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회에 목은 이색에 대해서 국민들이 아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몽주만 알지 이색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조선시대 당시에는 목은 이색에 대해서는 굉장히 유학의 종조 및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존재였다.
세조, 현종,숙종,영조등도 목은을 존경하는 글을 남겼고, 특히 당대의 여론을 이끌었던 유성룡,기대승,송시열,최익현,전우등은 이색의 절의를 지지하고 있다. | | 현종-문장과 절의는 당대 최고였다. 文章節義 蔚爲時宗-顯宗大王御製致祭李文靖公文 | 숙종- 옥이 영원히 닳지 않는듯 곧은 절개는 더욱더 빛난다. 如玉不磷 貞操彌彰-肅宗大王御製致祭李文靖公文 | 영조-내 일생에 보고 싶어하는 화상이 세개인데, 청해백과 오성 이항복과 목은 이색의 화상이다……..목은의 절의는 존경스럽고 문장은 최고였다.予之一生, 所欲見者, 靑海伯·牧隱·鰲城畫像…...節義可尊文章最高 - 英祖大王御製致祭李文靖公文 승정원일기 영조 22년 9월 8일 | | 김종직-『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은 앞뒤가 끊어지고 우리나라 인물(人物)들 모두 질그릇으로 만든 것 같네. 이제 한만히 선생 계시던 곳 지나노라니 같은 시대에 나서 따라다니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師友淵源絶後前 靑邱人物盡陶甄 如今謾過軒車地 恨不同時一執鞭>』하였다. 점필재집 시집 제3권寧海府懷牧隱三首 | 이항복-한산이씨에 군자가 많다.-백사집 제2권 기 문헌서원에 대한 기 | 유성룡-고려말에 포은은 원찬(袁粲)과 같고, 목은은 양표(楊彪)와 같고, 이 이외에는 논할 것이 없다.-《서애집(西崖集)》>, | 기대승-실록 선조 2년 윤 6월 7일(기대승이 목은에 대해 언급한 부분), | 송시열-<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1권 목은비 음기(牧隱碑陰記) | 최익현-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제24권 《목은사실편(牧隱事實編)》 발, 논사록 하편(論思錄下篇) ) | 전우(田愚)-牧隱先生 事蹟辯 등 여러 저술.) |
태조도 나중에 정도전을 시켜서 독살하지만, 평소에 매우 존경하였다.
《 태조 002 01/12/06(임자) 》 | 임금이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 조박(趙璞)과 경상도 안렴사 심효생(沈孝生)이, 백성으로서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이 절에 가서 부처에게 공양(供養)함을 금지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말하였다. “이색(李穡)은 세상에서 큰 유학자가 되었으나 또한 부처를 숭상하였는데, 이 무리들은 무슨 글을 읽었건대 부처를 좋아하지 않는가?" | 《 태조 002 01/12#04(경진) /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간할 발원문을 짓게 하다 》 |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에게 명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할 원문(願文)을 지어 올리게 하니, 정총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색(李穡)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 정총이 대답하였다.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 |
《 태종 006 03/11/15(기축) / 사신 왕연령과 최영을 선의문 밖에서 전송하다 》 | 사신 왕연령(王延齡)·최영(崔榮)이 돌아가니, 임금이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전송하고, 작별에 임하여 모의(毛衣)·모관(毛冠)과 화(靴)를 신행(쳵行)으로 주니, 두 사람이 모두 받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노상(路上)에서 추위를 막고 중국의 따뜻한 땅에 들어가서 버리면 무엇이 해롭겠소? 지금 천기(天氣)가 매우 춥고 심히 먼데, 만일 받지 않고 돌아간다면 어찌 안심하겠소? 감히 인사(人事)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인(主人)의 성의(誠意)요.” 하였다. 최영이 대답하기를, “경사(京師)에서 떠날 때에 추위를 막을 옷을 이미 넉넉히 준비하였고, 또 황제께서 복명(復命)하는 것이 추운 때에 있을 줄 아시고, 추위를 막을 옷을 많이 주시었으니, 무얼 반드시 받겠습니까? 주인의 성의는 이미 알았습니다.” 하고, 무릇 주는 물건을 안마(鞍馬) 외에는 받지 않았다. 삼부(三府)가 연령(延齡) 등을 서보통(西普通)에서 전송하니, 연령이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에게 말하였다. “공(公)은 반드시 이색(李穡)을 알 것이오. 이색 같은 분은 중원(中原)에도 한두 사람에 지나지 못하오. 중원 사람이라고 어찌 다 조선 사람 같겠소? 조선은 외국(外國)으로 볼 수 없소.” |
목은이 독살당한뒤에 중국 사신들도 목은 이색같은 사람은 중국에도 거의 없다고 애석해하고 있다. 태종대에 목은의 아들 이종선이 목은의 행장을 중국에서 출판해서 크게 알리고, 이성계를 욕하게 되니, 도리어 태종은 목은 편을 들고, 정도전 후손을 이종학,이숭인을 살해한 죄를 끄집어 내서 벌을 내린다.
《 태종 021 11/06/29(무오) / 》 .....하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목은(牧隱)은 천하의 대유(大儒)이니, 중국(中國)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것이 가하다. 그러나 양촌(陽村)이 지은 행장(行狀)을 지금 자세히 보니, 국체(國體)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목은(牧隱)만을 찬미(讚美)하여, 그 문사(文辭)가 사사 은혜[私恩]로써 의(義)를 가린 곳이 없지 않다. 이것으로 본다면 목은(牧隱)의 제자[門生]와 우리 태조(太祖)의 신하가 각기 병립(쯂立)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장(行狀)을 축맹헌(祝孟獻)에게 부탁한 사람인 유기(柳沂)는 지금 이미 죽었으니, 누구를 증거하여 물어 보겠는가? 그리고 이종선(李種善)은 그 아비를 찬미(讚美)코자 하였으니, 이것은 인자(人子)의 마음으로 당연한 일이다. 또 임군례(任君禮)는 몸은 먼저 왔으나, 치중(輜重)이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보고가 늦은 것이니, 어찌 죄가 있겠는가?”....... |
《 태종 022 11/07/02(신유) / 대간에서 하윤·권근의 죄를 청하다 》.......... |
......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도전과 거정과 흥종은 폐하여 서민을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되, 은은 공이 높으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
이렇게 태종대 부터 목은의 후손들을 극진 대우하여, 세종대에는 이색의 후손 10여명이 종2품 이상, 세조-성종대에는 3명이 공신, 10명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
첫댓글 kbs시청자 게시판에서 남양주 사시는 혜구님이 모셔온 글 가져다 놓습니다.
선조님의 귀한자료 잘읽어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는지,,반가워요
역사는 승리한자의 기록이고, 출세한 후손들의 미화 입니다
정몽주는 알고,,그 스승인 이색을 사람들이 잘 몰라,,? 이거 열나네..
지금이라도 한산이씨 대통령이 나와서,,,
광화문 네거리에 우리 이색 선조님 동상을 세우면 누가 뭐라 칼까,,
나이스~~ㅎㅎㅎㅎ부라보^^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한번...ㅎㅎㅎ^^
귀한 자료 일가분들께 널리 알려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