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신씨의 시조는 신수(愼修)이시다. 시조 신수(愼脩)의 선조는 중국(中國)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이다. 공은 중국 송나라에서 1068년에 사신의 한사람으로 고려에 오시었다가 문종의 권유로 귀화하여 고려인이 되시었다. 벼슬은 1075년(문종 29)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숙종 때 수사공(守司空), 우복야,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은 학식이 높고 의술에 정통하였으며, 관직이 사도(司徒. 正一品)에 이르렀다. 공께서 돌아가시었을 때 왕이 시호를 공헌(恭獻)이라 내리시어 이후 거창 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고 이르게 되었다. 아들 신안지가 지수주사가 되어 수원 신씨라고 한적도 있었으나 그후에 후손들이 거창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거창으로 하였다.
2세조 안지(安之)께서 병부상서가 되시면서 신씨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후 7세조 집평(執平)께서 신호위대장군 동북면병마사로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시다가 전사하시었는데 얼마 후 고려 조정이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신씨 가문은 반원파로 지목을 받게 되어 8세조 성(成)께서 거창으로 낙향하시어 거창 유(劉)씨와 혼인하여 세거 하시어 거창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신씨 가문은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13세조 이충(以衷)께서 참판공 기(幾), 서령공 언(言), 양간공 전(詮) 세 아드님을 두시어 그 삼 형제분이 파조가 되시고 그후 자손이 번창하여 최근에 조사된 인원이 1985년 40,013명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91명의 조상들이 등과하여 다시 명문사족의 가문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5세조 승선(承善)께서 세종대왕의 손녀사위로 연산왕 시대에 영의정에 오르시고 따님은 연산왕의 왕비가 되시었으며, 아드님 수근(守勤)은 좌의정, 손녀는 중종의 왕비가 되시었다.
선조들을 모신 서원과 사당은 유림에 널리 알려진 거창의 구연서원, 영암의 송양사, 진안의 충효사, 마이산 영모정 등이 있어 그 높으신 학문과 충효정신을 기리는 후손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자료: 대전 뿌리공원 신씨 유래비문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