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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득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포르쉐」와 「비틀」 자동차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의 스포츠카 「포르쉐」를 알 것이다. 뒤가 부드럽게 깎인 날씬한 외양에 정지상태에서 불과 수초만에 굉음을 내며 시속 수백 km의 속도를 내는 이 차는 대당가격이 억대를 호가하는 최고급 스포츠카이다.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딱정벌레 혹은 풍뎅이 차로도 불리는 「비틀(Beetle)」도 잘 알 것이다. 이 두 차를 머리 속으로 찬찬히 연상해 보면 무엇인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사실 이 두 차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포르쉐」와 「비틀」은 모두 동일한 사람에 의해 설계된 차이다. 두 차를 설계한 사람은 페르디난트 포르쉐(1875~1951)로, 당시 유명한 자동차설계자였던 포르쉐가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대중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국민차로 개발한 것이 바로 「비틀」이다.
「포르쉐」와 「비틀」의 개발자 포르쉐의 외손자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 페르디난트 피에히 폭스바겐그룹 회장이다. 이 책은 평생 자동차를 개발하고 자동차회사를 경영해온 이공계 출신의 CEO가 솔직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서술한 자서전이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신화의 시작’은 그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포르쉐에서 일했던 시기를, 2부 ‘도전, 다시 도전’은 포르쉐를 그만 둔 뒤 아우디(Audi)에 입사하여 회장이 되기까지의 시기를, 3부 ‘성취의 나날들’은 93년 폭스바겐(Volkswagen)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2002년 퇴임하기까지의 시기를 서술하고 있다.(주석-국내공식수입업체가 Volkswagen의 한글표기를 ‘폴크스바겐’에서 최근 ‘폭스바겐’으로 바꾸었다. 책에서는 폴크스바겐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최근의 사정을 감안하여 폭스바겐으로 표기한다.)
3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피에히는 스위스에 있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63년 4월 1일부터 포르쉐의 경주용 자동차 엔진담당으로 자동차산업에 입문한다. 이후 피에히는 9년 동안 포르쉐에서 스포츠카를 설계하면서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포르쉐의 후계자 분쟁에서 포르쉐의 일가친척이 모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자, 72년 3월 1일 부로 9년 동안 근무한 포르쉐를 그만둔다.
피에히가 포르쉐를 그만 두자 당시 다임러 벤츠의 회장이었던 요아킴 찬은 피에히에게 고문 역할을 요청한다. 그러나 저녁 식사에 피에히를 초대한 벤츠의 찬 회장이 자동차 개발 엔지니어가 쓸데없이 비용만 초래하는 일을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자, 피에히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렇다면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기술이 진보하기를 바라면서 투자하지 않고서는 좋은 자동차를 만들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엔지니어는 다임러 벤츠에도 충분히 있습니다”.
72년 7월 자유를 얻은 피에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외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엔초 페라리를 방문하고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인 쥬지아로에게로 간다. 피에히는 아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쥬지아로의 집에서 견습생으로 지내면서 자동차의 생산과 공장기획을 배운다.
피에히가 다시 자동차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72년 8월 1일로, 이번에는 폭스바겐의 자회사인 아우디(Audi)에 취직한다. 피에히는 양산중이던 「아우디 80」에서 발생한 나사풀림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73년 초 시험주행 담당자를 거쳐 개발담당 이사로 승진한다. 그 후 피에히는 아우디에서 100% 아연도금, 알루미늄 소재를 채용한 세계 최초의 양산차 「A4」, 승용차용 4WD(4 Wheel Drive) 기술을 채용한 「콰트로」, 고효율의 디젤터보직분엔진(TDI, Turbo Direct Injection) 개발 등을 직간접으로 도우면서 88년 1월 1일부로 아우디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아우디의 회장으로 선출된 피에히는 전임회장과 달리 모회사 폭스바겐을 앞지르는 것을 자신의 주요 임무이자 개인적인 야망으로 삼는다. 모델과 품질에 있어 평균수준의 아우디가 아니라 폭스바겐을 추월하고 BMW와 다임러 벤츠에 필적하는 고급차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피에히의 목표였다. 2%에 불과한 수익률 또한 개선이 시급한 분야였다. 피에히는 경영진의 구조조정과 함께 90년까지 약 4,000명의 인력을 감축한다. ‘인정사정없는 독한 회장’이라는 악평에 대해 피에히는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도 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내가 전임자들처럼 온건노선을 걸었다면 이보다 훨씬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 대규모 인력감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경영개혁을 거친 후 출시된 3세대 「아우디 80」은 디자인부터 생산품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후 엄청난 판매대수를 기록한 아우디는 BMW와 벤츠에 필적하는 수준에 근접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모회사인 폭스바겐의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당시 회장이던 칼 한은 중국합작공장 설립(85년), 스페인의 세아트 합병(86년), 체코의 스코다 합병(91년) 등 과감한 해외진출 전략을 펼친다. 그러나 해외진출 업무를 여러 파트에 중구난방으로 분산시키는 바람에 후속대책이 비효율적이고 불투명하게 이루어졌다. 90년 폭스바겐의 자동차 판매가 300만대를 돌파했지만 겉과는 달리 자동차 판매에서는 거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폭스바겐에는 경고시스템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다음에야 겨우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92년 초 언론도 ‘구조조정 0순위’라고 말할 정도로 폭스바겐은 파산 일보 직전이었다. 경쟁업체에 비해 생산성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폭스바겐의 수익률은 형편없이 낮았다. 더 이상의 인력감축을 피할 수 없지만 인력감축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칼 한 회장의 연장 임기가 시작되자 후임자 문제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해 차기 회장후보로 피에히와 괴드베르를 놓고 폭스바겐 감독이사회의 공청회가 열린다. 상황이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는 측근의 연락을 받은 피에히는 폭스바겐의 회장자리는 잊어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기로 마음을 먹은 다음 곤히 잠을 청한다. 다음날 새벽 2시 다시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전화를 건 측근은 피에히가 자고 있던 중이었음을 눈치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잠이 오냐는 말에 피에히는 안 잤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 다음의 말에 피에히는 정말로 잠이 확 깬다. “회장이 결정됐습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요.”
폭스바겐의 회장이 된 피에히는 주 4일 근무제, 비용을 줄이면서 모델 수를 늘리는 플랫폼 전략, 3리터카(3리터의 연료로 100km 주행하는 고연비 친환경 자동차), 고급브랜드 벤틀리와 부가티 인수, 폭스바겐 그룹의 구조개편 등의 혁신을 펼친다. 그 결과 93년 회장을 맡을 당시 9억 920만 마르크의 적자를 냈던 폭스바겐은 94년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이후 99년을 제외한 모든 연도에서 계속하여 매출과 이익이 증가했다. 피에히가 회장으로 재직한 93년부터 2001년 동안 폭스바겐의 판매량은 72%(2001년 523만대 생산, 세계 4위), 매출액은 126%(2001년 390억 유로), 종업원은 28%((2001년 32만 6천명)가 증가했다. 2001년 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들로부터 피에히는 “폭스바겐 그룹이 상위 클래스로 순조롭게 진입했다”는 평가와 함께 격려와 칭찬을 듣는다.
이밖에도 자서전에는 두 번의 결혼과 동거에서 12명의 자녀를 낳은 이야기,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프랑스의 만찬장에서 체포된 이야기, 시험도 안하고 양산을 시작한 「포르쉐 917」이야기, 미국과 독일간의 분쟁으로까지 번진 로페즈 스캔들 등의 일화를 솔직하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피에히 회장의 전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많은 지면이 자동차의 기술개발과 관련 인물에 할애되어 있어 자세한 설명을 얻기가 쉽지 않지만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를 피에히 회장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으로 꼽고 싶다. 그것은 이공계 출신 CEO의 기술혁신에 대한 집념과 인재중시 경영 및 변화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도전정신이다.
먼저 기술혁신에 대한 피에히 회장의 집념은 기술개발을 위해 포르쉐와 아우디에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추진한 이야기,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동차를 개발하라는 벤츠 회장의 요구에 벤츠를 그만 둔 이야기, 회장 퇴임식보다 1리터카의 시험운전에 더욱 흥분하는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피에히 회장의 기술혁신에 대한 집념은 외할아버지가 제작한 자동차 중 후세대에 가장 오랫동안 영향력을 끼쳤던 「비틀」에 대한 반감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자서전에서 피에히는 지칠 줄 모르는 창조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외할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비틀」이 40년이 지나서도 2,100만대 이상 불티나게 팔렸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덤에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고, 또 한 모델이 수천만대 이상 생산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이라 쓰고 있다. 물론 열정적인 기술개발자였던 포르쉐도 그러하였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구절은 피에히 자신의 생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인재중시는 피에히가 외할아버지 포르쉐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피에히는 자신이 자동차산업에 몸담게 된 것을 외할아버지의 덕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 중에 지배적인 사람이 있다면 어린이와 청소년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는 대개 직계 자녀에만 해당되고…… 나는 외할아버지를 단 한 번도 지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탁월한 자동차 제작자였음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피에히는 자동차보다 비행기와 경량 차체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경량차체에 대한 관심은 후에 3리터카와 1리터카(1리터의 연료로 100km를 주행하는 차)의 개발로 구체화된다. 피에히는 “외할아버지의 업적 중에서 가장 벤치마킹하고 싶은 부분은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이라고 적고 있다. 폭스바겐의 회장 이임식에서도 BMW 출신의 피쉐츠리더 신임 회장에게 최대한 빨리 인재 풀을 구성하여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피에히는 외할아버지의 설계사무소에서 환상적인 팀워크를 배운다. “협력과 독자적 연구의 두 톱니바퀴가 환상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포르쉐 설계사무소의 팀워크가 바로 그것이다. 피에히는 “이런 팀워크야 말로 경쟁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라 말하면서 분야별 최고 귄위자들의 팀워크에 대한 집념을 한평생 간직한다.
마지막으로 피에히 회장은 변화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굽힐 줄 모르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였다. 퇴임식장에서 주주들로부터 쉴새없이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 피에히 회장은 자신이 묵묵히 걸어왔던 과정을 떠올렸다. 수많은 의혹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그렇게 단호히 걸어 갈 수 있었던 것은 폭스바겐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 자신 같은 사람에게 기회가 되며 기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자신은 절대로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 회고하고 있다. 자서전의 마지막 역시 변화에 대한 도전정신으로 끝맺고 있다.
“주주총회에서 받은 박수 갈채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던 것은 1리터카의 시험주행이었다. 시험주행 중에는 항상 뭔가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돌발상황이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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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동차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모형 자동차를 들고와서 조카들을 모아놓고 설명을 늘어놓던 자동차 담당 한경기자인 막내동생 생각이 더 나네요.. 연비가 좋고 승차감이 좋은 수입차를 타라고 하지만서도 몰라서 못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