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이규태
글이 실린 곳: 2002. 8.10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중국 절강성 영해에 성종 때 선비 최부의 표류사적비가 일전 제막되었다.
외국인에 의한 중국기행문으로 "동방견문록"과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3대 기행문으로 꼽히는
최부의 "표해록"은 제주도에 경차관으로 가있던 최부가 부친상을 당해 바다를 건너오다가
난파 표류 끝에 명나라 내륙을 거쳐 7개월 만에 돌아오는 동안의 기록이다.
난파로 돛이며 닻이며 키도 날려버리고 굶기를 며칠하고 있는데 해적에게까지 약탈당해 알거지가된 데다가
최부는 작두로 잘리기 직전 구출되기까지 했다.
이 극한 상황에서 구제된 그 바닷가 현장에 사적비가 세워진 것이다.
표류에서 연속되는 극한 상황보다 그 상황과 대치해서 표출된 한국 선비의 기질을 기리는 사적탑으로서
보다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뒹굴고 나자빠지고 인사불성이 된 그 난파선에서 최부는 상복을 벗은 적이 없고
복상(服喪)의 예의를 지키느라 고통이 남달랐다.
일행이 엎드려 세상 사는데 변치 않는 도리도 있지만 임기응변하는 편법도 있다하고 상모를 벗고 편복할 것을 간곡히 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배 속에서 옷가지까지 약탈당했지만 상갓(喪笠)만은 목숨과 바꾸라고 대들어
한양 청파역에 도달할 때까지 머리에서 벗는다는 법이 없었다.
돌아오는 도중 현지 관리가 머리에 쓴 것이 뭐냐고 물었다.
상인(喪人)으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으므로
피눈물 나는 슬픈 마음을 이 깊은 상갓 속에 간직하고자 함이라고 대꾸했다.
계속되는 난파 속에서 일행은 신명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제사를 지내자고 간청을 했으나
우리가 바람을 잘못 탄 탓일 뿐 신명에 의지하는 현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선비의 뼈대를 의연히 지켜냈다.
돌아와 임금을 뵙자 '죽음을 무릅쓰고 국위를 선양했다' 하고 옷 한 벌을 하사하고서 표해록을 지어 바치라는 어명을 내렸다. 최부는 하루바삐 내려가 복상을 해야 하지만 어명을 따르는 총(忠)과 상을 입는 효(孝)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선충후효(先忠後孝)를 선택했다.
이는 당시 선효후충이 상식인 엘리트사회에서 파격적이고 용기있는 선택이었다.
나약해진 현대에서 선비에게 본뜰 것은 이 같은 심지와 의지의 뼈대다.
최부 표류비는 바로 그 절규라는 편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