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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여행의 즐거움 보다 더 큰 마음의 벽을 마주하고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무거운 마음이 되어 돌아왔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눈이 온 대지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출발 부터 난관이다. 117년 만의 11월 대설이 우리 여정의 발목을 잡고 불안을 조성한다. 11월 초에 내가 제시한 ktx를 타고 서울가서 공항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의 즐거움을 갖어 보자는 말에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었는데 전날의 폭설과 당일날의 대설예보로 여정이 불안 해졌다. 저녁 늦은 시간 집행부들의 현명한 판단과 발빠른 조치로 버스를 취소하고 ktx를 이용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나의 제안이 빠른 결정에 도움이 되었나 보다.
각자 서울 나들이를 다 경험해본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나들이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촌노 그대로다. 서울역 안에서 부터 우왕좌왕 하며 늦은 점심시간을 갖었다. 공항열차는 경로우대로 공짜여행이 되었다. 폭설 덕분에 40여 만원을 절감했단다. 이 무슨 횡재인고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의 만남과 티켓팅 그리고 수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4시간 지연 출발의 메시지다. 예정없던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다. 절약된 경비로 몇명의 수도권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겼다. 오랫만의 만남은 강릉사람들의 그 큰 목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하였다. 어찌보면 중국인들의 모임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항 한쪽 구탱이가 시끌벅쩍한 것이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탑승구 239번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긴 시간의 기다림에 지쳐버린 모습으로 이미 품격을 잃어버린 오합지졸의 무리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시계는 꺼꾸로 돌고 있었다. 탑승구가 열리는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들의 모습은 10대의 마음이 되어버렸다. 칠순여행이 아니고 고교시절 수학여행이 된 것이다.
약 5시간의 비행끝에 예정된 것보다 하루 늦은 새벽 4시에 빈폴 리조트&골프 남호이안 숙소에 도착하였다. 2인1실로 방 배정을 받고 눈 잠간 붙인 후 7시경 깨어나 뷔페 식당으로 갔다.일출 같지도 않은 일출광경을 보며 일찍 식사한다고 서둘렀으나 더 빠른 친구들도 있었다. 조식을 마치고 과웅과 둘이서 리조트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팬션단지도 구경하고 드넓은 해변도 거닐었고 친절한 베트남 노동자들과 밝고 유쾌한 인사도 나누면서 이국의 멋을 마음것 느꼈다. 그동안 여러차례의 해외여행 중 공산주의 국가에 가면 행동에 대하여 제제를 받던 기억이 있었건만 이곳 베트남에서는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근무자들의 너무도 편안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행동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어릴적 내가 받아 온 반공교육이 잘못 된 것인가? 여러번의 중국여행에서는 언어 소통의 부재보다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여행 첫날 하루의 일정을 비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따뜻한 남국의 해변과 풀장에서의 휴식은 수많은 여행중에서 한번도 격겨보지 못한 호사였다. 첫 단추의 소중함이랄까 매일 풀장에서 수영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 우리들은 푸른 잔디밭에 모여 제기차기과 신발 멀리 날리기 등 운동회를 갖었다. 왁자지껄 개구쟁이가 되었던 우리들은 운동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쓰레기를 처리하였고 그 모습은 꽤나 성숙한 의식 깨어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저녁 식사후 싸우나실에 들어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하여 찜질을 하였다. 즐거움에 흥얼거리게 된 시조창 이것이 뒷날 또하나의 장끼가 될줄이야. 재붕친구의 방에 들어 맥주를 마시고 돌아와 숙면에 들었다.
약속된 8시50분에 프런트에 키를 반납한 후 로비에 집합하니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부지런을 떤다고 서둘렀지만 더 많은 친구들의 부지런한 모습에 무언가 야릇한 기분이다. 모범적인 삶들을 살아온 친구들의 모습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랑스런 친구들이다.
마사지 샾과 커피 전문점으로 이동하며 관광객으로 돌아갔다. 편안하게 즐기며 다낭의 거리풍경에 빠져든다. 120만 인구라는데 거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한가하게만 보인다. 활기찬 모습은 아니다 무엇인가 개발되지 않은 시골 같은 분위기다. 짓다만 건축물들이 자주 눈에 띤다. 공산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란다. 국가소유의 땅에 분배 받은 사람이 건축을 하다 보니 중단하였다가 다시 자본이 생기면 하는 식의 건축이 많다고 한다. 공터의 담장안에 싸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정리되지않은 후진국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반쎄오 특식인 점심식사 자리에 올라온 베트남 소주격인 넵모이술의 맛은 찹쌀이 주원료라 그런지 은근히 뒷 끝에 숭늉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한상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의 점심 식사였지만 주변 위생상태는 역시 한참 뒤떨어져 지저분했다. 커피 전문점 콩카페에서도 화장실이 지저분함에 놀랐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내 가게 주변의 청소에 신경을 써야겠는 생각이들었다.
호이안으로 이동 중 바구니 배 체험을 하였다. 배를 타는 내내 우리의 트로트가요가 들려왔고 우리들은 광기어린 사람처럼 흥겹게 즐겼다. 그러나 사공들의 어설픈 한국말 노래는 흥겹기 보다는 슬프게 들렸다. 바구니배는 수상에서 자라는 키작은 코코넛을 수확하기 위하여 코코넛잎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배이다. 현대에 이르러 마을 주민들이 공동관리하는 수입사업의 일환으로 관광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이안의 작은 마을을 도보관광하였다. 60년대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좁다란 골목길 투어는 어릴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투본강 유람선을 타고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주변을 달리는 유람선에서 연신 들려오는 내 나이가 어때서등 연이어지는 트로트 메들리와 관광버스춤 판은 동내 유원지에 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여기 저기 흥겨운 놀이판은 한국말만 들려온다. 호이안 올드타운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단다. 잠시 동안 올드타운 자유관광을 즐기고 호이안 씨클로(인력거)를 탔다. 42명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고 돌아다녔다. 출발때는 키 작고 아담한 인력거꾼에게 미안한 느낌이었으나 편안하게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1달러의 팁으로 만족하는 모습에 안도하였다. 거리가 온통 전등빛으로 반짝인다. 휘황찬란하다고 하여야 할까 어둠이 내리기 전의 마을이 아니었다. 내원교도 건넜고 소원배도 타보고 소원등도 띄우고 호이안의 밤은 아름다웠다. 낮의 아픔을 싹다 씻어비린 별유천지였다. 모닝글로리 식당 이층에서 내려보는 호이안의 야경은 황금빛 전등불로 너무도 아름답게 빛났다. 한 순간 가졌던 슬픔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없는 자원을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활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다낭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빈펄리버프론트 호텔에 여장을 풀어 놓고 전동차를 타고 야시장을 관광 나갔다. 매우 복잡한 야시장이다 단오날 남대천을 거니는 것과 같은 그런 복잡함이다. 어쩌면 더 복잡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함 보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함께하였다.
1. 일찍 일어나 용머리 다리와 지난 밤 가보았던 야시장 거리를 다시 찾았지만 지난밤의 그 혼잡고 활력 넘치던 시장은 신기루였나 보다. 그곳은 왕래하는 차량도 별로 없는 한적한 왕복 4차선 도로였다. 6시땡 조식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한바탕 수영을 즐기고 시간에 맞추어 프론트에 모였다.
오늘도 2호차에 올랐다. 지난 밤과 새벽 활동의 이야기꽃이 만발이다. 70이라는 나이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부지런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정말 100세는 거뜬할 것 같은 모습들이다.
매일 해안가를 달리던 차량이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든다. 목적지는 다낭시내에서 40km 떨어진 1485m 높이의 바니힐 관광지이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휴양지로 개발해 놓은 바니산 테마파크로 이동 중이다. 어딘가 산 중간에 도착했다. 케이블카타는 곳이다. 이리구불 저리구불 몇 번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드디어 도착 8명씩 분승하여 곤도라에 올라 먼거리를 이동하였다. 바닥이 안보이는 깊은 숲을 보면서 월남전 당시의 고엽제 살포에 대한 이야기등 훗날에야 증명된 슬픈 월남전 역사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28 드디어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여행의 즐거움 보다 더 큰 마음의 벽을 마주하고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무거운 마음이 되어 돌아왔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눈이 온 대지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출발 부터 난관이다. 117년 만의 11월 대설이 우리 여정의 발목을 잡고 불안을 조성한다. 11월 초에 내가 제시한 ktx를 이용하여 서울로 가서 공항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의 즐거움을 갖어 보자는 말에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었는데 전날의 폭설과 당일날의 대설예보로 여정이 불안 해졌다. 저녁 늦은 시간 집행부들의 현명한 판단과 발빠른 조치로 버스를 취소하고 ktx를 이용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나의 제안이 빠른 결정에 도움이 되었나 보다.
각자 서울 나들이를 다 경험해본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나들이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촌노 그대로다. 서울역 안에서 부터 우왕좌왕 하며 서로를 찾는 호들갑을 떨으며 늦은 점심시간을 갖었다. 공항열차는 경로우대로 공짜여행이 되었다. 폭설 덕분에 40여 만원을 절감했단다. 이 무슨 횡재인고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의 만남과 티켓팅 그리고 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4시간 지연 출발의 메시지가 왔다. 예정없던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다. 절약된 경비로 몇명의 수도권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겼다. 오랫만의 만남은 강릉사람들의 그 큰 목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하였다. 어찌보면 중국인들의 모임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항 한쪽 구탱이가 시끌벅쩍한 것이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탑승구 239번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긴 시간의 기다림에 지쳐버린 모습으로 이미 품격을 잃어버린 오합지졸의 무리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시계는 꺼꾸로 돌고 있었다. 탑승구가 열리는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들의 모습은 10대의 마음이 되어버렸다. 칠순여행이 아니고 고교시절 수학여행이 된 것이다.
약 5시간의 비행끝에 예정된 것보다 하루 늦은 새벽 4시에 빈폴 리조트&골프 남호이안 숙소에 도착하였다. 2인1실로 방 배정을 받고 눈 잠간 붙인 후 7시경 깨어나 뷔페 식당으로 갔다. 일출 같지도 않은 일출 광경을 보며 일찍 식사한다고 서둘렀으나 더 빠른 친구들도 있었다. 조식을 마치고 과웅친구와 둘이서 리조트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팬션단지도 구경하고 드넓은 해변도 거닐었고 친절한 베트남 노동자들과 밝고 유쾌한 인사도 나누면서 이국의 멋을 마음것 느꼈다. 그동안 여러차례의 해외여행 중 공산주의 국가에 가면 행동에 대하여 제제를 받던 기억이 있었건만 이곳 베트남에서는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근무자들의 너무도 편안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행동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어릴적 내가 받아 온 반공교육이 잘못 된 것인가? 여러번의 중국여행에서는 언어 소통의 부재보다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29 여행 첫날 하루의 일정을 비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따뜻한 남국의 해변과 풀장에서의 휴식은 수많은 여행중에서 한번도 격겨보지 못한 호사였다. 첫 단추의 소중함이랄까 매일 풀장에서 수영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 우리들은 푸른 잔디밭에 모여 제기차기과 신발 멀리 날리기 등 운동회를 갖었다. 왁자지껄 개구쟁이가 되었던 우리들은 운동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쓰레기를 처리하였고 그 모습은 꽤나 성숙한 의식 깨어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저녁 식사후 싸우나실에 들어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하여 찜질을 하였다. 즐거움에 흥얼거리게 된 시조창 이것이 뒷날 또하나의 장끼가 될줄이야. 재붕친구의 방에 들어 맥주를 마시고 돌아와 숙면에 들었다.
30 약속된 8시50분에 프런트에 키를 반납한 후 로비에 집합하니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부지런을 떤다고 서둘렀지만 더 많은 친구들의 부지런한 모습에 무언가 야릇한 기분이다. 모범적인 삶들을 살아온 친구들의 모습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랑스런 친구들이다.
마사지 샾과 커피 전문점으로 이동하며 관광객으로 돌아갔다. 편안하게 즐기며 다낭의 거리풍경에 빠져든다. 120만 인구라는데 거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한가하게만 보인다. 활기찬 모습은 아니다 무엇인가 개발되지 않은 시골 같은 분위기다. 짓다만 건축물들이 자주 눈에 띤다. 공산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란다. 국가소유의 땅에 분배 받은 사람이 건축을 하다 보니 중단하였다가 다시 자금이 생기면 하는 식의 건축이 많다고 한다. 공터의 담장안에 싸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정리되지 않은 후진국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반쎄오 특식인 점심식사 자리에 올라 온 베트남 소주격인 넵모이 술의 맛은 찹쌀이 주원료라 그런지 은근히 뒷 끝에 숭늉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한상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의 점심 식사였지만 주변 위생상태는 역시 한참 뒤떨어져 지저분했다. 커피 전문점 콩카페에서도 화장실이 지저분함에 놀랐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내 가게 주변의 청소에 신경을 써야겠는 생각이들었다.
호이안으로 이동 중 바구니 배 체험을 하였다. 배를 타는 내내 우리의 트로트가요가 들려왔고 우리들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흥겹게 즐겼다. 그러나 사공들의 어설픈 한국말 노래는 흥겹기 보다는 슬프게 들렸다. 바구니배는 수상에서 자라는 키작은 코코넛을 수확하기 위하여 코코넛잎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배이다. 현대에 이르러 마을 주민들이 공동관리하는 수입사업의 일환으로 관광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이안의 작은 마을을 도보관광하였다. 60년대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좁다란 골목길 투어는 어릴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투본강 유람선을 타고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주변을 달리는 유람선에서 연신 들려오는 내 나이가 어때서등 연이어지는 트로트 메들리와 관광버스춤 판은 동내 유원지에 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여기 저기 흥겨운 놀이판은 한국말만 들려온다. 호이안 올드타운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단다. 잠시 동안 올드타운 자유관광을 즐기고 호이안 씨클로(인력거)를 탔다. 42명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고 돌아다녔다. 출발때는 키 작고 아담한 인력거꾼에게 미안한 느낌이었으나 편안하게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1달러의 팁으로 만족하는 모습에 안도하였다. 거리가 온통 전등빛으로 반짝인다. 휘황찬란하다고 하여야 할까 어둠이 내리기 전의 마을이 아니었다. 내원교도 건넜고 소원배도 타보고 소원등도 띄우고 호이안의 밤은 아름다웠다. 낮의 아픔을 싹다 씻어버린 별유천지였다. 유명하다는 모닝글로리 식당 이층에서 내려보는 호이안의 야경은 황금빛 전등불로 너무도 아름답게 빛났다. 한 순간 가졌던 슬픔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없는 자원을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활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다낭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빈펄리버프론트 호텔에 여장을 풀어 놓고 전동차를 타고 야시장을 관광 나갔다. 매우 복잡한 야시장이다 단오날 남대천을 거니는 것과 같은 그런 복잡함이다. 어쩌면 더 복잡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함 보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함께하였다.
1. 일찍 일어나 용머리 다리와 지난 밤 가보았던 야시장 거리를 다시 찾았지만 지난밤의 그 혼잡고 활력 넘치던 시장은 신기루였나 보다. 그곳은 왕래하는 차량도 별로 없는 한적한 왕복 4차선 도로였다. 6시땡 조식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한바탕 수영을 즐기고 시간에 맞추어 프론트에 모였다.
오늘도 2호차에 올랐다. 지난 밤과 새벽 활동의 이야기꽃이 만발이다. 70이라는 나이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부지런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정말 100세는 거뜬할 것 같은 모습들이다.
매일 해안가를 달리던 차량이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든다. 목적지는 다낭시내에서 40km 떨어진 1485m 높이의 바니힐 관광지이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휴양지로 개발해 놓은 바니산 테마파크로 이동 중이다. 어딘가 산 중간에 도착했다. 케이블카타는 곳이다. 이리구불 저리구불 몇 번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드디어 도착 8명씩 분승하여 곤도라에 올라 먼거리를 이동하였다. 바닥이 안보이는 깊은 숲을 보면서 월남전 당시의 고엽제 살포에 대한 이야기등 훗날에야 증명된 슬픈 월남전 역사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삼균친구의 이웃 형이 고엽제를 해충이 달려들지 않는다고 몸에 바르고 지냈다는 이야기와 고엽제 피해를 알지도 못하고 일직 돌아가셨다는 슬픈 이야기에 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짙은 안개가 자욱히 깔린 산정에서 선계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는 중세유럽의 별천지가 있었다. 일반 관광객과 같이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이곳 저곳 돌아 봤지만 수박 겉핡기 밖에 안되었다. 설악산 소청높이의 이곳에 지금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식민시절에(1887년~1954년) 이런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들의 피땀어린 노동이 착취 되었을까 감상에 젖어 약소국가였던 그 시대의 조국모습이 떠올라 아픔을 공감하게 된다.
바나힐 정상 바나 부루 식당에서의 점심식사는 마치 한국 도때비시장 모습이다. 엄청난 인파와 들려오는 우리네 소리에 동네 유명 관광지 같다. 이곳의 음식도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다녀 갔는지 음식은 우리들 입맛에 딱 맞았다.
오후의 아오자이쇼에서 국뽕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아오자이쇼는 베트남 왕실복장서부터 서민복까지 전통복장의 변천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갈 즈음에 관중 한 사람을 불러 내었는데 친구 태규가 불려나갔다. 공연의 일부였지만 친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으며 너무도 당당하게 70나이의 멋진 모습을 보여 주어 자랑스러웠다.
피날레 공연에 이웃 여러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춤을 추는데 베트남 다음으로 한국국기를 단 공연자의 등장에 울컥해지 무엇인가 가 있었다. 온통 한국에 대하여 우대해 주는 모습에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 졌다.
저녁시간 브릴리언트 씨푸드 식당의 단독룸에서 우리는 열정 가득한 여흥시간을 갖기로 했으나 시스템 문제로 부분 공연만 할수있었다. 나의 자작시 칠순여행 낭송과 시조창 시범이 있었고 흥섭친구의 마이웨이 열창이 있었다.
2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일직 조식을 마치고 동네 한바퀴 산책을 하였다. 깨끗하지 못한 골목길의 모습과 어제 본 경기도 다낭시라는 간판 모습을 떠올리며 이들의 변화와 발전을 빌어본다.
마지막 날의 여정은 왠지 바쁘기만 하다. 서둘러 프론트에 모여 인원 점검하고 2호 차에 올랐다. 핑크 성당으로 유명한 다낭 대성당과 베트남 신흥종교인 까오다이교 사원을 조망하고 구 다낭시내와 용머리 다리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차량을 이용하여 참 편안하게 관광을 하였다.
마블마운틴 오행산이라고 불리며 다섯 개의 대리석 산이다. 동굴과 사원 베트콩 주둔지역등 전쟁의 상흔이 도처에 널려있다. . 발아래 바라보이는 다낭시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가까운 미군 주둔지를 많이 습격한 유명 전투지역이었다.
오행산을 뒤로하고 해안을 끼고 달려간 곳은 30층 높이의 해수관음상으로 유명한 손짜 영흥사였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의 크기에 압도 당했던 기억이 이곳에 와서 어이쿠야 하고 놀랐다.
저 멀리 해안에서 하얗게 우뚝 솟은 관음상이었다. 크다는 것 이외에 볼거리는 없지만 노상에서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원숭이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저녁식사는 무제한 삼겹살 파티다. 우리들의 70인생은 100세를 향한 시작일 뿐이다. 피곤하여 지친 기색이어야 할 친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젊음을 되찾았다. 한잔 두잔 돌아가는 술잔은 서서히 열광의 시간으로 안내하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다. 우리는 젊음은 그 끝이 없다.
한강변의 마지막 여정 선택관광이었던 한강리버야경 크루즈가 우리를 반겼다. 저녁식사 시간의 여흥이 아직도 부족하였나 보다. 승선을 마치고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흘러나오는 흥겨운 트로트와 아주 조그마한 베트남 아가씨의 벨리댄스는 우리의 젊음을 일깨우며 지친 몸을 마음껏 불사르게 하였다. 한강변의 아름다운 야경은 기억에도 없고 그냥 학창시절의 추억만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안녕이다. 늦은 저녁시간 우리는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정들었던 현지 한국가이드와 또 묵묵히 열심히 일하던 현지인 가이드와 아쉬운 공항의 이별을 나누고 아담한 다낭 공항에 들어섰다. 이 여정을 마치면서 문득 베트남 전쟁에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참전했던 따이한 용사들의 용감한 무용담과 이 전쟁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아픔에 베트남에 대하여 무한한 미안함을 가슴에 새기며 공항을 떠났다.
안녕 잘있어라 경기도 다낭시여!
28 드디어 약속된 날이 다가왔다. 여행의 즐거움 보다 더 큰 마음의 벽을 마주하고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무거운 마음이 되어 돌아왔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눈이 온 대지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출발 부터 난관이다. 117년 만의 11월 대설이 우리 여정의 발목을 잡고 불안을 조성한다. 11월 초에 내가 제시한 ktx를 이용하여 서울로 가서 공항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의 즐거움을 갖어 보자는 말에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았었는데 전날의 폭설과 당일날의 대설예보로 여정이 불안 해졌다. 저녁 늦은 시간 집행부들의 현명한 판단과 발빠른 조치로 버스를 취소하고 ktx를 이용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나의 제안이 빠른 결정에 도움이 되었나 보다.
각자 서울 나들이를 다 경험해본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나들이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촌노 그대로다. 서울역 안에서 부터 우왕좌왕 하며 서로를 찾는 호들갑을 떨으며 늦은 점심시간을 갖었다. 공항열차는 경로우대로 공짜여행이 되었다. 폭설 덕분에 40여 만원을 절감했단다. 이 무슨 횡재인고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친구들과의 만남과 티켓팅 그리고 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4시간 지연 출발의 메시지가 왔다. 예정없던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다. 절약된 경비로 몇명의 수도권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즐겼다. 오랫만의 만남은 강릉사람들의 그 큰 목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하였다. 어찌보면 중국인들의 모임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항 한쪽 구탱이가 시끌벅쩍한 것이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탑승구 239번 게이트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긴 시간의 기다림에 지쳐버린 모습으로 이미 품격을 잃어버린 오합지졸의 무리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시계는 꺼꾸로 돌고 있었다. 탑승구가 열리는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들의 모습은 10대의 마음이 되어버렸다. 칠순여행이 아니고 고교시절 수학여행이 된 것이다.
약 5시간의 비행끝에 예정된 것보다 하루 늦은 새벽 4시에 빈폴 리조트&골프 남호이안 숙소에 도착하였다. 2인1실로 방 배정을 받고 눈 잠간 붙인 후 7시경 깨어나 뷔페 식당으로 갔다. 일출 같지도 않은 일출 광경을 보며 일찍 식사한다고 서둘렀으나 더 빠른 친구들도 있었다. 조식을 마치고 과웅친구와 둘이서 리조트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팬션단지도 구경하고 드넓은 해변도 거닐었고 친절한 베트남 노동자들과 밝고 유쾌한 인사도 나누면서 이국의 멋을 마음것 느꼈다. 그동안 여러차례의 해외여행 중 공산주의 국가에 가면 행동에 대하여 제제를 받던 기억이 있었건만 이곳 베트남에서는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근무자들의 너무도 편안한 미소와 자연스러운 행동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어릴적 내가 받아 온 반공교육이 잘못 된 것인가? 여러번의 중국여행에서는 언어 소통의 부재보다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29 여행 첫날 하루의 일정을 비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따뜻한 남국의 해변과 풀장에서의 휴식은 수많은 여행중에서 한번도 격겨보지 못한 호사였다. 첫 단추의 소중함이랄까 매일 풀장에서 수영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 우리들은 푸른 잔디밭에 모여 제기차기과 신발 멀리 날리기 등 운동회를 갖었다. 왁자지껄 개구쟁이가 되었던 우리들은 운동회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쓰레기를 처리하였고 그 모습은 꽤나 성숙한 의식 깨어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저녁 식사후 싸우나실에 들어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하여 찜질을 하였다. 즐거움에 흥얼거리게 된 시조창 이것이 뒷날 또하나의 장끼가 될줄이야. 재붕친구의 방에 들어 맥주를 마시고 돌아와 숙면에 들었다.
30 약속된 8시50분에 프런트에 키를 반납한 후 로비에 집합하니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부지런을 떤다고 서둘렀지만 더 많은 친구들의 부지런한 모습에 무언가 야릇한 기분이다. 모범적인 삶들을 살아온 친구들의 모습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랑스런 친구들이다.
마사지 샾과 커피 전문점으로 이동하며 관광객으로 돌아갔다. 편안하게 즐기며 다낭의 거리풍경에 빠져든다. 120만 인구라는데 거리가 복잡하지도 않고 한가하게만 보인다. 활기찬 모습은 아니다 무엇인가 개발되지 않은 시골 같은 분위기다. 짓다만 건축물들이 자주 눈에 띤다. 공산주의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란다. 국가소유의 땅에 분배 받은 사람이 건축을 하다 보니 중단하였다가 다시 자금이 생기면 하는 식의 건축이 많다고 한다. 공터의 담장안에 싸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정리되지 않은 후진국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반쎄오 특식인 점심식사 자리에 올라 온 베트남 소주격인 넵모이 술의 맛은 찹쌀이 주원료라 그런지 은근히 뒷 끝에 숭늉맛이 나는 느낌이었다. 한상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의 점심 식사였지만 주변 위생상태는 역시 한참 뒤떨어져 지저분했다. 커피 전문점 콩카페에서도 화장실이 지저분함에 놀랐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내 가게 주변의 청소에 신경을 써야겠는 생각이들었다.
호이안으로 이동 중 바구니 배 체험을 하였다. 배를 타는 내내 우리의 트로트가요가 들려왔고 우리들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흥겹게 즐겼다. 그러나 사공들의 어설픈 한국말 노래는 흥겹기 보다는 슬프게 들렸다. 바구니배는 수상에서 자라는 키작은 코코넛을 수확하기 위하여 코코넛잎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배이다. 현대에 이르러 마을 주민들이 공동관리하는 수입사업의 일환으로 관광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이안의 작은 마을을 도보관광하였다. 60년대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좁다란 골목길 투어는 어릴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투본강 유람선을 타고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주변을 달리는 유람선에서 연신 들려오는 내 나이가 어때서등 연이어지는 트로트 메들리와 관광버스춤 판은 동내 유원지에 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여기 저기 흥겨운 놀이판은 한국말만 들려온다. 호이안 올드타운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단다. 잠시 동안 올드타운 자유관광을 즐기고 호이안 씨클로(인력거)를 탔다. 42명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고 돌아다녔다. 출발때는 키 작고 아담한 인력거꾼에게 미안한 느낌이었으나 편안하게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1달러의 팁으로 만족하는 모습에 안도하였다. 거리가 온통 전등빛으로 반짝인다. 휘황찬란하다고 하여야 할까 어둠이 내리기 전의 마을이 아니었다. 내원교도 건넜고 소원배도 타보고 소원등도 띄우고 호이안의 밤은 아름다웠다. 낮의 아픔을 싹다 씻어버린 별유천지였다. 유명하다는 모닝글로리 식당 이층에서 내려보는 호이안의 야경은 황금빛 전등불로 너무도 아름답게 빛났다. 한 순간 가졌던 슬픔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없는 자원을 개발하여 관광상품으로 활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다낭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빈펄리버프론트 호텔에 여장을 풀어 놓고 전동차를 타고 야시장을 관광 나갔다. 매우 복잡한 야시장이다 단오날 남대천을 거니는 것과 같은 그런 복잡함이다. 어쩌면 더 복잡했는지도 모르겠다. 화려함 보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함께하였다.
1. 일찍 일어나 용머리 다리와 지난 밤 가보았던 야시장 거리를 다시 찾았지만 지난밤의 그 혼잡고 활력 넘치던 시장은 신기루였나 보다. 그곳은 왕래하는 차량도 별로 없는 한적한 왕복 4차선 도로였다. 6시땡 조식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한바탕 수영을 즐기고 시간에 맞추어 프론트에 모였다.
오늘도 2호차에 올랐다. 지난 밤과 새벽 활동의 이야기꽃이 만발이다. 70이라는 나이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부지런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정말 100세는 거뜬할 것 같은 모습들이다.
매일 해안가를 달리던 차량이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든다. 목적지는 다낭시내에서 40km 떨어진 1485m 높이의 바니힐 관광지이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휴양지로 개발해 놓은 바니산 테마파크로 이동 중이다. 어딘가 산 중간에 도착했다. 케이블카타는 곳이다. 이리구불 저리구불 몇 번이나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고 드디어 도착 8명씩 분승하여 곤도라에 올라 먼거리를 이동하였다. 바닥이 안보이는 깊은 숲을 보면서 월남전 당시의 고엽제 살포에 대한 이야기등 훗날에야 증명된 슬픈 월남전 역사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삼균친구의 이웃 형이 고엽제를 해충이 달려들지 않는다고 몸에 바르고 지냈다는 이야기와 고엽제 피해를 알지도 못하고 일직 돌아가셨다는 슬픈 이야기에 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짙은 안개가 자욱히 깔린 산정에서 선계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는 중세유럽의 별천지가 있었다. 일반 관광객과 같이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이곳 저곳 돌아 봤지만 수박 겉핡기 밖에 안되었다. 설악산 소청높이의 이곳에 지금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식민시절에(1887년~1954년) 이런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들의 피땀어린 노동이 착취 되었을까 감상에 젖어 약소국가였던 그 시대의 조국모습이 떠올라 아픔을 공감하게 된다.
바나힐 정상 바나 부루 식당에서의 점심식사는 마치 한국 도때비시장 모습이다. 엄청난 인파와 들려오는 우리네 소리에 동네 유명 관광지 같다. 이곳의 음식도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다녀 갔는지 음식은 우리들 입맛에 딱 맞았다.
오후의 아오자이쇼에서 국뽕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아오자이쇼는 베트남 왕실복장서부터 서민복까지 전통복장의 변천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갈 즈음에 관중 한 사람을 불러 내었는데 친구 태규가 불려나갔다. 공연의 일부였지만 친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으며 너무도 당당하게 70나이의 멋진 모습을 보여 주어 자랑스러웠다.
피날레 공연에 이웃 여러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춤을 추는데 베트남 다음으로 한국국기를 단 공연자의 등장에 울컥해지 무엇인가 가 있었다. 온통 한국에 대하여 우대해 주는 모습에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 졌다.
저녁시간 브릴리언트 씨푸드 식당의 단독룸에서 우리는 열정 가득한 여흥시간을 갖기로 했으나 시스템 문제로 부분 공연만 할수있었다. 나의 자작시 칠순여행 낭송과 시조창 시범이 있었고 흥섭친구의 마이웨이 열창이 있었다.
2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일직 조식을 마치고 동네 한바퀴 산책을 하였다. 깨끗하지 못한 골목길의 모습과 어제 본 경기도 다낭시라는 간판 모습을 떠올리며 이들의 변화와 발전을 빌어본다.
마지막 날의 여정은 왠지 바쁘기만 하다. 서둘러 프론트에 모여 인원 점검하고 2호 차에 올랐다. 핑크 성당으로 유명한 다낭 대성당과 베트남 신흥종교인 까오다이교 사원을 조망하고 구 다낭시내와 용머리 다리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차량을 이용하여 참 편안하게 관광을 하였다.
마블마운틴 오행산이라고 불리며 다섯 개의 대리석 산이다. 동굴과 사원 베트콩 주둔지역등 전쟁의 상흔이 도처에 널려있다. . 발아래 바라보이는 다낭시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가까운 미군 주둔지를 많이 습격한 유명 전투지역이었다.
오행산을 뒤로하고 해안을 끼고 달려간 곳은 30층 높이의 해수관음상으로 유명한 손짜 영흥사였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의 크기에 압도 당했던 기억이 이곳에 와서 어이쿠야 하고 놀랐다.
저 멀리 해안에서 하얗게 우뚝 솟은 관음상이었다. 크다는 것 이외에 볼거리는 없지만 노상에서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원숭이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저녁식사는 무제한 삼겹살 파티다. 우리들의 70인생은 100세를 향한 시작일 뿐이다. 피곤하여 지친 기색이어야 할 친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젊음을 되찾았다. 한잔 두잔 돌아가는 술잔은 서서히 열광의 시간으로 안내하고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다. 우리는 젊음은 그 끝이 없다.
한강변의 마지막 여정 선택관광이었던 한강리버야경 크루즈가 우리를 반겼다. 저녁식사 시간의 여흥이 아직도 부족하였나 보다. 승선을 마치고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흘러나오는 흥겨운 트로트와 아주 조그마한 베트남 아가씨의 벨리댄스는 우리의 젊음을 일깨우며 지친 몸을 마음껏 불사르게 하였다. 한강변의 아름다운 야경은 기억에도 없고 그냥 학창시절의 추억만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안녕이다. 늦은 저녁시간 우리는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정들었던 현지 한국가이드와 또 묵묵히 열심히 일하던 현지인 가이드와 아쉬운 공항의 이별을 나누고 아담한 다낭 공항에 들어섰다. 이 여정을 마치면서 문득 베트남 전쟁에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참전했던 따이한 용사들의 용감한 무용담과 이 전쟁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아픔에 베트남에 대하여 무한한 미안함을 가슴에 새기며 공항을 떠났다.
안녕 잘있어라 경기도 다낭시여!
인천공항 도착 후 하나 둘 선착순으로 떠나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며 이 여행의 모든 경비를 지원해준 그 친구의 통큰 결정과 현지에서의 선택 관광과 작은 선물등 즉석에서 망설임 없이 지원 해 주는 모습에
감히 엄두 내 볼 수 없음과 행할 수 없음이 아프다. 살아온 날들을 아쉬워하게 되며 앞으로 변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