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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연경)의 흔적(痕跡)과 연산(燕山)
연경(燕京), 연경(燕京)은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알수 없는 의문(疑問)을 많이 지니고 있는, 청(淸)나라의 도읍지(都邑地)로서, 북경(北京)이라고 하며, 유주(幽州)의 유도(幽都)로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수 천년(千年) 이어 내려온 곳이다.
지금의 북경(北京)이 연경(燕京)이요, 유주(幽州)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것인가 ?
조선사(朝鮮史)와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 그리고 조선(朝鮮) 대신들의 문집(文集) 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현재의 북경(北京)은, 서로 상충되는 점이 너무나 많을 뿐만 아니라,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과도 정면으로 위배(違背) 되는, 모순(矛盾)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연경(燕京)에 있어서는 수도 없이 다루어온 과제(課題)이기 때문에, 역사서(歷史書)나 문집(文集)에 나타나는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그 기록(記錄)들이 가리키는 지역을 살펴보면서, 과연 옛 기록(記錄)들과 얼마나 부합(符合)되는지 논(論)해 보기로 한다.
燕行錄[金正中]
上松園書
執事將北遊燕京。知燕之雄傑險要。甲於天下乎。蘇秦說燕文侯曰。大王之地方二千里。左遼東。右雲中。陰山在其北。易水在其南。粟支數年。車七百乘。騎六千匹。此所謂天府也。昔邵康公有大勳勞於周室。故封於燕。盧綰與漢高帝同日生。親愛信重。異於絳灌平勃之屬。故封之燕。燕之形勝膏腴。自周,漢以來。非與他州等。且其俗悲歌慷慨。椎埋擊刺。崇信義重然諾。亦渤碣之間一都會也。故士之抱負者。多願遊焉。解大紳因張崇顯。作北京重遊序。韓文公送董生。吊望諸君墓。而二人未遊之嘆。隱然於編什間 (중략)
집사(執事)께서 장차 북으로 연경을 여행하시려는데, 연(燕)의 웅걸(雄傑)ㆍ험요(險要)가 천하에서 으뜸임을 아십니까?소진(蘇秦)이 연 문후(燕文侯)를 달래기를, ‘대왕(大王)의 땅은 사방 2000리로서 요동(遼東)을 동에 두고 운중(雲中)을 서에 두며, 음산(陰山)이 그 북에 있고 역수(易水)가 그 남에 있으며, 식량은 수년을 지탱하고 병거(兵車)가 700승(乘)이요, 전기(戰騎)가 6000필이니, 이는 이른바 하늘이 내린 요새입니다.’ 하였으며, 옛 소 강공(邵康公)은 주실(周室)에 큰 공훈이 있었으므로..............
연 나라에 봉(封)해졌고, 노관(盧綰)은 한 고제(漢高帝)와 같은 날에 태어나서 친애(親愛)와 신중(信重)이 강(絳)ㆍ관(灌)ㆍ평(平)ㆍ발(勃) 같은 공신들보다도 더하였으므로 연 나라에 봉해졌습니다.연 땅은 형세 좋고 기름져 주(周)ㆍ한(漢) 이래로 다른 주(州)들과는 다르며, 또 그 풍속이 비가강개(悲歌慷慨)하고 추매격자(椎埋擊刺)하되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승낙한 일을 실천하기를 귀중히 여겼으며, 또 발해(勃海)ㆍ갈석(碣石) 사이의 한 도회(都會)인 까닭에 포부가 큰 선비가 흔히 여기에 여행하기를 바랐습니다.해대신(解大紳)이 장숭현(張崇顯)으로 인하여 ‘북경중유서(北京重遊序)’를 짓고 한 문공(韓文公)이 동생(董生)을 보내어 망저군(望諸君)의 무덤에 조제(弔祭)하였으되, 두 사람이 그곳에 직접 가 보지 못한 한탄이 글 속에 은연합니다. (중략)
음산(陰山)이 그 북쪽이 있고, 역수가 그 남에 있으며, 연(燕)의 웅걸(雄傑)과 험요(險要)가 천하(天下)의 으뜸이 된다. 그리고 음산(陰山)이 연(燕)의 북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북경(北京)의 북쪽에, 역사서의 기록(記錄)에 합치하는 음산(陰山)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
연경(燕京)의 토질은, 석탄 앙금지대라고 연행록(燕行錄)은 기록하고 있으며, 대체로 검은흙이 많다고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말하고 있다. 위의 사진은 , 운하(運河)가 있는 이 도시의 북쪽에 있는 산인데, 인근 수 백리 지역의 산들이, 다 비슷하다.
위의 사진은, 이 도시의 서북 300 리 지역에 있는,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거론하는, 문필봉의 한줄기이다. 해발 3000 미터에 이르는 산이라, 흰눈과 푸른 초원의 풍경이 그림과 같다.
연산燕山)도, 이 부근의 어느 지역에 있는 산일 것이다.
연도기행(燕途紀行)
從西門下。門頹樓毀。經過危甚。遵兔耳山底。歷蘆峰口。巳到背陰鋪攤飯。撫寧素稱山水鄕。山明水麗。蕭灑絶勝。午發過雙望堡。城已毀。堡東港口有石碑。刻盧龍界。(중략)
서문(西門) 밑으로 해서 가노라니, 문은 무너지고 누(樓)는 훼손되서 나가기가 몹시 위험했다. 토이산(兎耳山) 밑을 따라 노봉구(蘆峰口)를 지나 사시에 배음포(背陰鋪)에 도착하여 먹고 낮잠을 잤다. 무령(撫寧)은 본래부터 산수(山水)가 좋은 고을이라고 이름이 났지만, 산명 수려(山明水麗)하여 깨끗하기가 특별히 뛰어났다.오시에 떠나 쌍망보(雙望堡)를 지나노라니 성은 이미 무너졌다. 보(堡) 동쪽 항구(港口)에 비석이 있는데 ‘노룡계(盧龍界)’라 새겨져 있었다. (중략)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산해관(山海關)에서, 연경(燕京)으로 가는 여정에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 노봉구(蘆峰口)이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산맥이 양쪽으로 서 있는 골짜기 같은 곳이다. 조선(朝鮮)의 사신(使臣)들이 연경(燕京)을 우회하여 가는것을 증명할수 있는 옛 지명(地名) 중의 하나이다. 노(蘆)자를 노(老)로 바꾸어 표기를 하는데, 지명(地名)을 바꾸는 곳이면, 대체적으로 이런식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지금도 현지에서 대막(大漠)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소금 사막(沙漠) 의 염지(鹽地)이다. 이곳에서생산되는 소금은, 바다물로 만드는 소금과 같은 방식이라, 소금의 질이 흙염보다 좋은 편이라고 한다. 흙염도 생산되고, 이런 소금도 생산되니, 옛 기록에서 바다(海)라고 기록 했을 것이다.
이 지역의 남쪽으로 펼쳐지는, 대막(大漠)의 풍경이다.
이 도시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도로인데, 이곳에서 님쪽으로 대막(大漠)의 아득한 사막(沙漠)벌판이 펼쳐지고 있다.
대막(大漠)에 있는 호수(湖水)이다. 지금은 수량이 적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바다였을 것이다.
주견제사(主見諸事)
其曰江河者。若通州白河大凌河小凌河四五水外。皆可徒涉。水漲則盡用行舟。地平之故。潦水難泄。地皆泥濘。柳河溝等處。古有車馬胥溺。沒入泥中。竟不可求矣。江河混濁。色赤黃味苦臭。水如楡汁。井泉味惡。牛馬不飮。每汲泉而行。關內水味稍勝。(중략)
그들이 말하는 강하(江河)란, 통주(通州)ㆍ백하(白河)ㆍ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와 같은 4, 5개처 물 이외는 모두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고 물이 불으면 모두 배로 건너는데, 땅이 평평하기 때문에 물이 괴면 빠지기 어려워서 땅이 모두 수렁이 된다. 유하구(柳河溝) 등지는 옛날에는 거마가 진흙 속에 빠지면 결국 구해 내지 못하였다.강물은 혼탁하여서 색깔은 적황(赤黃)이고 맛은 쓰고 냄새가 나며, 물이란 것이 느릅나무즙[楡汁]과 같다. 샘물 맛이 나빠 소나 말도 마시려 하지 않아 매양 물을 길어 가지고 가는데, 관내(關內) 물맛은 좀 낫다. (중략)
소금 사막(沙漠)의 풍경이다. 이곳은 대막의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며, 이 인근 지역이 모두 소금기가 있어서, 연행록의 기록대로 물맛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역사(歷史)적 의미를 지니는 다리이다. 다리 양옆으로 조그만 호랑이 조각물을 세워놓고 노호교(老虎橋)라고 하고 있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곤륜로(崑崙路) 로 들어가는 다리인데, 이교각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 한것을 보면, 역사(歷史)의 조작(造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알게 해주는 다리이다.
이 다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설명한것을 보면, 일명 노호교 (老虎橋),란간상도시석노호(欄杆上都時石老虎)라고 설명을 하고, 이 다리를 흐르는 운하(運河)에 대하여,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고 있다.
주견제사(主見諸事)
中國貢路。皆從蘆溝橋入燕。蘆溝是桑乾海。距燕京西南四十里。橋外大路。是天下之門路。便是燕之外城。而天設門限也。(중략)
중국의 공로(貢路)는 모두 노구교(蘆溝橋)로 해서 연경으로 들어가니, 노구교는 곧 상건(桑乾)이다. 바다는 연경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떨어졌고 다리 밖의 큰길은 곧 천하의 문로(門路)로서 곧 연경의 외성인데, 천연적으로 세워진 문이다. (중략)
역사(歷史)적으로 연원이 깊은 다리를 설명하는데, 이런 황당한 설명이 어디에 있는가 ?
조선(朝鮮)의 연행록(燕行錄)에는, 원(元) 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이 운하(運河)를 처음 만들어서, 통주(通州)라는 이름도, 그에 기인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란간(欄杆)이 원(元)의 쿠빌라이를 말하는 것인지, 상도시(上都時)라고 한다면, 어느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 하기가 짝이 없다.
이 도시의 전경이다. 아득히 보이는 곳이 대막(大漠)으로 임한 곳이고, 시내의 남쪽에 운하(運河)의 물이 흐르고 있다.
멀리 보이는 곳이 대막(大漠)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며, 앞에 있는 물줄기는, 운하(運河)로 흐르는 물이다.
庚子燕行雜識
過宋家城鼈山店。望見西南間煙霧中。有一帶長林。隱映數百里外。卽所謂薊門煙樹也。遠而望之。宛如雲樹。迫而察之。無所見。如蜃樓之起滅於空中。眞奇觀也。此爲燕都八景之一 (중략)
송가성(宋家城) 별산점(鼈山店)을 지나서 서남쪽 사이를 바라다보니, 연기와 안개 속에 한 줄기 장림(長林)이 수백 리 밖에 은은히 비쳐 보인다. 이것은 곧 이른바 ‘계문연수(薊門煙樹)’라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뚜렷이 운수(雲樹)와 같다가 바싹 가서 살펴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치 신기루가 일어났다가 공중에서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이것이 연도 팔경(燕都八景)의 하나이다. (중략)
계문연수(薊門煙樹)와 비슷한 현상인데, 연행록(燕行錄)의 기록대로, 이런 현상은, 이곳 뿐만 아니라 요동(遼東)벌 전체에서 나타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운하(運河)의 동쪽에 있는 수문이다. 현재 이운하의 물은 아리태산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 들이고 있는데, 이 도시의 중요한 생명수와 같은 물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도 운하(運河)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지금의 운하(運河)는, 원(元)과 청(淸)나라의 시대와는 차이가 많을 것이다.
이 도시와 인접한 산의 모습인데, 대체적으로 산의 토질이 많이 검다.
이 도시의 인근 지역에 있는 산들은, 이처럼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산에는 나무가 없는 곳이 많다. 골짜기와 낮은 구릉지대는, 제법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는데, 그리 많지는 않고, 나무가 없는 풀만 무성한 구릉지대의 연속이다.
이곳이 바로 바다라고 하는 발하슈호이다. 이곳 주변에는 연행록(燕行錄)의 기록과 일치하는 성(城)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산해관(山海關)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유적(遺跡)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주견제사(主見諸事)
太行東脉。走爲盤山爲山海關爲毉巫閭山。正龍行千餘里。而東南面爲燕爲遼爲薊爲海。彌望一大野。山以北則爲長城。長城內外。遼薊以北。盡是蒙古地方。未有界限。蒙古以外則西北東界。萬里俄羅㒋地也。自栅內及燕。土色或黑或靑。多白少黃。石礫絶稀。 (중략)
태항산의 동쪽 산맥은 반산(盤山)이 되고, 산해관이 되고,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된다.오른편 산맥이 1000여 리를 가서 동남쪽에는 연경(燕京)ㆍ요주(遼州)ㆍ계주(薊州)ㆍ해주(海州)가 되는데, 한 큰 야산(野山)이 아득히 보이고 이북은 장성이 된다. 장성 내외와 요주ㆍ계주 이북은 모두 몽고(蒙古 몽골) 지방인데, 한계가 없다. 몽고 밖 서쪽ㆍ북쪽ㆍ동쪽은 만 리의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땅에 접해 있다. 책문 안에서부터 연경까지의 흙 색깔은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며, 백색은 많고 황색은 적으며 돌과 자갈은 거의 드물었다. (중략)
연행록 김정중 燕行錄[金正中]
下坮騎馬行數里。向山海關而來。溟海橫蕩東南。角山崛起西北。眞天府金湯之地也。關在山河間。綰轂其口。故人行無憑照公文。則不許其出入云。日晩入關。歷瓮城。至第二門。以大字外書祥藹摶桑。內書天下第一關。雖非李客卿筆法。亦近代高手也。凡五重門。有三夾城。城中有副都督,戶部衙門。過此。一行從人皆下馬。此是舊例也。(중략)
대에서 내려와 말을 타고 2리쯤 가서 산해관을 향하여 왔는데, 동남에는 명해(溟海)가 가로질러 뒤흔들리고 서남에는 각산(角山)이 우뚝 솟았으니, 참으로 천부(天府), 금탕(金湯)의 땅이다. 관(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그 어귀를 모두 얽어매었으므로, 사람의 통행에 빙조공문(憑照公文)이 없으면 그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해 늦게 관문에 들어가 옹성(瓮城)을 지나 둘째 문에 이르니, 큰 글자로 밖에 ‘상서가 부상에 가득하다.[祥藹榑桑]’고 쓰고 안에 ‘천하에서 첫째가는 관[天下第一關]’이라 썼는데, 이 객경(李客卿 이사(李斯))의 필법(筆法)은 아닐지라도 역시 근대의 훌륭한 솜씨이다. 모두 다섯 겹문이고, 세 협성(夾城)이 있으며, 성안에는 부도독(副都督)과 호부(戶部)의 아문이 있는데, 여기를 지날 적에 일행과 따르는 사람들은 다 말에서 내리니, 이는 곧 옛 규례이다. (중략)
영원위(寧遠衛)는, 각화도(覺華島)앞 바다와 10 리라고 했으니, 저 보이는 섬이 각화도(覺華島)인가 ?
산해관(山海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그 어귀를 모두 얽어 매었다고 했는데, 실지로 이곳은, 양쪽으로 산이 마주보고 있어서,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다면, 개미 한마리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된다.
천하(天下)에 험한 진(陣)이 산해관(山海關)이라고 한 말은, 이러함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발하슈호의 동쪽에 있는 도시에, 옛 건물을 재현하여 놓은 것이다. 이 건물과 공원을 만든 연혁을 보면, 개인들이 기부를 하여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기부자들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청(淸)나라 열하(熱下)의 피서 산장과 연이은 행궁이, 400 리에 걸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때, 이곳도 그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내에도 민족성이 살아나는 것인가 ?
요동(遼東) 들판과 요동(遼東) 사막(沙漠)의 모습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上]
自中江以後。蘆葦夾道。其長過人。間多老木柯梢。罥挂衣冠。或橫仄路邊。中開一小徑。地皆黑沙。間有沮洳。大抵盡日所行。無非荒原廢野。所見蕭瑟。踰九連峴。申時。到九連城。此處雖以城名。而不知何年廢壞。作一荒墟。曠無人居。(중략)
중강(中江)에서부터는 길을 따라 갈대가 있는데, 그 길이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노목(老木)들이 많은데 그 가지에 의관이 걸린다. 어떤 것은 길가에 가로누워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만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땅은 모두 검은 모래이고, 더러 습한 곳도 있다. 대개 하루 종일 가는 길이 모두 거친 벌판과 황량한 들판뿐이어서 보이는 것마다 모두 쓸쓸하다. 구련현(九連峴)을 넘어서 신시(申時)에 구련성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록 성(城)이라고는 하나 어느 해에 허물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거친 빈터에 사람 하나 살고 있지 않았다. (중략)
끝이 없는 아득한 요동(遼東)들판이라고 했던가 ?
주견제사(主見諸事)
入栅以後。連行山谷。靑石岺以後。一望平地遙遙。看西北遠山。若有若無。三四日之行。都不見山。四望虛空。雲天平垂。正似霧中行。反不知遼野之爲大也。(중략)
책문에 들어간 후로는 줄곧 산곡(山谷)을 지나가다가 청석령(靑石嶺)을 지나면서부터는 끝없는 평원으로서 아득히 서북쪽 먼 산을 바라보니, 가물가물하였다. 3, 4일을 가는 동안에 도시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구름낀 하늘만이 평야에 드리워져 있어 마치 안개 속을 가는 것 같아, 도리어 요동 벌판이 크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중략)
이곳으로 부터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자락을 제외하고 나면, 구릉과 평원과 모레벌판, 풀이 자라는 들판으로 이어지는 아득한 대야(大野)로 이어지고 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북경(北京)까지는, 모두 모래땅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지역이다.
운하(運河)의 동쪽에 있는 수문의 모습이다. 아리태산의 강물을 1000 리에 끌어 들이는 것이니, 이물은 압록강(鴨綠江)의 물이며, 백두산(白頭山)의 물이다.
건물의 모습이 청(淸)나라 풍이 아니다.
이러한 자갈 들판이 100 여리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이 자갈 들판이 이어지는 지역은, 이 도시의 동쪽, 즉 대막(大漠)과 인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황막한 사막(沙漠) 흰 자갈뿐인 천리광야에, 높이 벽돌담을 쌓아서 빙 둘러놓고는 ..............
이 도시에 이러한 동상을 세워놓은 것은, 필히 제비와 연산(燕山)과 연경(燕京)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제비 4 마리는, 그 무엇을 뜻하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通州江一名潞河。俗又呼爲外河。源遠流駛。率多沙溜。每夏秋暴雨。最易衝決。少遇天旱。舟便淺澁。故設淺五十餘處。卽天下通漕之處也。通州之稱。亦以是云。岸上閭閻。皆臨水而居。望之如畫。往往以白灰塗其屋上。河水氷合。百餘艘舸艦。泊在上下。亦有江南商舶之留着者。若比我國三江之船泊則不啻倍之。而曾聞通州船檣。有如萬木之森立。爲天下壯觀云。今來見之。不盡如此 (중략)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 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언덕 위의 민가(民家)들은 모두 물에 임해서 살기 때문에 바라다보면 마치 그림과 같다. 이따금 백회(白灰)로 그 집 위를 바른 것도 있다. 냇물이 얼면 백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위아래에 정박해 있고, 강남(江南) 상선(商船)도 머물러 있는 것이 있다. 만일 이것을 우리나라 삼강(三江)의 선박에 비교한다면 곱절만 될 뿐이 아니다. 일찍이 듣기로는 통주의 배 돛대가 마치 만 그루의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것과 같아서,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렇지는 않다. (중략)
이 홍교(虹橋)는 연행록(燕行錄)에서, 배가 이 다리 밑으로 통과한다고 말한 북경(北京)의 명물이었다. 지금의 이 다리는 새로 만들어 세운 표식이 역력하다. 그것은, 오래된 벽돌과 새 벽돌이 뒤섞이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본래의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이 홍교(虹橋)만 그런 것이 아니고, 동쪽에 있는 수문에도, 조각상들이 옛것과 새로 만든 것이 뒤섞이어 있다.
조경일록(朝京日錄)
陰。早朝。發行。渡大通橋。橋在通州西十里許。極高廣。下有三虹門。漕船由橋下而過
(중략)
흐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대통교(大通橋)를 건넜다.다리는 통주 서쪽 10리쯤에 있어 매우 높고 넓으며 아래 세 홍예문(虹霓門)이 있는데, 조선(漕船)이 다리 아래로 통과한다.
(중략)
요동(遼東) 벌 에서 볼수 있는 풍경중의 하나는, 낙타이다.
몽고포는 초원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풍경이다.
열하일기 (熱河日記)
시냇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다. 오도하(五渡河)까지 5리만큼씩 돈대가 하나씩 있다. 이른바 두대자(頭臺子)ㆍ이대자(二臺子)ㆍ삼대자(三臺子)라는 것은 모두 봉대(烽臺 봉화를 놓는 곳)의 이름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마치 필통(筆筒)같이 동그랗다. 대 위에는 성첩(城堞)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 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길가에 간혹 널을 돌 무더기로 눌러 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 두어서 나무 모서리가 썩어 버린 것도 있다. 대개 뼈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불사른다 한다.흔히 길 옆에 무덤이 있는데, 위가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아니하였으며, 백양(白楊)을 많이 줄지어 심었다. (중략)
이곳 사람들은, 이 축조물을 옛날 진(陣)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연행록에서 말하는 봉대(烽臺)의 일종이거나, 진(陣)의 한 축조 방식이었을 것이다.
지금 보는것은 높이에서 연행록(燕行錄)과 차이를 보이지만, 필통과 같이 동그랗다는 설명은 일치하고 있다.
주견제사(主見諸事)
過瀋陽歷北鎭庙。自此始有山氣。以至于燕京。幷千餘里。西北如屛障者。都是一山行龍。而山勢巨壯。蓋太行之南一麓。爲燕京之龍虎。西山枝麓。東南入渤海之口 (중략)
심양(瀋陽)을 거쳐 북진묘(北鎭廟)를 지나고 나니,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산기(山氣)가 있어 연경에까지 이르는데 도합 1000여 리이다. 서북쪽에 병풍같이 둘려 있는 것은 도무지 한 줄기로 뻗은 산맥인데 산세가 장대하였다. 대개 태항산(太行山) 남쪽의 한 산록으로 연경의 용호(龍虎 용은 왼쪽의 산맥인 청룡(靑龍), 호는 오른쪽 산맥인 백호(白虎))가 된다. 서산의 지록(枝麓)은 동남쪽으로 뻗어 발해(渤海)의 어귀로 들어간다. (중략)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의 남쪽에 천산(千山)의 봉우리가 웅장하다고 연행록(燕行錄)은 기록하고 있다.
천산(千山)이라고 고도 하고, 천산(天山)이라고도 하는데, 천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천산 (千山)이라고 하는 기록(記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천산(天山)이라고 하는 기록도, 운하(運河)가 있는 이, 도시에 곤륜로(崑崙路)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둘다 맞는 기록(記錄)일 것이다.
심양(瀋陽)에서 남쪽으로 천산(千山)이 보인다고 하는데, 기록과 거리, 방향등이 맞는다.
조경일록(朝京日錄)
人死則不葬於山。葬於野田中。或路旁平地。墳形銳甚如艾炷。年年取土一鍤。加於其上。謂之加土。以此益高益銳。不用莎覆。士大夫則四面築墻。前開一門。此所謂神道墓門也。墻內墳如立蔥。多者數十。少者六七。樹以白楊老柯。門額。題曰某官某人之先塋。自通州至北京。夾路左右。皆墓門也。與村閻相雜。不在路旁者。又何可勝計哉。(중략)
사람이 죽으면 산에 장사 지내지 않고 들판 밭 가운데나 혹은 길가의 평지에 장사 지내는데, 봉분(封墳)의 모형은 윗부분이 매우 뾰족하여 애주(艾炷 쑥심지)와 같았다. 해마다 흙을 한 삽씩 떠다 그 위에 붙이는데 이것을 가토(加土)라고 하니, 이로 인해 높아지고 더욱 뾰족해지며, 잔디도 덮지 않았다.사대부의 묘소는 사면에 담을 쌓고 앞에 문 하나를 내니 이것이 이른바 신도묘문(神道墓門)이다. 담장 안엔 봉분이 파[葱]가 서 있는 것과 같아 많은 것은 수십 개이고 적은 것은 6, 7개인데, 백양(白楊)과 노가(老柯)를 심고 현판을 ‘모관(某官) 모인(某人)의 선영(先塋)’이라고 써 놓았다. 통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길의 좌우가 모두 묘문이어서 마을의 여염과 서로 섞였으니, 길가에 있지 않은 것이야 또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중략)
이 묘를 보면서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는, 거의 정확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도 이 풍습(風習)은 변함이 없으니, 삶과 죽음이 인간에 있어서 일대의 중대사가 아닌가 ?
이곳만 그런것이 아니라 카자흐스탄의 동쪽 지역으로는, 같은 풍습(風習)을 유지하고 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 2천리 지방에 이와같은 장례(葬禮) 풍습(風習)은, 어렵지 않게 지금도 볼수 있다.
엠파스한자사전
이것이 바로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에 나오는 연대(煙臺)이다. 압록강(鴨綠江)가에서 청(淸)나라의 누르하치가 있는 건주(建州)까지, 연대(煙臺)에 대한 기록(記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연대가 특이한 구조 를 같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대(煙臺)가 있는곳이 바로 압록강(鴨綠江)이 흐르는 지역이며, 건주(建州)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신흠(申欽, 1566년∼162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경숙, 호는 상촌, 본관은 평산이다.
신흠(申欽)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보고서에는 연대(煙臺)의 수 , 마을, 인구, 말의수, 누르하치의 동향, 누르하치의 성(城)에관한 내용 등 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카자흐스탄과 중국 국경에 인접한, 카자흐스탄에서 세워놓은 정(鼎)의 모습이다. 카자흐스탄 같은 나라에서도 이런일을 하는데, 일만년의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역사(歷史)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지금보는 것이 고대(古代)의 정(鼎)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한 고대(古代)의 정(鼎)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
청(淸)나라의 건축물들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모양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형식이 청(淸)나라의 전통(傳統) 건축 방식이다.
청(淸)나라의 건축물들은, 이러한 특색있는 형식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 지금의 북경(北京)이 청(淸)나라의 연경(燕京)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해를 가지고 달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고 방식이 과연 올바른 자세인가는, 깊이 생각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것이 청(淸)나라의 모습이다.
이 건물과 조형물이 있는 도시는, 우르무치 인근에 있는, 창길시이다. 우르무치에 있는 고대(古代)의 성곽(城郭)은 흔적(흔적)없이 없에 버리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러한 건물을 지어놓고, 청(淸)나라의 역사(歷史)에 먹칠을 하는 자들이 오늘날의 중국의 행태이다.
그런한 자들이니 만리장성이 압록강(압록강)을 넘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비석(碑石)에서 확인되는 것은, 연산(燕山)은, 이곳 지역의 인근에 있는 산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비석(비석)마다 제비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碑石)들은 대단히 오래된 비석(비석)이라고 하는데, 하나같이 제자리에 온전히 있는 것이 없다.
연산(燕山과 연경(燕京)의 유래는, 그 역사(歷史)가 오래인데, 역사(歷史)를 조작하는 자들이 그런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제자리에 보전 할리가 만무한 것이다.
이 보다 더 오래된 비석(碑石)도 있는데, 개인이 감추고 있다가 다시 기증한것도 있고, 아직도 아무도 모르게 소장(所藏)하고 있는 것도 있다고 하니, 이러한 일들은, 역사(歷史)의 비애를 느끼는 한 단면일 것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塔)이 보인다. 이 탑은 8각 13층에 높이는 70길[仞]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唐)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을 타고 요동으로 돌아와 본즉, 성곽과 인민이 이미 바뀌었으므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니, 이것이 곧 그가 머물렀던 화표주(華表柱)다.”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요양성 밖에 있으니 성에서 10리도 못 되는 곳이고, 또 그리 높고 크지도 않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조례(皁隷)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중략)
요동(遼東) 벌에 있는 백탑(白塔)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들이 존재하고 있다. 요동(遼東)벌에는 백탑(白塔)이 10개가 있다는 기록도 있고, 누가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紛紛)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본래 백탑(白塔)이라고 정의 (定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요동(遼東)의 백탑(白塔)이, 요동(遼東)벌을 누르고 있다는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볼때, 현재의 이 백탑(白塔)이 맞을 것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요동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 리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세 개가 놓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만 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린다. (중략)
그런데 현재의 이탑(塔)은, 옛 모습이 아니다. 현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백탑(백탑)이 있던 곳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백탑(白塔)의 형태(形態)가 참으로 미묘(微妙)하다.
사막(사막)에서 바라보면 장관인 것은 분명한데, 탑(塔)에 낙서 하듯이 써놓은 홍산탑(弘山塔)이라는 글귀와, 탑(塔)의 형태(形態)가, 역사의 비애를 느끼게 하고 있다.
지금 현지의 지명(地名)과 유적(遺跡) 유물(遺物)들은, 원래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 드물다.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어 세우고, 옛 역사의 자취는 단절(斷絶)시켜, 역사의 흔적(痕迹)을 지운 뜻이 역역하다.
백탑(白塔)에서 바라보는 요동(遼東)벌의, 광경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아득히 지평선 넘어, 먼 산이 보일듯 하지만, 운무가 끼면 흐릿해서 꼭 안개가 낀것 같다.
이 탑(塔)은, 요동(遼東)벌 대야(大野)의 장관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백탑(白塔)이 요동(遼東)벌 삼분의 일을 차지했다는 말은 그렇듯한 표현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그 유명한 요택(遼澤)이 자리잡고, 200 여리 천하(天下)의 비습(卑濕)한 곳이 펼쳐지게 된다.
위성사진 출처 구글어스
위의 사진들은 원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의 모습이다. 자료를 더 첨부할것이 많으나, 너무 길어지므로, 다음 기회에 올리기로 한다.
대학(大學)의 반명(盤銘)에 이르기를, 하루를 새롭게 하면, 나날이 새롭게 되고, 또 날로 새롭게 하겠다고 하였다.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은 세숫대에 글을 새기고, 매일 이 귀절을 외우며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갈고 닦아, 천하(天下)에 태평(太平)의 길을 열었다.
역사(歷史)라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학문(學文)과 혼(魂)과 정신(精神)을 올바로 심어주는 것이다.
옛 성현(聖賢)들도 역사(歷史)의 흐름 속에서, 선대(先代)의 위대한 조상님(祖上恁)들이 남긴 학문(學文)과 걸어온 길을 본받아, 스스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학문(學文)을 익히고, 천하(天下)에 인간의 바른 길을 닦으려고 노력 했던 것이다.
역사(歷史)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정의 하는 설(說)이 분분한데, 이러한 논리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역사(歷史)는 지나간 일들을, 있는 그대로 사실(事實)대로 보는 것이지, 그 무슨 강자의 논리니 뭐니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심는가 ?
오늘에 이르러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우려고, 힘과 역량을 기울이는 것은,역사(歷史)가 단절되고 나면, 학문(學文)과 혼(魂)과 정신(精神)과, 본인 자신의 자아(自我)를 상실 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작금의 한국(韓國) 현실은, 일만년의 역사(歷史)는 단절되고, 역사(歷史)도 없으며, 학문의 전통(傳統)도 끊어지고, 그저 다른 나라의 학문(學文)을 최고 인줄알고, 그것을 따라하는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느 나라가 되었든 간에 역사(歷史)를 모르면, 자기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수많은 사례(事例)들을 모를 것이요, 그것을 모르면, 그 국가(國家)가 당면한 문제를 모르게 되고, 그렇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나라는 미래(未來)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예(例)가 현실에 가까이 있는 것은, 세상에 수재도 많고, 소위 간판이 화려한 사람도 많으면서, 국가(國家)의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논쟁만을 일삼는 것으로 날을 보내는데, 현실에서 이러한 예(例)가 증명(證明)이 되는 것이며, 당대(當代)에 그러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歷史)를 잃으면서, 학문(學文)의 근본(根本)을 모르고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學文)의 발전사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
그렇지 않을 진데, 오늘날의 학문(學文)을 평생하며, 그 지식(知識)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당면한 중대사 하나도 풀어나가지 못하는 그러한 학문(學文)을 무엇에 쓰려고, 후세(後世)들에게 근엄한 권위를 내세우며 가르치는 것인가 ?
책을 만권을 쓰고 논문(論文)을 만편을 낸다고 하더라도,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당면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학문(學文)의 본질을 벗어난 죽은 학문(學文)일 뿐이다.
대학(大學)에서 이르기를 ........... 그 근본(根本)이 어지러운데 말단(末端)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나니, 그 후하게 할것을 박하게 하고, 그 박하게 할것을 후하게 하려는 자는 없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천자(天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으로 근본(根本)으로 삼는다. 라고 하였고.................
증자(曾子)가 가로되.............열눈이 보는 바이여...........열손이 가리키고 있음이니, 그 엄하고 엄함이여 라고 하였다.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이러한 학문(學文)을 하고, 수신(修身)을 하며 자신을 갈고 닦고, 고금(古今)의 역사(歷史)에 통달했던 분들이다.
이러한 분들이 청(淸)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 남긴 기록(記錄)이 연행록(燕行錄)이다.
이러한 기록(記錄)들과 침략자들이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역사(歷史)가, 허무 맹랑하게 상충(相衝)됨에도 불구하고, 그 의문(疑問)을 찾아서, 그 것을 밝혀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기미(幾微)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이를 더욱 조국(祖國)과 후세(後世)들에게 고착(固着)화 시키는 그 뜻은 참으로 알수 없는 일이다.
선대(先代)분들이 남긴 기록(記錄)을 보고, 현지를 조사 하면서, 조상님(祖上恁)들께, 어찌 엎드려 감사를 드리고,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조선사(朝鮮史)는 위대하고 찬란(燦爛)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歷史)를, 침략의 무리들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을 말살하기 위하여,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그대로, 국민(國民)들과 후세(後世)들에게 가르치는, 그 목적(目的)은, 무엇이며, 그 뜻은 이디에 두고 있으며, 그 근본(根本)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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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가장 슬프고, 비참하게 생각되는 것은 "자국인" 스스로 자신들의 선대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영광과 찬란했던, 유구한 조선사를 한 갖 반도역사로, 식민사학의 줄거리를 궤 맞춰 그것을 역사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우리들을 생각하면 비참한 생각 뿐입니다. 이런 조작된 역사를 조선사라고 하면서, 강단에서 우리들이 내는 세금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만든다는 사실엔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반도는 <혁신적인 정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게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구글지형도로 보아도 산이 검게 나타나는군요. 음산(陰山)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나무 하나 없는 거무튀튀한 산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은데, 티벳의 라싸 인근의 산맥도 또한 시커먼 음산이더군요.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 도읍을 석탄산 인근에 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옥토였을 남쪽 평원이 대막(大漠)인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변한것이 뭔가 음모가 있어 보입니다. 사방의 거무튀튀한 석탄산으로 둘러쌓인 곳에 위치하고 압록강(예니세이)으로 흘러가는 지류들이 요택(遼澤)을 이루었을 천혜의 옥토가 황량한 사막으로 바뀐것이 언제부터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요동벌은 압록수(예니세이)의 본류였을 큰 강 주변에 펼쳐진 비옥한 벌판인 듯 헌데, 강과 옥야천리의 요동벌은
어마어마하게 컷던 아랄해가 흔적도 없는 증발해 검은 사막으로 변했듯이, 뭔가 정책적으로 사막화가 되어버린 듯한 음모의 냄새가 납니다. 아무다리강의 물줄기를 카스피해로 돌리자 아랄해는 현재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요동벌을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 발하쉬호로 집결된 물줄기가 동북으로 흘러 북극으로 빠졌던 것 같은데, 구글지도 동북에 보이는 천지였을 호수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리 흔적이 보이는 압록강 줄기가 어떤 이유인지 천지(天池)공사를 당한 듯 합니다.
압록강(예니세이)의 흐름은 천지에서 서남으로 흘러 발하쉬호(산해관)에 결집해서 유턴하여 방향을 동북으로 틀었던 흔적이 역력하네요. 산맥의 허연색은 만년설이고, 평지의 허연색은 강과 호수가 말라 생긴 소금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드문드문 떨어진 허연색을 연결하면 압록수(예니세이)의 물줄기가 천산산맥을 빙돌아 시베리아의 중심을 관통해 북극해로 빠지는 강의 흐름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요동벌(타클라마칸) 북쪽에 있는 천지(天池)의 호수물이 물줄기가 빠지지 못하게 하는 댐공사로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를 확인하면, 요동벌의 사막화와 중앙아 역사의 증발의 비밀이 확연히 벗겨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아리태산은 알타이 산이며, 천산(天山)인 것 같은데요. 천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딱히 운하라기 보다는 원래부터 자연스레 형성된 물줄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압록수(예니세이) 상류의 말라버린 물줄기에 간간히 흘러드는 물줄기를 가지고 인공의 운하라고 구라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제현 선생님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을 드리며,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공개하지 못할 조선사의 자료가 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 하는 바입니다. 현재 준비 작업을 하고 있으나, 홀로 하는 일이라 시간이 여의치 않음을 이해하여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조선사가 그 빛을 보고 제자리를 찾아 갈수 있는 것은. 제현 선생님, 여러분의 성원에 힘 입은 것입니다.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여, 준비 작업이 마쳐지는 時 에 이르러, 조선사의 전말을 올리고저 밤과 낮을 벗 삼아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현 선생님 댁내에 두루 평안하시고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