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13 장 마(魔)의 준동(蠢動)
[1]
스슷!
나청봉이 막 백양나무 숲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커다란 전각 안에서 거무스레한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청봉(靑鳳)이냐?"
검은 인영은 망설이지 않고 나청봉에게 다가왔다.
"사부님, 소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나청봉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허리를 깊숙이 숙여보였다.
"수고했다, 청봉아!"
말과 함께 으스름한 새벽 달빛에 드러난 검은 인영은 대략 육십 세 가량 되어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두 눈은 매우 작았다. 마치 새우눈만 같았다. 입은 가로로 쭉 찢어져 있었으며 안색은 구리빛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왼쪽 볼에는 두 치 정도의 검상자국이 세로로 그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괴기스런 용모를 지닌 노인이었다.
"구해 왔느냐?"
흑의노인은 조그만 두 눈에 흉광을 띄우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사옵니다."
나청봉은 허리춤에 묶어둔 보자기를 끌러 흑의노인에게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쳤다.
보자기를 집어들자마자 그것을 푸는 흑의노인의 손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심장이 크게 뛰면서 주체할 수 없는 격동이 일어나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보자기가 풀러지며 그 안에서 손바닥만한 나무 목상(木像)이 나타났다.
"오오! 문곡상…… 드디어 이것이 본교(本敎)의 수중에 들어왔구나!"
흑의노인은 목상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손에 쥔 문곡상이 천조오수가 만든 가짜라는 사실을 알리 없는 흑의노인의 얼굴 가득 희열의 빛이 물들었다.
"수고 많았다."
흑의노인은 문곡상을 다시 보자기에 싸매며 나청봉에게 치하를 했다. 나청봉은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보자기를 품에 넣은 흑의노인이 소매 안에서 한 알의 환약(丸藥)을 꺼내 나청봉에게 건네주며 자상한 어조로 말했다.
"청봉아, 내공의 소모가 있었을 테니 이것을 먹고 보충하도록 하여라."
"네."
나청봉은 대꾸를 하며 환약을 받았다.
그러나 환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흑의노인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환약을 먹을 것을 재촉했다.
"천지신단(天地神丹)은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영단이다. 사부가 널 어여삐 여겨 특별히 하사하는 것이니 즉시 복용토록 하라."
"사부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청봉은 천지신단을 입 안에 넣었다.
나청봉이 환약을 삼키는 것을 바라보던 흑의노인의 눈가로 음흉한 웃음이 스치고 지났다.
'흐흐흐! 네년이 노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그러나 결코 노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때였다.
"……!"
돌연 흑의노인의 눈에서 새파란 청광(靑光)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청봉을 향해 쌀쌀한 어조를 흘려냈다.
"바보같은 것! 꼬리를 달고 왔구나!"
"……!"
그 말에 나청봉은 흠칫했다.
그녀가 황급히 일어나려는 순간 흑의노인은 어둠 속에 자리한 숲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흑의노인의 입에서 정중한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느 방면의 고인이신지 이제 그만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떻소?"
'이크! 들켰다!'
황자강의 등골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푸른 고양이의 눈빛마냥 날카로운 흑의노인의 눈빛이 새벽 어두운 공기를 가르며 곧장 자신의 눈으로 쏘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시구려."
재차 모습을 나타내라는 흑의노인의 말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아까 도망쳤어야 하는데 괜히 얼씬거렸다가 죽는 게 아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도망쳐버려?'
황자강은 머리를 굴렸다.
'내 경공으로는 저 계집조차 따돌릴 수 없다. 더군다나 사부라는 노인네는 더 강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담을 넘자마자 무작정 서화가(西貨街)로 도망쳐야겠다!'
황자강은 생각을 굳혔다.
서화가(西貨街)라면 북경 서쪽에 자리한 야시장(夜市場)을 말하는 것이었다.
황자강은 무공 실력으로 저들 두 사제를 이겨낼 수 없다 판단하고는 복잡한 시장통으로 도망칠 궁리를 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는 공공연하게 살수를 펼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지체하지 않는 게 그의 특기이자 장점이 아니던가?
'튀자!'
그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음침한 괴소가 자신이 숨어있는 백양나무 숲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카핫핫핫! 참으로 놀랍군. 사련(邪聯)의 공봉(公奉)인 백골사존(白骨邪尊)이 천지마교의 주구(走狗)일 줄이야."
휘리리릭!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줄기 혈영(血影)이 백양나무 줄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휴우! 내가 아니었군. 하마터면 들통날 뻔했다. 근데 저 자는 또 누구지?'
뜻밖의 출현자로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황자강은 새로운 의문에 부딪쳤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뿐이었다. 흑의노인의 음성이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들려왔던 것이다.
"핫핫핫! 또 한 분이 있는데 왜 나타나지 않는건가?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게 어떤가?"
'제길! 알고 있었잖아!'
황자강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이미 흑의노인은 백양나무 숲에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황자강은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나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미 들통난 정체라면 기죽을 필요는 없다. 저쪽도 둘, 이쪽도 둘이다.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 혈의인과 합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황자강은 모습을 드러낸 낯선 침입자를 주시했다. 그는 피처럼 붉은 혈의를 입고 있었다.
'저 혈의인의 무공이 나보다 세야 할텐데!'
어쨌거나 그건 부딪쳐보면 알 일이었다.
"핫핫핫, 과연 안목이 높으시군."
황자강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여유롭게 숲 속을 걸어나갔다.
[2]
휘이이잉!
겨울의 차가운 새벽 바람이 네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황자강은 혈의인 옆에 되도록 가까이 섰다.
그는 혈의인을 힐끔 살펴보았다. 혈의인은 핏빛 유의(儒衣)를 걸친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흑의노인은 혈의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냉소했다.
"흥, 누군가 했더니 천마성의 혈유(血儒)군. 우리가 만난 게 삼 년 전이던가?"
혈의인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백골사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사련이 언제부터 천지마교의 꼭두각시가 되었소?"
흑의노인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혈유의 안목이 이토록 높을 줄 몰랐는데?"
"역시 그랬군. 근자에 정체불명의 혈운이 강호를 덮는다 싶었더니 천지마교가 다시 나타났단 말인가?"
흑의노인의 말에 혈의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관계로 황자강은 그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련?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계집을 보고 천조오수는 천지마교라 했는데…… 그럼 혹시 사련이 천지마교의 하수인들이란 말인가? 맙소사! 그게 사실이면 난 살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가!'
황자강은 자신도 모르게 식은 땀을 주르르 흘렸다.
백골사존(白骨邪尊) 기사웅(奇史雄)!
그는 마로 흑도 삼패천 가운데 사도무림을 일통한 사련의 공봉이었다.
눈동자에서 푸르른 청광(靑光)이 뻗어나오는 날이면 영낙없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자가 바로 백골사존 기사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마주서 있는 인물은 역시 흑도삼패천 가운데 한 곳인 천마성의 거마였다.
혈유(血儒) 상관목(上官牧)!
천마성에는 일황이제삼종사군오살십이마(一皇二帝三宗四君五殺十二魔)로 불리우는 이십 칠 인의 절정고수들이 있었다.
거용관에 나타났다가 홍살마후에게 내공을 빼앗겨 죽은 대천마종(大天魔宗)이 삼종 가운데 일 인이었고,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혈유는 십이마 가운데 일 인이었던 것이다.
혈유는 일류고수에 속했다. 하지만 백골사존 기사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공실력을 지닌 자였다.
"……!"
문득 혈유는 옆에 선 황자강을 힐끔 주시했다. 하나 그는 곧 실망의 기색을 드리웠다.
'틀렸어. 이 젊은 친구의 실력이래봐야 본성의 이급무사 정도일 뿐이다. 우연히 지나치다가 신비소녀가 펼치는 경공이 사련의 비천신응공(飛天神鷹功)이기에 호기심이 일어 쫓아왔다가 백골사존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렸다. 혈유는 백골사존과 소녀를 번갈아 응시했다.
'백골사존이 나타나자마자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숨을 죽였지만…… 문곡상 때문에 놀라 호흡을 흐트려뜨린 것이 큰 실수였다!'
결국 혈유가 들킨 것은 호흡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혈유는 심기를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문곡상도 문곡상이지만…… 천지마교의 발호를 강호에 알려야 한다!'
혈유는 이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뇌리를 굴렸다. 그러나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천지마교는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악마의 집단이다!'
그렇다.
천지마교는 오직 파괴(破壞)만을 목적으로 한 사악한 집단이었다.
이천여 년의 무력(武歷)을 지닌 강호 무림사에 수 많은 마도집단들이 나타나 강호제패를 꿈꾸어왔지만 천지마교는 그런 마도집단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천지마교는 기존의 흑도무림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만이 진짜 마(魔)라고 주장해온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차례에 걸친 천지마교의 발호 때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의외로 흑도무림이었다. 천지마교는 발호 때마다 흑도무림을 제일 먼저 굴복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천지마교가 다시 나타날 징조가 보이자 혈유의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 그 사실을 천마성에 알리고 싶었다.
혈유는 희망을 황자강에게 걸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백골사존을 상대할 수 있는 시간은 일각(一刻) 뿐이다. 그 사이 이 젊은 친구가 이곳 담벽만 넘을 수 있다면 그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
왠지 황자강에 대한 믿음이 섰다.
혈유는 백골사존이 눈치채지 못하게 전음술로 황자강에게 말을 걸었다.
-나에게 눈길을 주지 말고 귀를 기울이게. 놈이 눈치채면 자네 목숨을 부지할 수 없네.
'전음술!'
황자강은 경악했다. 그 순간 혈유의 전음술이 다시 이어졌다.
-내가 놈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은 단 일각 뿐이다. 그 사이 자넨 뒤돌아보지 말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난 혈유란 사람으로 천마성에 속해 있다. 자넨 오늘 이 자리에서 본 사실을 그대로 천마성에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무조건 해야 한다. 알겠나?
'빌어먹을! 전음술을 알아야 대답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황자강은 답답한 가운데서도 혈유라 밝힌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자신을 살려준다 하자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빨리 대답을 해줘야겠는데 전음술을 할 줄 모르니 보통 열불이 터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당장에 백골사존이 눈치챌 것이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3]
"……!"
아주 기발한 생각 하나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이 아닌가?
황자강은 즉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돌연 엉뚱한 말을 꺼내 긴장된 분위기를 깨뜨렸다.
"야참을 먹은 게 잘못되었나? 어째 속이 더부룩하군."
황자강은 배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배를 핑계대면서 끄덕여 혈유의 뜻에 동조(同調)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
찰나지간 혈유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전음술도 할 줄 모른단 말인가? 이런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해야 하다니!'
그러나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어찌되었건 혈유는 황자강밖에 믿을 방법이 없었다. 혈유는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심정이 되었다.
이때였다. 백골사존이 더욱 파란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네놈이 노부와 본교의 비밀을 알았으니 목숨을 내놓아야겠다."
혈유가 말을 받았다.
"백골사존! 당신의 실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소이다."
"흐흐흐…… 꿈틀해 보겠다 이건가?"
두 사람이 서로 음성을 높이며 언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황자강과 나청봉은 서로를 응시했다.
황자강은 그 순간 나청봉의 미모를 보고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확실히 죽이는 얼굴이다. 아까는 바위로 분장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저 몸매하며…… 특히 오동통한 엉덩이가 죽이는구나!'
그의 눈에 비친 나청봉의 모습은 월궁에 산다는 선녀가 하강한 것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백옥같은 살결, 넓은 이마와 오똑한 콧날, 버들잎의 아미와 조용한 호수를 연상케 하는 수심이 어려있는 눈동자, 잘 익은 사과를 무색하게 하는 붉은 입술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그녀의 모습은 가히 경국지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
황자강은 그녀를 탐욕스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한편 나청봉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황자강의 영준한 모습에 매우 호감이 갔다.
'저런 공자와 마음 놓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야릇한 감정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장내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졌다.
백골사존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노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네놈의 목숨을 앗아야겠다."
"하하하……! 내 목숨은 좀 질긴 편이다."
혈유도 대소를 터뜨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혈유, 노부의 백골초혼공(白骨招魂功)을 받아랏!"
"백골초혼공!"
찰나지간 혈유는 흠칫했다.
설마하니 백골사존이 자신의 최대절기인 백골초혼공을 처음부터 발출해내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놈은 날 죽여 입을 막기 위해 이 한 수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 틀림없다!'
혈유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흘깃 황자강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각은 커녕 삼초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 젊은이가 도망칠 수 있을까?'
혈유는 자신의 바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백골사존의 백골초혼공은 무서운 무공이었던 것이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혈유는 마음을 굳히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백골사존은 오른손을 목 근처로 들어 올리며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혈유, 넌 오늘 일을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백골사존은 손가락을 목 앞에 두고 팔꿈치는 어깨와 나란히 하고 전광석화같은 솜씨로 허공을 갈랐다.
츠츠츠츠츠!
그 순간 음산한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는 독특한 음향이 들렸다.
"크윽!"
검을 꼬나쥐고 있던 혈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신형을 휘청거렸다.
"아니?"
황자강은 놀랐다.
그는 급히 비명을 지르는 혈유를 살펴보았다.
혈유는 앞가슴의 왼쪽 부분에 손을 대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중의 장검은 이 장밖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혈유는 백골사존의 일초식도 받아내지 못하고 패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검조차 제대로 뻗어내지 못한 것이었다.
"흐흐흐! 노부가 뭐라고 했느냐?"
백골사존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으음!"
혈유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무거운 신음만을 연발했다.
"이제는 죽어줘야겠다."
백골사존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려 금시라도 쓰러질 듯한 혈유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찰나지간 황자강은 입술을 앙물었다.
'빌어먹을, 도망치기도 글렀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사실이었다.
황자강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멍청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도 혈유가 시간을 벌어주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내 실력으로 저 노인네를 이긴다는 것은 꿈이다. 기환술! 천환문의 기환술을 이용해 노인의 눈을 속인 후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무엇을 생각해 낸 것일까?
돌연 황자강은 백골사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백골사존 앞에 무릎을 꿇고는 애걸을 했다.
"살려주십시오. 소인은 보잘 것 없는 놈입니다. 어르신의 발가락 사이의 때만도 못한 놈입니다. 이런 놈을 위대하신 강호 영웅께서 죽인다는 것은 오히려 어르신의 영명에 누를 끼치는 일이지 않습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
일시지간 백골사존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혈유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해 진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런데 황자강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을 하자 일시지간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양 황자강을 내려보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백골사존의 눈썰미는 날카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처음 혈유와 함께 황자강이 나타났을 때 백골사존은 황자강이 적어도 한 수 재간을 지닌 청년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런 청년이 목숨을 구하고자 애걸복걸하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
비록 사도무림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 역시 강호인이 아니던가?
강호인은 목숨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 여겼다. 실력이 모자라 고수에게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강호인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네놈은 배알도 없느냐?"
백골사존의 입으로부터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저절로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황자강에게로 쏠렸다.
바로 그것이 빈틈이었다.
"……!"
일순 혈유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역시 뭔가가 있는 친구였군! 저 친구에게 하늘의 운이 닿길 바랄 뿐이다!'
기실 혈유는 황자강이 살고자 무릎을 꿇었을 때 묘한 배신감같은 것을 맛보았다. 헌데 그것이 아니었다.
황자강은 완벽한 속임수로 백골사존의 헛점을 드러내게 한 것이었다.
"……!"
찰나지간 혈유의 눈에 백골사존의 헛점이 보였다.
고수(高手)간의 싸움에 있어 눈한번 깜빡이는 그 짧은 시간의 틈 하나로 인해 승패(勝敗)가 좌우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법이 아니던가?
사소한 헛점 하나가 승패를 뒤바꾸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곧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타핫! 천혈조(天血爪)!"
츄류류류륙!
독수리 발톱처럼 날카롭게 세워진 혈유의 손가락이 병아리를 채가듯 백골사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읏!"
일시지간 흠칫한 백골사존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허공중에 떠 날아오는 혈유를 향해 장력을 뿜어냈다.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청마수(靑魔手)!"
꽈우우우우!
시퍼런 청강(靑 )이 기둥인 양 일직선으로 혈유를 향해 쏘아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핫핫핫! 늙은이, 난 간다!"
파파팍!
무릎을 꿇고 있던 황자강이 그 자세 그대로 호탕하게 웃었다.
이어 그의 몸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꽈지지직!
땅이 갈라지고, 흙가루와 먼지가 비산했다.
사위는 일시지간 흙먼지로 인해 뿌연 안개가 깔려진 것처럼 가리워졌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경악성이 터졌다.
"앗! 태을지둔술(太乙地遁術)! 놈이 천환문의 제자였단 말인가! 그러나 어림없다."
퍼펑!
"크으윽!"
"컥! 제기럴, 한 방 맞았다!"
폭음성과 함께 생의 종지부를 찍는 처절한 비명성과 둔탁한 신음성이 흙먼지 속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4]
휘시시시…….
부는 새벽 바람에 흙먼지가 흩어지면서 장내의 전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차디찬 땅바닥 위에 혈유는 피곤죽이 되어 죽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황자강이 무릎을 꿇고 있던 땅에 어른 몸하나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져 있는 게 보였다.
그 구멍 앞에 백골사존이 다소 어이없는 눈으로 서 있었다.
고작 숨 두서너 번 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숨가쁜 가운데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자강은 강호인들의 습성(習性)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백골사존은 강자(强者)였다. 그런 강자 앞에 약자(弱者)가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황자강은 그 당연한 진리(眞理)를 이용해 멋들어지게 도망친 것이었다.
실상 황자강은 무릎을 꿇고 애원함으로써 두 가지를 노렸다.
그 첫째가 백골사존이 자신을 하찮게 여겨 혈유만을 상대케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자신에게 백골사존이 눈길을 돌리는 그 틈을 이용해 혈유가 그를 기습하게끔 돕는 것이었다.
결국 그 두 가지 계획 전부다 황자강이 태을지둔술로 땅을 파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황자강의 계획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어이없어하는 백골사존의 짧은 방심의 시간을 이용해 혈유는 기습을 강행했다. 당연히 백골사존은 혈유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황자강은 천환문의 태을지둔술을 펼쳐 두더쥐가 땅을 파며 땅 속으로 들어가듯 지하를 이용해 이곳을 벗어난 것이었다.
비록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 결과 그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약삭빠른 놈!"
백골사존은 시꺼멓게 뚫린 땅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왠지 서두르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힐끔 옆에 서 있는 나청봉에게 시선을 주었다.
"놈을 추적해 죽여라!"
짧다면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예."
나청봉은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백골사존의 음성이 이어졌다.
"놈은 땅을 파고 도망치려 했지만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노부의 백골초혼공이 놈의 몸에 적중되었다. 백골초혼공의 음독(陰毒)에 맞은 이상 놈의 생명은 고작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
백골사존이 여유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황자강이 땅을 파면서 일어난 흙먼지 때문에 사위가 흐려졌지만 백골사존은 초강자였다.
그는 대번에 황자강의 약은 꾀를 간파하고는 그 즉시 백골초혼공을 발출해냈던 것이다.
그가 발출한 공력은 막 땅 속으로 파고드는 황자강의 등짝을 그대로 적중시켰던 것이다.
결국 조금 전 먼지 속에서 일어난 신음성은 바로 황자강의 것이었다.
백골초혼공(白骨招魂功)!
이는 음한지기(陰寒之氣)를 이용해 연공하는 음공이었다.
결국 백골초혼공에 적중된 자는 음독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죽어가게끔 되어 있었다.
백골사존은 황자강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듯 등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가랏! 가서 놈의 숨통을 끊어라!"
"예."
나청봉은 허리를 굽혀 대꾸한 후 쏜살같이 땅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휙!
나청봉이 사라지자 장내는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어느새 깊은 밤이 지나고 여명이 시작되는 시각이었다.
백골사존은 새벽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련(邪聯)이 본교(本敎)의 전진기지(前進基地)임이 아직 밝혀져서는 안된다. 아직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련(邪聯)이라면 사도무림의 연합체가 아닌가? 그런 사련이 천지마교의 전진기지였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백골사존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뒤이어 그의 입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광명천(光明天)! 본교의 대륙혈세를 번번히 좌절시켰던 네놈들. 하지만 백 년 전 놈들은 본교에 의해 소탕되었다. 하지만 그 뿌리가 아직 대륙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뿌리마저 완전히 소탕될 때까지 우린 참고 기다릴 것이다. 영원한 마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대륙의 영원한 수호신이자 천지마교의 천적인 광명천이 백 년 전에 멸망했다니?
그리고 천지마교에서는 광명천의 뿌리마저 완전히 뽑을 때까지 발호를 늦추고 있단 말이 아닌가?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크크크ㅋ!"
새벽 하늘을 바라보며 괴소를 흘려내고 있는 백골사존의 눈엔 벌써부터 피와 죽음으로 시달리는 대륙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정녕 광명천은 이 땅에서 사라졌단 말인가?
은밀히 등장해서 강호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천지마교의 준동이 기세를 막 펼치고 있는 이때에 정녕 대륙의 영원한 수호신인 광명천이 멸망했단 말인가?
그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마두들의 행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대륙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첫댓글 굿,,,
잼 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