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박주선 그리고 DJ비자금 수사
‘DJ 비자금 사건’ 수사유보 발표, 김대중 대통령 당선 1등 공신
1997년 대통령 선거 개표가 진행되던 12월18일 새벽 4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당선이 거의 확정되는 순간 박주선 검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호남 출신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DJ에 대한 오랜 애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검찰총장의 꿈을 접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최대 쟁점이었던 ‘DJ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 유보를 강력 주장하면서, 수사유보 발표문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대검 수사기획관이었던 박주선 검사였기 때문이다.
박주선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놀랍게도 단 한번도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DJ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DJ 비자금 사건’ 수사를 담당했다는 정도다.
그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의 수 차례에 걸친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박주선 검사에게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을 보필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박주선은 그러나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어릴 적 “검사가 돼 핍박받고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소박한 꿈을 실현코자 했기 때문이다. 즉, 검찰 총수를 자신의 삶의 목표이자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고교?대학 선배였던 김 총장은, 검찰 재직시절 박주선 검사와 무려 6번씩이나 함께 근무해 누구보다 박 검사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계속 고사하던 그를 마침내 설득하여 마침내 청와대 법무비서관 자리에 ‘밀어 넣다시피’ 하여 앉혔다.
“권력은 타오르는 불이다. 불나방들은 멋모르고 불 가까이 다가갔다가 결국 타 죽는다.”
이런 권력의 속성을 익히 알고있던 박주선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청와대 근무를 마치면 다시 검찰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전제로 결국 김 전총장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발간한 <김대중 시대의 파워엘리트>라는 책은 박주선 검사를 “깐깐한 검찰세계에서 ‘검찰의 이수성’으로 불릴 만큼 친화력이 뛰어나며, 화통한 화술로 분위기를 사로잡는 능력의 소유자”로 표현해놓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마당발로 통하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박주선과 서울대 법대 사제지간(師弟之間). 이총리가 서울대 법대교수로 초임발령을 받았을 때 박주선은 법대학생이었다.
이수성 전 총리는 사석에서 박주선을 평하기를 “사람들은 그를 ‘검찰의 이수성’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그가 훨씬 출중(出衆)한 인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또, “사법시험을 수석(首席)으로 합격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엘리트 의식이나 머리 좋은 사람이 범하기 쉬운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소탈하고 호방(豪放)한 성격으로 정감(情感)넘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극찬한 후, “정치를 하면 대성(大成)할 인물로 강력한 리더십과 좌중을 휘어잡는 매력적인 풍모를 지닌 친구 같은 제자”라고 평가했다.
김대중 대통령, “박주선은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다!”
재임 시절 김대중 대통령은 박주선 비서관을 가리켜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다.”라고 표현한 말은 기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개혁에 앞장서는 박 비서관에 대해 야권에서는 정치적 공세를, 여권 내에서조차 그의 원칙에 입각한 강력한 정책추진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다.
‘청렴’과 ‘강직’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던 박주선은 전국을 뒤흔든 ‘실패한 옷 로비 사건’에 뜻밖에 유탄을 맞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를 했고, 사정(司正) 관례상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직동팀 최종보고서를 사건 당사자이면서 사정최고 책임자인 김태정 전 총장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을 밝히자, 언론과 야당은 일제히 그를 김 전총장과 공범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장본인으로 몰고 갔다.
사실상 사건이라고 볼 수도 없는 황당한 일이 바로 ‘옷로비 스캔들’이다. 박주선 스스로가 해명을 하고 김 대통령마저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고, 그가 한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노도(怒濤)와 같은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는 사건의 ‘진실(眞實)’ 보다는 이 광풍(狂風)을 잠재울 속죄양(贖罪羊)을 찾고 있었다.
불꽃 속으로 던져 넣을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결국 ‘개혁의 집행자’ 박주선이 떨치고 일어섰다. 사표를 내고 진실(眞實)앞에 섰다. 김 대통령이 “아무 문제가 없으니 계속 일하라.”며 한사코 사표를 반려했지만, 그는 광풍이 대통령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 스스로 물러나 온몸을 던져 김대중 대통령을 지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의 진실은 거악(巨嶽)으로 상징되는 부패한 재벌이 자신들을 단죄(斷罪)한 박주선과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게 복수(復?)하기 위해 벌인, 치졸한 자작극(自作劇)인데도 엉뚱하게 그 불똥이 박주선에게 튄 것이다.
박주선은 청렴과 강직으로 솟아 올랐지만 거세개탁(擧世皆濁)으로 부패한 사회는 그런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에 떠밀려 억울하게 구속까지 된 박주선은 지금까지 별로 무관심했던 ‘인생살이 운명(運命)과 사주팔자(四柱八字)소관’이란 옛 어른들의 말이 새삼스럽게 실감났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박주선을 면회 온 검찰 선배 한 사람은 “큰 일을 할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시련을 내린다.“는 맹자의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란 구절을 인용해 위로해 주었다고 전한다.
검사가 직업이라 부정부패한 수많은 범죄자들을 구속 수감시킨 그였지만, 그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리라고는, 스스로는 물론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박주선은 1평 남짓의 좁은 공간에서 지난 50여년의 발자취에 대해 깊은 회한(悔恨)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검찰총장 재목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박주선은,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몸을 떨면서도, 세상을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보는 안목을 키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후 보석으로 석방된 직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평 감방에서 세상이 크고 넓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의미심장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출처:경향신문]
첫댓글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에 시달렸던 옷로비사건 특검의 결과는 '앙드레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것이 제일 큰 수확이었습니다..디자이너의 본명을 알기 위해 수개월동안 국가가 소비한 경제적, 정신적에너지를 금액으로 따진다면 수천억 수십조원에 달할 것입니다..도살장의 소가 웃을 일이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한나라당, 그리고 장기판에나 다니며 편하게 살 양반들을 어줍짢은 꼴통으로 만드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조중동...그들이 변해야 나가가 변합니다..소머리님 말씀대로 이제는 '조동' '조동아리'라고 해야하나..^^
그랬군요... 자세히 몰랐었는데 이기사를 보고 어느정도 흐름이 이해가 갑니다..감사합니다.
박주선씨에 대해서는 저도 자세히 몰랐었는데...아직도 변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행태와 꼴통언론이 정말 문제입니다. 그들이 나라의 위기를 부추기고, 국민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갑니다. 친일,독재에 빌붙은 밤의 황제를 몰아내는 '조아세' 운동이먀 말로 나라의 앞날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