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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 도음산 천곡사 순례 1 慶北 浦港 禱陰山 泉谷寺 巡禮 一
9시경 출출한 배를 안고 25.8Km 떨어진 천곡사로 향하며 콩요리나 산채비빔밥집이 있으면 들 어가 출출한 위장을 위로 하려 했으나 음식점은 대개 오리고기, 닭고기, 불고기 등만 있지 두부 음식이나 산채비빔밥 등은 없었습니다. 간혹 간판이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문을 안 열었거나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몇 번을 허탕치다 보니 천곡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밥은 없지만 주차장 한 옆에서 자리를 펴는데 소명거사님께서 자리를 가지고 오셔서 활짝 피니 오 붓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비니초님이 준비한 참외, 포도, 바나나, 냉커피, 칡차 보화님의 우뭇 가사리콩국 등을 먹으며 주린 배를 위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기연을 만났습니다. 거사님께 고향을 여쭈니 "충남 천안입니다." 하시는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같은 고향이면 반가운 법이라 "ㅎㅎㅎ 저도 천안입니다. 그러면 천안 어디이신데요?" 다시 여쭈니 "성환입니다." 하시는 거였습니다. 점입가경 기막힌 일이었습니 다. "저도 성환입니다. 성환 어디 이십니까? 저는 학정리인데..." "어룡리입니다." 그래서 학교 까지 거론되었는데 중학교 10년 선배로 밝혀졌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 아닐 수 없었습 니다. 원래 서울에 사시다가 직장따라 지금은 경산에서 생활하신다고 하며, 찔레꽃님은 조계 종 포교사로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경산에서 활동하시는 법사님이셨습니다. 정말로 반가운 만 남이었습니다.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사시예불시간이 되었는지 목탁과 태징소리가 나오 더니 유장한 영산회상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계곡에 크게 들리는 것이었습니 다. 찔레꽃님이 귀한 경험을 한다며 빨리 올라가자고 하시어 자리를 정리하고 천곡사로 향했 습니다.
천곡사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천1리 796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입니다. 천곡사에 대하여 천곡사 홈페이지에 실린 글을 인용해 봅니다. 『천곡사(泉谷寺)는 흔히 영곡사(靈谷寺)라고도 부른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우연히 피부병을 얻어 오랫동안 낫지 않고 백약이 무효하므로 모두가 안타까워 했다. 신하들이 동해변 퇴화현(阿等邊退火縣)의 천곡령(泉谷嶺)이라는 산 아래에 신비한 물이 물이 솟아나는데 흔히 사람들이‘만병통치의 약수’라 하니 납시어 목욕하기를 권하 므로, 왕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곡사까지 와 며칠 목욕하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완치되었다. 왕은 천곡령 아래에서 솟는 물의 신비한 효험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자장율사 (慈藏律師)로 하여금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천곡사(泉谷寺)라 명명하였다. 경내 13동의 건 물이 나열병립(羅列竝立)하여 그 위용이 일대 장관(壯觀)이었는데 애석하게도 6.25동란의 병화(兵火)로 역사적인 신라고찰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과거의 천년거각 안에 천년노불은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천곡사 홈페이지에서-
천곡사로 가는 길
장승 같은 약수터 안내목
다리 밑에는 약수터가 있는데 못 봤습니다. 이 약수터와 선덕여왕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약수 터입니다.
등안교(登岸橋)
이 다리는 최근에 놓은 듯 합니다. 피안으로 오르는 다리입니다. 다리 이쪽은 차안(此岸)으로 사바세계(娑婆世界)이고, 다리 저쪽은 피안(彼岸)으로 불국토(佛國土)의 세계입니다.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이 절의 주전(主殿)이 보입니다.
관음전(觀音殿)
마침 비구니 스님께서 사시불공 중이어서 조용히 참배만 하고 나왔습니다. 이 건물은 퇴락한 대웅전을 헐고 2001년 건립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장지붕 건물입니다. 안에는 관세음보살 좌상이 봉안 되어 있는데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0년 전 경북 곡강의 용 주사에서 이운하여 봉안했다고 합니다.
이 절이 선덕여왕의 피부병을 고친 까닭으로 선덕여왕이 친히 자장율사로 하여금 사찰을 건립 케 했다 하니 선덕여왕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에 대해서 잘 알고 계 시겠지만 선덕여왕에 대해서 알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글을 올려 봅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47)에 대하여
『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 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조세를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 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 다.
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 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 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 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 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ㆍ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 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당하였다. (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寺九層塔)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견제 를 가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 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백과사전에서-
관음전 벽화. 1. 선덕여왕이 피부병에 걸리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우연히 피부병을 얻어 오랫동안 낫지 않고 백약이 무효 하므로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장면입니다.
2. 천곡령의 약수를 듣다
한 관원이 어떤 사람에게서 동해변 퇴화현退火縣)의 천곡령(泉谷嶺)이라는 산 아래에 신비한 물이 솟아나는데 '만병통치의 약수'라는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장면입니다.
3. 천곡령의 약수를 확인하다
관원들이 천곡령의 약수가 정말 좋은지 어쩐지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장면입니다. 일국의 왕 에게 치유를 위하여 건의하려면 소문만 믿고 무턱대고 하였다가는 낭패이므로 진위를 살피러 가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신하들이 여왕께 이 사실을 고합니다.
4. 천곡령 약수터로 가다.
신하들은 사실을 조사해 보니 좋은 약수라 하며 며칠간 납시어 약수에 목욕하고 정양(靜養)할 것을 건의하니 이를 받아들여 선덕여왕이 천곡령 약수터로 가는 장면입니다.
5. 우물에 목욕하다.
이 천곡령에 와서 목욕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더 자세히
시녀들이 약수를 퍼내어 연신 닦아내고 있네요.
시중드는 사람들
이렇게 며칠간 목욕한 선덕여왕은 그를 괴롭히던 피부병으로 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신기하게 도 씻은 듯이 나아 완치하여 궁궐로 돌아가게 됩니다.
6. 천곡사를 짓다.
선덕여왕은 천곡령 아래의 약수 덕분에 피부병이 나음에 감격하여 이곳에 자장율사로 하여금 절을 짓게게 하고 천곡사(泉谷寺)라 명명하게 됩니다.
7. 중생에게 가피 내리다.
절을 낙성한 자장율사가 법문을 들으러 온 불자들에게 법문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관음전 벽면은 선덕여왕이 이곳에서 피부병을 고쳐서 절을 지었다는 내력에 대하여 벽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 앞으로 이 절을 찾게 되시면 벽화를 잘 둘러 보세요. 저도 간과 하고 지나갔다가 주지스님 말씀을 듣고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찍어 왔습니다.
아, 그런데 사진을 찍다 보니 밧데리가 다하여 하필이면 주차장에 가방을 두고 왔는데 거기에 여분의 밧데리가 있어 난감했는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비니초님이 그 더위에 부랴부랴 내려가 가지고 왔는데 밧데리가 아닌 메모리카드여서 난감했네요. ㅎㅎㅎ 그 더위에 다시 가기는 힘 들 것 같아서 뛰어갔다 오려 했더니 어느새 다시 내려가 밧데리를 가져왔네요. 짜증이 날만도 한데... ㅎㅎㅎ 그래서 무사히 주련도 찍고 그 밖의 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또 하나의 곡절이 남아 있으니 다음 보경사에서 기술해 보겠습니다. ㅎㅎㅎ
삼성각
맞배지붕의 아담한 삼성각입니다.
칠성의 주불이신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이와 같이 삼성각 내에 존상으로 모신 경우는 처음 봅니다. 특이한 예입니다. 이 삼성상(三聖像) 사진은 부득이 천곡사 홈페에제에서 가져온 사진입니다. 이때 밧데리가 떨어져서 찍지 못했습니다.
삼성각 옆에 피어난 상사화가 장관입니다.
끽다거(喫茶去)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요사채 같습니다.
☞ 다음 2부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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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상 잘 했습니다..... 늘 행복한 나날되세요~~~ ().
천곡사는 전설에 비해 소사찰이지만 스님의 노력으로 사세가장 될 것 같습니다. _()_
입구에서 아침겸 점심 맛나게 먹은 생각 남니다,마침 비구니 스님이 사시 예불 중 이어서 짧은 시간 잠시 동참 하였지요....나무묘법연화경()()()
예, 주차장에서의 담소시간이 많이 생각납니다. 비구니 스님이 예불 중이어서 내부는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 _()_
먼 옛날 선덕여왕님을 떠올리면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 봤답니다 물맛은 약간 건건 쩝쩝 하던데요..... 더운 날씨 탓인가_()_
소사찰이지만 지금도 선덕여왕이 살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물을 한참 틀어야 시원할 텐데 금방 트셔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_()_
선덕여왕의 한 시름을 덜어 준 약수 덕분에 천곡사가 세워졌네요. 10년 선배를 그곳에서 만나신 소감은 더욱 기쁠 듯 합니다. ^-^
선덕여왕이 아득한 옛날의 왕이지만 오늘날에도 막강한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천곡사가 소사찰이지만 예전엔 서산대사 법손이 주석할 정도여서 명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0년 선배를 순례길에 만날률은 극히 드문일이지요. _()_
잘보았읍니다()
천곡사 약수로 모든 식수와 생활용수로 쓰고 있는데 약수로 지어진 밥을 먹고 싶네요.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인지... _()_
천곡사는 제 뇌리에 꽉 박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