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의 동편에 위치해 있는 다산 4경 중 하나인 '제3경'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
인고의 나날들 | 충절 어린 그 곳 | 선조들의 피서법 |
조선후기 당쟁 휘말린 다산 정약용 18년간의 유배생활 흔적 고스란히 | 정조 향한 그리움 달래던 '천일각' 군신 간 훈훈한 의리 엿 볼 수 있어 | 석천서 시원한 암반수로 갈증 달래고 백련사 동백나무숲서 자연 정취 만끽 |
조선후기 당쟁에 휘말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 1762~ 1836)의 발자취가 흠뻑 남아있는 전남 강진군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찾아가면, 무더위도 사라지고 숙연한 마음으로 가라앉는다.
순조 원년(1801) 2월 신유박해 때 형 정약종이 처형되고, 그해 11월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북경에 있는 프랑스가톨릭교회에 조선의 천주교도 박해사실을 알리고 프랑스군이 출동해줄 것을 청하는 백서(帛書)사건에 연루되어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사람들은 정약용을 나라에서 금한 천주교도라며 외면해서 다산은 잠잘 곳조차 구할 수 없었는데, 가까스로 동문 밖 주막집의 노파가 그에게 방 한 칸을 주어서 기거하게 되지만, 몇 년 동안은 바깥출입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4년을 보낸 1805년 봄, 어느 정도 바깥출입이 자유로워지자 다산은 스님이면서도 유학, 특히 주역에 능통하다고 소문이 나서 인근 강진, 장흥, 해남의 선비들이 줄을 이어 찾는다는 백련사(白蓮寺)주지 혜장(惠藏; 1772~ 1811)을 찾아가는데, 이렇게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다산은 새로운 활력을 찾고, 1811년 가을 혜장이 죽을 때까지 6년 반 동안 교류하게 된다.
혜장은 28세 때부터 해남 대흥사에서 나이든 스님들을 제치고 강론할 정도로 실력가여서 30대 중반에 대흥사의 말사인 백련사 주지가 되었는데, 혜장은 자신을 찾아온 다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침없이 주역을 떠들다가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다산보다 10살 아래인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했는데, 그 해 겨울 다산이 백련사의 암자인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의 도움이었고, 또 혜장은 수제자인 수룡색성(袖龍賾性)을 다산에게 보내어 시중을 들게 했다.
색성은 화엄경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보의 시에도 능통하고, 차를 잘 볶아서 이때부터 다산은 유배 중에 처음으로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얼마 후 혜장은 또 한 사람의 제자 철경응언(鐵鏡應言)도 다산에게 보내어 시중을 들게 했는데, 색성과 응언 이 두 학승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는 다산은 그의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두 사람을 소개할 정도였다.
사실 다산이 보은산방에서 머문 것은 약 10개월 정도이고, 그 후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1808년 외가(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귤동(橘洞)으로 다시 이사한다.
강진읍에서 완도 방면 국도 3호선을 약7㎞쯤 가면 도암면 만덕리(귤동)에 다산초당 입구를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에는 2005년 10월 17일 개관한 다산수련원이 있다.
다산수련원에는 다산의 발자취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다산기념관과 공직자연수원이 있고, 다산수련원에서 산길로 약2㎞쯤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있다. 귤동 마을에서 좁은 산길로 곧장 92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도 우거진 적송과 대나무 숲속에 다산초당이 있는데, 다산은 18년 유배기간 중 이곳 다산초당에서 11년을 기거하면서 손님을 맞기도 하고,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서적을 저술했다. 그리고 아호도 다산으로 바꿨다.
다산은 초당에서 800m 떨어진 백련사까지 매일 산길을 오가면서 혜장과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다산은 자존심과 고집이 깔깔한 혜장에게 어린아이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라며 아암(兒庵)이란 별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숲길, 그리고 다산초당과 주변의 산방들, 또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산길에서 다산을 생각해보며 걷는다면 세속에 찌든 현대인들은 잠시 마음을 씻게 된다.
혜장은 불가의 큰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음주로 40살에 죽었는데, 다산은 만시와 제문 그리고 탑명(塔銘)을 지어 만남과 사귐의 과정을 진솔하게 적었다. 그리고 혜장과의 인연으로 나중에 대흥사의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학승들, 저술활동을 도왔던 18명의 다신계 제자들,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과의 만남도 가능했으니, 다산에게 혜장은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다.
다산초당은 원래 해남윤씨 윤단의 정자였으나 다산과 친분을 나누면서 거처로 제공되었다고 하는데, 1957년 다산보존유적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3칸 기와집으로 지었다. 그러나 초당이란 초가집이란 뜻이니, 초가집으로 복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다산초당 왼편의 서암(西庵; 茶星閣)은 윤종기, 윤종벽, 윤종상, 윤종진 등 18명의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이고, 초당 오른편에는 다산이 거처했던 다산동암(茶山東庵)과 보정산방(寶丁山房)이 있는데, 다산동암의 편액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이다.
초당에는 다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다산 4경’이 있지만, 사실은 조금은 조잡하고 인위적이다.
제1경은 초당의 왼쪽 뒤편 바위에 새긴 ‘정석 (丁石)’ 이란 두 글자로서 다산이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직접 자신의 성씨를 새긴 것이라 하고, 제2경은 초당 동편 뒤에 있는 샘물 ‘석천(石泉)’으로서 다산이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암반수를 마시기 위해 직접 판 것이다. 다산은 일기에서 이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는다" 고 기록했다.
제3경은 초당의 동편에 있는 작은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서 바닷가에 있는 반들반들한 돌로 연못 가운데에 봉우리를 만들고 석가산이라 하고, 연못에 잉어를 키우면서 날씨를 예측했다고 하는데, 다산은 잉어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서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제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잉어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고 한다.
제4경은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넓은 돌로서 다산은 이곳에서 차를 끓여마셨다고 한다.
한편, 다산이 백련사주지 혜암과 매일 오가면서 대화를 나눴던 산길인 동암에서 약20여m 떨어진 곳의 정자 천일각(天一閣)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말인데, 다산은 돌아가신 임금 정조와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또, 다산과 혜장의 인연을 맺게 해준 백련사 입구 왼편 능선에 자생하는 동백나무 숲은 고창 선운사, 여수 오동도 등과 함께 국내 3대 동백군락지로 유명한데(천연기념물 제151호), 주차장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과 동백나무 숲 사이의 골짜기는 다산과 혜암이 즐겼을 야생 차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2006년 강진군에서는 만덕산 등산로 옆 오솔길에 바다 위에 뜬 달이라는 의미의 십자형 2층 정자 해월루(海月樓)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