 바라고서 그 가격을 넉넉히 쳐 준 것이지만 지금은 도리어 방납(防納)하는 자의 이익이 되었습니다. 의주부에서 그 일을 총괄하는 것 또한 근실하지 못하여 낱알이 잘고 빛깔이 나빠 전에 비해 품질이 점점 더 못 미칩니다. 호조에서 관할하는 방물 역시 모두 이와 비슷합니다. 대호지(大好紙)와 소호지(小好紙)는 측량 기준을 겨우 채워 근수(斤數)는 대략 같지만 종이 품질은 크게 떨어집니다. 문석(文席)은 성기고 얇은 정도가 더욱 심하여 신이 들어갔을 때 13장을 퇴짜 맞았는데, 비록 즉시 도로 받기는 했지만 심한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청나라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걸핏하면 뇌물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각각의 물건이 완전하여 이전에 비해 손색이 없게 하면, 한번 열린 뇌물 통로는 다시 막을 수 없더라도 우리 일의 체모로 볼 때 손상이 없고 폐해 또한 이 정도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김상명이 있기 때문에 저들이 화를 낼지언정 감히 말은 못하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김상명이 죽어 버린다면 불만을 가진 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달을 일으키고 나라를 욕보일 것은 형편상 필연적으로 닥칠 일입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무릇 김상명을 통해 뇌물을 써서 일을 도모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습관입니다. 만약 목전의 무사함만을 바라고 훗날의 큰 폐단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사신이 공적으로 가져가거나 사적으로 추렴하는 재화가 사행 때마다 증가할 것이니, 식자(識者)들의 우환이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뇌물을 쓰는 일은 갑자기 막을 수 없다 하더라도 각각의 방물은 호조 및 평안 감영, 의주부 등에 각별히 신칙하여 물건을 정밀히 가려 다시는 이전처럼 구차히 채우지 않게 하는 것이 혹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백면지(白綿紙)가 옛날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아주 얇습니다. 기타 관동(關東)의 인삼 같은 것은 한 뿌리도 옛날만 한 것이 없고, 당재(唐材)인 황련(黃蓮)과 육계(肉桂) 등의 물건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자연에서 나는 것이야 어찌할 방법이 없지만 사람이 만드는 종이나 돛자리 등의 물건은 별도로 신칙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전에 이미 누차 신칙하였다. 유신이 사명을 받든 때가 신칙하고 난 뒤였는데도 또다시 이러하니 참으로 잘못되었다. 해당 당상과 평안 감사를 엄히 추고하고 다시 더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윤휘정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연경에 사행 갔을 때 책자 하나를 구해 와서 올렸는데, 혹 이미 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보았다.”
하자, 윤휘정이 아뢰기를,
“옹정제(雍正帝)의 정사와 논변한 문장이 모두 그 안에 있는데, 좋은 곳은 문리(文理)가 치밀한 반면 저급한 곳은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역관들을 시켜 계속 구하여 보신다면 또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옹정제는 아무래도 자존심이 강하다. 강희제(康熙帝)와 같지 않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의 소본을 경들은 이미 보았는가? 선비의 습성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선비의 습성은 참으로 잘못되었습니다만, 이미 사림(士林)을 벌하였으니 상소를 올린 것은 번거로운 듯합니다.”
하였다. 이진순이 아뢰기를,
“얼마 전 입시했을 때 양역(良役)을 줄이는 일로 아뢰었더니 ‘본책(本冊)을 올리라.’라고 말씀하시어 감히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이라.”
하였다. 유건기와 윤휘정 등이 아뢰기를,
“이진순이 고심하며 공을 들여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변통하는 방도에 각기 차서가 있으니, 채택하신다면 반드시 국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책은 내가 조용히 펼쳐 보겠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영대장을 본직에 붙이지 않아 장수에 제수한 지 이틀이 지났는데 아직도 명소(命召)를 전해 주지 못하였으니 이보다 더 온당치 못한 일이 없다. 이조의 당상을 모두 엄히 추고하고 속히 거행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이다. - 상이 이르기를,
“주서 이상정은 나아오라.”
하니, 이상정이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 상이 이르기를,
“너의 사조(四祖)는 시지(試紙)의 겉봉을 보고 이미 알고 있다. 선대에 달관(達官)을 지낸 자가 있는가?”
하니, 이상정이 아뢰기를,
“고려 말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실로 신의 비조입니다. 그 이후 대대로 벼슬아치가 나왔는데, 고조 이홍조(李弘祚)는 선묘조(宣廟朝) 때의 재상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으로서 안동에 눌러앉아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 때 의병 대장이 되었고 벼슬이 회인 현감(懷仁縣監)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는 책을 얼마나 읽었는가?”
하니, 이상정이 아뢰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학문에 힘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시골 스승을 따라 경서를 한번 배웠을 뿐이고 과거 공부 역시 많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성탁을 통해 너의 이름을 들었다.”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들으니 외조부인 이재(李栽)에게 수학했다고 합니다. 이재는 바로 무신년(1728, 영조4)에 장악원 주부에 제수된 자로서 참봉 이만(李槾)과 종형제 간입니다.”
하고, 유건기가 아뢰기를,
“이상정은 소과(小科)도 올해 보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소과를 본 뒤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있었는가? 몇 등(等) 몇 번째로 입격하였는가?”
하니, 이상정이 아뢰기를,
“진사시에 3등 3번째로 입격하였습니다. 소과 뒤에 그대로 반촌(泮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은은 고려 말의 명신인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목은은 고려 말에 능히 자숙하는 절개를 지켰습니다.”
하고, 유건기가 아뢰기를,
“우리 왕조에 들어와 명나라로 사신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유건기의 말은 사실과 어긋납니다. 목은이 사명을 받든 것은 고려조 때였습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친구로 부르신 적이 있었지만 목은은 백의(白衣) 차림으로 와서 알현하여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보였습니다. 국초에 일찍이 문묘(文廟)에 올려 제사되었지만 불가(佛家)의 글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곧바로 파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실로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입니다.”
하고, 홍상빈이 아뢰기를,
“목은은 큰 절개가 뛰어나 실로 포은(圃隱)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은(殷)나라에 세 명의 어진 이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대부 치고 목은의 후손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서울에 있는 여러 대족(大族)도 후손이 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주-D001] 성인(聖人)을 …… 못한다 : 《서경》 〈군진(君陳)〉에 나오는 구절이다.[주-D002] 강도(江都)의 일 :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간 일을 말한다.[주-D003] 소신은 …… 되자 : 김재로(金在魯)는 1733년(영조9) 10월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7월 경상 감사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英祖 9年 10月 6日, 10年 7月 14日》[주-D004] 신의왕후(神懿王后) : 원문은 ‘神德王后’이다.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강씨(康氏)이고 태조의 비 중 한씨(韓氏)는 정비(正妃) 신의왕후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등제(等第)된 : 역관이나 의관 등의 취재(取才)에서 우등자를 선발하여 관직에 나아갈 차례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주-D006] 국가의 …… 중요합니다 : 원문은 ‘有國家表咨 事體至重’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有’를 ‘與’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7] 은(殷)나라에 …… 있었다 : 《논어》 〈미자(微子)〉에 나오는 말이다. 세 명의 어진 이란 은나라 말기에 주왕(紂王)의 폭정을 보고 나라를 떠난 미자(微子),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종이 된 기자(箕子), 비참하게 죽은 비간(比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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