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가 말한다_『디지털 역사란 무엇인가』 한누 살미 지음 | 최용찬 옮김 | 앨피 | 204쪽
〈매일경제〉의 첫 서평이다. “디지털 역사학이란 디지털 기술과 컴퓨터로 활용되는 새로운 역사 연구를 뜻한다. 역사가 디지털화되면서 텍스트와 시각 자료를 아우르는 빅데이터 연구가 가능해졌다. 저자는 ‘역사학의 새로운 희망봉’이라고 은유한다. 디지털 역사학은 21세기 역사학의 구원투수일까. 구(舊)역사학으로부터의 혁명을 꾀하는 책. 앨피 펴냄.”
디지털 역사학에 관한 내용 파악이 간명하고 정확하다. 다만, ‘역사학의 새로운 희망봉’, ‘21세기 역사학의 구원투수’, ‘구역사학으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은유에 관한 오해가 약간 불편하다. 이 자리를 빌려 이는 모두 역자의 표현이라 바로잡는다. 따라서 과도한(!) 은유에 대한 해명 책임은 전적으로 역자에게 있다.
한 마디로 한누 살미 핀란드 투르크대 문화사 교수의 『디지털 역사란 무엇인가』는 ‘구역사학으로부터의 혁명을 꾀하는 책’이라기보다 ‘디지털 역사(학) 탐사를 위한 길라잡이’라 보는 게 좀 더 차분하다. 그러나 그의 짤막한 안내서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21세기 역사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적 전환’에 대한 혁명적 통찰력을 얻게 된다.
간단하게 이번의 전환은 종래의 전환들과 전혀 다르다. 이는 역사학 생태계 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충격적이고 위력적이며 실로 거대한 전환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은 역사 콘텐츠의 생산·유통·소비 부문 전체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을 태세다. 이처럼 세기적 문화현상은 21세기 역사학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이러한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의 혁명적 성격을 역사 콘텐츠의 생산·유통·소비 부문별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은 역사 연구 부문에서의 혁명적 전환을 실행하고 있다. 본문 2장 「디지털 역사의 읽기와 텍스트성」에 따르면, 대표적인 연구자는 당연히 프랑코 모레티 전 미국 스탠퍼드대 영문학과 교수다. 같은 학과 교수인 마가렛 코헨의 ‘방대한 비독’(非讀) 개념에 영감을 받은 모레티는 세계문학사 연구에서 방치된 ‘방대한 비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읽히지 않은 책이 너무도 방대한데, 세계문학 운운하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도발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는 문학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인 ‘멀리서 읽기’를 주창했다. 기계식 읽기에 기반한 방대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역사 연구를 수행하자는 그의 구호는 디지털 역사 혁명의 신호탄인 셈이다.
둘째,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은 역사 유통 부문에서의 혁명적 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1장 「디지털 과거와 자료 문제」에 따르면, 빅데이터를 집적하는 디지털 아카이브들이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방대한 빅데이터 자료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5장 「디지털 시대의 과거 전시」에서 설명하듯이, 학교 교실을 넘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연구 결과를 함께 공유하려는 디지털 역사가들의 노력은 대대적으로 환영받을 만하다. 전통적인 궁정 역사가의 고지식한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공공의 역사학을 위한 열린 시민 역사가로의 대변신이기 때문이다.
셋째,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은 역사 소비 부문에서의 혁명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5장 「디지털 시대의 과거 전시」의 ‘증강현실과 혼합현실’에 대한 논의는 역사 소비의 혁명적 전환을 앞당기는 디지털 역사학의 최첨단 분야에 해당한다. 2016년에 출시된 ‘포켓몬 GO’ 게임에 기반한 혼합현실 응용 프로그램은 역사 교육·에듀테인먼트·관광·박물관 등 다양한 목적에 쓰이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역사를 소비하는 전당인 역사박물관에서도 몰입형 전시 방식을 통해 혁신적인 박물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방문객은 입장하기 전에 무료 앱을 내려받고 증강현실 장비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생한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학교에서 증강현실 앱과 몰입형 학습이 연계될 경우, 디지털 역사학에 기반 한 교육 혁명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역설하면, 21세기 디지털 역사학으로의 거대한 전환은 시대정신이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와 함께 역사가도, 역사학도, 심지어 역사도 변해야 한다. 그러나 디지털 역사 혁명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유혈혁명이 결단코 아니다. 누구도 피 흘리지 않는 무혈혁명이, 모두가 환영할 만한 명예혁명이, 구역사학으로부터의 혁명을 꾀하는 조용한 혁명이 돼야 한다. 그래야만 AI가 역사학계에 등극하는 그날, 우리 인간이 그래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역사학을 주관할 수 있게 되리라.
최용찬
아주대 강의교수·문화사
- 2024.05.17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