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ommunication의 의미가 지금도 통하는 나라.
죄를 지은 범죄자에서 내리는 형벌중 사형은 최고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의 세력이 드높았을 때는 교회에서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파문이라는 형벌은 범죄자를 교회에서 쫓아 내면서 그의 옷 앞뒤에 "파문"이라고 쓴 겉옷을 입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옷을 입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그를 도운 사람은 이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하여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만일 파문당한 범죄자가 우물에서 어떤 사람에게
"물 한잔만 주시오"
라고 물을 때, 돌아서서 그를 보았더라도 못본척 다시 돌아서서 자신의 일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돌아서서 그 사람에게
"당신이 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오?"
라고 해도 죄값을 받아야 되었습니다. 때문에 파문당한 범죄자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 처리되는 것이지요.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사회로부터 매장당한 것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파문(excomminication)"의 형벌입니다.
영어 단어에서 communication은 대화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대화를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과 교감이 오가는 것, 마음이 오가는 것,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칭찬하는 것 그것이 communication이라면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탈된 것이 바로 파문, excommunication인 것이다.
언제가 우리나라에게서는 이러한 일들로 인해 메스컴에서 화제 집중이 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일입니다. 얼마전에는 한 중학교 교실에서 이러한 파문의 일이 동영상으로 찍혀서 인터넷상에 올라온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지매"라는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왕따"라는 말로 불리우는 것이다. 왕따는 파문과 같은 말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완전히 고립시키는, 살인만큼이나 무서운 범죄와도 같은 것이 왕따입니다.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은 당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와 몸짓(행동)으로 억압하고 억누르려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말에 존중하고 들어주는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나의 생각을 입을 통해 몸짓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에",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도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다. 서로간에 대화는 하고 있지만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는 아니지요.
내가 다른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인다고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 뜻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느끼는 것,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행동에서도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왕따가 없어야 합니다.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파문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우리식의 표현으로 하면 왕따 당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용기와 치료를 주셨습니다.
나 아닌 다름사람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