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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질랜드 캔터베리한인침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제임스 김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1) 본문 : 시-023-001 압력 해소제 (시편 23편)
염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을 중심으로 해서 압력을 해소하는 법에 대해 시리즈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압력을 가져다주는 일곱 가지 출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들 전부가 시편 23편에 나와 있습니다. 또 그러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이 시편 23편에 나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정말로 누구이신가를 잘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시편입니다. 앞으로 시편 23편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가를 배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더 이해하시면 할수록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쉬워집니다.
우리가 압력을 받게 되는 첫째번 원인이 바로 염려입니다. 우리 모두가 염려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물질 문제일 수도 있고, 직업이나, 인간 관계, 결혼, 자녀, 건강상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염려는 세 가지 문제를 동반합니다. 염려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합리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염려는 건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염려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염려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합니다. 염려는 어떤 문제도 풀지 못합니다. 염려는 시작하지도 않고 우리의 속만 태웁니다. 마치 기아를 넣지 않고 액셀레이터만 밟는 것과도 같습니다. 연기는 자욱하게 나나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합니다. 염려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미래를 다스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오늘을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염려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염려는 효과적이 아니고 실상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염려는 합리적이 아닙니다염려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과장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더욱 더 크게 만듭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에 대하여 더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욱 더 커집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바꾸십시오. 염려는 건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염려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염려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게 되면 위궤양, 요통, 두통, 불면증 등 여러 가지의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식물이나 짐승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염려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입니다. 우리는 실상 염려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지음바 되었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불행하게 되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염려에 대한 고전 영어의 뜻은 “질식시키거나 숨이 막히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염려가 하는 일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염려는 우리에게서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염려는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염려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염려하는 것부터 배웁니다. 오랜 실습을 통하여 염려하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염려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입니까?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실 것을 믿으십시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것이 어떻게 삶의 압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것이 어떻게 당신이 염려하는 것의 해결책이 됩니까? 우리들은 이 점을 알기 위해 목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것이 당신이 염려하는 것의 해결책이 됩니까? 우리들은 이 점을 알기 위해 목자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 목자는 제공해 줍니다. 먹을 것과 안식처, 그리고 사람의 기본적인 필수품들을 제공해 줍니다.
2. 목자는 보호해 줍니다. 그는 우리가 적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도록 방어해 줍니다.
3. 목자는 인도해 줍니다. 목자는 양들이 혼란된 상태에 처하게 되어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모를
때에 인도합니다.
4. 목자는 고쳐 줍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고쳐 줍니다.
이 점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위에 나열한 네 가지를 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의 목자가 되게 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시며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며 우리의 삶에 잘못된 문제들을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게 하면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인도하며 보호하고 바로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욕심을 채워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채워 주신다면 아마도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못쓰도록 버려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정말로 잘못되어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지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당신은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 보겠다. 아마 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걸고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든지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하시면 하나님의 성품을 걸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것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됩니까? 의사에게 지불할 돈도 포함됩니까? 월세도 포함됩니까? 영적인 필요도, 경제적인 필요도, 건강상과 인간 관계상의 필요도 다 포함됩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다면, 우리가 혼돈될 때에 인도해 주시며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을 때에 고쳐 주시겠다고 하셨다면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실상은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무엇이 보상되는지를 알면 보상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해도, 보상이 되는 것을 알면 그런 것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 7천가지나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람을 책임져 주시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것들을 이해한다면 걱정할 것들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을 것입니다. 염려는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도 아니며 건전하지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목자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마다 마치 무신론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실상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할 때마다 바로 무신론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염려란 무신론이 실제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신 것들을 내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목자는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목자가 되도록 허락하시는 사람들만의 목자가 되십니다.
1. 예수님을 나의 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 영어로 보면 주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목자가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지 않고는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다스리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인이란 누구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쓰는 말로 표현한다면 사장, 경영자, 회장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란 최고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내 삶의 모든 사항을 예수님께서 결정하신다면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인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아니시라면 목자도 아니십니다. 주인이 나의 목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나타냅니다.
(요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나도 아는 것이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이 세가지 의미는 줄친 세 가지 단어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은
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⑵ 예수님을 듣는 것입니다.
⑶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염려를 하는 한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다스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염려란 항상 다스릴 수 없는 것을 다스리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염려란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지 않는 책임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나 경제나, 환경이나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리려고 할 때에 염려하게 됩니다. 염려란 경고하는 신호등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때마다 불이 꺼져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다스리려고 하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염려를 하게 될 때마다 결코 다스리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내가 허락해야만 합니다.
내가 자신의 삶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이 바로 염려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할 때마다 우리는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다스려서 일하려고 할 때에, 내가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리고자 시도할 때에 우리 속에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하나님이 아니며 너도 알고 하나님도 아시는 것은 네가 모든 것을 다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 다스리냐가 주요 문제점입니다. 하나님의 지시함이 없어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다스린다면, 여러분들은 염려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것들을 자신의 힘만으로는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목자가 되셔서 나의 삶을 지배한다면, 나는 땀을 흘리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2. 모든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걱정하시는 모든 것들을 내놓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친구가 되시기를 원하시며 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으십니까? 그런데 염려할 시간은 있으십니까?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을 내어놓고 기도한다면 염려할 것이 아주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나 기도는 합니다. 염려란 하지 않고서 애태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접촉하게 합니다. 내가 염려할 때마다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겁에 질려 있거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께 필요한 것들을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임함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종교적인 것만을 기도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는 것들만을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내 놓고 다 기도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염려할 정도로 큰 문제라면 다 기도해야 될 만큼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염려보다 더 크십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맡겨 버리라” 라는 말은 다 버려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떨쳐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놀랍게도 우리가 받은 압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라는 말은 우리가 성이 나거나 걱정하거나 압력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는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하나님께 맡기고도 여전히 염려합니다. 마치 낚시로 고기를 낚는 것과도 같습니다. 낚시를 던지고는 다시 줄을 감은 것처럼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고는 다시 걱정합니다.
지난 주일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비행기를 타고 갔었습니다. 그 때에 오렌지 카운티상의 계곡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탄 비행기가 위로 올라가 안개를 벗어나자 마자 해가 밝게 비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염려란 때로는 짙은 안개와도 같습니다. 짙은 안개가 몰려오면 잘 볼 수가 없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운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안개는 환상입니다. 염려가 그와 같습니다. 염려와 안개가 환상을 만듭니다. 국가 표준청(National Bureau of Standards)에서는 “한 도시에 7개 블럭을 100피트나 짙게 깔려 있는 안개는 실상 압력기로 축소했을 때에는 한 잔의 물밖에는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염려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염려가 확장되면 큰 문제를 야기시킴니다.
3. 한 번에 하루씩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하루씩 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사십시오.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비가 오기 전까지는 우산을 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실상은 내가 어제 걱정한 내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 할 때에 어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일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염려란 단지 오늘을 혼란하게 만들 뿐입니다. 미래가 아주 어렵게 우리를 짓누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조그만 조각으로 한 번씩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에 24시간씩만을 주십니다. 한 번에 하루씩 사십시오.
(마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염려하는 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루씩 선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약이 없습니다. 어느 세미나의테이프나 책도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영적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다시 염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를 이기는 해결책은 매일 매일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매 시간마다 또는 매 순간마다 선택하는 것에 좌우됩니다.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믿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나의 주인으로 삼으려고 하는가?내 삶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누가 모든 결정을 하는가?만일 내가 다스리고 있다면 염려할 것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배하고 계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문제이고 그 분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으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염려하게 합니까? 왜 이런 것들이 잘 될 것인가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방황합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 뱃 속이 쓰라립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면하고 있는 것들을 액면 그대로 아십니다.
(마6:32∼33)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집에 가셔서 시편 23편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 여섯 구절에 “나의, 내가, 나를, 내, 내게” 라는 나를 나타내는 말이 14번이나 나오는 것을 발견할 겁니다. 시편 23편은 아주 개인적인 시편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 7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시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로 염려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종교가 내가 받고 있는 압력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종교가 내가 염려하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들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는 내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고 보호하고 인도하며 바르게 잡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은 종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대하여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윌버 채프만씨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열살 난 소년을 격려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 소년은 죽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채프만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를 원한다. 손을 내게 내밀어 다오. 성경은 주님께서 네 목자라고 말하고 있단다. 네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걱정하게 될 때마다 주님은 너의 목자인 것을 기억하고 집게손가락을 붙들어라.”두 주가 지난 후에 그 소년이 잠을 자면서 죽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소년의 어머니는 그 소년이 집게 손가락을 붙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무슨 압력을 받으시며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신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단어들을 강조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다른 것들은 다 가짜이며 거짓신들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자신있게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실 것이다가 아니라 정말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자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인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자이시고 주인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목자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든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자가 되시고 주인이 되신다면 당신은 걱정을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염려를 지고 다니시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압니다. 내가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내 삶을 다스리려고 하고 있다는 경고임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내 삶을 내가 다스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저의 삶을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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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쁨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시편 23:2)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이 시편을 압력을 제거해 주는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받는 압력 7가지에 대한 해결책을 이 시편이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너무 바쁜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시원한 바람 속에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 바쁜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레지스터라는 신문에서 최근에 발표한 것을 보면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일하는 것을 택하며, 즐기는 것보다는 일하는 것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 내가 일만 아는 사람이 아닌가를 알아보는 방법
① 항상 서두르며 사는가?
② 항상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은가?
③ 휴가를 내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가?
④ 좀 쉬면서 일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한 사람 이상이 있는가?
⑤ 편히 쉴 때에 죄의식을 느끼는가?
⑥ 병들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는가?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난다면 당신은 일만 아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모든 크리스마스 카드가 사업에 관계된 사람들로부터 온다.
- 자녀의 사정을 알기 위해 학교에 가나 자녀가 무슨 과목들을 택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 교회에도 비퍼를 차고 온다.
- 가정 식구들이 당신을 집에서 잠만 자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 Tom Snyder를 봄으로써 일과 후에 피로를 푼다.
- 사업에 관계된 자료를 화장실에서 읽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형태의 삶을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촛불을 켜고 다 탈 때까지 깨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똑똑한 사람은 아닙니다. 때로 집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일이 잠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면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 예수님께서 할 일들을 너무 많이 주셔서 훨씬 더 바빠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여러분들이 양이라면 시편 23편을 아주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23편 2절의 경우는 양들에게는 완전히 천국에 있는 것과도 같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편히 쉬면서 위기를 회복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히 쉬는 것과 즐거움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고 균형잡힌 멋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일만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을 더하시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줄이셔서 더욱 쉴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CNN 방송국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 중 59%는 일을 덜하며 더 쉬고자 합니다. 해리스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는 한 세대 전보다 8시간 반이나 휴가 시간이 줄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을 더하고 쉬는 것을 줄이고 있습니다.
1. R -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E -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입니다.
3. L - 일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4. A - 자신의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5. X - 자신이 받고 있는 압력을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편히 쉬고자 한다면
1. 내가 가치있는 사람임을 인정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일과 자신의 가치를 함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열심히 일해서 달성하는 것이 많이 있으며 우리가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과 누구인가를 혼돈해서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의 가치관을 정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이름을 묻고 그 다음에 묻는 것이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가치관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가를 우리가 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부정적인 사회에 살면서 우리 마음 속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왔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사귀던 친구가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너는 결코 큰 사람이 될 수가 없다”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지나치게 일하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증명해 주겠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달성한 업적들을 보여 줌으로써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겠다”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많이 달성해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매나 채찍이 우리의 뼈를 부러뜨릴 수가 있으나 내 이름은 결코 오랫동안 상처를 입을 수가 없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름 때문에 오랫동안 상처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보다도 명예상으로 당한 모욕이 더 오래갑니다. 내가 결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들은 말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강하게 남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열심히 일합니다. 계속 일합니다. 누가 나를 능가할 수 있습니다. 누가 나를 앞장서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보다 앞장섬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위대함과 중요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지나치게 일을 합니다. 쉬지를 못하고 계속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약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우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나이고 하나님께서는 시사한 것들을 만드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는 좋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된다면,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고 내가 나를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전 삶을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가치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새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아시고 돌보신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보시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⑵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⑶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덜 사랑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실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분이 누구이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더 열심히 일함으로써 우리가 더 가치있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손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들은 주님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의 이름을 새긴 손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2.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즐기십시오.
(전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우리들은 더 많이 가지는 것에 열중한 나머지 현재의 것을 즐기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더 가지려고 너무 열중한 나머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즐기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을 즐기지를 못합니다. 아무도 집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하느라고 사무실이나 사업처에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더 얻고자 하는 병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면 우리도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보조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들이 집을 재융자했는지 파산 신고를 했는지도 모르고 남이 하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돈도 없으면서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으시대려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삽니다. 우리들은 더욱 더 소유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빚더미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빚을 갚으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일을 합니다. 우리가 산 물건의 빚을 갚기 위해서 일하느라고 모든 시간을 다 소비하다 보면 가정 식구간에 인간 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조금 가지고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항상 바쁜 것보다 낫습니다. 사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와 왔습니다. 죽기전에 “사무실에서 더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식들하고 시간을 더 보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인간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좋게 하는데 보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합니다. 미국 문화권 내에서는 “일전 한푼 없이 죽는 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때가 세상을 떠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마지막 수표를 쓰고 아무것도 없이 죽는 것이 실상은 괜찮습니다. 얼마나 시간을 잘 맞추는 것입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즐기시고 더욱 더 가지려고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3. 일하는 것을 제한하십시오.
일하는 것 대신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의식적으로 시간을 내야 합니다. 나는 매 주일 몇 시간
을 일하려고 하는가를 결정하고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나는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 가족 식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일하는 시간만큼 내 삶에 중요한 시간입니다. 특별히 이런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⑴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일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에서까지도 일하고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을 안고 삽니다.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는 시간을 제한하지 않으면 계속 일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⑵ 홀로 자녀를 돌보는 독신 부모입니다.
어떻게 일을 하고 가정을 돌보는지를 알기가 힘이 듭니다.
독신 부모들은 너무나 쉴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쉬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결국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전10: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항상 일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활을 늘 잡아당기기만 하면 그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화가 나서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월요일 종일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월요일은 내가 쉬는 날입니다.”“사단은 하루도 쉬는 때가 없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사단처럼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라고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출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것이 십계명 가운데 있는 네 번 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너무나 중요해서 하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들보다도 앞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쉬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십니다. 매 칠일마다 하루씩 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주일에 하루씩 쉬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그 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일이란 쉬는 날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우리가 어느 날을 택하든 한 주일에 하루를 택하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요일은 목사들에게는 안식일이 아닙니다. 일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쉬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에 무엇을 합니까?
⑴ 육신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몸을 쉬지 않으면 몸 자체가 시간을 내서 쉴 것입니다. 감기에 걸리거나 병원에서 쉬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쉬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몸이 쉬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불란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불란서에서는 일요일에 쉬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수 년이 지난 후에 그 법을 다시 바꾸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불란서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지치게 되어서 그랬습니다. 쉰다는 것이 어색하게 생각되십니까?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내어 쉬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바쁘십니까? 예수님이 하셨던 것들보다 여러분이 하는 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⑵ 감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감정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까? 조용함이 필요합니다. 오락이 필요합니다. 무엇인가 우리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사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Time지에 “20세기 우울증”이라는 주제하에 현대인들이 너무나 빈번히 받고 있는 압력과 걱정과 좌절감에 대하여 언급을 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이 이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신뢰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이 의미있는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삽니다.
⑶ 영혼을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줍니다. 교회에 큰 문제를 안고 올 때에 예배를 통해서 그 문제를 바로 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그런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며 다룰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4. 내 가치관을 조정하십시오.
내 삶에 기쁨을 줄이기 위해 중요한 것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전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더욱 더 얻으려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의 경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건을 더 얻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막8: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목숨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까? 현재 돈을 아주 많이 법니다. 그런데 자녀들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몇 년후면 다 집을 나갈 것입니다. 지금 자녀를 등한시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실상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또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내가 현재 받고 있는 압력을 하나님의 평안으로 바꾸십시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받는 모든 압력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가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피곤함을 느낍니다 - 근육이 피곤해졌습니다. 이런 피로는 속히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피곤함을 느낍니다 - 감정과 느낌으로 피곤합니다.
영적으로 피곤함을 느낍니다 - 영이 메마름을 느낍니다. 이것이 최고로 피곤한 것입니다.
아마 휴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휴가는 감정적으로 피곤한 것이나 영적으로 피곤한 것을 돕지 않습니다. 감정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메마름을 다시 충전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두 주간 타히티나 다른 좋은 곳으로 휴가를 갔다가 오는 것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됩니다. 여전히 압력을 받게 됩니다. 감정적인 문제나 영적인 메마름은 시간을 내서 쉰다고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가치관을 재조정하거나 내가 받는 압력을 하나님의 평강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들은 누워서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휴식을 거절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항상 일만 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십계명을 범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성숙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양도 잔디에 누워서 쉬기를 싫어합니다. 시편 23편 2절을 보십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가 강제로 양이 눕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쉬지를 않는다면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눕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속도를 올바르게 맞추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너무 빨리 가거나 더디게 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내 속도를 조정해 주셔야 합니다. 내 자신보다도 나의 안팎을 더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받는 압력을 주님께서 평안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의 길일뿐만 아니라 가장 건강한 길이며 가장 완전한 길입니다. 이렇게 살 때에 삶의 균형이 잡히며 참 쉼과 만족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초대를 하십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가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무겁게 더 얹어주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해주십니다. 지치셨습니까?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으십니까?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님께 나오시면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쉬는 법을 주님께서 보여 주실 것입니다. 참 자유와 평안을 찾게 될 것입니다.
========================================================================================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3) 본문 : 시-023-003
상한 심령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시23:3)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위의 말씀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기적으로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이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들은 실망과 좌절감과 절망으로 마음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모두가 지치며 실수하고 좌절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과거로부터 받은 남이 모르는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상처와 패배의 아픔과 감정적인 불안을 안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불안한 것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다음 세 가지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소생시켜 주십니다.
1. 하나님께서 나의 죄책감을 제거하시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으로부터 해방시키도록 하십시오.
3. 하나님께서 나의 불평을 바꾸도록 하십시오.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불평 때문에 우리들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합니다.
1. 하나님께서 내 죄의식을 제거하게 합니다.
죄책감보다 영혼을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두 가지 문제가 야기됩니다.
⑴ 우리 모두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실수를 합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들은 죄의식을 안고 삽니다.
⑵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식을 안고 갑니다.
(시38: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죄책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를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으며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매장시켜 버렸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적절하게 않은 때에 죄의식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죄를 부인하는 것이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소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 큰 죄가 아니라고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지금까지 기억하십니까? 극소화하는 것도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합리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이제는 그런 것들이 죄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행운을 알려주는 과자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두 번 저지르게 되면 처음 저지를 때보다 훨씬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됩니다.”
살인을 열 번이나 하게 되면 처음으로 살인할 때처럼 그렇게 나쁘게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 어떤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우리의 양심이 그 점에 대하여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죄책감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첫 번째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다손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근거하여 자신이 잘못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합리화하는 것은 합리화한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괜찮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서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머리를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내가 잘못한 것과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을 측정하는 저울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저울을 조정해서 내가 나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결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자책을 합니다. 자신 자신을 처벌합니다. 우리 마음 속으로는 누가 내 삶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지불해야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잠재 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합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아파질 수가 있습니까?물론입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확실히 그렇습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실패자라고 느끼게 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던 많은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의기소침하게 됩니까? 우리가 성공할 수 없다는 죄의식이 마음 속에서 강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어떤 방법도 죄의식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해결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죄의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실 수가 있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지은 죄뿐아니라 앞으로 짓게 될 모든 죄악들과 실수, 그리고 후회하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위하여 지불하신 대가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의식이 제거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우리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죄들을 저질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의 용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미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하나님께 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뇌물을 써서 용서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 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깨끗한 양심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수없이 많이 간구했는데도 아직도 죄의식을 왜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자유롭게, 완전히 아무 조건없이 우리가 처음에 요청할 때에 죄의식을 완전히 제거해 주십니다.
이미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첫 번에 요청할 때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죄라고 느낀다면 그런 느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나쁘게 느끼며 우리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는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합니다. “그런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한 후에는 “그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십니까?
(골2:13~14)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말은 모든 죄가 다 완전히 제거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늘 완전하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다속 제일 깊은 곳에 던져 버리시고 다시는 재론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꾸 재론합니다. 천국에 가게 되면 제일 첫번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용서함 받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십니다. 이 사실이 성경상에 나타난 아주 놀라운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나와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정말로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릴 수가 있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기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시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 죄를 도말하십니다. 그 말씀은 그 죄에 대해서는 다시 재론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무효로 인정하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 죄의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가 청구서를 지불한 후에도 그 청구서에 대하여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청구서를 지불하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용서함 받은 죄를 가지고 괴로워 하십니까?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백한 죄를 잊어버리시는데 우리가 안고서 고민할 이유가 있습니까?하나님께서 더 이상 문제도 삼지 않으시는 것들을 가지고 왜 자꾸 자신을 괴롭히십니까?정말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지를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나 잘못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수하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복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이미 처벌하신 것을 가지고 왜 내가 자신을 처벌하려고 합니까?예수님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못박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죄의식을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을 제거하시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모든 것들은 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상처를 받게 되며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한 곳입니다. 어느날은 이유도 모르게 고독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입니다. 어떤 날은 절망에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홀로만 이런 일을 당한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슬픔을 맛보고 손실과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께.
작년에 20년간 함께 살아온 결혼 생활이 끝장났습니다.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혼한 상태에서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 감정이 상해 있고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배척 당했다는 심정을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슬픔에 잠겨 있고 제 마음은 고독함으로 신음합니다. 저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빈집에 가서는 울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는 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로 너무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순간 순간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순간을 이기기가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감정적으로 손상되어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삶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목사님, 제발 상처받은 제 맘을 도와주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상처를 아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의 아픈 곳을 돌봐 주십니다. 본 교회의 성도님들이 함께 상처와 위기를 돕기 위하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텅 빈 마음과 허전한 마음을 오직 예수님께서만 채워 주실 수가 있습니다.
마음 속이 찢어지는 것 같은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삶의 슬픔이 극도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자신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십니까?“만일, 이랬었더라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십니까?내게 상처주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감추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십니까? 그런 다음에는 고독함을 느끼면서 홀로 불행하게 사십니까? 아주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상에 나오는 다윗은 슬픔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에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31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흘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마음 속에 상처를 입는 것이 얼마나 자기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해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큰 실수를 저지르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로 고통을 받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마음 속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자가 세상을 떠나서 슬픔에 잠깁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거나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은 우리가 어떻게 슬픔을 다루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 것이 시련 51편에 나옵니다. 죄 때문에 상한 심령이라면 시편 51편을 읽으시면서 다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슬픔에 잠겼습니다. 밧세바가 이런 불륜의 관계로 인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갓난 아이가 아주 병들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갓난 아기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 잘못으로 저 아기가 고통을 당합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제 실수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쁜 영향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를 살려 주십시오. 그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나 그 아기는 끝내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슬픔 가운데서 다윗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세 가지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 가지를 하셔야 합니다.
● 세 가지 해야 될 일들(삼하 12장)
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당신은 부모나 동업자나 친구에 의하여 상처를 받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슬퍼할지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치유 받으며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첫 단계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배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는 그 첫 단계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첫 번으로 이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⑵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삼하 12:20)과장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념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살아가면서 고통은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피할 길이 없으나 불행함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것을 너무나 오래 간직함으로 계속 애통하게 합니다. 슬픔을 너무 오래 안고 살 것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마시고 “하나님, 이 환경을 통해서도 역사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⑶ 잃어버린 것들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삼하 12:24)
어떤 분들은 지금 당면한 슬픔을 안고 고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슬픔들이 여러분들을 더 치명적으로 이끌도록 하시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삶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고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식과 슬픔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우리 삶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간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통의 노예로 남아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나의 원망을 바꾸시게 합니다.
불평이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들 때문에 우리들은 죄의식을 느끼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것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살면서 상처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입니다.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줄 것입니다. 어떻든 상처를 받으며 마음이 아픕니다. 삶의 상처를 받을 때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 “bitter”와 “better”의 “I”의 차이입니다.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환경이 내게 치명상을 가하게 할 수도 있고 내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상처를 받을 때에 더욱 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만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에,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위에 고통이 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Job5:2) To worry yourself to death with resentement would be a foolish, senseless thing to do
분노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전혀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우리가 계속 마음 속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지금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에 대하여 분노를 느낄 때마다 다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는 아직도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없으나 아직도 그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과거의 상처를 계속 안고 사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만 상처를 줄뿐입니다.
(욥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불평을 어떻게 다룹니까?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이 세상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공평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늘 이루어지는 것처럼 세상에서 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번영합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많은 세사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온갖 범죄와 불공평, 편견, 인종차별, 성폭행, 강간, 살인, 상처와 남용이 현존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복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복수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먹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엡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어느 곳이 천당이고 어느 곳이 지옥입니까?모든 쓴 마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용서해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해 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쓴 마음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쓴 마음을 품게 하면 나는 실제로는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과 선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들과 악한 것들과 악과 편견과 죄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하여 내가 눈이 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이고 해로우며 상처받은 일까지라도 나를 바꾸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내가 쓴 마음을 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의 상처를 고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제가 죄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들 마음에 무엇인가 떠올라서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없습니까? 모든 것을 아니라고 하고 합리화하고 경감시키고 합리화한 후에도 역시 내 마음이 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죄를, 마음에 받은 상처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죄를 제거할 수가 없으나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전문가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죄를 계속 안고서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과거가 계속 내게 상처를 주는 것을 중단케 하십시오.
자아 개선을 하는 책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참 구세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다루십니까?슬픔에 대해 애통하시기보다는 신음하십니까? 잃어버린 것을 보기보다는 남아 있는 것을 보십니까?현실을 직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슬픔이 나를 짓눌러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십니까?자신의 선택으로 만든 슬픔의 노예가 되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문을 잠근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스스로 문을 잠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을 제거해달라고 말씀하십시오.
원망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 지금도 나를 괴롭게 하도록 하십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여러분의 슬픔, 죄책감, 그리고 원망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시편 42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왜 우리가 낙망합니까? 왜 불안해합니까? 우리가 낙망할 때에 다윗은 목자들이 쓰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 단어는 양이 스스로 들어간 후에 나올 수 없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양들은 이렇게 지음을 받아서 한쪽으로 넘어져서 네 발이 다 하늘을 향하게 되면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리로 허공을 치고 헛수고일 뿐입니다.
“매애”하고 울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상태에서는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동물이나 와서 공격할 수 있고 양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양이 다리를 하늘로 향하여 누어 있게 되면 위에서 가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가스가 위를 굳어지게 하여 공기가 몸 속에서 유통하는 것을 막아 한 시간 내로 질식하게 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리가 마비됩니다. 뜨거운 날에 이런 상태에 처한 양은 수 시간 내에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런 극심한 상태를 도와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킬 때는 즉각적으로 회복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선 다리를 위로 향하고 있는 양에게로 목자가 옵니다.
첫 번째로 목자는 네 다리를 사랑으로 마사지 해주어 다리에 피가 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양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양에게 안정감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손을 배에다 대고 양을 부드럽게 돌립니다. 다리가 약해져서 스스로 서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들어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면 점차로 다리에 힘을 얻으며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목자가 양이 이제는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느낄 때에 양이 부드럽게 목자의 손을 빠져 나가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슬픔, 죄책감이나 원망으로 가득 차서 스스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손길과 우리를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를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일으켜 주시고 다시 제 발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간에 여러분이 낙망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를 다시 소생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실 때에 우리에게 자신과 기쁨과 평안과 힘이 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소생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동차, 그림, 음악, 레코드, 건물들 복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 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욥11:13~16)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것입니다. 그 분이 여러분의 목자와 구세주가 되게 하십시오.
(시23:3하) 결정하지 못함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4) 본문 : 시-023-003
결정하지 못함으로 받게되는 압력
삶이란 것은 여러 가지의 것들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성공이란 근본적으로 현명한 결정을 함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결정을 하고 그 결정한 것들이 또한 우리를 형성합니다.
모든 결정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을 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을 하는 것이 때로는 큰 압력을 가져다 줍니다.
잘못된 결정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걱정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분들은 지금 결정해야 되는 문제들을 결정하지 못함으로 압력을 받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금주에 아주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택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해야 할 것인가? 내가 참여해야 되는가, 아니면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가? 결혼을 해야 될 것인가? 새로운 직장을 택해야 할 것인가? 이사를 가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들을 결정하지 못함으로 오는 압력이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모든 일에 안정성이 없다고 말해준니다.
(약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정함이 없다”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는 뜻입니다.
삶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없게 될 때에 허우적거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핀볼 게임에서 공이 이리 저리 부딪치며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한 후에도 또 다시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하여 “정말 내가 바른 결정을 한 것인가?”하면서 생각해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 것인가?”하며 안절 부절함으로써 압력을 받게 됩니다.
결정을 할 때에 오는 압력을 피하는 해결책이 있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시편 23편 3절 후반 절은 그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시23:3)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결정을 할 때에 압력을 해결하는 비결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선한 목자는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주시고 인도해주시며 보호해 줄뿐만 아니라 또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의 길이란 올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만약 지금 우리에게 말한다면 올바른 길은 우리가 궤도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궤도에서 벗어나기란 아주 쉽습니다. 사소한 일에 사로잡혀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이 정상적인 궤도에 머물러 있도록 해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아마도 이런 고백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내 삶의 방향을 제시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실상은 더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게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게임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지를 몰라 당황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을 하나님은 즐겨보시는 괴퍅한 분이십니까? 물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알기를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할때에 일어나는 큰 문제중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된 곳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느낌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신비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에 바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조직적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기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을 누군가가 제시해 주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9가지 단계”입니다. 이 공식을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공식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에 있어서 마술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기를 기다립니다. 하늘에다가 글을 쓰시거나 전화를 걸든 아니면 전보를 보내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사람들이 사용하는 위에 열거한 모든 방법들은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좌절감을 느끼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느낌이 아닙니다. 어느 일정한 공식도 아닙니다. 무엇인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좌절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하면 하나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가 네 가지를 해야 됨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도함을 받으려면
1. 내게 인도자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믿음으로 방향 제시를 간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4.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1. 내게 인도자가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특별히 남자들에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우리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방향을 물어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잃어버릴 때에 중단하고 방향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헤매게 되고 방황하게 되고 곁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이 선한 목자가 필요하듯이 우리들도 삶을 인도해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방황하게 됩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들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큰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안내자, 인도자가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양은 잘 보지 못합니다. 멀리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박쥐처럼 눈이 멀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양처럼 눈이 멀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양은 앞을 멀리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이 가는 길이 절벽으로 인도하는 길인지, 불 가운데로 인도하는 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인도할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내년이나 십년 후는 말할 것도 없고 실상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오늘 오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미래를 알려고 아무리 애쓴다 할지라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무슨말을 한다 할지라도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양은 멀리 볼 수가 없고 우리 또한 미래를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비틀거리게 됩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우리 모두가 결정을 할 때에는 옳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잘못된 것임을 깨달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어떤 길은 아주 막혀 버립니다. 다른 곳으로 전혀 인도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빗나가기 쉬운 것입니다. 양은 방황하게 되어 있고 우리들은 미래를 볼 수 없음으로 우리도 양처럼 방황하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인정 해야 합니다.
(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2. 믿음으로 방향 제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여 줍니다.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야보고서 1장에 어떻게 지혜를 얻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약1:5-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시려고 하시며, 정말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려고 갈망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으려면 두 가지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는 올바른 대상인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올바른 태도, 즉 믿음으로 응답을 기대하면서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간구하고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우리가 가진 믿음에 따라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간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고 합니다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자기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란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혜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처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나쁜 결정을 하시지 않습니다. 결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그 분에게 귀를 귀울이면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방 안에도 라디오 전파와 텔레비젼 전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방 안에도 여러가지 소식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는 없으나 올바른 기구를 가지고 채널을 맞추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라디오가 있으면 들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디오 주파를 만든 자가 우리가 그 주파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고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수화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1) 수화기를 꺼놓은 상태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3) 다른 채널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채널이 13인데 채널 4를 돌렸다면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채널이 믿지 않을 뿐입니다.
(욥33:14)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합니까? 채널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채널을 사용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들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교사들, 인상, 환경, 고통을 사용하시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같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를 여러 가지로 성경은 제시해줍니다. 삶은 여행이며 성경은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책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침반을 주셨습니다. 그 나침반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내자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면 지도책과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갔다 오신 분이 사막 가운데서 우리를 실제로 인도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도하는 지도책과 같습니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지도책을 읽지 않으면 전혀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성경은 혼돈될 때에 문제를 해결하고 삶에 필요한 방향 제시를 해주는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마치 전화선을 끊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상태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접근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ㅣ 않는다고 말하셨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십니까? 안 읽으시지 않습니까? 전혀 성경을 암송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넣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간에 그것을 생각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사를 통하여, 경건한 성경 교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느껴보신적이 있으십니까? 그럴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하와 목사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기는 하나님께서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들어야만 하는 말을 하도록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은 목사님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어느 성도나 사용하십니다.
제가 설교할 때에 모든 성도님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실상 제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필요한 것들을 제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매일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번 주일에 누가 예배에 참석할 지를 아십니다. 그들이 지난 주간 동안 얼마나 어려운 일들을 당했는지 저는 모르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그들이 무슨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그들이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제가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들어 주시고 목사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삶의 전환점들이, 아주 큰 삶의 전환점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교회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교회에 참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꼭 들어야 할 말씀을 목사님을 통하여 준비하셨는데 우리가 결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휴가를 갈 때도 교회는 빠지지를 말아야 합니다. 저는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나가 예배와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하며, 그 곳의 목사님들을 통해서도 제가 들어야 할 말씀을 증거하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낌, 영감, 생각이나 예감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느 편으로나 너무 극단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느낌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느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닌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음식을 잘못먹어서 위에 소화불량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때 느끼는 느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이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의 느낌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가스가 생길 때도 그렇습니다. 사단도 느낌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시험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즐길 때에는 속삭이시지만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에는 고함을 지르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어려울 때는 무신론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기로에 놓여 있게 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믿습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잠20:30)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채널을 맞추어 듣고 계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채널을 맞추지 않아 매일 매일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달에 아폴로 우주선을 발사했을 때에 달까지 가는 과정에 있어서 계속 궤도를 수정해야 했습니다. 달에 우주선을 겨냥하고 발사하면 자동적으로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초마다 다시 궤도를 수정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이탈은 너무나 쉽습니다. 우리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간 하나님과 접촉이 끊어지게 되면, 오래 사귐을 중단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분야에서 멀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계속 사귐을 가짐으로써 삶의 중간 궤도수정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채널을 맞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바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소견대로 삶을 살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은 결국 깨어진 꿈과 상처받은 마음, 그리고 파괴된 삶과 가정을 초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따르기를 원하는 길을 이탈했기 때문에 생겨난 산물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의의 길은 또한 회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 저는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 초기부터 저는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난것이 오래 됐을 수도 있고 얼마 안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가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회복이 시작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삶을 낭비해 이제는 소망이 없다고 말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끝났다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떠났는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르게 세우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비극이 찾아 올 수도 있고 위험이나 수많은 고통이 수반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길을 이해하기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4.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일을 예로 들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바로왕 밑에서 400년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내 민족을 해방시키라”라고 말했습니다. 바로가 견디다 못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을 떠납니다. 이스라엘 온 민족이 자유를 찾아 여행하다가 홍해에 오게 되었습니다. 좌우 양편에는 산들이 중첩으로 솟아 있어 도무지 여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바다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뒤편에는 바로가 마음을 바꾸어 그가 보낸 군대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의 길이 바닥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시77:19)
어떤 분들은 현재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또는 인간 관계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른 길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현재 처해있는 환경이 어둡고 절망적이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절망적으로 느끼면서 이제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전혀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놓으신 바른 길을 계속 걷는다면, 그 길이 더욱더 밝아지고 분명해지며 그 길을 갈수록 더욱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감으로써 더욱 더 성장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삶은 여행입니다. 잠언 4장 18절 말씀을 보십시다.
의인의 길은 듣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집4:13)
새벽에 햇빛이 완전히 밝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감에 따라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어느 날 완전히 밝게 비치는 정오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하신 삶의 길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고 위험과 혼돈한 현재 상태에서 이런 삶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의아해 하는 현실에서 어느 날 영원의 밝은 빛 밑에서 삶을 밝혀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의 그림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삶의 목적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언 3장에서 말씀해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5-6)
“네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것들을 이헤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길을 다 가기전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지 못한 계획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 참으면서 기다리십시오. 어느 날 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들을 확실히 알고 계심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를 하시지 않습니다. 잘못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나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결과를 아십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제반 문제, 고민거리, 어려움과 일의 지연됨, 육체의 가시, 질병 그리고 우리가 “왜”라고 질문하는 모든 것들이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아주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경로를 이미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고안해서 만드셨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확실히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억지로 가게끔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로 갈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서세 될 때에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길을 네가 갔느냐?”고 물어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내 방법대로 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자기 주장대로 사는 길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길이 바로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자기 원하는 대로 가는 길은 파멸로 인도한다고 말씀해 줍니다. 옳은 길처럼 보이나 필경은 사망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해 줍니다.
========================================================================================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5) 본문 : 시-023-004
역경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시23:4)
이런 아랍 속담이 있습니다. “해만 밝게 비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된다.” 우리들의 삶에 힘들고 어렵고 우울한 날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깊이도 없을 것이고 성숙함도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좋은 때와 나쁜 때를 다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이란 고통과 즐거움, 승리의 패배, 성공과 실패, 산의 정상에 오름과 골짜기의 이르는 것의 연속입니다. 오늘은 삶의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에 어떻게 처신하여 압력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 처할 때에도, 삶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에도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게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이스라엘에 “죽음의 그늘”이라는 골짜기가 실제로 있습니다. 아주 가파르고 깊으며 좁은 협곡입니다. 정오에만 해가 바닥까지 비췰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밑바닥이 캄캄합니다. 다윗은 아마도 그가 성장할 때에 양들을 “죽음의 그늘”이라는 골짜기를 통해 양들을 인도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골짜기”란 또한 삶의 가장 어려운 모든 상황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재난의 골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더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수7:26)
시편 84편은 통곡의 골짜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시84:6)
호세아는 고난의 골짜기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2:15)
시편 23편 4절에 나오는 골짜기는 히브리 원어의 뜻을 보면 깊은 암흑의 골짜기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깊은 암흑의 골짜기에 처할 때에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암흑의 골짜기에 처하게 될 때에 다섯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Ⅰ. 삶이 역경에 처할 때에 기억할 사항들
1. 역경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암흑의 골짜기는 꼭 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삶의 골짜기에서 막 나오셨을 수도 있고 지금 삶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삶의 골짜기를 향해 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삶의 골짜기는 하나가 지나가면 또 곧바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골짜기가 꼭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3)
역경이나 고통은 “만일”이 아니라 “언제” 일어나느냐의 문제입니다. 일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정된 사실이나 문제는 언제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살면서 어려움과 실망 그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시간이 바드시 있을 것입니다. 좌절과 실패한 피곤한 시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의 정상적인 삶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2. 역경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역경은 계획을 할 수도 없고 시간을 맞출 수도 없고 예정할 수도 없습니다. 역경이란 항상 기대하지 않을 때에 옵니다. 보통은 가장 최악의 시간에 내가 시간이 없을 때에 찾아옵니다.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에 옵니다. 가장 편할 때에 차가 빵구난 적이 있으십니까? 가장 여유가 없고 불편한 시간에 역경이 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역경이 찾아오는 시간을 미리 계획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역경을 대비해서 미리 계획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역경이 찾아옵니다.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좋게 시작한 하루가 아주 빨리 아주 나쁜 날로 바뀔 수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전화 한 통화로, 편지 하나 때문에 하루가 불행하게 바뀔 수가 있습니다. 정기 건강 진단을 받은 후에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사고 때문에 곤란한 하루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란 뜻하지 않은 때에 일어납니다. 예레미야 4장20절을 보십시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렘4:20)
3. 역경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역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삶을 통하여 아무 문제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건 악한 사람이건 누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시련, 어려움,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들, 우울증과 좌절감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악한 사람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것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람임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당신이 악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악한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선한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역경이란 공평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선하고 악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5:45)
우리가 인생의 골짜기 즉 삶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항상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께 물어 본다면 “왜 내게 안 일어납니까?”라고 물어 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문제로부터 자신만은 면제되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문제로무터 자신만은 면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나만이 비극이나 손해,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는 일들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라고 물어보는 대신에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은 완전한 것이 없고 여기 저기에 문제와 어려움이 쌓여 있습니다. 선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문제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재난이나 비극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4. 역경이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역경은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우리가 역경 가운데서만 살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찌라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골짜기에서만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골짜기란 우리가 항상 그 가운데만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을 당할 때에는 종종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경이란 터널과도 같아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터널을 들어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됩니다. 역경이란 우리 삶에 항상 머물려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역경이란 오면 지나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우리가 어떤 때는 어려움에 처하는 것을 베드로는 인정했습니다. 때로는 아주 어렵습니다. 삶이 힘이 듭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넘치는 기쁨도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문제도 없고 골짜기도 없으며 어두운 날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신다면 바로 당신은 천국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나이가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이 먹었으며 평생을 문제 가운데서 고통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 기간은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수천 백만 년을, 아니 영원히 살 것과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역경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영원과 비교해 보면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고후1:6)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레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받는 환난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가 지나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바울은 말해줍니다. 이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고통은 생산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에 처할 때에 올바르게 반응한다면 우리는 분제를 통하여 유익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순간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가 바르게 행동한다면 인생의 골짜기를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유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5. 역경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생의 골짜기가 의심, 우울, 절망, 실망이나 패배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벧전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라
베드로는 잠깐 근심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깐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어납니다. 역경이란 자연의 장난은 아닙니다.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믿음을 증진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산의 정상에 있을 때를 즐기나 산의 정상에서 믿음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의 골짜기에서 믿음을 키웁니다. 모든 것이 아주 잘되고 정상적일 때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직면할 때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역경을 통하여 믿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거나 신뢰하거나 찬양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삶의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를 통하여 믿음이 자랍니다.
⑴ 어떤 역경이나 목적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고통이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을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어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⑵ 믿음은 인생의 골짜기에서 성숙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안이나 편리보다도 우리의 성품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삶이 그저 편안한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보다는 거룩한 것에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거룩한 것은 지속되나 행복한 것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린다면 행복이란 거룩함에서 오는 부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경험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외로움을 체험하셨습니까? 물론 체험하셨습니다.
우리도 외로움을 경험하게 됩니까? 반드시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실망하실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해를 받으시고 중상을 받으시며 불공평하게 비난을 받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꼭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됩니다. 골짜기를 통하여 우리의 성품을 성숙시키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고나 비극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고나 비극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악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고나 비극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악을 행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악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성품을 성숙시키심으로 선한 것이 오게 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골짜기를 반드시 사용하시어 우리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Ⅱ.역경에 처할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2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1.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하지 않음”이라는 글을 쓴 티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나님은 믿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말은 삶의 어려운 골짜기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달려가거나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여유있게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걸어가고 있다는 말은 역경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여유있게 살아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침착하게 생각하면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망하는 것을 거절하십시오. 골짜기를 돌아서, 피해서 갈 수는 없습니다. 골짜기 속으로 갈 수도 없고 위로도 갈 수가 없습니다. 골짜기를 통과할 수만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삶의 골짜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인생의 골짜기에서라도 겁내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현재 실망한 상태에 있다면 실상은 자신이 실망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문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실망하기로 선택한 것은 압니다. 실망이란 항상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실망하는 편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하기로 결정합니다. 부정적인 면만을 보기로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와 모든 긍정적인 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데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서 올바른 결정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떻게 하면 실망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가 있습니까? 문제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두 사람이 다 동일한 상황에 처합니다. 혼란과 비극과 위기에 처합니다. 한 사람은 아주 실망하게 되고 다른 사람은 더욱 강건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산산조각이 나고 다른 사람은 더욱 든든해집니다. 그 차이점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환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황이 아니라 구세주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골1:11)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사람의 힘은 약해지고 없어집니다. 오랫동안 시련을 겪은 후에는 모든 힘이 다 빠집니다. 더 이상 스테미너가 없습니다. 인간의 견딤은 한계가 있습니다. 끝이 있습니다. 삶의 역경에 처할 때는 자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모든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모든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삶의 모든 문제들을 다룰만한 힘이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힘을 능가하는 힘의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골짜기에 있을 때에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삶의 골짜기를 결코 혼자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삶의 어려운 순간을 혼자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우리는 물 가운데 잠기지도 않으며 불에 타거나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골짜기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며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걸으시면서 “골짜기에서도 인도해 주시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서 언어가 의미심장하게 달라지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시편 23편 4절 이전에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했습니다.
(Psa23:2-3)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시23:2-3)그가 나를 푸른 초장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 골짜기를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3인칭에서 2인칭 대명사로 바뀝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Psa23:4)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시2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삶의 역경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면하게 됩니다. 인생의 골짜기에 처할 때에 갑자기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이 가장 친밀한 하나님이 되십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종교가 인간 관계가 됩니다.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것을 말해줍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기진맥진하여 지치고 방황하며 절망에 사로잡히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말하게 됩니다. 그런가운데서 “네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듣게 됩니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있을 때에, 골짜기에 처할 때에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제일 가깝게 느낍니다.
3.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의존해야 합니다.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는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목자는 막대기를 자유 자재로 구사해서 양들을 공격하는 어떤 짐승이라도 보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의 골짜기에 처할 때에 “우리를 방어하고 보호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오늘날의 목자들은 막대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총을 사용합니다. 옛날 서부 시대에 총을 막대기로 부른 것은 아주 재미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골짜기를 통과할 때, 삶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동정하는 마음과 측은하게 생각하시는 마음으로 하늘 저편에서 앉아 생각만 하시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절망 가운데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싸워 주십니다. 영적 싸움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어자이시고 보호자이십니다. 막대기가 바로 이런 것들을 나타냅니다. 지팡이는 긴 막대기로 끝에 검게 칠해 있습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사용하여 양을 인도하고 편하게 해줍니다. 양이 가까이 오도록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양이 누웠을 때에 일으키기 위하여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지팡이를 사용하여 양들을 가까이 오게 합니다. 지팡이를 사용하여 양들을 인도합니다. 골짜기를 갈때에는 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하십니다. 삶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 그늘이 우리로 하여금 겁나게 합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협곡을 통과할 때는 그림자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 골짜기를 잘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죽음의 계곡을 걸은 것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비치는 계곡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기대하지 않은 그림자가 우리의 삶에 닥칠 수가 있습니다. 미리 염두에 두고 사십시오. 그림자가 접근해 옴을 경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닥칠 때에 그림자에 대하여 세 가지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1) 그림자는 항상 실체보다 큽니다.
두려움이란 항상 문제보다 큽니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2) 그림자는 우리를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림자에 치여 본 사람이 있습니까? 트럭의 그림자와 트럭 실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림자란 실체가 없는 형상에 불과합니다. 그림자는 우리를 상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할 수는 있으나 상처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3) 불빛이 없이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를 갈 때는 해가 비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아 가셨다. 내가 홀로 걷고 있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전혀 볼 수가 없고 그러므로 내가 완전한 암흑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다른 곳에 빛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어두운 삶의 골짜기에서 두려워지기 시작할 때에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서 빛을 보기 시작하고 어두움을 등지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 볼 때에는 우리 주위에 있는 그림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뒤에 그림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면 괴로우실 것입니다. 자신을 보면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면 쉼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눈을 돌려 놀라운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영광과 은혜 가운데 세상 것들은 이상하게도 그리 큰 가치가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림자를 보지 마십시오. 골짜기를 통과할 때는 빛을 보십시오.
(시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삶의 골짜기를 통과함을 분명하게 나타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병이듭니다. 그리스인들도 비극을 체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경제난에 허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가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골짜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생의 골짜기를 거닐 때에 현저한 차이점이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림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함께 해 주신다은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6) 본문 : 시-023-005
상처받음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시23:5)
오늘은 상처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불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상처받는 분야는 사람들을 통하여 옵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제일 큰 상처를 안겨 줍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큰 축복과 기쁨도 또한 인간 관계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때로는 고의로 또는 알지도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대부분의 경우는 잘못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결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잘못 반응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잘못 반응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문제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Ⅰ. 상처를 받을 때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
1.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받을 때에 Clint Eastwood(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조용히 참는 것입니다. 총알을 입으로 씹는 것입니다.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면서 그런 문제들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상처를 받을 때에 마치 그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완전히 부인함 나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로 느끼는 바를 부인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2)상처를 최소한도로 줄임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대응책을 세우는 것을 연기합니다. 자신이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문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더 악화될 때도 있습니다.
(시39: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시39: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연기하게 되면 사소한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상황이 더 나빠집니다. 점점 더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자르지 않으면 상처는 더욱 커지고 더 많이 퍼지게 됩니다.
2.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Don Knotts(돈 낯츠)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도망갑니다. 피합니다. 뒤로 물러갑니다. 문제로부터 도망갑니다. 아무것도 직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다윗도 이런 방법을 취할 때가 있었습니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 (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55:6-8)
상처를 받으면 피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면 도망가고자 합니다. 모든 건물의 문들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리게 되면 도망갑니다. 우리들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합니다. 도망가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 텔레비전, 술, 마약,이혼, 디즈니랜드 등 여러 가지로 시도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시도해도 이런 것들을 다한 후에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시도할 때는 다 해결된 것 같아도 그런 활동이 끝나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달라진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3.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때에 도망가거나 무시하지는 않으나 숨기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간직을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를 않습니다. 가면을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데에 있어서 아주 전문가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즐거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나 마음 속은 아주 크게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속이는 게임을 합니다. 누가 “당신 무엇 잘못돤 것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화가 날 때에는 인정하나 상처를 받을 때에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가장을 합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을 좋은 물질로 감춥니다. 좋은 차를 사고 멋있는 집에 살며 주위에 좋은 물건들이 넘치게 합니다. 그들은 상처를 받으면 물건을 사러 쇼핑을 갑니다. 소유물이 결코 상처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상처를 받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소유물들이 우리의 상처를 싸 메지는 못합니다.
(시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상처를 감추는 것은 오히려 더 상처를 갖게 할 뿐입니다. 즉 상처를 더 악화시킵니다.
본 교회에서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정직하게 아픔을 나누며 서로를 세워 주는 데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음 없이 자신의 문제를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주며 사랑하는 교회가 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 놓고 자신의 상처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나눌 수 있을 때에 치유함이 따라 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문제와 상처를 받고 사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더욱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면 함께 나누는 위로과 치유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치유함의 시작입니다. 상처를 나눌 때에 그 상처를 극복하는 첫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자신의 마음속에만 간직하며 숨기고 있는 한, 치유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상처들을 지금도 안고 있습니다. 계속 숨기고 있는 한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처를 제일 잘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소규모 그룹입니다. 그래서 구역성경 공부에 참가하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누구나 상처받은 분야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누구나 상처받은 분야가 있습니다. 나만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처받은 분야를 나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만이 이런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자신이 상처받은 분야를 나눌 수만 있다면 상처를 치유 받아 안정감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상처를 무시하거나 회피하거나 감추면서 치유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4.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란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리려고 할 때에 옵니다.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들을 다스라고자 함으로써 염려를 하게 됩니다. 염려란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역할을 하려고 하면 더욱 더 불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 가지고서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욥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염려는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합니다. 상처를 결코 고치지 못합니다. 염려가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고통을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염려하는 것은 매번 해가 되는 비디오를 다시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염려는 문제를 더 과장되게 되고 더 크게 만들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생각할 때 문제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염려를 더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5.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우리는 쓴 마음을 품게 되고 화를 내며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 문을 닫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욥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우리가 다른 데서 받는 어떤 상처보다도 마음 속에 쓴 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강간, 배척, 희롱이나 악을 행하는 등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보다 우리에게 더 상처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쓴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우리를 죽이는 독소입니다. 우리를 안에서부터 잡아 죽입니다.
분노가 하는 일이 바로 상처가 우리 마음 속 깊이 박히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받아들여 계속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더 길게 지속시킵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화를 낼 때마다 고통을 연장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과거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은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이 아직도 계속해서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게 하는 것입니다. 위의 다섯 가지 방법이 상처받음을 돕지 못한다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시편 23편 5절을 보면 장면이 들에서 잔치상으로 바뀝니다. 다윗은 잔치상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돕도록 하신 우리가 해야 될 세 가지 단계를 말해 줍니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상처를 받았을 때에 치유함을 받는 비결입니다.
1.주님께서 해결하시도록 맡깁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도록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23:5상)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양은 이리, 늑대, 곰, 뱀과 이 등을 포함해서 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은 전혀 방비가 없는 동물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을 방어하지 못합니다. 날카로운 이도 없어서 적을 깨물 수도 없습니다. 발톱도 없습니다. 걷어차지도 못합니다. 빨리 뛰지도 못합니다. 가장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릅니다. 누가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면 전혀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상처 주는 사람들을 다스리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롬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누가 내게 상처를 줬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상처받는 것을 보셨으며 또 나를 돌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말씀해 줍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으며 심판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있는 지원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복수하려고 하는 한은 그 상처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자원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복수하려고 하는 한은 그 상처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 맡길 것인가, 아니면 내가 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날은 복수하는 것이 아주 빈번합니다. 복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항상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계속 내가 상처를 받게 합니다. 내가 상처를 받아 복수를 할 때는 고통을 더 크게 할뿐입니다.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확대합니다. 상처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란 “내게 상처를 줘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당신이 한 것은 나쁜 짓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란 내가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이 세상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악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란 내가 상처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며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도록 하십시오. 복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⑵ 화를 내는 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⑶ 내 자신이 앞으로 많은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조건하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베풀어 준 것을 다시 받는 것입니다.
복수하려고 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나는 더 오랫동안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주님께서 내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시 23:5하)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상처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양에게 가장 큰 적은 파리입니다. 양들은 발굽이나 꼬리로 파리를 털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파리들은 양들의 코에 앉아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애벌레들은 양을 미치게 만듭니다. 여름에 어떤 때는 양들이 그들의 머리를 돌에 박는 것을 봅니다. 파리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양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작은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목자가 하는 일은 기름과 유황을 섞어 양의 머리에 발라 주는 것입니다. 즉 곤충들을 쫓아내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목자가 양에게 “네가 자극 받는 것을 돌보아 주겠다” 말한 것이 실행된 것입니다. 양들을 자극하는 것을 돌봐 준 것입니다. 기름은 또한 고약으로 사용됩니다. 양들이 상처가 날 때에 목자는 기름을 고약으로 사용합니다. 상처를 보호하며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이 “내게 기름으로 바르셨으니”라는 말을 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위와 똑같이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에 예수님께는 우리 삶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해주십니다.
(시 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와서 네 상처를 맡기면 문제를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너를 회복시켜 주겠다. 상처를 치료해 주며 네 영을 소생시키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 주면 우리의 모든 고통이 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 준 후에도 여전히 상처를 받습니다. 용서는 즉시 되지만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용서해 주는 것은 즉시로 되지만 회복하는 데는 우리가 받은 상처의 정도에 따라서 몇 주나 몇 달, 때에 따라서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조그만 상처가 나면 붕대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혼이나 부모로부터 배척함을 받거나 희롱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의 깊은 상처를 입게 되면, 이런 것들은 쉽게 치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깊은 상처는 붕대로 싸서 보호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일단 상처받은 것을 용서해 주면 즉시 치유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복하는 첫 단계인 용서를 해 준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고치는 일이 시작됩니다.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어떻게 고치십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예수님께서 무슨 붕대를 사용하여 우리의 감정을 치유해 주십니까?
(1) 주님께서는 교제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상처를 다른 성도들과 나눌 수 있을 때에 감정적 지원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에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이 예수님을 믿는 친구와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을 고립시키지 마십시오. 지원 그룹이 필요합니다.
(2) 주님께서는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손상을 끼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니께 다 내어 놓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3) 주님께서는 예배를 사용하십니다.
찬양을 할 때 고침이 따라 옵니다. 마음이 상심될 때에 교회에 오셔서 찬양이 시작될 때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배를 통하여 감정적인 치유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말씀을 사용해서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4) 주님께서는 사역을 사용하십니다.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상처를 고쳐줍니다.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도울 때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고 재생시키는 모임에서 우리들이 겪은 바를 나눕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에 우리가 고침을 받습니다. 교회는 상처받는 사람들이 모인 병원과도 같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친교, 기도, 예배, 그리고 봉사를 합니다.
지금 크게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일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1) 고침은 두 단계로 일어납니다.
육체적인 고침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겠지만 감정적인 고침도 필요합니다. 뼈를 부러트려 수술을 하고난 후에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 치유하는 단계가 항상 두 단계입니다.
첫 번째는 조용히 있는 단계입니다. 수술 후에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카스트를 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카스트를 제거하고 손을 움직여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둘째번 단계입니다.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이런 것을 돕기 위해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요법사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요법사들에 대하여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라고 명령하며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침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압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조용히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도전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사역을 시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나가서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는 결코 치유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조용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너무나 조용히 있는 단계에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적인 치유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나가서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게 됩니다.
(2) 우리가 완전히 고침을 받은 후에도 상처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상처를 받은 후에는 항상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상처가 남아 있을 때에 우리가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상처를 계속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상처를 볼 때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기억할 수도 있고 상처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상처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원합니다. 상처를 보시고 고쳐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패배한 것과 실패한 것들, 즉 이혼이나 상처받은 것들을 생각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 대상이라는 것들을 기억하십시오. 상처 대신에 고쳐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3. 주님께서 내 필요를 충족시키게 합니다.
(시23:5하)...내 잔이 넘치나이다
성경에서는 잔이 넘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채워져서 만족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중동 지방은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할 때는 물이나 술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막에서는 물이나 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있지 않으면 낭비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사람들이 채워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도 우리에게 절대적인 삶의 안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랑을 다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그렇게 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 아주 철저하게 실망할 뿐만 아니라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다른 사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도록 의도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필요를 다른 사람들이 채워주기를 기대하면 그들이 채워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분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하루 24시간 동안 조건없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루 24시간 동안 안정감을 줄 수도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필요를 다 채워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부족하거나 모자라서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잔이 넘치게 됩니다.
무엇으로 넘치게 됩니까?
(1) 소망으로
(롬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 사랑으로
(살전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3)기쁨으로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다른 사람의 집에 갈 때에 얼마나 오래 동안 머물러 있다가 떠나야 할까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집에 올 때에 언제 가라고 말할지를 모른적들이 있으십니까? 중동에 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잔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의 집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막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서로 돌봐 줍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막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서로 돌봐 줍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잔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손님이 잔을 마십니다. 다시 채워줍니다. 주인이 계속 잔을 채워 주는 한 머물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집에 갔을 때에 서너 잔을 채워준 후에 더 이상 채워주지 않아 잔이 비었을 때는 떠나야 할 시간이 왔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손님을 너무 좋아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 계속 잔을 채워줍니다. 잔을 가득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따라 줍니다. 사막에서는 물이나 술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잔이 넘쳐 흐르도록 따라 주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한 계속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당신이 특별한 손님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겠다”라고 말하실 때는 내가 하나님께 아주 중요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큰 상처를 주어 마음이 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잔치에 초대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원수 앞에서 잔치를 베풀려고 한다. 너를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줄 것이다. 네 잔이 넘치도록 재워 주겠다.” 주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상처를 싸매 주시며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정말로 수지가 많은 거래입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준비하신 잔치는 완전함과 도움과 구원의 잔치입니다.
======================================================================================== 제목 :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7) 본문 : 시-023-006
릭워렌의 시편강해설교(7)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걱정하면서 돈을 씁니다. 내일을 너무 걱정하기 때문에 오늘을 결코 즐기지 못합니다. 왜 내일을 걱정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시편 23편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시23:6) 나의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미래를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를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어디서 그런 확신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성도라면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지신있게 직면할 수 있는 이유는
1.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3.천국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히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따문에 나는 하나님의 보호와 제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선하심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내게나 이웃에게 또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항상 좋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145:20)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자상한 부분까지도 살펴 주십니다. 아버지처럼 미래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 미래를 다스리고 계심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미래를 다스리시며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도울 것입니다. 하나니께서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보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 . .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도 삶을 통하여 실망할 때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좋은 일들만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는 좋은 일들만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그에게 결과적으로 따라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쁜 일이나 악한 일, 또는 힘든 일들이 일어난다할지라고 그 결과는 선한 일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이 이주 좋은 본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아주 큰 약속을 하셨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일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악을 이룹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다 선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선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패배나 재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선이 따라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슬픈 일들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기가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느끼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종종 하나님의 선하심이 숨겨진 것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면서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의아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하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후에 살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하심을 향하여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오직 좋은 일들만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쁜 일들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이런 것들을 통하여 선하심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울은 부당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을 것이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오늘날 신약 성경으로 알려진 책의 일부를 기록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후에 선한 일이 따라 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울이 당한 문제와 공통과 어려움으로 온 선한 결과를 맛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라 옵니다.
하나님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시91:11)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은 천사를 사용하여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천사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살제로 존재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신 이유중의 하나가 성도들을 살펴 보호해 주는 것임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들은 천사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그들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천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천사들”이라는 책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중심으로 하여 란로데스씨가 저술한 책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하여 많이 말씀해 줍니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아 주는 사역에 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기본적인 사항을 세 가지로 간단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사람들이 죽으면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자들이 사람이 죽으면 천사가 되는 것을 보여 주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사실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시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2)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육체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들이 우리 주위에서 사역함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도 천사들은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것입니다.
(3) 우리를 돌보는 천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어떻게 돌봐줍니까? 천사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호합니까? 첫째로 천사들은 해를 받음과 상처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다니엘 6장에서 이런 실례를 봅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있었고 사자들은 아주 배가 고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이 다니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천사들이 다니엘을 상처받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도 함을 나타내 줍니다. 둘째로 천사들은 악을 막음으로써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열왕기하 6장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엘리야와 그의 종이 사악한 적군에 의해 포위를 당하고 있으며 그들이 엘리야의 집으로 쳐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적을 막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적을 막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종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종의 눈을 열어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종의 눈이 열렸을 때에 수백 명의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봅니다. 더 이상 그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편 91편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셋째로 천사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를 돌봐줍니다. 이런 예는 사도행전 27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납니다. 모든 외부적인 상황을 살펴 볼 때에 배가 파손되어 모든 사람이 죽을 것처럼 보입니다. 한 천사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걱정하지 말아라, 배가 파손이 될 것이나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안전할 거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천사들은 우리들을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들은 우리가 절망하거나 실망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우리 교회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다운 증후군이 있는 아기를 가지려고 하는 데 상담을 구하기 위하여 릭목사님에게 왔습니다. 릭목사님은 그분에게 하나님께서 다운 증후군이 있는 어린 아기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상황을 돌보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떠난 후에 릭복사님께서 포스트 카드를 써서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운 증후군이 있는 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을 축복해 주시며 모든 상황을 돌보실 것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 엽서가 다른 주소로 잘못 갔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여인은 손수 그 엽서를 올바른 주소로 전해 주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 엽서에다가 이렇게 추가해서 썼습니다. “당신의 목사님께서 다운 증후군 아기에 대해 당신에게 엽서를 보냈습니다. 나도 다운 증후군 아기가 있는 것을 당신이 알기를 원하며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천사가 그 편지가 가는 방향을 변경했다고 믿습니다. 천사들이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천사들이 특별한 일들을 해서 사람들을 격려한 것을 보게 됩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격려하는 방법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를 돌보는 천사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것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다윗을 돌보는 천사가 있었으나 그에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을 돌보는 천사가 있었으나 그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역경으로 부터 면제되도록 하시지는 않으나 역경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쁜 것들을 통하여 좋은 것들을 가져오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시23:6) 나의 평생에...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사60:10)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긍흘히 여겼은 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부유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다 은혜입니다.
은혜란 내가 가치가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셔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시지 않고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은혜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긍휼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고 실수를 하고 실족합니다. 미래에 우리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긍휼도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면과 고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정말로 이해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복수하기 위하여 계신 분이 아님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당신의 삶을 바치셨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내가 지은 모든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의 대가까지도 지불하셨음을 확실히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복수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이미 지불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복수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시면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103:2-1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103:6)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시103: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103: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시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게 죄면 하니님꼐서는 선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잘못과 죄와 실수를 다루시는 데에 있어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긍휼이란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할 때, 삶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도 그것이 비록 나의 실수로 인하여 그런 어려움이 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기 위하여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면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아무 때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러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마찬가지로 긍휼도 우리의 삶에 계속 일어납니다. 어린 아이 주위를 따르면서 모든 더럽히는 것을 줍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된 것들을 집어 올리십니다. 우리가 참지 못하고 터뜨린 것들, 실수한 것들, 일을 경솔하게 잘못 처리하고 다음 일로 나간 것 등을 하나님께서 뒤를 따라 오시면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뒤에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는 말씀은 어떤 특정한 날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풀었다 안 베풀었다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루는 우리를 아주 잘 취급하여 주시고 다음 날은 나쁘게 취급하여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루는 우리를 아주 잘 취급하여 주시고 다음 날은 나쁘게 취급하여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의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나를 따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여러 종류의 다른 날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날과 슬픈날, 좌절감을 느끼는 날, 고독함을 느끼는 날과 어려운 날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렸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받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꼐 하십니다. 어떤 날은 그렇게 느끼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보지 못할 것이며 정말로 하나님이 함꼐 하시는지를 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결혼한 부부 중에 어느 날 한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다른 배우자는 반려자 없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반드시 함께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가 당면하는 좋은 날들을 다루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가 당면하는 불우한 날들을 돌보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평생동안 함께 하실것입니다.
이 점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리가 아닌 것을 말씀하실 수도 없으시며 변덕스러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하면서 상상하면서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하나님꼐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의심을 가지고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직면합니다. 가정하면서 염려하지 마시고 확신하면서 편안히 쉬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실 것이고 긍휼하심으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도우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나를 치료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우리가 살면서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게 하시고 긍휼하심으로 우리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텐데 받지 않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다 필요합니다.
시편 23편은 목자에 관한 시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양은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소는 뒤에서 몹니다. 양과 소의 차이점은 양은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의 앞에 있습니다. 목자가 인도하고 양들이 따라갑니다. 소는 뒤에서 몰아 계속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중동 지방에 가게 되시면 목자는 앞에서 인도하며 양들의 뒤에는 한 두 마리의 개들이 양이 제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뒤를 지켜 주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선하심과 긍휼하심은 항상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정상적인 자리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안전하도록 도와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 일단 된 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대상이 된 우리들은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자신있게 직면하도록 도와줍니다.
(히1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3. 천국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시23:6) . . .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Psa23:6) . . . a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그리고(and)”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오는 아주 중요한 접속사입니다. 그 말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연결해 줍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위해 위대한 삶을 계획하고 있으며 네 평생을 통하여 나의 선함과 긍휼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끝에 다른 무엇이 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은 점점 더 크고 강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을 “우리가 천국에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끝을 냅니다. 예수님은 제일 좋은 것을 마지막까지 보류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더욱 더 좋아집니다. 아직도 최선의 것은 앞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고후5: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영원은 얼마나 오래 계속됩니까? 영원히 계속됩니다! 어느 날 우리 몸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이 우리 삶의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 이 둘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둘 다 실존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죽을 것이나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관하여 가장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천국에서 새로운 몸을 가지고 살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며 죽은 후에는 주님과 영원한 집인 천국에서 살 것입니다.”
(고후5:6)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5: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장 6절과 8절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장소를 옮기는 것, 더 좋은 곳으로 승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문제가 없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기 전까지는 살 준비도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바보만이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혀 준비함이 없이 한 평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일까요?
천국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했으며 그리스도에게 순종했는가에 따라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 사람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당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SHAPE)에 따라 우리가 정말로 즐기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얀천을 받고 하루 종일 구름 위에 앉아서 하프를 탄다고 말합니다. 제게는 그런 곳이 지옥입니다. 하루 종일 구름 주위에 앉아서 하프를 타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실 것이고 그런 것들은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얼마나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불완전합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상상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 세상에서 파도타기를 즐기고 스키 타는 것을 즐기도록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천국에 얼마나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을까를 상상해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는 발목을 삐는 일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멋있는 일들을 생각하신다면 천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너무나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더 이상 고통, 슬픔, 고난, 좌절감과 두려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이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것입니다.
(계21: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런 것들을 생각하신다면 천국을 기다리며 그리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누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고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입니다.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으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벧전1:4-6)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천국에 안전하게 가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바치면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그곳으로 안전하게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놀랍고 기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주님과 함게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위하여 준비된 곳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고 계시다면, 왜 영원을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지금 결정하십시오!
이 세상은 준비하는 곳에 불과합니다. 세상에의 삶이 최고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60년, 70년, 80년 아니면 90년을 이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되거나 지옥이 되든지 간에 그 곳에서는 천년, 만년 아니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보육원(Preschool)에 들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개막식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세상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우리가 어디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벧전2: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나그네요 참 우리의 집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지금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사시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너무나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것들은 아무 것도 영원히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오직 일시적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60년, 70년, 80년 사용합니다. 물질들은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전 생애를 물질을 축적하는 데 다 보냅니다. 우리들은 돈을 버는 것이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인 것처럼 삽니다. 그리고 돈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죽게 될 것이며 그때에는 아무 돈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물질에 투자하지 마십시오. 물질을 획득하는 것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천국을 준비할 수 있습니까? 성품을 쌓아 올림으로 준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그것을 가지고 갑니다. 우리는 돈이나 자동차나 스테레오나 집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세상 체계에 너무 사로 잡히지 마십시오. 세상만 바라보면서 살지 마십시오. 영원을 바라보면서 사십시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결국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에만 신경을 쓰면서 물질을 더 획득하는 데만 전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빌려쓰고 있는 것들이지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는 포기해야 합니다. 영원을 염두에 두고 사십시오.
누구나 다 천국에 갑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히틀러나 살인자들이나 집단 학살을 한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오게 한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오게 한다면 천국은 더이상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실상은 지옥일 것이며 저는 그런 곳에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만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요10:27-28)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나를 알며 나를 따른다.”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을 어떻게 살라고 하는 음성을 들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니까? 그 분이 여러분의 목자이고 구세주이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 하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 들였고 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면 자신이 영원히 주님의 집에 살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거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헌신한 후에 죄를 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칠 때에 우리는 자신의 손을 하나님의 손 위에 놓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알면서도 잘못된 인간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나쁜 책들을 읽을 수도 있으며, 비윤리적인 결정을 하기도 하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일들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자녀로 택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멸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 줍니다. 내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나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 마음대로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미래를 볼 때에 무엇을 보십니까? 의심의 눈을 가지고 미래를 보십니까? 비꼬는 태도를 가지고 보십니까? 더 나빠지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보십니까?
삶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를 냉소적인 자세로 의심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모든 것이 더 나빠지리라고 생각하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미래를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히심이 평생 나를 따를 것을 기대하면서 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좋아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로 시편 23편을 마치려고 합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돌보시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의 목자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3편을 통하여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것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목자를 안다면 두려워 할 것들이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가난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면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외로울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므로 실수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으로 실패를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따르기 때문에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함께 살 것이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푸른 풀밭에도 함께 계시면 잔잔한 물가에서 내 곁에 계신다. 삶의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나의 원수들과 함께 있을 때 내 주위에 계신다. 내 위에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다. 내 앞에서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 뒤에 계셔서 선하심과 인자히심이 따르게 하신다. 천국에서도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시편 23편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서는 보호, 제공, 평화, 섭리, 우정(함께하심)과 천국을 다 제공하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