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가문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200여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훌륭한 음악가를 배출해 낸 음악 가족이며 또한 독실한 루터정통파 가문이기도 합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가르키듯 모든 음악가들에게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는 바흐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음악가 집안이기 때문에 바흐의 음악성이 어려서부터 튼튼하게 다져졌으리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인 것이지요. 그는 부모님을 여읜 후에 그의 형을 따라 오르도르프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의 형은 바로크시대의 대 작곡가로 불리던 파헬벨의 제자였으며 바흐도 그의 형에게서 파헬벨의 음악어법을 배웠습니다.
바흐는 그가 독일의 여러곳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매우 훌륭하고 당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들과 만날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바흐는 생계유지를 위해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며 작곡을 계속하였고, 1708년에는 바이마르의 궁정오르간연주자가 되어 후에 궁정악단의 지휘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717년에는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취임하였고, 바흐 자신은 쾨텐에서의 생활에 매우 만족해 하였습니다. 바흐는 헨델의 작품에 대해 높게 평가했었고, 만나기를 희망하였었습니다. 바흐가 쾨텐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번 헨델과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공요롭게도 이 두 위대한 작곡가들끼리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720년 첫번째 부인과 사별해야했던 바흐는 슬픔을 안은 채 라이프치히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남은 삶을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일하며 지냈으며 그는 작곡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많은 작품을 출판하고 연주했으며 1736년에는 폴란드 왕 작센의 궁정작곡가 칭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작품집들이 출판되었고, 바흐는 자신의 많은 작품집들을 정리하고 재편집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어법을 좀더 성숙한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바흐의 업적들은 그의 아들들을 통해 계승되어 후대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가르쳐졌고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음악어법을 가장 완벽한 것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지요.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르의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음악을 한마디로 특정지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이 대위적인 선율작법과 화성적인 진행의 완벽한 융화점을 가진다는 데 대해서는 별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Bach's Pencil Sketch』
특별히 다양한 전조양식을 정립하였고, 매우 밀도있는 다성부 선율작법이 그의 음악적 특성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우 박절적인 리듬과 긴장감있는 변화화성의 진행들은 음악을 매우 힘있게 만들어 줄 뿐만이 아니라 집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루터정통파 가문이었다는 점과 교회 오르간연주자였다는 점 등은 그가 코랄형식의 곡을 많이 작곡하게 해 주었습니다.
『J.S. Bach's Logo』
● 브란덴 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 Concert BWV 1046 ~ 1051) 바흐는 풍요롭고 행복한 쾨텐에서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음악을 하며 살려했지만 1720년 아내인 마리아 바르바라가 어린 자식들을 남긴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고통은 바흐를 더욱 일에 몰두하게 했습니다. 1721년 겨울이 끝날 무렵 그는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을 완성했는데 3월 24일 크리스티 루드비히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헌정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여러개의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이었지요. 각각의 독주악기에 현악 합주를 대비시켰으며 바흐는 헌사에서 이것을 '다양한 악기들과의 협주' 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바흐는 몇 년전 크리스티 루드비히 폰 브란덴부르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가 쾨텐을 위해 주문된 새로운 하프시코드를 손에 넣기 위해 베를린에 있을 때인 1719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주 크리스챤 루드비히는 베를린의 궁전에 살면서 자신이 직접 6명의 음악가로 이루어진 소규모 악단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의 만남은 아마 음악 창작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때 그 영주는 아마도 바흐의 작품들에 익숙해지고 싶은 요구를 표현했을 것입니다. 이 요구는 쾨텐의 궁정악장이었던 바흐가 그에게 6개의 협주곡을 헌정했던 1721년에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바흐의 협주곡들이 베를린에 있는 그 영주의 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지요. 오직 제5번과 제6번 협주곡만이 실제로 그곳에 있던 몇 안되는 음악가들을 확대시키지 않고서도 연주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 헌정된 악보가 사용된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작품들이 연주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든 연주되기 위해서는 총보에서 개별 성부들을 위한 악보로 다시 정서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뭏튼 그 협주곡을 쓸 때 바흐는 베를린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쾨텐의 오케스트라를 염두해 두고 작품을 썼습니다. 그가 이끈 소규모 실내악단의 정확한 구성에 대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결코 정서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 협주곡들의 관현악법은 쾨텐에서의 연주 실제와 관련해야만 상세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실제로 바이올리니스트로 출발했던 바흐는 스스로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 "화성의 중간 성부"를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Marlboro Recording Society - Pablo Casals Bach: Brandenburg Concertos Nos.1-3 & 4-6;』
형식과 악기 구성, 양식이 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여섯 개의 협주곡이 진정한 연작으로 간주되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협주곡 장르에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집대성해 놓은 사전과도 같습니다. 이 음악의 궁정 연주 일정이 잡히자, 바흐는 풍요위 느낌, 행복이 분출되는 느낌이 깃들여 있어,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음악적 대화를 전개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거기에는 이탈리아 양식, 프랑스적 취향, 독일식의 절제, 다성과 단성, 춤곡의 동기, 그리고 활발하게 교체되는 대위법의 구조 등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교회와 왕실의 양식이 행복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악기의 구성은 다양한 음색을 들려주기 위해 서서히 변화되었습니다. 각 협주곡의 구조를 구별하는 특성을 살펴보면 바흐가 쾨텐궁정의 연주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연주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쾨텐의 뛰어난 궁정연주가들은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을 멋지게 연주했지만 당사자인 브란덴부르크 후작은 이 곡을 단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무관심 속에서 서가에 꽂혀 있던 바흐의 귀중한 자필원고는 수많은 협주곡 악보들과 섞여 있다가 후작이 죽자 그의 후손들이 나눠 가졌습니다. 이 악보는 30년 뒤인 1754년 바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키른베르거가 입수하면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지요.
『Gustav LEONHARDT Anner BYLSMA Bach: The Brandenburg Concertos, 』
연주실제와 악기편성의 측면에서 볼 때 <브라덴부르크>협주곡은 그것의 독특한 예술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보다 인간적인 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정악장이었던 바흐는 그의 다른 모든 작품들처럼, 상상적인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인 현재의 필요와 조건을 위해서 그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작곡하는데 피할 수 없는 제약들을 그는 상상력과 탁월한 독창성으로 상쇄할 수 있었습니다. 악기 그룹들의 다양한 색채감이 그 협주곡 자체의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바흐가 한 세트의 협주곡 전집을 쓰고자 했었는가 하는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씌여졌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6개의 소나타, 6개의 첼로 조곡,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 콘체르타토를 위한 6개의 소나타 등은 모두 이 당시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전집에 대한 본질을 보여줍니다.
전집이란, 어느 정도 동일한 구성을 갖는 하나의 완결적인 작품으로서, 최소한 하나의 일관된 주도적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브란덴부르크">협주곡에는 그러한 원리가 없습니다. 독창적인 그 제목이 암시하듯이, 바흐는 이 작품들에서 협주곡 형식이 갖는 광범위한 변형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각 작품들을 음악적 유사성을 지닌 통일된 전체로 묶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작품에 관한 기록들에서도 그러한 사실은 입증되고 있습니다. 오직 그 헌정된 사본만이 6곡의 작품들을 한 작품으로 묶고 있을 뿐이며, 다른 기록들에서는 그 작품들이 언제나 분리된 작품으로 존재합니다. 결국 양식적 연구는 이 협주곡들이 여러 해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점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이 협주곡들을 연대순으로 배치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작품들의 다양한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윤곽이 그려지는 하나의 기본적인 경향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 경향이란 바로 여러 성부의 협주곡에서 독주 음악으로 향하는 그러한 발전입니다. 그는 하나의 특정 유형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6곡의 서로 다른 변형들 속에서 그는 바로크 협주곡 작법의 반세기를 보여줍니다. 서서히 새로운 종합을 만들어 내고 최고의 창조적 차원으로 그 형식을 재구성함으써 가능케 했습니다. 3년 이상에 걸친 기간 중에 그는 처음으로 그 협주곡의 제3번과 제6번을 작곡했으며, 그와 함께 제1번도 수정하였습니다. 제1번의 초기본에는 독주 악기들이 없었습니다. 제2번은 4명의 독주자들이 주도적으로 나옵니다. 반면에 제4번에서는 바이올린에게 특히 대가적인 독주의 지위가 부여됩니다. 제5번은 이러한 발전의 최후 단계를 보여주는데, 제1악장이 뛰어난 하프시코드 카덴짜에서 그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718년에서 1721년 사이에 씌여진 이 작품들의 대략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3번-제6번-제1번-제2번-제4번-제5번.
● CD's Available
● 협주곡 제2번 F장조 독주 협주곡으로의 분명한 경향은 협주곡 제2번 F장조, BWV1047에서 인지되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바로크 성숙기의 콘체르도 그로소(합주 협주곡)의 전형적인 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콘체르토 그로소의 전형적인 특징이란, 전체 현악 투티에서 콘체르티노(이 곡에는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의 4성부로 구성됨.)가 분리되어 나와 그것이 투티와 대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콘체르티노에 대한 취급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각각의 악기들은 새롭게 결합된 사운드를 연속적으로 만들어 내면서 리피에노(투티)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러한 취급법은 특히 마지막 악장의 주제 재료에서 보여지듯이 이미 고도의 독립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협주곡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중주곡과 유사한 중간 악장은 평온하게 휴식하는 듯한 분위기를 제공합니다.
● 협주곡 제3번 G장조 『No.3 G Major Manuscript』
협주곡 제3번 G장조, BWV1048 협주곡 작법의 가장 오래된 유형인, 악기들을 몇 개의 합주 부분으로 구분하는 그러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특징의 정신적 배경은 1600년경의 가브리엘리 시대에 속하는 것입니다. 투티와 콘체르티노(작은 합주) 혹은 독주 악기들이 대비되는 대신에, 여기서는 같은 비중을 갖는 3개의 대립적인 그룹들이 있어서, 높은 성부, 중간성부, 낮은 성부 그룹들로 나뉘어집니다. 각각의 그룹이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나온 뒤 에 그들은 하나로 합쳐지지만 이 세 그룹을 동화시키는 힘의 대화를 경향보다 더 큰 비중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처리법은 현대적이며, 그 효과는 거의 교향악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것을 동시대적 어법속에서 재구성해내는 바흐의 기술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 협주곡 제4번 G장조 협주곡 제4번 G장조, BWV1049와 제5번 D장조, BWV1050은 여전히 바로크 성숙기의 콘체르토 그로소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악기가 독주 주자로서의 주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4번에서는 바이올린과 두 개의 리코더로 이루어진 콘체르티노가 현악 투티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부각되는 제2악장은 코렐리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콘체르탄테적 (경쟁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 협주곡 제5번 D장조 제5번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블리가토 하프시코드가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포함하는 콘체르티노 가운데에서 부각됩니다. 특히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지 없이 연주되지요. 제1악장의 탁월한 하프시코드 카덴짜는 원래 19마디의 길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필사본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 입증되었듯이, 그것은 문자 그대로 바흐가 헌정본을 필사하던 최후의 순간에 씌여졌습니다. 바흐는 그것을 65마디로 확대하여 그 길이를 세배 이상 확대시켰으며, 그럼으로써, 그 악장에 하프시코드 협주곡과 같은 성격이 주어졌습니다. 제2악장에서는 트리오 형식의 독주 연주가 특징적이지요. 우리는 그 당시 바흐가 하프시코드 오블리가코를 지닌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의의 『Bach: Brandenburg Concertos』
최고의 창조적 재능을 지닌 바흐는 그의 <브라덴부르크>협주곡에서 옛것과 새것을 통일시켜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작품에서 그는 과거의 회상을 현재와 융합시킴으로써 전체 협주곡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그는 결코 진부한 관습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가장 개성있는 방식으로 각각의 패턴을 변형시켰습니다.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형식들을 새롭게 결합시키고 변형함으로써 말입니다. 독주 협주곡과 합주 협주곡을 독특하게 혼합시킨 것은 협주곡의 역사에서 그가 가장 독창적으로 기여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후 바이올린 혹은 하프시코드를 위한 그의 독주 협주곡들에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에서는 참여하는 악기들 간의 대조가 아니라 오히려 융합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는, 협주곡의 악장을 동질적인 구성으로 만들어내는 이태리인들보다 훨씬 더 일관적입니다. 따라서 <브라덴부루크>협주곡은 협주곡이라는 형식의 발전에 있어서 일종의 이정표 같은 것입니다. 250년이 지나 지금에도 그 작품은 여전히 현대적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