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얼굴이 없다. 이름도 없는 셈이다. 소리만 있다.
그것도 목소리가 아닌 기타 소리다.
그러나 이 소리는 오랜 동안 우리 주변에 넘쳐 있어 우리의 고막에 젖어 있다.
기타리스트 金光錫(김광석.45)은 몇년전 개인콘서트를 가졌다.
가수 金光石(김광석)이 살아 있던 시절이어서 어떤 관객들은「김광석」을 보고 왔다가
무명 기타이스트가 나타나자 환불하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김광석은 기타를 들고 TV무대나 일반무대에 서기보다는 가수들이 레코드취입할 때
반주를 넣는 「세션 맨」이다. 지난 20여년간 자신의 혼을 손가락으로 박아 넣은 음반의
숫자를 기억할 수는 없다.
55년 강원도 원주태생인 김광석은 원래 기타와는 거리가 먼 법관지망생이었다.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의 지망이었다. 본인보다는 아버지의 「지망」이었지만….
『아버님은 사업에 성공하셔서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서울에서 가정교사를 모셔와 입주시켰습니다. 그래선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김광석과 기타의 인연도 초등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집에 기타가 있어 건들어 보자 너무 재미 있었던 것이다.
집에 와서 가정교사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자 판자에다 철사로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의 기타값은 아깝지 않았으나
「법관 아들」의 시간은 아까워 기타를 사주기는커녕 장난감 기타도 없애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김광석이 원주중에 들어 가던 해 여동생에게 기타를 사준 것은 일생의 패착이었다.
그는 법관아들을 열망하면서도 형제 사이에서는 점유권앞 에서 소유권이 무색하다는
법률상식도 없었던 것이다.
김광석은 즉각 동생의 기타를 「점유」함으로써 6년간 잠자던 기타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그가 미친듯 줄을 튕기자 「판검사」라는 뿌리 없던 「열망」은 먼지처럼 튕겨 나갔다.
『그 기타를 학교에서도 치다가 수업시간에는 교단밑에 감춰 두었지요.
수학여행이든 소풍이든 기타를 가져가 그 무렵의 내 사진에는 어김없이 기타가 보입니다』
그래도 김광석의 성적은 중학 3년 내내 별 이상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보컬팀을 조직하여 교회에서 연주하게 되자 기타솜씨는
수직상승했고 성적이 수직낙하 했으며, 아버지의 표정이 달라졌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기타가 박살나 있었어요.
기타가 없이는 살맛이 없어 가출하고 말았지요. 어머니가
친구들을 통해 더 좋은 기타를 사주겠다고 해서 들어갔습니다』
김광석은 덕분에 일렉트릭기타를 갖게 됐다.
그 뒤에도 아버지는 기타를 세 번 부쉈고 아들은 세 번 가출했고
기타는 3단계의 고급화과정을 거치게 돼 마지막 기타는 서울에서 사야 했다.
기타 부수기가 먹혀들지 않자 아버지는 「24시간 밀착마크」로 작전을 바꿨다.
아들이 「못된 X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오토바이로 등하교시켰다.
종례 무렵이면 어김없이 밖에서 「부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고
부자는 그 길로 자택연금에 들어갔다.
그러나 밀착마크라는 말을 몰라서 골문이 뚫리는가.
김광석은 절묘한 트릭으로 전담마크맨을 따돌린 것은 물론 교회가 아닌
나이트클럽의 골문까지 갈랐다.
『고2때 까까머리를 베레모로 감추고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를 했어요.
한번은 춤을 추던 학생주임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정학이나 퇴학을 걱정했으나 다음날 선생님은 「너 기타 잘 치더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퇴학만 무서운가. 그의 성적이 날개도 없이 떨어지자
낙제여부를 두고 직원회의가 열렸다.
낙제요건은 빈틈이 없었으나 교사들은 우등생이었던 그에게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김광석도 감격해 눈썹을 깎는 한편 기타를 치워버리고 교과서의 먼지를 털었다.
그 作心(작심)이 사흘을 견뎠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비장하게 면도질했던 자리에 정성스레 반창고를 붙이고 책 대신 기타를 들고
나간 것은 어제일 같다. 그가 경기대 관광경영학과에
들어간 것은 눈썹을 깎아서가 아니라 그 시절 고교생들의 복이 많아서였다.
『대학에 들어가자 앰프를 갖춘 기타를 사달라고 해도 사주지 않았어요.
학생회장을 설득해 교내활동에 기타가 필요하다는 공문을 집으로 보내자 어머니가 사줬습니다』
기타를 산 다음날 김광석은 이삿집센터의 타이탄트럭에
기타와 앰프만 달랑 싣고 집과 학교를 등졌다.
그러나 당장 갈곳이 없어 한 기타학원에서 잠자며 조교겸 잡역부 노릇을 했다.
어느 이른 아침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악기점 앞에서 한 보컬그룹이 안달을 하고 있었다.
「범스」라는 이 보컬은 공연이 급했으나 기타가 없었던 것이다.
김광석은 기타를 빌려줬고 이내 멤버로 합류했다.
「범스」에서 한동안 경험을 쌓다가 미8군의 오디션을 거쳐 8군전속 보컬인
「허밍 버즈」(Humming Birds) 단원이 됐다.
수입이 많고도 안정됐으나 아직 생활의 안정이라는 의미를 몰랐기에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대구의 미군부대에서 연주할 때 두세살 위인 사람이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졸라대자 그를 따라 나선 것도 그런 것이다.
함께 서울로 와보니 그는 아무 기반도 없어 헤어졌으나 「허밍 버즈」와 만날 수는 없게 됐다.
『부평의 미군기지촌으로 굴러가 어느 보컬그룹을 만났어요.
보컬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당구대 위에서 잠을 자고,
동료들의 몰골을 보면서 내가 거지가 됐다는 것을 실감했던 기억은
잊히지 않습니다』
김광석의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밥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웬 여자가 오더니
『혹시 김광석을 아느냐』고 물었다. 신체검사가 막판에 몰리자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버린 아버지 대신 찾아온 것이다.
김광석은 그 후 집과 병든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다.
어려서 왼팔을 크게 다쳤기에 군대에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80년에 먼저 돌아가시자 15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에 정성을 다했다.
밖에서도 바빴다. 김광석은 이태원에 진출했다가 정상급의 보컬인
「히파이브」 단원이 되자 쉴 날이 없었다.
10년간 제대로 쉬어본 날이 20일을 넘지 않았다.
스물세살에 약혼식을 한 날도 78년 현충일이었다.
가무를 금하는 현충일은 놀아야 하는 날이었고 따라서 그 20일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아내는 원주간호여고에 다닐 때 교회서 만난 동급생 친구였어요.
고교 졸업 후 나는 방황했고 그는 간호원으로 서독에 갔기에 잊다시피 했으나
친구들이 연락해줘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아버지의 병수발을 했다는 말처럼 또 한번 믿기지 않는 소리다.
고교시절부터 술집을 드나들었다면 주색에는 이골난 탕아같은데 옛친구를 잊지 않다니.
새삼 장난끼 없어 보이는 표정을 들여다 보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모두 건전하고 심성도 착하다고 한다. 자신을 비롯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술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밤무대라면 누구나 주색을 떠올리고 실제로 그런 기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악과 주색은 딴판이다 못해 상극이기에 그런 사람들은 곧 사라지고 말아요』
「히파이브」에서 한동안 일하다 곧 레코드사의 「녹음멤버」로 변신했다.
누가 봐도 음악인으로써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10여년간 남의 노래에 반주만 넣어주다 보니 그것이 음악인생의
완성단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광석은 95년 자신이 작곡한 기타연주곡집 「고백」을 내놨다.
金光錫의 이름이 모처럼 신문에 났으나 한 일간지에는 金光石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이 바뀐 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음반을 내기 위해 아파트를 팔고
전세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어요. 육성이 실리지 않은 기타연주곡집이어서
사실상 자비로 내다시피했고 그 바람에 아내와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국내정상의 기타리스트로 10여년간 음반제작에서 연주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김광석이 바로 음반제작 때문에 전세살이를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린가.
그는 얼마전까지 월소득이 천만원대였고 세션 맨들이 많아진
오늘도 돈을 구하면 돈이 생기는 위치다.
김광석은 집이 없는 대신 기타 17대와 앰프 8대의 재산이 있다고 자랑한다.
70년대에 그의 집이 이사할 때 제기동의 2층 집값은 4백80만원이었고
그가 사들인 마셜앰프와 기타는 꼭 반값인 2백40만원이었다.
『좋은 악기를 보면 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나 그것도 수입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괴롭지는 않아요.
가장 괴로운 순간은 아직도 기타를 칠 때 손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을 때이며,
그것은 기타를 만지는 한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기타를 놓을 수가 없다며 웃는 김광석.
그에게서 베레모로 까까머리를 감춘 문제학생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차라리 눈썹을 깎은 채 기타를 응시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찾기가 쉬울 것 같다.
[출처: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첫댓글 중학교 얘기까지는 정말 공감가네요 ㅎㅎ;;;;
아직 중학생이라서 그런거지.....^^
최고의 기타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