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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원, 나의 죽음!
2. 왜 죽어야 하는가?
사람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힘든 일일 때 더 그렇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자기를 죽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1) 죽어야 잠재력이 풀려납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셨고 죽으심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계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맺은 열매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이토록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한 알의 밀이 아닙니다. 우리도 한 알의 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죽이면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일어납니다.
제가 성도들에게 가장 권하는 테이프는 하이디 베어커의 『보좌로부터 사랑의 강물이』라는 제목의 세미나 테이프입니다. 그녀는 자아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고, 자아의 죽음에 하나의 모델이 되는 사람입니다. 최근 하이디 베이커가 남편 롤랜드와 함께 쓴 『항상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롤랜드와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도 사모했기에 그분께서 자기의 영을 쏟아 부어 주시는 모든 곳에 우리가 있기를 원했다. 미국에서 집회 인도를 위해 초대를 받을 때마다, 우리는 그 집회 장소가 토론토와 가까운지를 계산해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집회를 마치고 토론토에 들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998년 1월에 랜디 클락이 그곳에서 사도적 기름부음과, 우리의 삶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불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네가 모잠비크를 원하느냐? 라고 묻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불이 내 위에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너무 뜨거워서 정말 문자 그대로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하나님, 죽을 것만 같아요!'라고 외쳤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분명하게 '좋다. 나는 네가 죽기를 원하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완전히 비움으로 자신의 더 많은 영을 내 안에 불어 넣어 주실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때 하이디는 일주일 동안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하이디를 사용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소경들이 연거푸 눈을 뜨고, 심지어 4인분의 음식으로 5,000명을 넘게 먹이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5년 만에 6,000개의 교회를 세웠고, 아프리카 12개국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죽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런 잠재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알의 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그 한 사람을 통해 100명이 구원받을 수도 있고, 1,000명이 구원받을 수도 있고, 10,000명이 구원받을 수도 있고 있습니다. 아니 10만 명, 100만 명, 1,000만 명 이상이 구원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이런 무한한 잠재력은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철저히 죽을 때 풀려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2) 죽어야 나를 통해 성령이 흘러갑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 의하면 성전 문틈에서 흘러나온 생수가 강을 이루었고 그 강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 바다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과도 같이 우리의 뱃속에서 성령이 강물처럼 흘러나와 교회와 지역사회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전도의 다이나믹 파워』라는 책에서 민경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실제적으로 성령이 그 상대방에게 전해져야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자 속에서 성령이 나타나지 못하면 그 복음은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 그러면 성령이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자아에 갇혀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 속의 혼에 거하지 않고 영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성령은 그 사람 속에서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왜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성령은 우리의 영 속에 계시고 그것을 혼이 싸고 있고 마지막으로 육이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이 깨어지지 않고 육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에 계신 성령님이 혼과 육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반석이 깨졌을 때 그곳에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 성령님이 흘러나오게 하려면 혼이 깨지고 육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가정으로, 교회로, 도시와 국가로, 그리고 열방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3) 죽어야 기름부음이 임합니다.
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역한 김승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설교는 제목부터가 압권이었는데, 설교의 제목은 "기름부음의 대가는 죽음입니다."였습니다.
베니 힌은 한 책에서 "나는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나는 강단에 오를 때마다 죽습니다."라는 캐더린 쿨만의 고백을 소개한 후 이렇게 썼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육체에게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에서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부으신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실제로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 가장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모세입니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갈랐지만 모세는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의 학문을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고 동족을 위해서 일하려는 열정이 있었던 젊은 시절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배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꿈도 죽고, 혈기도 죽은 모세를 찾아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기름부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일 조르지만 우리가 죽지 않으면 40년이 지나도 기름부음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름이 가득한 기름병을 가지고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원하면 죽어야 합니다.
한편, 신약에서 가장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희한한 능을 행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기름부음은 죽은 자들의 것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일 조르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은 자에게 기름을 붓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합니다.
(4) 죽어야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캐더린 쿨만은 요한복음 14장 12절을 본문으로 한 "이보다 큰 일"이라는 설교에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만나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용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집회에 참석했던 한 볼리비아 청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신자였던 한 볼리비아 청년이 캐더린 쿨만의 집회에 참석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 달 후 그는 집회 장소 밖에 있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접는 의자에 올라서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능숙치 못한 영어로 한 달 전에 어떻게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전하는 동안 성령이 임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볼리비아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의 증거를 통해 볼리비아 대통령이 구원을 얻었고 대통령의 부인도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젊은 청년은 볼리비아에서 한 번에 수천 명을 모아 놓고 복음을 전하며 치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쿨만은 이 같은 볼리비아 청녀의 간증을 소개한 후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그를 쓰셨듯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또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인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빌 해몬 박사가 쓴 『영원한 교회』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다음 운동에 참여할 만한 요구 사항은 죄와 자아에 대하여 죽은 바 된 사람들일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이러한 참여자들에게는 현실적인 생활 방침이 되어질 것이다."
과거에는 몰라도 앞으로는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5) 죽어야 예언이 맹세로 전환됩니다.
여러분, 내가 굶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자식을 굶기는 게 쉽습니까? 나아가서 내가 죽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자식을 죽이는 게 쉽습니까? 내가 죽는 게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요구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기 전 그는 자식을 죽이기 전에 자기를 죽여야 했습니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에 올랐을 때 거기서 죽은 것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약속은 맹세로 바뀌었습니다.
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약속은 이미 수차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조건부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님이 맹세로 인친 약속이 되었습니다. 예정이 아니라 확정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도 직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미래에 관한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어떤 거창한 예언이 주어졌든 그것은 예언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죽지 않으면 그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죽으면 여러분에 관한 예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보다 더한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발생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합니다.
(6) 죽어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요 12:2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산 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있고, 죽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은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을 위해서 주님을 섬기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섬김이고 사랑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대접을 받았듯이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주의 종"이라 하여 성도들이 떠받들고 섬겨 줍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유명히 여김을 받고 섬김을 받으나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실 사람이 많습니다.
마 7:22-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나 자아가 죽은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불법을 행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귀히 여기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길 원하십니까?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이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입니다.
(7) 죽어야 자기 자아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노벨 헤이즈 라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분은 『당신의 운명을 노리는 사단을 제압하는 능력』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주된 문제는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원은 주께서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구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이 있고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지옥에서의 구원, 사탄으로부터의 구원, 죄에서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고 보배로운 구원은 바로 '자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구원입니다.
미국에서 지도자론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존 맥스웰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사건건 존 맥스웰 목사님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붙잡아 혼내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그 방해자가 자기 앞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잘 만났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달려들어 그 방해자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혼내주려고 모자를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해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방해자는 나다."
며칠 전 제가 "주여, 나를 죽여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대마귀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마귀 때문에 교회가 부흥을 안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마귀가 아니라 나입니다. 주님의 일에 마귀보다 더 위협이 되는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그러니 내가 대마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가 바로 대마귀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막히고 안됩니다. 오 주여, 제발 나를 죽여 주시옵소서."
진실로 하나님의 일에 가장 걸림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나를 죽여주소서, 나를 죽여주소서."라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부르짖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