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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영을 분별하라-빈야드(Vineyard)운동”
1. 빈야드(Vineyard) 운동의 원류
빈야드 운동은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 (Anaheim)에 있는 \"빈야드교회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이끄는 죤 윔버 (John Wimber)에 의해 시작되었다.그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밑에서 음악에 매료되어 대학을 졸업한 후, 1960년대 유명한 록 그룹 ‘Righteous Brothers’를 조직하였고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나중에 퀘이커 교도를 만나 회심을 체험하고 아주사대학 성경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나중에 풀러신학교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면서 교회성장연구소와 오순절 성령파의 영향으로 "빈야드 교회 연합(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을 조직하여 은사, 치유, 능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토론토 축복\" 이라 불리우는 죤 아노트 (John Arnott)이다. 그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하는 죤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현재는 죤 윔버(John Wimber)가 이끄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죤 아노트(John Arnott)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은 분리되었다.
2.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1. 성령의 비인격화 현상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 현상적인 기적적인 일을 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 심령이 거듭나서(요 3:5)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며(고전12:3), 주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행1:8) 우리에게 임하신 삼위일체 성령하나님이시 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다양한 은사를 교회에 부어 주신다(참고: 롬12장,고전12장,엡4장). 그러므로 성령은 기적적인 무슨 능력이나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자로 변화받고 진리의 길에 따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의 핵심은 성령의 외적 은사를 성령받은 증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러한 외적 은사가 진정한 성령운동이라고 강조한다.
(1)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
-그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하지만 비성경적이다.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의 근거?: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 21:6)을 말하고 있고 주로 성경의 기쁨과 희락의 근거로 웃음이 나온다 고 한다. 분명히 웃음은 기쁨의 근거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지 꼭 성령받아야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비웃음이며 아들 이삭을 낳고 웃은 사라의 웃음(창21:6)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격과 기쁨의 웃음이다. 자연현상을 지나치게 성령운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2) 짐승의 소리들
-이들의 집회때마다 각종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다양하다. 특히 기도할 때에 나타난다.
-짐승소리의 근거?: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암3:8) (The Father`s Blessing\" pp.172-173) *이것은 비유이 지 실제적인 사자울음이 아니다. -닭소리는 재림의 소리라고 하며, 개소리는 사단의 소리라고 하며, 사자소리는 귀신을 좇아낼 때가 되어서 나는 소리 이며, 바람, 물, 새, 소나기 등의 자연의 소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찬양하는 바람에 자연도 함께 회복되는 은혜의 소리라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며, 비성경적이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3) 쓰러지는 현상
-존 윔버는 성령의 은혜가 너무 강력하면 쓰러지게 된다고 강변한다.
-쓰러짐의 근거?: 겔1:28; 단8:17; 요18:6; 마28:4, 행9:4; 계1:17등이다(John Wimber, Kevin Springer, \"능력치유\" 이재범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359). 위에 언급한 성경의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쓰러짐의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너무 비약된 경우가 많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받으 면 넘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본 경우이고, 다니엘은 엎드려 깊이 잠든 상태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은 예수님의 당당하신 모습에 넘어 진 것이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군사들이 넘어진 것은 천사를 보고 놀라서 넘어진 경우이며, 다메섹에서 사울이 넘어진 것은 강렬한 빛으로 인한 경우 이며, 요한이 밧모섬에서 엎으린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다. 성령의 강력한 펀치를 맞으면 넘어진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엉터리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이다.
(4) 떠는(진동) 현상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66:5이나 렘5:22, 막 5:33, 눅8:47, 행16:29, 고전2:3, 고후7:15, 빌2:12; 히12:21 등을 인용하지만(\"능력치유\" p.356), 거기에 나타난 것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 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처럼 성령이 기름을 부으시는 현상이 아니다.
2. 무질서한 예배와 성령의 은사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들은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증을 위하여..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기 위하여..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바르게 세워지고 성장 하기 위해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사들은 특히 교회의 유익을 가져온다(고전14장, 엡4:11).
-빈야드 지도자들은 성령의 초월적인 기이한 현상들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내적 유익보다는 교회의 무질서 현상을 가져온다. 결국 영적 혼란을 부추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일찍이 고린도 교회에 경계한 무분별한 은사주의이다(고전14:5-40).
-빈야드 운동은 질서없는 무질서한 찬양인도, 웃음, 넘어짐, 소리지름, 방언기도, 예언 등으로 예배의 혼란을 가져온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운동이 아니다(고전14:33).
결론) 각 교파별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하나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계시관에 있어서, 빈야드 운동은 사 도적 계시의 종료성을 불인정하고 있고, 성령론에 있어서, 사도적 이적과 섭리적 이적을 분별치 못하고 있으며, 예배에서 영적 자유와 무질서를 혼동하며 거룩한 웃음과 동물적 괴성의 비성경성, 옷차림의 부도덕성, 쓰러짐과 춤추는 찬양 등 불경건성이 두드러 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령의 역 사를 비인격화 시키는 것이며 말씀선포가 중심이 되지 않는 은사주의는 위험스런우며 주관적 감각이나 신비적 체험과 경험만을 부각시키고 추구하는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4:23)라고 볼 수 없다.
http://www.sdbansuk.org/bbs/board.php?bo_table=biblebasic&wr_id=61
빈야드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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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論
韓國敎會와 우리 교단은 선교 2C에 접어들면서 그 동안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바탕하여 부흥 성장하는 活力이 넘치던 급성장의 熱氣가 식어지고 성장이 둔화되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牧會일선에 선 救會者들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전도 운동이 活性化되고 지속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고 效果的인 牧會方法을 찾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內)교회 내에서 일어나 세계로 퍼져가는 “제3의 물결”이란 이름으로 시도되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는 빈야드 운동에 韓國敎會와 牧會者들은 새로운 救會갱신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운동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적, 신유,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리는 일 등 초자연적인 것과 초대교회에 번성했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계속 된다고 믿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에 참석하고 매료된 牧會者들은 이미 빈야드 교회의 목회방식을 능력의 목회로 적용하고 있고 교회의 예배를 빈야드 예배로 바꾼 이도 있다. 갑작스런 예배 갱신의 충격과 혼란으로 기존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그것을 모방하기를 원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목회와 신학 1995. 6월호)
그 동안 우리 교단은 성경계시 중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바탕에서 성장 발전하면서 복음을 앞세운 비복음적인 운동의 오염을 방지해 왔다.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 김기동의 귀신론, 예태해씨의 넘어짐, 류광수의 다락방 운동 등을 하나씩 검증 정리했다.
이제 한국 교회에 제3의 물결로 파도쳐 오는 빈야드 운동을 아무런 검증없이 성급하게 능력의 목회 대안으로 앞서 신학부에서는 성경적인 면과 신학적 실천신학 입장에서 그 실상을 밝혀 보고자 한다.
本 論
1. 빈야드 운동이란 무엇인가?
빈야드 운동은 우리 말로 옮기면 “포도원을 세우는 운동”이다. 빈야드 운동이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세계 빈야드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 집회나 세미나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격식 없는 프로그램化 되지 않은 단순한 예배 절차, 찬양과 치유사역, 넘어짐, 방언, 전율, 중보기도, 예언사역 등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포트 빈야드 교회 예배와 세미나 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거룩한 웃음들, 넘어짐, 기이한 짐승 소리(사자, 개, 닭)등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는 John Wimber가 제창한 능력전도, 능력치유, 능력牧會, 교회성장 등을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빈야드 운동의 특징적 여러 단면을 보여준 것으로 빈야드 운동 전체를 말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훌러 신학교 선교 대학원 교회성장학 Peter Wagner교수는 20C에 들어와서 기독교 안에 세 가지 성령운동 물결이 일어났다고 보고 제1의 물결은 19C말에서 20C초엽에 일어났던 五句節운동이요, 제2의 물결은 1960년대에 개신교 여러 교파로부터 일어나서 천주교에까지 미쳐진 은사 운동이요, 제3의 물결은(미래 학자 칼빈 토플러에 의해 창안되었다. 훌러 신학교의 P.W교수가 물결 은사운동에 적용하면서 기독교계에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John Wimber에 의하여 발생한 빈야드 운동이라고 하였다. 윔버牧師는 “능력전도”, “8장 성령의 역사, 새로운 물결”에서 ‘나는 와그너 박사가 “제 3의 물결”이라고 지칭한 것이 하나의 새로운 물결이라기보다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운동은 오순절운동과 은사 운동처럼 예수님과 초대 교회에 있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에 오셨던 성령의 오심과 역사들 이적, 병 고침, 귀신축출, 죽은 자를 살림 등의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초대교회 선자들에게 나타났던 방언, 예언, 통역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이 운동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기대와 찬양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역방식을 다시 활용한다. 빈야드 운동은 근본적으로 성령운동과 성령운동에 의한 복음 전파와 교회성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1) 사도행전적인 성령 역사의 표적과 기사를 동반한 복음전도
2) 교회의 숫적성장의 方法論을 추구함이요
3)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예배 행사를 통하여 기사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능력전도와 빈야드 찬양이며 증거이다. 기존의 복음전도는 단순히 설교를 통하여 영적인 각성에 호소하였으며 分明한 회개와 告白과 함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빈야드 복음전도는 설교에 의존보다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간증과 기적의 행사를 전시함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기사화 하려는 방법을 쓴다.
Wimber는 지금까지 전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이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능력전도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성장해 가는 방법이라고 했다.
빈야드 운동이란 Peter Wagner 교수는 20C에 기독교 안에 일어난 세 가지 성령운 동 물결 즉 오순절 운동을 제1물결, 은사 운동을 제2물결, 그리 고 빈야드 운동을 제3물결이라고 규정했다.
존 윔버는 Wagner 박사가 제3의 물결이라고 규정한 것이 하나의 물결이라기보다는 은사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빈야드 운동을 정리하면 존 윔버를 中心으로 국제 빈야드 교회(협의회)에 소속된 교회와 牧師들이 주창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을 행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운동이라고 보아진다.
Peter Wagner 교수는 Wimber 牧師를 통한 치유 은사를 체험한 后 빈야드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 세우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제1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은 교단을 형성하였지만 제2의 물결인 은사 운동은 1970-1980년대에 오순절 운동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신 오순절 운동”(New Pentecostalism) 이 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 운동은 교단을 형성 하지는 않았지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는 물론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제3의 물결 은사 갱신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나타난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으로 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빈야드 운동은 현재 약 2000명의 한인 牧師들이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나 캐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교회의 집회나 세미나에 참석하였으며 그리고 약 2000명의 牧師 및 평신도가 빈야드 운동 세미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牧師와 평신도가 참석 하게 될는지 그리고 이 운동이 새로운 교단으로까지 발전하게 될는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2. John Wimber
빈야드 운동은 국제 빈야드 교회협의회에서 주창하는 표적과 기사를 통한 사역 운동이라고 했는데 John Wimber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라고 했다. 모든 빈야드 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 창설자이며 국제 빈야드 교회 협의회(빈야드 교회 교단 총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존 윔버 牧師를 제쳐두고는 빈야드 운동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배경을 알 수 없다.
1) 존 윔버는 어떤 人物인가?
1934년 불신자의 가정에서 출생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 아버지 슬하에서 보냈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좋아하므로 음악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졸업 후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록 음악 그룹인 Righteous Brothers 보컬 그룹을 만들어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1962년말 아내와 이혼 직전에 아내와 함께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하여 퀘어커 교도들이 인도하던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공부하면서 뜻밖의 개인적인 회심, 체험을 통하여 부부가 함께 기독교 신앙에 열렬하게 헌신하게 되었다. 회심 후 음악계를 떠났고 그 동안 모은 재산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성경 공부와 개인전도 사역에 헌신됐다. l970년에 퀘이커교단 소속인 요르바 린다 포랜드(형제 교단)교회에서 收師안 수 받은 후 1970년에서 l973년 사이에 아주사 퍼시픽 성경 대학에 편입하여 신학공부 를 하였다. 1974년 풀러 신학 대학원에 가서 선약학교수 G. E. Ladd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교 대학원에서 풀러 복음전도 및 교회성장 연구 소 설립에 관계하게 되었고 이 연구소의 분과 책임자 및 (1982) 교회성장학 조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교회성장학에 깊이 관여하면서 교회성장학 교수들인 Peter Wagner, Donald A. Mc Gavvran, Charles Kraft, Russel Spltter의 강의와 그들의 제3세계 선교보고 등을 통해서 지금 이 時代에도 예수님과 사도 시대에 있었던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들이 동반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의 五句節 王義 신학자 Donald Gee의 저서 “Concerning Spiritual Gifts” ( 영 적 은사에 관하여 ) 와 Marton Kclscy의 “Healing and christianity ( 치유와 기독교)를 통해 오늘날도 성경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복음서 연구를 통해 이들의 가르침을 옳다고 믿고 개인적으로 표적과 기사와 치유 등이 동반하는 복음 전파 능력전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7년 요르바 린다 갈보리 채플을 설립하였고 치유와 은사 운동으로 급격한 교인 수 증가를 체험했다.
그 후 1982년 Peter Wagner의 주선으로 풀러 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표적과 기사와 교회성장”을 강의하면서 제3의 물결 운동을 주도했다. 그 동안 풀러에서 배우고 깨닫고 체험한 바를 牧會에 직접 접목시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1983년 갈보리 교단에서 탈퇴 Kenn Gullikson의 예수운동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빈야드 교회 펠로섬에 加入하였다. 빈야드 교회는 John Wimbr 牧師의 탁월한 지도력과 그가 제창한 빈야드 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을 오늘 우리 시대에 재현하자는 운동에 의해 13년이 지난 1996년 현재 약 550개의 소속 교회로 윔버가 개척한 애너하임 빈야드 교회는 현재 약 6000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2. 빈야드 운동의 현상
1) 토론토 블레싱사건
빈야드 운동은 토론토 블레싱이란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1994년 1월 26일 캐나다 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한 자그마한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교회(빈 야드 교회에서 일이) 아르노토 收師는 빈야드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랜디 플라크 救師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갖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회에서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넘어지기도 하고 거룩한 웃음을 웃으며 방언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쓰러지는 일과 웃는 현상, 짐승 소리와 같은 괴성을 지르는 현상이다. 빈야드 운동이 크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 바로 이 토론토 블레싱 이었으며 거기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는 바로 넘어짐과 거룩한 웃음이란 은사의 형태로 보는 것이다. 토론토 블레싱의 사건은 빈야드 운동의 또 하나의 영적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오순절 운동과 신유 은사 운동에 관심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 물결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현상
빈야드 주의자들은 개혁 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 또는 육체적인 체험 신앙을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다음과 같다.
①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몸의 떨림에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에 나타날 수 있고 땀을 흘리거나 숨을 깊이 쉬거나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이 수반될 수 있다고 한다. 이 떨림에는 평온한 진동과 격렬한 진동이 있는데 평온한 진동은 “영적 갱신이나 목회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과 관련이 있고 격렬한 진동은 “성령께서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 또는 어떠한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죄나 마음의 상처’ 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치유능력 355p)
② 고꾸라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성직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머리를 땅에 짓찧기도 하는데 이를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Wimber는 주장한다.(능력치유 366p)
③ 술 취한 듯한 행동이다.
이 현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새로이 깨닫는 것이다.
④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는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한 內的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⑤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 있다.
갑자기 껄껄대거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몇 시간동안 때로는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정서적인 치유가 필요하거나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 한데서 오는 반응(흐느낌) 또는 그분의 은총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웃음) 일수도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62p)
⑥ 장시간 걸쳐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가 있다.
이런 경우 “방언의 은사를 받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새로이 부여받았다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했다.(363p)
3) 빈야드 예배 현상
빈야드 세미나와 예배에는 먼저 기타, 하모니카, 키보드 등 악기로 젊은 사역자들이 맨발에 반바지를 입고 껌을 씹으며 악기를 다룬다. 빈야드에서는 빈야드 찬양을 해야 한다. 한얼山에서는 한얼山에 맞는 찬양을 오산리에서는 오산리 성격에 맞는 찬양을 해야 성령을 받고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의 찬양을 해야 은혜를 받는다(Paul Mim 牧師)고 한다. 빈야드 집회에서는 빈야드 찬양을 해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치유가 가능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다고 한다.
세미나 강사가 자신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려고 했는데 문에 들어오는 순간 성령께서 “겸손”을 강의 하라고 해서 겸손이란 제목으로 즉흥적으로 했다.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의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하면 된다는 것이다. 평범한 여신도가 거룩한 권세 성령의 권세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그 소리를 거룩한 권세(성령의 권세)라고 믿게 되었고 감사했다고 했다. 사역 시간, 능력 받는 시간에 몇몇이(목사, 기도원장) 개처럼 쭈그리거나 누어서 개처럼 꽁꽁거리며 개의 흉내 그 모습이 개의 모습이었다. 어떤 남자는 권투 선수가 혹을 맞아 앞으로 꼬꾸라지는 몸짓으로 훅 하고 몇 마디 이야기하고 또 고꾸라지고 훅훅하면서 반복된 짓을 하자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P牧師도 멀쩡하다가 강단에 올라와 이야기만 하려하면 먼저 훅훅 하고 고꾸라지는 짓을 했다.
빈야드 예배에서는 기도가 없다. 대중 기도 및 목사의 축도도 없다. 죄의 告白과 사도신경의 告白도 없다. 오직 빈야드 찬양, 광고, 헌금, 설교 그리고 사역이다. 빈야드 교회 예배는 형식과 의식을 초월한 무형식의 형식이다. 가존 교회의 예배는 인도자가 담임목사로 정해져 있고 정장을 하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드린다. 그런데 빈야드 예배는 인도자와 예배하는 회중의 복장이 자유롭다. 예배의 시작은 있지만 끝이 分明치 않다. 형식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그들 나름의 형식이 있다.
예배 인도자가 사회하는데 중앙 무대에서 기타, 키보드를 연주하며 찬양 팀과 함께 빈야드 찬양을 리드하는 음악 전문 사역자이다. 준비된 악단 형식의 밴드에 의해 모두 일어나 무용을 곁들인 찬양을 약 1시간 부르는데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찬양이라고 한다. 이 찬양은 가스펠 송의 형태거나 그들이 만든 빈야드 찬송이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 회중은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양손을 펴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고조되면 리더가 간절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 몸을 떠는 이들 이러한 자유스러운 행위 가운데서 성령의 내재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무질서가 지나간 후에 광고하고 헌금하고 간증하고 간증이 끝나면 항상 기도하여 쓰러지게 한다. 그 다음 설교가 진행되는데 집회 설교는 목사가 할 때도 있으나 세미나 중에는 평신도가 주도했다. 설교는 20-30분 정도로 짧다. 설교가 끝나면 빈야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능력의 사역이 시작된다. 사역이란 은사를 체험하는 능력 받는 시간이다. 기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앞 무대로 나와서 전문사역 자들을 함께 동반하고 사역자들은 인도하게 한다. 이 사역자들은 평소 훈련된 빈야드 운동의 능력을 행사하는 평신도 기도자들인 이들에 의해 성령의 역사와 여러 가지 은사적 현상들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순서는 빈야드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시간이다. 병자들과 안수기도 받고자 하는 자 능력 받기를 원하는 자는 한 손은 머리 위에 한 손은 손을 잡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능력(표적과 기사)이 나타나기를 위한 기도이다. 이때 설교한 목사는 권능의 손으로 손을 흔들거나 치유의 은사를 경험하러 나온 자 앞에서 손으로 밀며 뒤로 넘어지며 쓰러뜨린다. 넘어질 때까지 계속한다. 안 넘어지면 “믿음 없다. 나무막대기 같다.”고 한다. 계속해서 넘어지도록 주문을 외듯 기도하고 안 넘어지면 손으로 이마를 밀고 귓부분을 누른다. 가슴에 손을 대고 밀기도 하고 최종 방법으로 두발로 양쪽 발가락을 밟기도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거의 모두가 넘어지게 된다. 바르르 떠는 사람들은 방언을 하며 거룩한 웃음을 터뜨린다. 어떤 사람은 전기에 감전된 듯 사지를 떨고 종아리를 비비며 팔딱팔딱 뛰게 되는데 사역자가 이상 야릇하게 웃으며 충만, 충만을 반복하자 높이 더 빨리 뛰게 되었다.
빈야드 운동의 주일예배는 이런 행위의 반복으로 진행되며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라는 예배에다 표적과 기사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의 행위를 혼합해 놓은 거룩한 무질서의 형식과 의식을 초월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3. 빈야드 운동이 한국 교회에 소개된 배경
빈야드 운동이 처음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0년 후반 온누리교회 하용조 牧師의 동생 하스데반이 온누리교회 찬양곡 70여곡을 빈야드 교회 존 윔버에게서 얻어와서 경배와 찬양팀을 결성하여 목요일 저녁이변 서울시에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온누리에 찬양이라는 것을 부르게 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본격적인 종교 형태로는 1988년 “능력 전도”와 1991년 “능력치유”라는 존 윔버의 책자를 이재범 牧師에 의해 번역함으로써 처음 소개된 듯 하나 그 본질적인 것은 거의 같은 무렵 예태해 목사(79총회에서 불건전한 신비주의 내지 이단성의 혐의가 있으므로 강단 교류를 금하고 일체 교제를 금하기로 결정함)가 기독교 장로회 소속의 서울 남성교회 조원길 목사와 백봉산기도원을 중심으로 성도 쓰러뜨려 넘어지는 것을 성령이 권능으로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 즉 “성령의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Francis Scott MacNutt의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라는 책을 예태해 목사의 형인 한신 대학원장 예영수 씨가 번역하였는데 “성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며 그렇게 되면 사자처럼 부르짖거나 개처럼 짖거나 자제할 수 없이 웃는 것 같은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이므로 그대로 수용하라는 것으로 이를 지지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이 책의 저자인 Francis Scott MacNutt는 牧師가 아닌 미국 천주교 도미니칸 司祭이며 미국 천주교 은사 운동에 이 같은 기현상을 도입 한 장본인 인 것이다. 빈야드 운동이 韓國敎會에 공식 논란으로 등장한 것은 牧會와 신학이 1993년 4월호에 ”제3의 물결“이란 제목으로 논평 없이 소개한 것을 계기로 1995년 6월 호에 “능력 牧會의 파도가 몰려온다.”라는 특집과 대담을 통해 본격적으로 교회와 신학의 주요 논제가 됨에서부터이다.
빈야드 운동이야 말로 오늘날 韓國敎會가 당면한 침체의 늪에서 나오는 출애굽 운동이라고 이재범 牧師는 추켜세워 극찬했다.
예태해씨의 형인 한신대학원 교수 예영수 씨는 토론토 블레싱은 어거스틴과 성 프란시스 케더린, 쿨만 멜데리와 같은 人物들이 체험한 바 있는 교회사적인 사건이므로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바른 검증이 없는 일들을 열거하여 변호했다.
숭실대학의 김영한 교수는 워필드와 패커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미국 빈야드 애너하임 교회의 한인교회 담임 민병길 목사는 빈야드 운동 공개 강의에서 서두에 창조도 물결 위에 서 있는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고 오순절의 성령운동도 물결 운동이었다. 오늘날 빈야드에서 전개하고 있는 물결 운동도 오직 성령이 하는 것으로써 이는 절대적으로 성경적이며 복음적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신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평가, 찬양 가운데 존 윔버가 주관하는 L.A 빈야드 세미나에 참 석한 韓國人牧師 800명 평신도 200명 여기다 캐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숫자를 합하면 약 2000명이 된다고 한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여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빈야드 식으로 바꾸어 순서 없이 진행하고 또 다른 교회는 예배를 치유 집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韓國교회는 성장이 멈추고 감소 현상으로 (매년 4%) 목회자들이 고민하고 있다. 그 동안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던 순복음교회의 五旬節 성령운동, 은사 운동도 감소 현상으로 매력을 잃어 가고 있다. 제자 운동, 평신도 운동, 성경 공부도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그래서 너도나도 救會者들은 교회 부흥 성장에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다. 이러한 때에 빈야드 운동이 소개되어 교회 부흥 성장을 위한 대안으로 생각하고 빈야드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하는 우리 시대의 도구로 삼는다면 비록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성경의 교훈을 따라 자기 정화의 길로 나아가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제3의 물결이 저 바다에 한 번 몰려왔다 사라져 버리는 물결처럼 교회사에 작은 상처의 할퀴고 간 흔적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4. 빈야드 운동의 문제접
1 ) 존 윌 버의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신학기초
① 신학적 기초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의 신학은 사도행전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된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다. 그는 “표적과 기사는 결코 종식될 수 없는 것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 이야말로 성경과 교회사가 공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능력전도 167p) 고했다.
이러한 은사들이 目的은 치유이며 치유를 통하여 모든 질병과 연약함만이 아니라 죽음까지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278p) 말씀만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치유 이적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돌아올 수 있으며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했다. 이 같은 전제에 기초하여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 체험은 몸의 진동과 떨림, 꼬꾸라지는 행위, 예언과 방언, 계시, 투시 현상이다.
② 퀘이커교의 신령주의적 배경
윔버는 퀘이커교도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고 거기서 牧師 안수 받고 (프렌스 교단-퀘이커교회)퀘이커교회는 기성 교회들이 객관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內的인 빛의 사역을 제한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떠났다고 주장하여 영국의 조지 폭스란 신령 주의자에 의해 세워졌다. 內的인 빛은 퀘이커의 가장 중요 주제이다.
그 빛은 양심이나 이성과 혼돈해서는 안되고 인간들에게 직접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人間內部에 있는 하나님의 빛인 것이다. 그 빛은 양심을 깨우쳐 이성에게 다시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內的인 인도에 귀를 기울이는 경험은 신비적이고 공동적인 성격을 지니며 실재적인 것이다.(요 1:9-18)에서 말한 內的인 빛만이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길이며 성도를 순수하게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도와 형식에 매인 교회를 무시한다. 신앙의 절대적 권유가 계시인 성경의 가르침이나 계시의존 사색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內的인 빛”이라고 한다. 성경계시의 객관성과 절대성을 부인하고 환상이나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主體的 體驗, 신비적인 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윔버는 신령주의적 퀘이커교에 사상에 기초하여 “분별의 은사”들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분별의 은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든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해 주는 은사들로 그것들을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사물을 파악하시듯이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特定한 상황에 지혜와 통찰력을 계시해 주시는 것.”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 정보나 사실을 계시해 주시는 것.” 영분별의 은사란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동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人間的, 신 적 혹은 마귀적인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말한다.(능력치유 321-322p) 이같이 윔버는 主體的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內的인 빛을 체험할 수 있는 方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귀절이 있다고 했다.(322p) 윔버에게는 內的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의 판단의(기준이) 근거가 될 수 없다. 사단은 人間의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그런 모든 기만을 形成한다. 이 방법은 마귀가 가장 즐거워하고 마귀는 어리석고 기만당하는 심령에 보금자리를 튼다.
③ 體,驗中心
개혁 주의자들과 우리 교단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의 사역인 이적 기사를 이해하고 성경을 벗어나 직접 계시, 主體的인 체험을 신학과 신앙의 中心으로 삼지 않는다. 윔버는 성경을 신학의 기초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을 출발점으로 감았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 근거로 삼지 않고 개인 체험이나 이성이 판단 기준이 될 때 거짓된 사상이 출현했다. 윔버는 이러한 主體主義的인 신학은 위험한 사상이다. 퀘이커의 직관에 기초하여 치유 즉 질병, 가난을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치유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설교보다는 치유사역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그 사역의 대부분을 할애하셨다고 했다.(능력전도 85p) 病과 가난을 罪값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치유 제한으로 성경을 해석 한다.
④ 치유 신학의 혼합주의
윔버의 신학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능력의 목회)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사, 표적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된다는 주장을 변호 증명 合理化하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한 것이다. “나는 치유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 있는 치유 사역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치유에 관한 기독교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병든 자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도 할 수 있는 방법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교인들 모두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능력치유 102p) 그는 성경대로 病든자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오랄로-버츠의 五旬節모텔,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의 성례 전적 모델, 치유 훈련을 강조하는 산 오순절 모델, 마귀 축출 방법, 상처와 원한의 치유에 관심 두는 심령적 영적 모델, 內的치유 모델을 참고하여 치유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한다.(능력치유 309-311p) 이러한 모텔로부터 배운 바를 빈야드 기독교회에 적용하였다.(능력치유 284p) 윔버의 치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온 것으로 성경을 교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참고서로 사용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2) 성경 해석학적 문제
빈야드 운동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과 그의 사역, 메시아적 그들의 사역, 이적, 병고침, 귀신축출, 죽은 자의 살림 등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나타났던 방언, 예언, 통역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된다고 믿고 있다.
성경을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접근하여 예수와 사도들과 그들의 사역은 물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을 오늘날에도 재현해야 하는 모델로만 보려는 것은 성경 저자들이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강조하고 있는 주제들 기독론, 구속사, 종말론적 주제들을 약화시키거나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규범화, 모델화, 모방화 하고 있다. 사도들도 예수님의 人格 신분 사역을 모방할 수 없다. 예수님, 사도를 모텔로 보고 오늘날에 그대로 재현하려는 행위는 잘못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모든 표적들과 관련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요 2031)고 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예수님의 표적들을 우리가 그대로 모방해야 할 모델로 제시된 것이 아닌 예수님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녹 l:1-4에서도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目的은 그들의 人格과 사역을 닮아야 할 모델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데오빌로에게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人格과 사역 그리고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 구원의 토대요 기독교의 뿌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하려함에 있다. 빈야드 운동의 지나친 모방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을 성경 자체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人格과 사역에 두기보다 오히려 自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표적과 이적 그 자체에 관심을 두게 할 위험이 있다.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가들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지나치게 특정한 은사를 규범화, 모델화할 뿐만 아니라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사역자 훈련을 실시한다. Wimber목사는 능력의 치유”(283-385p)에서 오늘날 사역자들(성도, 목사)도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치유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빈야드 운동의 치유 모델과 5단계 치유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1단계 : 면담으로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2단계 : 진단을 내리는 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명확하게 찾아내는 일이다. 진단은 이 사람이 왜 이러한 病을 앓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얻 어 내는 과정 이다.
3단계 : 기도의 선택하는 일로서 이는 이 사람을 돕기 위해 어떠한 종류의 기도가 필요한 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4단계 : 기도의 시행으로서 이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효과적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얻어지게 된다.
5단계 : 기도가 끝난 후의 취하는 후속 조치로서 이는 이 사람이 치유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 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제공한다.
Wimber목사의 치유모델과 5단계는 규범화, 교리화되어 있다.
은사의 모방과 은사의 사역 훈련은 은사가 우리의 노력과 훈련에 의하여 조정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사도나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다 치유나 예언 방언 등의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전 2:28-31) 신약성경에 어느 곳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제시하는 치유사역의 모델이나 치유사역 단계 훈련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없고 훈련시켰다는 기록도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를 반대한다. 신비나 이적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이적주의를 배척한다. 계시의 영속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를 배척한다.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은 은사나 이적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經驗論의 문제
빈야드 운동가들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經驗論을 지나치게 (복음서-사도행전) 누가에게 의존하고 있다. 편협하고 획일적인 성경 이해로 성경을 한편으로 자신들의 프로그램 경험, 체험 등을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모델을 이끌어 내는 방편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가들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가들과 꼭 같이 신약 성경 저자들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신약성경 안에 나타나 있는 성령의 가르침에 대한 구절들을 획일적으로 뽑아서 그 구절들을 자신들의 특정한 신학이나 신앙 경험이나 교리나 운동을 변증하고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지나치게 은사와 능력 위주의 聖靈論을 주장하는 빈야드 운동이 韓國敎會가 지향하여야 할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빈야드 운동은 성령을 받음으로 오늘도 우리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모든 것을 성령께 의존하려고 한다. 예배의 진행까지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기 위해 빈야드 교회는 예배순서지를 만들지 않는다. 지나치게 성령에 의존한 나머지 빈야드 교회나 집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을 너무 쉽게 성령의 역사로 돌려버린다. 신약성경 안에서도 그 실례가 없는 비 성경적인 현상들을 최근에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웃음, 뒤로 넘어짐, 이상한 짐승 소리까지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한다.
개혁 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빈야드 주의자들은 특이한 현상, 육체적인 신앙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1)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2) 고꾸라지는 현상이다. 3) 술 취한 듯한 행동이다. 4)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 5)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다. 6) 장시간 열렬하게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이다.
Wimber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지만 적절하지 못하다. 넘어지는 현상이 은혜 체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에스젤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엎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앞에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고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요 18:6),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마 28:4), 귀신이 고꾸라진 것(막 9:20)을 제시했지만(능력치유 359p)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Wimber는 거룩한 웃음을 예증하가 위해 사라의 웃음을(창 21:6)을 거론했다.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約束에 대해 믿지 못하는 가운데 웃은 것이다.
Wimber의 성경 인용은 자신의 사역의 목표에 맞추는 것이지 성경의 본의와는 관계가 먼 것이다. 성경 해석도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 배경도 없는 자신의 主體的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1978년 4월경 “존은 방을 돌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는데 믿을 수 없는 能力이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가 사람들을 건드리면 그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마치 전류처럼 영적인 능력이 존의 손으로부터 나왔다.”(제3의 물결을 타고 56p)고 했다. 윔버 부인은 윔버를 은혜의 통로로 간주하고 있다. 제3의 물결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지 않고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말하면서도 인간을 이적의 근거로 설명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손으로 밀기도 하고 넘어지지 않으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계속 기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인위적인 작용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감화와 작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韓國교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행위를 믿음으로부터 은사를 윤리로부터 분리시킬 위험이 다분한 빈야드 운동은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점이 있다 해도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제3의 물결 운동의 문제점은 성령의 사역을 총괄적으로 균형있게 접근하지 못하고 성
령의 카리스마적 사역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서 오해와 역기능들을 야기 시킬 수도 있다. 기존 신자들마저 계속 7l적만을 추구하려는 신앙에 빠지게 할 수 있으며 보다 성숙하고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성령의 윤리적 사역을 평가 절하하거나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본다.
5. 빈야드 예배의 문제점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의 예배로 표적과 기사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의 행위를 합쳐 놓은 것 이라 할 수 있다.
1) 사회 문화적 관점
빈야드 운동이 생겨나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환경은 다양한 民族X化가 현존하는 美國X化的 배경을 가지고 있다. 빈야드 예배는 기존 교회의 形式과 의식을 초월하고 있다.
기존 교회의 예배들이 형식과 틀, 의식에 매여 있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느낄 수 없었던 것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그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느껴 보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으로 본다. 現代과학 · 文明이 지배하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사회에서 신적인 특별한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갈급한 심리로 생각된다. 그 어떤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의 직접적으로 주도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려는 의도는 기존 교
의식적인 모습에 사로잡힌 것을 볼 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경험한다. 빈야드 운동에 심취한 이들이 미국이 가장 번성하고 번영과 자유를 누리던 시대에 출생한 자로서 그 들의 자유스러운 생활 습관은 예배에 임할 때 자유로운 복장과 태도 찬양과 경배로 키보드, 드럼, 밴드를 동원한 빈야드 음악, 가스펠 송이 이 시대의 X化的인 성향과 맞물려 왔다. 아무리 사람들의 욕구에 충족되고 성향에 맞는다 하더라도 예배의 형식과 의식 없이는 그 어떤 예배도 하나님과의 만남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표현할 때 도구를 사용한다. 그 도구는 化따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예배에서 복장은 의식과 형식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시대의 스타일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모든 신앙과 사역의 초점을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에 맡기고 순종한다는 것인데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능력 사역”(행 1:8)이라 한다.
[1] 능력 사역의 의미
主의 일을 하는 일꾼을 사역자라 하고 사역에는 두 가지 사역이 있다. 즉 말씀 사역과 능력 사역, 말씀 사역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성경 공부) 전파(설교)하는 것이다.(마 433) 능력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병자를 고치는 사역이라 한다. 말씀 사역은 들리는 使彼(사역)이라 한다면 능력 사역은 보이는 복음(사역)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 두 가지 사역을 다 행하셨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말씀(들리는)사역과 능력(보이는)사역에 다함께 역사하심이다. 모든 사역이 다 능력 사역이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므로 빈야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말씀 사역이 있는 뒤에 반드시 그 말씀과 관계되는 능력 사역이 뒤따른다. 천국 복음이 전파하고 실제로 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이러한 사역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2] 능력 사역의 목적
예수께서 행하신 3년 동안이 사역은 천국을 전파하는 사역이었고 우리를 천국으로 가게 하는 사역이요 천국을 이루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가까웠느니라”하신 첫 번째 설교는 예수님의 3년 사역의 目的이다. 우리의 능력 사역은 인간 구원과 사회 구원과 교회 부흥에 멈출 수 없다. 천국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3] 능력 사역의 방법
主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必몇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主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그의 임재 속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변화시키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그분이 능력 사역을 행하신다고 한다.
빈야드 교회의 예배에는 주보도 없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예배를 드린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질서에 따라 은혜스럽게 예배를 드린다. 예배의 시작 시간은 있으나 끝나는 시간이 없다. 순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에 맞추기 때문이다. 예배드리며 박수치고 기도하는 모습도 각각 다르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가 체험되는 대로 자유스럽게 표현한다. 어떤 形式의 기준이 없다.
2) 예배신학
빈야드 예배는 시작은 있지만 끝마침이 分明치 않다. 기존 교회의 만남, 말씀, 봉사는 정해진 형식에 의해 진행되는데 빈야드 예배는 찬양, 말씀, 치유라는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악기의 사용으로 진행되는 경배와 찬양으로 회중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이끌어 가기를 원한다. 긴 시간 찬양을 통해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은혜스러운 분위기를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그 다음 계속되는 기도는 감사와 찬양을 동반한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말씀은 20-30분 하는데 성령의 역사와 기적을 통한 치유의 역사에 관련된 본문이 사용되고 설교도 주로 성령의 직접적인 은혜의 체험에 대한 간증 형식으로 전제된다. 빈야드의 신학이 표적과 기사를 예전에는 직접 경험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엔 공식 에전은 회중으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께 죄를 告白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빈야드 예배는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
된다. 빈야드 예배는 선학적으로 성령의 강조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관련된 화해의 신학적인 표현이 결여된 예배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 예배의 내」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상징화된다. 기독교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표현이거나 간접적인 표현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개신교의 예배나」心은 설교에 두는 것이다. 말씀 中心예배는 단순히 설교뿐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가 말씀에 기초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빈 야드 예배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과의 관계에서 추구되는 A格的인 만남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표적과 기사란 성령의 가시적인 영적 체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경험을 예배의 中心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역사와 전통에서 벗어난 예배의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말씀 가운데 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영적 시간으로 인식해야 한다. 빈야드 예배는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시화하려고 기도 사역의 순서에서 안수와 방언의 기도, 치유와 귀신축출 등의 신유적인 형태를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예배 중에 거룩한 무질서를 행하는 것이다.
빈야드 예배는 치유의 은사와 방언과 쓰러짐과 거룩한 웃음 등으로 굉장히 소란스럽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느껴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요 어지러움이나 무질서의 예배 형태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다.
과도한 음악과 찬송 부르기를 통하여 감정이 고조되는 그것이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과 동일시한다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오늘날 경배와 찬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예배의 형태들도 바로 그 자체를 은혜 경험의 매체로 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
종교개혁은 말씀과 성례가 은혜 받는 수단이라고 했으나 Westminst신조와 장로교 헌법에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고 제시되어 있다. 빈야드 운동과 예배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과 方法論추구에 도전과 혼란을 일으키고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예배는 성령으로 임재하는 하나님을 통한 기적과 은사를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임하신 하나님과 교제하여 마음과 뜻을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 하고 섬기는 일이며 삶에 必要한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은혜의 사건으로서 文化的 도구들을 사용하여 준비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교회의 영적 사건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인격성을 무시한 공적인 수단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
6. 빈야드 운동이 왜 이렇게 관심이 되고 있는가?
빈야드 운동은 1980년대 말에 빈야드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John Wimber의 책들이 한국교회에 소개되면서 또 미국 훌러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공부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강의나 저술을 통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과거 한국의 주류 교단인 장로 교단이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의 극단성에 대해 이단시 하던 것과는 달리 교회적변에서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입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성 교회 특히 보수 교회 안에 파고들 수 있었다. 빈야드 교회가 한국에 소개된지 몇 해가 못되어도 그 열기는 지금까지 소개된
6. 빈야드 운동이 왜 이렇게 관심이 되고 있는가?
빈야드 운동은 1980년대 말에 빈야드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John Wimber의 책들이 한국교회에 소개되면서 또 미국 홀러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공부한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강의나 저술을 통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과거 한국의 주류 교단인 장로 교단이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의 극단성에 대해 이단시 하던 것과는 달리 교회적면에서 복음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입장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기성 교회 특히 보수 교회 안에 파고들 수 있었다. 빈야드 교회가 한국에 소개된지 몇 해가 못되어도 그 열기는 지금까지 소개된 그 어떤 세미나보다 더 뜨겁다. 1994년 빈야드 교회 사역 팀이 한국을 방문하여 루디아 자매 선교회의 主管으로 산곡기도원에서 약 400여명의 牧會者가 참석했고 1995년 6월말과 7월초에 경기도 광림수도원과 전주 한 일신학대학 세미나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광림수도원에서의 세미나는 고액이었고 주 말인데도 1000여명의 목회자가 참석했다. 이 세미나 후에 성령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모든 것이 더 확실해졌고 찬양과 기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있었으며 목회자 자신의 목회 소명과 목회 사역 자체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목회와 신학 1995.6)
한국 교회 목회자 안에 빈야드 신드롬이 불같이 휘몰아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리적인 면에서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에 거리를 두던 보수 교단 목사들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1) 목회 탈출구
목회者속에 있는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영적으로 피곤하고 너무 공허해 계속 목회를 해야 하느냐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Wagner 박사의 제3의 바람을 읽고 빈야드 교회를 다녀오면서 分明히 회복을 맛보았다고 했다. 빈야드 운동에 참여하게 된 목회자들이 단순히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제3의 물결이 말하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목회 상황에 대한 새로운 좌표 설정에 목말라 하는 외침의 발로라고 본다. 좌절감과 패배 의식 상실감에서 목회자의 자기 정체의식에 강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기존의 모든 형식과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엄청난 변화를 제시하는 빈야드 운동은 보수적인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탈출구로 보여진 것이다.
2) 교회 성장의 모델
교회성장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교회성장을 위해서라면 물, 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다 보니 기존의 형식과 질서를 벗어난 빈야드 운동 사역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3) 禮拜文化的 입장
빈야드 운동이 생겨나고 예배가 이루어지는 환경은 서구적이며 미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빈야드 예배의 기본 구도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복장도 자유롭다. 예배 인도자도 담임 목사로 제한되지 않는다. 기존의 형식과 의식 틀에서 벗어난 초월적 예배로써 현대인들에게 기존의 예배가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고 의식에 사로잡힐 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형식 없는 빈야드 예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4)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려고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시화하려고 한다. 신약의 성령의 은사적인 나타남의 현상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가시적인 경험 때문에 기도 사역에서 안수 방언의 기도, 치유와 귀신축출, 신유적인 형태로 거룩한 무질서가 행해진다. 성령의 나타난 현상을 체험하려는 관심에서다. 이상의 관점에서 관심이 집중되지만 빈야드 운동이 교회성장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목회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욱 심각하다. 빈야드 운동이 현실적으로 성장보다는 오히려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고 때로는 분열되기도 한다.
結 論
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입장과 대안
빈야드 운동은 제3의 물결이라고 지칭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결이라기보다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처럼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있었던 강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고 있다.
(Wimber 능력전도 8장 성령의 역사 새로운 물결)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 주의자들은 內的으로 들려오는 음성이나 투사, 직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 신앙을 주관화하고 진동이나 넘어짐 낄낄대며 하루 종일 웃어대는 웃음,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육체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간주하여 체험만이 신앙의 기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윔버의 신비주의적 은사 운동은 18C중반 대 각성 운동 이후 조나단 에드워즈 체험한 미국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꼬꾸라지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앙을 主體化하거나 체험주의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대신 체험이 신앙의 온전한 판단기준이 된다면 기독교가 계시종교가 될 수 없고 모든 판단 기준이 결국 인간 자신이 된다. 체험을 강조하는 王體主義는 부패한 죄성의 영향을 받는 자율주의로 나가게 되고 자율주의는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있다.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는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그것이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한 것이라고 한다. 존 윔버는 극단적인 체험주의로 나가는 토론토 빈야드 교회를 그들의 모임에서 제명하였는데 이는 빈야드 주의자들의 신학이 가지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단인 우리 교단의 신학에서는 신앙의 主體的인 성격을 강조하지만 객관적인 면을 중요시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가시적인 현상의 체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삶의 체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성령의 사역성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Calvin은 신학의 원리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통한 성령을 내세웠고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신학적인 전통에 서서 말씀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고 성령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 하는 실수를 犯하지 않으려 했다.
2. 빈야드 신학이란 무엇인가?
빈야드 운동의 존 윔버는 Peter Wagner의 제3의 물결 운동으로 규정한 것이 새로운 물결 운동이라고 하기보다 은사 갱신 운동의 발전된 다음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빈야드 운동은 존 윔버의 체험적인 신앙이 기독교의 교리로 설정되어 있다.
1) 불신자를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신학 정립의 目的으로 보고 있다. 신학의 주제가 선교이고 모든 성경의 신학 주제들은 그것을 위한 보조 신학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빈야드의 전 교리는 선교에 편중되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2) 선교의 최상의 방법은 먼저 음악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존 윔버는 대중음악의 그룹멤버였고 경배와 찬양이라는 대중음악에 곧잘 적용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찬양 예배를 만들었다.
3) 영적인 체험을 망하는 이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신학의 으로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간주한다.
4)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보다 구별되게 자신들의 사역을 성경적이고 복음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빈야드 교회 연합에서 발표한 “신학적 철학적 선언”을 보면 개신교의 복음주의 신학 사상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가들은 표면적인 것은 복음주의를 말하고 있으나 실질적 행위는 신비적 체험 행위를 답습하고 있다. 성경은 그들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사역을 변호 증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주장과 사역이 복음주의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에 치중한 신학 사상이 계시 의존 사색이 아닌 자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실행 재현되어지는 오늘날 우리를 신앙의 모델로 주어진 것인가?
넘어뜨림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 안에서의 안식인가?
빈야드 운동을 교회에 그대로 접목시키려다 교파가 분열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시키기 위한 수단인가?
짐승 소리, 기이한 현상, 웃음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역사로 단정하는 그들의 행동을 그들의 사역은 성경적인 것도 신학적인 것도 아직 검증된 일이 없다. 또한 성령의 역사라고 확실하게 말하거나 단정한 것은 그들 자신들이나 추종자들 뿐이다.
다만 韓國교회 아니 세계 교회 우리 시대의 교회가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이 침체에 빠져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또한 목회 일선에서 능력 있는 목회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목회자들에게 수요와 공급의 거래가 맞아 떨어지듯이 체험적 능력의 가시적 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이러한 새로운 물결이 재철 성수기를 만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지금까지 성경의 진리가 역사 속에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대마다 물건을 모방한 유사 모조품이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들에게까지 악성 전염성처럼 퍼져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유사종교, 유사복음일수록 전면에 복음을 내세우고 복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내면의 교리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빈야드 운동이 새로운 은사갱신이란 이름으로 또 21C를 제3의 물결이라고 한 알빈 토플러의 신조어를 신속히 도입하여 시대 정황과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개혁되어 가는 매력적인 운동인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운동의 본질이 성장계시의 본래적 큰 진리를 벗어난 보조적 부수적인 것을 본 진리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성경에서 찾아 보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온전히 바탕한 진리로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난 94총회 시 예태해 목사의 넘어지는 사건이나 96총회 시 류광수 목사의 다락방 운동도 본래의 성장의 진리 운동으로 사역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으나 그들의 사역의 내부 진상을 조사해 본 결과 자기들의 사역을 주 목적으로 하고 성경을 그들의 주 사역을 변호 증명하는 보조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성경적 이요 성경이 보증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 진리를 벗어나 부제를 주제로 바꾸어 놓은 격이었다.
빈야드 운동은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층에게 호응하는 은사 운동의 새로운 물결로이 거센 물결을 전면에서 가로막아 내기에는 우리 교단과 韓國교회에 파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계속 더 조사 연구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써 우리 교단의 성경적신학적 실천 신학적 면에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더욱 분명하게 걸려질 때 까지 경계 금지해야 될 것이다.
▣ 참고자료
김성봉 :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 인가?〉
한국 개혁주의 신학연구소 1996
오덕교 : 조나단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개혁주의 신학 연구소 1996
이광희 : 실천 신학적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정동수 번역 : 빈야드 운동의 실〈생명의 샘〉
권경흠 : 빈야드 운동은 과연 밀려오는 성령 임재의 징조인가?〈체험 수기>
김영한 : 성령의 역사인가, 사단의 미혹인가?〈목회와 신학〉1995. 6.
이재범 : 새물결의 파고 “빈야드 운동 어떤 것인가?”
이한수 : 오늘날 신유에 대한 신학적 판단
김현석 : 현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
김영재 : 오순절 성령 운동가 성령 세례에 대한 이해와 새지평<목회와 신학〉1994. 3.
정종헌 :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목회와 신학〉1994. 3
최갑종 : 빈야드 운동 그 성경적 조명〈개혁주의 신행협회〉
정일웅 : 빈야드 운동과 빈야드 예배 문화의 비판적 성찰〈신학지남〉 96. 여름
교회와 이단 : 빈야드 운동과 토론토 브레싱의 정체〈기독교 이단 문제 연구소〉
존 아더맥 : 은사(1)“예언자인가 광신자인가?”〈생명의 삶〉
은사(2)“성령의 역사인가 사단의 장난인가?”〈생명의 삶〉
존 윔버 : 이재범 옮김. 능력전도〈나단 출판사〉
능력치유〈나단 출판사〉
현대종교 : 빈야드와 현장에 나타난 잘못된 성령론 l997.4
http://www.nelvit.org/main/sub.html?Mode=B_View&board_id=board20&num=4930&page=2&tmp_num=102
조나단 에드워드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 의문제점
오덕교 합동신학교 교수
「빈야드운동」무엇이 문제인가
조나단 에드워드 입장에서 본 '빈야드 운동'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 교회를 강타한 대표적인 신학적인 흐름을 든다면 '제 3의 물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의 물결운동'은 1977년 존 윔버(John Wimber)에 의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어 캐나다, 영국, 중남미 전역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특히 캐나다의 토론토의 에어포트교회는 소위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 [토론토 라이프](Toronto Life)가 지적하는 것처럼, 1994년 토론토의 최고 관광 명소가 되었다. 토론토 에어포트교회는 1994년 초반 랜디 클락(Randy Clark)과 200여명의 교인으로 시작하였는데, 1995년 1월 20일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와 4,000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이 교회는 소위 거룩한 웃음, 진동, 동물적인 괴성, 넘어짐 등의 체험과 치유 사역을 강조하고, 히브리서 13:8과 요한복음 14:12에 근거하여 성령 역사의 현재성과 구원의 표징으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며, 이를 통한 지상 왕국의 건설(마 16:19)을 꿈꾸고 있다.
1. 빈야드 운동과 한국 교회
'제 3의 물결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1년 존 윔버(John Wimber)의 [능력치유]가 이재범목사에 의하여, [능력 표적]이 도서 출판 나단에 의해 번역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은사운동의 보급은 치유 목회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었다. [목회와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를 인식하고 '제 3의 물결 운동'을 1993년 4월호에 특집으로 다루어 한국 교회에 알렸다. 그러나 기고자의 대부분이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없이 소개하여, '제 3의 물결'은 한국 교회에 토착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난 해 [목회와 신학] 6월호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권두 좌담을 열면서 존 윔버의 '제 3의 물결 신학'을 거르지 않고 소개하였고, "능력 목회의 파도가 몰려온다"는 특집을 통해 빈야드의 은사 운동을 널리 알렸다.
(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신학자들의 진단
[목회와 신학] 6월호에서 한국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빈야드 운동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였다.
이재범 박사는 빈야드 운동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면서 빈야드 운동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당면한 침체의 늪에서 나올 수 있는 "출애굽"운동이라고 극찬하였고(64),
한신대학교의 예영수교수는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토론토 축복'은 어거스틴(Augustine)과 성 프란시스(St. Francis), 존 웨슬레(John Wesley), 캐더린 쿨만(Catherine Kuhlman), 멜 태리(Mel Tari)와 같은 인물들이 체험한 바 있는 교회사적인 사건이므로(71) 이를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74).
숭실대학교의 김영한 교수는 미국 장로교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와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 패커(J. I. Packer)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75).
한국에서 보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고백한다고 하는 총신대학교의 이한수 교수도 특별은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비판하면서(92), 빈야드운동이 "나름대로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하였다(97).
그러나 장신대학교의 현요한 교수는 은사주의자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치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기복신앙에 불과하며 복음의 본질과도 무관하다고 하였다. 복음은 영광의 신학이라기 보다는 고난의 신학이기 때문이다(104)
(2) 빈야드 운동의 확산
이와 같은 한국 신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평가 또는 찬양 가운데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빈야드 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로스앤젤레스의 빈야드 교회나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많은 영향을 한국 교회에 끼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빈야드식으로 바꾸어 순서없이 진행하는가 하면 다른 교회는 예배를 치유 집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유행에 보조를 맞추어 일부 여행사에서는 빈야드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내는 등 빈야드 열풍이 한국 교회 전역에 확산되어 가고 있다.
(3) 빈야드주의자들의 개혁주의 신학 비판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빈야드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그들의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그들의 신학 운동이 건전한 개혁주의에 기초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른 면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공격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요 심리학자인 존 화이트(John White)는 빈야드 운동이 복음주의적인 신학에 근거한 것을 입증하기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존 웨슬레(John Wesley)와 같은 신학자를 들먹였고, 다양한 신조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그 포괄적인 성격 때문에 윔버에게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조라고 하였다.
그러나 빈야드주의자들은 19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공격으로 한국에서는 신학에 문외한인 평신도는 물론 신학자들까지 현혹되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오해가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혼동을 초래하고 있는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들의 주장과 그들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현상들이 성경적 기초를 갖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한국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 1740년대 초반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미국 교회가 극단적인 신비주의 운동으로 혼란 가운데 있을 때 은사 운동에 대한 건전한 진단과 평가를 내림으로 미국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는 -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검토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존 윔버와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 기초
윔버의 신학은 사도행전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된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다.
그는 사도행전적인 은사의 연속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표적과 기사는 결코 종식될 수 없는 것으로써,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성경과 교회사가 공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능력전도 167). 이러한 은사의 목적은 치유이며, 치유를 통하여 모든 질병과 연약함만이 아니라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능력 치유 278). 윔버는 말씀만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도 치유이적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돌아올 수 있으므로,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윔버는 이와 같은 전제에 기초하여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는데, 그 체험 가운데는 몸의 진동과 떨림, 고꾸라지는 현상,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 울거나 웃는 현상, 장시간에 걸쳐 찬송하는 행위, 예언과 방언, 계시, 투시 현상이 있다.
(1) 퀘이커의 신령주의적 신학적 배경
윔버의 신학은 첫째로 퀘이커 교회의 신령주의적 신학에 기초한다. 윔버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퀘이커교도를 통해서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단체도 바로 퀘이커 교회인 프렌즈 교단(Friends)이었다. 퀘이커 교회는 영국의 죠지 폭스(George Fox, 1624-91)에 의해 세워졌는데, 폭스는 신령주의자(Spiritualist)로 기성 교회들이 객관적인 신앙만을 강조하다가 내적인 빛의 사역을 제한하여 신약의 가르침에서 떠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은 내적인 빛의 사역을 강조하는 참된 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1:9-18에서 말하는 '내적인 빛'(the Inner Light)만이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의 형식이나 제도를 무시하였다. 또한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객관적인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내적인 빛'이라고 하였다. 폭스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농민전쟁을 부추긴 바 있는 토마스 뮌쳐(Thomas Muntzer), 내적인 종교를 주장한 한스 뎅크(Hans Denk), 직접 계시를 주장한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와 같은 16세기의 신령주의적인 재침례파교도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데, 그들은 성경 계시의 객관성을 부인하고 환상이나 직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주관적인 체험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윔버는 이러한 신령주의적 퀘이커 사상에 기초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물론 그는 퀘이커처럼 '내적인 빛'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분별의 은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분별의 은사들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 분별의 은사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부여해 주는 은사들"로서, 그것들을 통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파악하시듯이 사물을 파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상황에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계시해 주시는 것"으로, 특히 상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다고 하였다.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에 관하여 정보나 사실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며, 영 분별의 은사란 "어떤 사람에게 있어 특정한 동기를 유발하는 요인이 인간적인 것인가, 신적인 것인가, 혹은 마귀적인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말한다"(능력 치유 321-322)고 했다. 이와 같이 윔버는 주관적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내적인 빛'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 귀절이 있다고 하였다(능력치유 323).
윔버에게 퀘이커의 '내적인 빛' 개념은 그의 신학과 목회의 원리가 되고 있다. 그는 설교하거나 전도할 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적인 빛'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였다(능력전도 88). 그는 이러한 직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은 육체적인 감각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영적으로 감지하는 것, 또는 하나의 인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그때에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능력 치유 106).
윔버는 또한 [능력 전도]에서 그의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시카고 집회를 마치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업가로 보이는 중년 신사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서 아무런 특별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 위에 매우 분명하게 '간통'이라는 글씨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글씨는 여전히 그의 얼굴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간통' - 나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비행기 안이 그 누구도 나처럼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께서 나에게만 보여주신 것이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이 이 사건의 현실성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능력전도 65-66). 여기서 윔버는 내적인 빛 - 그의 말로 표현하면 분별의 은사 - 을 주장하는데, 그 은사의 성격을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내게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투시의 은사로 당뇨병에 달린 사람을 고치고(능력전도 102), 관절염에 걸린 여인을 치유하게될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 등 많은 직관의 예를 나열하였다(능력전도 104). 이처럼 윔버에게 내적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인의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한 현상들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도 하늘에서 불이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 말한다(계 13:13). 그러므로 직관과 투시는 사탄의 전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명저 [신앙과 정서]에서 말하기를, "마귀는 자신의 본 얼굴을 숨긴다. 그리고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경배하도록 만든다. 사단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그런 모든 기만을 형성한다. 그래서 거짓된 종교와 가짜 은혜와 가짜 정서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야말로 이 방법은 마귀가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마귀는 어리석고 기만당하는 심령에 보금자리를 튼다"고 하였다.
많은 거짓 종교는 이러한 직관과 상상력에 기초한다. 이교도 가운데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상한 환각과 환희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영감이며, 하늘로부터 온 직접적인 계시라고 여겼다. 사도시대 이후 나타난 이단인 에세네파(Essenes)도 환상과 직관을 주장하였고, 고대 영지주의자(Gnostics)나 몬타누스파(Montanist)도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상상에 빠지곤 하였다(신앙과 정서 298).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마귀들도 예수를 시험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그러한 인상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신비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성경 말씀을 떠올리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신앙과 정서 205).
성령의 보증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어떤 즉각적인 암시나 어떤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신앙과 정서 223). 설령 성령께서 이런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 주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인 성령의 작용이지, 성령의 특별하고 은혜로운 감동은 아니다"(신앙과 정서 201). 곧 그러한 이적은 구원 사역과 관련이 없는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에게 "사람의 기질과 체질을 관찰"한 후 "그의 공상에 암시를 집어넣고 불화살을 당기는"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신앙과 정서 302).
(2) 체험중심적 신학 사상
둘째로 윔버의 신학은 인간의 체험에 기초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과 그의 사역인 이적과 기사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윔버는 성경(text)을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context)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윔버의 다음의 증언은 이를 잘 입증해 준다. "나는 성경연구 - 특히 복음주의적인 방식의 - 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갖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 - 표적 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 - 있음을 깨닫고 나서는, 성경연구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이것만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갖추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 나는 믿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과, 이 가운데 기적에 대한 믿음을 내가 얼마나 경시해 왔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복음주의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 과정에는 교리적인 믿음과 인격적인 신실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배워 왔다. 교리적인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사역에 관한 지식을 바르게 배워 나아감으로써 성장하는 것이며, 인격적인 신실성은 우리의 삶을 통해 각종 성령의 열매(갈 5:22-23)로 거두게 되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이상의 두 가지 차원의 믿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능력 전도 79).
여기서 윔버는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고백해 온 성경의 유일 사상(Sola Scriptura)을 거부하고, 그의 치유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치유 신학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근거하여 만들어졌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근거로 삼지 않고 개인의 체험이나 이성이 판단의 기준이 될 때 항상 거짓된 사상이 출현했다는 교회사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윔버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윔버의 거짓 증언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능력 전도]에서 자신이 4대째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났으며(능력전도 15), 기독교를 알게 된 때는 가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1962년이라고 하였다. 곧 그가 기독교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단으로 간주하는 퀘이커를 통해서 였다고 증거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자신이 "복음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고 소개하여 독자를 속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윔버의 빈야드 신학이 거짓으로 가득 찬 '인간이 만든 종교'(man made religion)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윔버는 이러한 퀘이커의 직관 신학에 기초하여 치유 신학을 세워 나갔다.
그는 질병과 가난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치유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는 [능력 치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질병을 사람들의 적으로 이해하셨다. 그것은 악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으며, 사단의 왕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장 깊고도 무서운 병이 죄이며, 육체적 질병이나 가난과 같은 결과들은 죄를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능력치유 48). 또한 [능력 전도]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설교보다는 치유 사역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그 사역의 대부분을 할애하셨다"고 하였다(능력전도 85). 이처럼 윔버는 병과 가난을 죗값으로 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지 치유로 제한하여 극단적으로 성경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병과 가난의 원인이 죄라고 단정하지 않으며, 치유(healing)보다 설교(preaching)와 교육(teaching)을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사역으로 간주하고 있다(마 4:23). 더구나 성경 기자들은 예수께서 병고침으로 사역을 시작한 후 마쳤다고 하지 않고 설교함으로 하였다고 증언하였다(마 4:17; 행 1:3-8).
(3) 치유 신학의 혼합주의적 배경
성경을 보는 시각이 편협하다고 해서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상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이단 운동의 초보가 된다. 더구나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신학을 전개한다면 그러한 신학은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윔버의 신학이다. 그는 그의 치유 신학의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치유,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나 있는 치유의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치유 사역에 관하여 매우 지적인 주장을 펴 나아간 맥너트(Francis MacNutt)를 포함하여 치유에 관한 그리스도교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병든 자를 위해서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법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교인들 모두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무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능력 치유 102). 곧 그는 성경대로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오랄 로버츠의 오순절 모델, 성공회와 로마천주교회의 성례전적 모델, 치유를 강조하는 신오순절 모델, 마귀 축출 모델, 심리적 내적 치유를 강조하는 심리적 영적 모델과 같은 각각 상이한 견해를 지닌 여러 학파의 치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신학과 그 실천 방안을 연구하였고, 이러한 모델들로부터 배운 바를 빈야드 그리스도인 교회에 적용하였다고 기술하였다(능력치유 284).
그러므로 우리는 윔버의 치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며, 성경을 교재(text)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서(reference)로 사용하여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윔버는 이러한 인위적 배경에서 그의 신학을 세워가기 위해 루터와 칼빈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보다는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 로마 천주교의 기적 신앙은 3세기에 "이미 이교 세계에서 유행하던 전설들이 그 주제와 심지어 내용까지 그대로 기독교의 형식으로 재현"되면서 나타난 것이다(기독교 기적론 131). 이러한 이적 신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씨시의 프란시스나 시에나의 캐더린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흔(聖痕), 성물이나 성자의 화상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하는 기적, 마리아 상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등이 있다.
로마 천주교도들은 이와 같은 성물이나 성상을 숭배하며 그것들을 통한 기적을 기대하며 성자나 성상을 순례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미신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배척하여 왔다. 그러나 빈야드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인정하면서 로마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이적 신앙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개혁주의 교회의 은사 이해
윔버는 이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개혁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윔버는 초자연적인 치유와 기적이 사도시대, 곧 성경의 정경화와 함께 종료되었다고 믿는 개혁주의신학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 보다는 현대의 합리주의자나 물질주의자의 입장에 가까운 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능력 치유 43).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개혁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한 자세는 종교개혁 이후 "하나님 대신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척도로 왕좌를 차지한" "계몽주의적인 사고의 입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적과 기사의 역사를 부인하는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반은사주의적 신학의 대표자로 윔버는 벤자민 워필드를 지목하였다.(능력전도 10).
(1) 계시의 종료 사상
그러나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를 반대하였다.
신비나 이적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이적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는 그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기적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섭리를 일반 섭리(providentia ordinaria)와 특별 섭리(providentia extraordinaria)로 나누면서, 전자는 자연법칙에 따라 제 2 원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제 2 원인의 중재 없이도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역사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곧 기적은 특별섭리에 속하는 것으로, 개혁주의 신학 체계 속에서 이적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기적이 존재하는 목적은 빈야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능력 전도나 능력 치유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였다.
개혁주의 교회는 빈야드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적이나 은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은사주의를 배척한다.
그리고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은 은사나 이적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도들이나 마호멧교도들이 이적을 통하여 어떤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주장도 하나님의 역사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혁주의자들은 허구에 찬 이적 신앙을 부인한다. 로마 천주교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예수 때문에 혀를 잘리운 아프리카 교회의 신자들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만, 우리는 이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요한 웨슬레가 지적한 것처럼 "누구든지 이런 허구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주전자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 기적론 221).
워필드는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사상에 근거하여 사도들이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은사가 이미 중단되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은사들이 주어진 목적이 "교회 확장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사자들로서 사도들의 권위를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사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라고 권위를 부여하여 임명하신 대리인으로서의 사도들이 지닌 신임장"으로 사도들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기독교 기적론 12).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성경에서 기적은 합당한 이유없이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기적들은 계시 시기에 속하며(나타나며),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사자들을 통해서 자기의 은혜의 목적을 선포하시며, 그 분의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만 나타난다. . . .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계시 능력의 표적인 기적은 그 본체인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계속되라고 기대할 수 없으며, 실질상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기독교 기적론 34, 35). 여기서 우리는 워필드가 은사주의를 부인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곧 그는 현대에도 계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직접 계시파의 위험성과 이적을 교회의 표지로 보는 로마 천주교회의 은사관을 배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워필드의 사상은 빈야드주의자들이 자주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인용하곤 하는 에드워즈의 사상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3장 해석인 [사랑의 열매]에서 방언과 이적과 예언의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 중에는 부여되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에만 주어진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게 부여된 은사를 특이한 은사(extraordinary gif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 은사들이 원시시대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 시대에 주어졌던 것이다. 특히 그 시대에 주어진 그러한 특이한 은사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건설키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완전히 성립되었을 때 그 특이한 은사는 멈추어졌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사상은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이기도 하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세운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 동안 나타내시기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를 영원히 놀라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누어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하라는 어떤 위임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개혁자 루터도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했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떤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별한 어떤 이적이나 계시도 필요 없다"고 하였다.
(2) 특별은사의 제한성
개혁주의자들이 은사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은사가 신앙의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은사를 일반은사(ordinary gift)와 특별은사(extraordinary gift)로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든지 예언하는 영을 주실 때나 직접적인 영감을 주셔서 이적적인 일을 행하게 하고,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도록 능력을 주시는 일은 큰 특권"이지만, 구원이라는 은혜보다는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35). 그는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옷과 보석으로 비유하면서, 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옷 때문에 성품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며, 보석이 몸을 우아하게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39).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예언을 말하고 이적을 행하는 이상한 은사만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는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동참자가 되지 못한다. 곧 그 자신의 성품 안에 신령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면 특이한 은사만으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사랑의 열매 40).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병을 고치거나 예언을 하는 등의 특별은사가 불신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가졌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적을 체험한다거나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소유함이 구원의 표시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통하여 주어지는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러나 이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는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이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주시기 위해 성도들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경건치 못한 자에게도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를 주신다. 발람(벧후 2:15; 유 11; 계 2:14)과 사울과 유다(마 10:1-2, 8)의 예가 그렇다(신앙과 정서 216). "이런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보다도 더욱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랑의 열매 42). 이러한 교훈에 비추어 볼 때, 마태복음 7:22-23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빈야드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요건으로 강조하는 특이한 은사를 가지고도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갈 자들이 많은 것이다. 성도라 불리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신앙과 정서 171).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좋아할 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였다(눅 10:20).
4. 빈야드의 영적 현상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
빈야드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 또는 육체적인 신앙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능력 치유 351).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빈야드의 소위 '영적 체험 현상'
첫째는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몸의 떨림에는 신체의 일부나 전체에 나타날 수 있고, 땀을 흘리거나 숨을 깊이 쉬거나 또는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이 수반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떨림에는 평온한 진동과 격렬한 진동이 있는데, 전자는 "영적인 갱신이나 목회 사역을 위해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시는 일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성령께서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 또는 어떠한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죄나 마음의 상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55).
둘째는 고꾸라지는 현상이 있다.
이 현상은 성직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규칙적으로 머리를 땅에 짓찧기도 하는 데 이를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윔버는 주장한다(능력치유 356).
셋째로 술 취한 듯한 행동이 있다.
이 현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새로이 깨닫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를 체험하고 난 후"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말조차 더듬거리게 된다고 한다(능력치유 359).
넷째로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런 현상에는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등의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한 내적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다섯째로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 있다.
갑자기 낄낄대거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동안이나 계속되는 데, 이러한 경우는 정서적인 치유가 필요하거나, "새롭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흐느낌), 또는 그 분의 은총을 체험한 데서 오는 반응(웃음) 일 수도 있다"고 한다(능력치유 362).
마지막으로 장시간에 걸쳐 열렬하게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가 있다.
윔버는 이러한 경우 "방언의 은사를 받는 일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능력을 새로이 부여받았다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라고 하였다(능력치유 363).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비판
그러나 우리는 윔버가 주장하는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
론 윔버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대부분의 경우 적절하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윔버는 넘어지는 현상이 은혜 체험의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에스겔서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고 스스로 엎드린 것이다.
또한 고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요 18:6),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마 28:4), 귀신이 고꾸라진 것(막 9:20)을 제시하였지만(능력치유 359),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성령의 증거와 무관한 것이다. 또한 윔버는 소위 거룩한 웃음을 예증하기 위하여 사라의 웃음(창 21:6)을 열거하였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라의 웃음과 빈야드의 웃음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빈야드주의자들의 '거룩한 웃음'은 소리내어 깔깔대며 웃지만, 사라는 "속으로" 웃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지 못하는 가운데 약간은 조롱하는 투의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윔버의 성구 인용은 문법적으로 볼 때 많은 과오가 있다. 그러므로 윔버의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하겠다.
둘째로 윔버의 영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곧 진동의 경우 평온한 진동
은 목회의 소명과 관련된 것이며 격렬한 진동은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라고 하였고, 고꾸라져 머리를 땅에 찧는 현상을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배경도 없는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셋째로 은사를 가진 인간을 신격화하고 있는 점이다.
윔버 부인은 윔버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78년 4월 경 "존은 방을 돌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는데 믿을 수 없는 능력이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가 사람들을 건드리면 그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마치 전류처럼 영적인 능력이 존의 손으로부터 나왔다"(제 3의 물결을 타고 56). 여기서 윔버 부인은 윔버를 은혜의 통로로 간주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빈야드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성경의 가르침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경은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제 3의 물결을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의 손 끝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말하면서도 인간을 이적의 근거로 설명하였다.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즉각적인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손으로 밀기도 하고, 넘어지지 않으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계속 기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인위적인 작용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감화와 작용과는 무관한 것이다.
(3) 영적인 체험에 대한 개혁주의적 진단
윔버의 신비주의적 은사 운동은 18세기 중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후 조나단 에드워즈가 체험한 미국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에드워즈는 그 때의 미국 교회의 혼란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대각성운동 이후, "사람들이 그저 크게 감동하고 깨우침을 받아 종교적인 대화로 꽃을 피우고, 뜨거움과 열심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매우 충만해 있거나 온전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나타내기만 하면, 더 점검해 보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크게 체험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투의 자세가 아주 편만하였다.
3, 4년전만 해도 그러한 극단이 아주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분없이 모든 종교적인 정서들을 높이 평가하거나 찬탄하는 대신에 구분없이 모든 정서들을 거부하고 무시해 버리는 분위기가 더 더욱 크게 우세하다"(사랑의 열매 61). 곧 신앙적인 판단 기준이 흐려지면서 은사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은사주의자에 반대하여 합리주의자가 등장하여 교회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은사주의 운동을 교회 몰락의 징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은사주의로 인한 신앙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1744년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에서 정서를 "혼의 성향과 의지가 보다 활발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움직이는 행위"(신앙과 정서 25)라고 정의한 후, 참된 신앙적인 정서(religious affection)는 격정이 나 흥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과 감화를 통해 오기 때문에(64), 육신에 나타나는 반응이 참된 정서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75). 또한 찬양하고 복음을 촉구함이 신앙적인 것들이나 그런 행위가 바로 정서의 본질이 아니며(124), 유창하게 기도하거나(272), 몸의 뜨겁게 달아오르거나(279-300), 이적(329, 348), 시끄러움(427)이 참된 은혜의 표시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에드워즈는 몸의 떨림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보지 않았다. 몸의 떨림 현상은 인간의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어떤 경우든지 어느 정도 몸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본성과 몸과 영혼이 연합의 법칙이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몸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된다. 몸은 마음에 복종하고,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 씀에 따라 몸의 체액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5).
그리고 에드워즈는 고꾸라지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유의 은혜로운 정서에는 가짜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형제를 향한 사랑에도 가짜가 존재한다. 또한 바로와 사울 왕, 아합과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의 경우처럼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삼상 24:16, 17; 26:21, 왕상 21:27; 민 14:39, 40). 열왕기하 17:32이 묘사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그러한 거짓으로 나타난다"(97)고 하였다.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신령한 기쁨도 가짜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또한 에드워즈는 찬송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 간주하는 윔버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찬송을 즐겨 부른다고 해도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찬송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지만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며, 나사로의 부활을 본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를 배신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경을 많이 읽거나 찬송을 즐겨하고, 설교를 듣는 일에 많은 시간을 내는 등 종교적 열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거듭난 신자임을 증거 하는 표식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를 모이는 것과 그들의 손을 펴는 것과 많은 기도를 하는 것에 열렬히 참여"하였기 때문이다(123).
외식자들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대단히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또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일 수 있고,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감탄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죄에 대한 슬픔과 경외심과 복종심과 자기를 낮추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기쁨, 종교적인 갈망들, 종교와 영혼의 유익을 위한 열심 등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151). 이와 같이 "모든 은혜로운 정서를 흉내내는 모조품적인 정서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정서의 표출이 반드시 은혜로운 정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125).
5. 맺는 말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주의자들은 내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이나 투시, 또는 직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 신앙을 주관화하고, 진동이나 넘어짐, 낄낄대며 하루 종일 웃어대는 웃음,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육체에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간주하여 체험만이 신앙의 기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주관화하거나 체험주의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체험이 신앙적인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면, 기독교는 더 이상 계시의 종교가 될 수 없으며 모든 판단의 기준이 인간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 아래 태어나므로 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단의 지배를 받을 확률이 높다. 죄 없던 아담이 사단의 꼬임에 빠졌다면,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부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는 부패한 죄성의 영향을 받는 자율주의로 나가게 되고 자율주의는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토론토의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이다. 존 윔버는 최근에 극단적인 체험주의로 나가는 토론토의 빈야드 교회를 그들의 모임에서 제명하였는데, 이는 빈야드주의자들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앙의 주관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객관적인 면을 중요시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수직적인 체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수평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곧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칼빈은 신학의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내세웠고, 청교도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적인 전통에 서서 말씀만을 강조하여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고, 성령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곧 개혁주의자들은 교회 사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한국 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칼빈과 청교도, 개혁주의자들처럼 말씀과 성령을 신학의 원리로 삼아 말씀과 성령이 왕노릇 하는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예배가 단순히 집행되는 의식이나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배에서 찬송과 기도가 살아나야 하고,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생활의 영역에서 성령의 은사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쓰신 말씀에 깊이 묻혀서 그의 뜻을 발견하는 균형 잡힌 신앙을 세워 가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신앙과 삶의 원리가 되고 균형 잡힌 신앙이 한국인의 가슴을 지배할 때, 한국 교회는 여전히 21세기 세계 교회의 중심적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주(註)--------
1) '제 3의 물결'이라는 용어는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에 의하여 창안되었다. 그러나 풀러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가 이를 은사운동에 적용하면서 기독교계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와그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을 제 1의 물결, 1960년대에 개신교의 여러 교파의 은사 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에 미친 은사 갱신운동을 제 2의 물결, 존 윔버의 은사운동을 제 3의 물결이라고 칭하였다. John Wimber, Power Evangelism [능력전도], 이재범 역 (서울: 도서출판 나단, 1988), p. 169.
2)존 윔버(John Wimber)는 1934년 불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그는 편모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랐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전문대학에 진학하여 1954년 졸업한 후 Righteous Brothers라는 보컬 그룹을 만들어 라스 베가스(Las Vegas)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2년 이혼 직전에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고, 퀘이커교도(Quaker)들이 인도하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여 기독교를 배웠다. 그는 1970년 퀘이커 교회인 형제교단(Friends)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70년에서 73년 사이 아주사 퍼시픽 성경대학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신학을 더 배우기 위하여 1974년 풀러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만남은 그의 생애를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White 212-218). 그는 1977년 요르바 린다 갈보리 채플(Calvary Chapel of Yorba Linda)을 설립하였고, 치유 사역과 은사 운동으로 급격한 교인수의 증가를 체험하였다. 그 후 1982년 피터 와그너의 주선으로 풀러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표적과 기사와 교회 성장"(Signs, Wonders and Church Growth)을 강의하면서 '제 3의 물결'운동을 주도하였다.
3)LA 빈야드교회 한인 담당목사인 민병길에 의하면, 존 윔버가 주관하는 로스앤젤레스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인 목사가 800여명, 평신도가 200여명이다. 민병길, "능력목회의 새로운 장을 연 아나하임 빈야드 크리스챤 펠로우쉽," [목회와 신학] (1995, 6), p. 117. 여기다가 토론토 에어포트의 빈야드 교회에서 실시한 세미나에 참석한 숫자를 더하면 적어도 2,000명의 목회자가 참석하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4)존 윔버는 그의 신비 체험을 에드워즈의 성령 체험과 동일시하였다. John Wimber, Power Evangelism, [능력 전도], 이재범역, 서울: 나단출판사, 1993, p. 56. 그는 또한 [능력 치유]에서 말하기를, "1726년에서 1756년까지 진행되었던 대각성운동에 에드워즈, 웨슬레, 그리고 휫필드와 같은 사람들 모두 그들에게 기도를 받았던 사람들에게서 격렬한 감정의 분출이나 기이한 육체적 상태를 목격하였다. 그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라고 하였다. John Wimber with Kevin Springer, Power Healing, [능력 치유] 이재범 역, (서울 나단 출판사, 1991), p. 351. 또한 그는 자신이 비판을 받은 것처럼 에드워즈도 박해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에드워즈의 체험은 바로 자신의 신비 체험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Ibid., p. 353.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한인 담당목사인 김승환도 [목회와 신학에 투고한 "토론토 불레싱으로 퍼지는 영적 메아리,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라는 글에서 "1730년대의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목사의 사역의 기록을 보면 [빈야드 운동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목회와 신학] (1995, 6), p. 119.
5)John White, When the Spirit Comes with Power: Signs and Wonders Among God's People [능력 표적] 나단출판부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 222.
6) 그는 그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저스틴 마터(Justin Martin), 이레니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노바티안(Novatian),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은 초대교회 지도자들, 그레고리 1세(Gregory I), 성 프란시스(St. Francis), 왈도파(Waldenses)와 같은 중세시대의 인물,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로는 루터(Luther), 로욜라(Loyol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퀘이커(Quaker), 얀센주의자(Jansenist)를 꼽고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웨슬레(Wesley)의 체험과 아주사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등을 예로 든다. [능력전도] pp. 213-234. 그러나 그가 열거한 인물들은 몇을 제외하고는 은사를 인정하였을 뿐, 그와 같은 은사주의자는 아니었다.
7)폭스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신학은 그의 후계자인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 1648-90)와 18세기 대표적인 학자인 조셉 거니(Joseph John Gurney, 1788-1847)와 같은 신학자에 의하여 퀘이커 신학을 형성하였다.
8)여기서 윔버가 말하는 직관의 모호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간통'이라는 글자가 얼굴 위에 쓰여 있어서 그의 눈을 비비고 쳐다보았다고 말하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한 후, 이를 성령이 자신에게 보여준 영적인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다.
9)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신앙과 정서] 서문강역 (서울: 지평서원, 1993), p. 300.
10)그는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와 코플랜드(Kenneth Copeland)와 같은 부흥사나 복음 전도자에 의하여 실시되는 오순절 모델, 영국 성공회 주교인 매독스(Morris Maddocks)와 매사추세츠의 로마 천주교 신부인 맥도나우(Edwards McDonough)와 같은 이들이 사용하는 전례적 - 성례적인 모델, 치유 훈련과 특별 집회를 강조하는 맥너트(Francis MacNutt)와 디오리오(Ralph DiOrio)와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신오순절 모델, 복음전도와 마귀 축출에 사용하는 마귀 축출 방법, 과거에 입은 상처와 원한의 치유에 주된 관심을 두는 심리적 영적 모델 혹은 내적인 치유 모델을 참고하여 치유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하였다(능력치유, 309-311).
11) 로마 천주교회는 빈야드주의자들 처럼 은사의 절대성과 은사 운동의 가능성을 주장해 왔다. 로마 천주교 신학자 프랜시스 맥너트는 말하기를, "실제로 치유는 개신교보다는 카톨릭 교인편에서 훨씬 이해하기 쉽다. 카톨릭 교인들은 신유를 포함한 기이한 은사들로 축복을 받은 성자들의 전통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신유는 아직도 성자로 시성되기 위한 하나의 시금석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인들은 신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 Francis MacNutt, Healing (Notre Dame, IN: Ave Maria, 1974), p. 13.
12) 존 윔버, 피터 와그너, 찰스 크래프트, 앤 왓슨, 존 화이트 외 13인 공저, [제 3의 물결을 타고] 변진적 변창욱 옮김 (서울 도서출판 무실, 1991), p. 33.
13)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4), pp. 176-177.
14)Benjamin.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기독교 기적론] 이길상 역 (서울: 도서출판 나침판, 1989), p. 30.
15)Jonathan Edwards, Charity and Its Fruits, [사랑과 그 열매], 서문강 역, (서울: 정음출판사, 1984), p. 34.
16)John Calvin,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IV. xix. 18.
17)Martin Luther, "Sermons on the Gospel of St. John," in Luther's Works. ed. Jaroslav Pelikan. vol. 24.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p. 367.
(월간<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http://cafe.daum.net/jejusinilch/Qw8d/34
능력사역 빈야드 명령기도 실체 비판
선포 명령기도 문제 해결은 비성경적인 행각
한국교회 교회성장을 갈망하는 교역자들에게 <능력사역>은 과거 <긍정적인 성공의 복음>에 이어 매력적인 사역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듯하나 비성경적이다. <빈야드운동>은 이런 능력사역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고 있는데, 인천 포도원교회(소속교단 : 대신)의 <세계로 영성훈련센타>에서 발간한 훈련교재를 입수해 <능력사역(선포. 명령)의 실체>를 공개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훈련교재가 말하는 <영성사역>이란 “영성이란 인간 안에서 성령이 활동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는 것이고, “영성사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성품)과 삶과 사역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을 말하며, 특히 주님이 하신 사역은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하는 일들을 능력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교재 1부에서 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능력전달(전이), 묵상 훈련, 기도훈련, 고백훈련 항목도 보이고. 2부에서는 무려 100가지 선포. 명령기도를 다루고 있고, 250권의 책을 <영성 개발에 도움이 되는 도서 목록>으로 소개 하고 있었다.
1. 100가지 선포. 명령들 .
어떤 교인이 고장 난 세탁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해서 고쳤다는 간증을 읽어보았는데, 그 진원지가 어딘가를 살펴보니, 바로 빈야드 운동이었던 것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이제 본 훈련교재에서 100가지 선포. 명령의 실체는 무엇인가 찾아보고자 한다.
1) 저주를 끊는 사역.
2) 암으로부터 자유를.
3) 술, 담배, 마약 중독에서 자유.
4) 불안, 두려움, 염려, 걱정으로부터 자유.
5) 당뇨와 중풍과 심장병으로부터 자유.
6) 혈기, 분노, 악한 말, 폭력, 원망, 불공평으로부터 자유.
7) 성적인 죄.
8) 가난의 저주에서 부요함으로.
9) 땅(토지)을 자유케 하는 것.
10) 집과 건물을 자유케 하는 것.
11)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저주에서 자유.
12) 무자비한 자에 임한 저주에서 자유.
13) 우상숭배(무당)의 저주를 끊는 기도.
14) 사람을 괴롭히고 유혹하는 사단을 물리치는 명령기도.
15) 질병과 바이러스들이 침입하여 신음하는 자를 위한 기도.
16)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기도.
17) 교회부흥을 위한 명령.
18) 성적인 범죄에 자꾸 빠지는 사람에 대한 기도.
19) 귀신의 영향을 받아서 고통을 받는 자를 위한 기도.
20)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
21) 화와 분노를 잘 내는 사람을 위한 기도.
22) 사단의 간계로 우리 자신과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23) 구원을 위한 기도.
24) 영분별을 증진시키는 기도.
25) 기이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때에 하는 기도.
26)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속으로 하는 기도.
27) 우상숭배를 통해서 들어온 귀신 축출 기도.
28) 악(어두움)에 세력과 지역의 영에 대한 명령기도.
29) 사역을 위한 뒤풀이(마무리).
30) 채무의 문제를 해결.
31) 채무의 영을 물리치는 기도.
32) 재물을 얻는 능력을 받자.
33) 모든 돈은 어디서 생기나.
34) 개인 빛에서의 자유.
35) 집(건물. 땅)을 팔기 위한 기도.
36) 능력(은사)을 나누어(전이) 주는 기도.
37) 성령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38) 마음속에 쓰레기들을 태워 버리는 기도.
39) 재물이 들어오라는 기도.
40) 형통하라는 기도.
41) 자녀를 얻기 위한 기도.
42) 불안, 초조, 긴장하는 자에게.
43) 죽은 자를 위한 명령.
44) 알콜 중독자에 대한 기도.
45) 반역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
46) 마음의 치유를 위한 용서의 기도.
47) 부부간의 문제에 관한 기도.
48) 신유사역을 실시하기 전에 명령기도.
49) 돈이 필요할 때.
50) 불신자를 위한 기도.
51) 성령을 부어 달라는 기도.
52)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
53) 목회의 축복 선포기도.
54)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기도.
55) 능력의 선포기도.
56) 재물에 대한 명령.
57) 사역을 위한 선포기도.
58) 믿음의 선포기도.
59)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기 위한 기도.
60) 전도의 선포기도.
61) 형통의 선포기도.
62) 믿음과 말의 능력기도.
63) 보호와 안전을 위한 선포.
64) 축복의 선포.
65) 악한 자를 위한 기도.
66) 기억력과 집중력을 위한 명령.
67) 사역의 기름 부음의 기도.
68) 가계를 위한 축복 선포기도.
69)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파괴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언.
70) 교회 부흥을 방해하며 지역을 조종하는 영에게 명령.
71) 교회 지원을 위한 기도.
72) 영적 전쟁
73) 지혜를 얻기 위한 기도.
74) 재채기 나올 때 마다 선포하는 말.
75) 부흥을 위한 선포.
76) 목회에 탈진한 사람이 선포하는 간구.
77) 교회와 교인을 위한 선포기도.
78) 경제적인 문제 해결 기도.
79) 저주와 질병을 끊는 기도.
80)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능력기도.
81) 새로운 사역을 위한 기도.
82) 형통하기를 믿는 기도.
83) 마귀와의 싸움에서 선포기도.
84)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기도.
85) 보호와 안전을 위한 선포기도.
86)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기도.
87)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기도.
88)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선포.
89) 경제적인 축복의 선포.
90) 강한 자를 묶는 기도.
91)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선포.
92) 선포자로서의 사명에 대한 기도.
93)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기도.
94) 보혈의 기도.
95) 성품과 체질을 바꾸는 기도.
96)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
97) 자신의 몸을 향하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
98) 씻는 기도.
99) 예배 시간에 기도.
100) 은사가 나타나기 위한 기도.
2. 살펴보면.
1) 기도의 제목이 되는 어떤 문제의 내용을 ‘00 저주’ 라는 용어를 붙여 사용한다.
“ ‘마약 중독의 저주’ (121쪽) ‘저와 저의 가문에 내려진 가난의 저주’ 는 지금 이 순간 끊어질 찌어다.” 하는 식의 기도를 한다(125쪽), 이것은 모든 것을 저주와 축복이라는 양자구도로 보는 시각이다.
2) ‘저주’ 라는 단어 다음으로는 ‘00 마귀’ 나 ‘영’ 이라는 용어를 붙여 사용한다.
예를 들면“이 사탄 가난 마귀야!” (125쪽)“순종의 영”(127쪽)“성결의 영”(135쪽)“계시의 영”(138쪽)채무의 영”(147쪽) “봉사의 영”(156쪽) “분노의 귀신”(192쪽) “이기심의 귀신”(192쪽) “교만의 귀신”(192쪽)이라는 신종 용어들이 나온다. 얼토당토 않는 것에다 영이라는 단어를 첨가해 사용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악령과 성령의 대결 구도로만 보는 시각이다.
3. 문제성을 안고 있는 기도의 내용들.
1) “이 땅(토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입혀 주시고 저주는 떠날 찌어다.”(126쪽).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집(건물)에 붙어 있던 악한 영들과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결박 하노니 이집(건물)에서 당장 떠날지어다(126쪽).
3) “나의 마음에 순종의 영을 풀어 놓습니다.”(127쪽).
4) “지금도 무한히 흐르는 예수님의 보혈로 이 저주를 끊어버립니다. 나의 마음과 나의 자손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으시고 새롭게 하옵소서.”(128쪽).
5) “나의 조상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마십니다. 내 영과 혼과 육을 정결케 하소서.”(129쪽).
6) “계시의 영을 받아라.”(139, 164쪽).
7) “주님, 저는 예수 이름으로 제 생활 속에서 채무의 영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 빚을 신기하게 변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47쪽).
8) “은과 금의 주인이신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손에 재물 얻을 능력이 나타날 찌어다.”(153쪽).
9) “예수 이름으로 명령한다. ‘마귀야 내 돈 내 놓아라? 사탄아 내 돈에서 손을 떼라! 나는 돈이 들어온 것을 믿습니다.”(158쪽).
10) “재물의 주인 되시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의 재정문제에는 해결이 되고, 돈은 들어올 지어다. 사탄아! 내 돈에서 손을 떼라! 예수 이름으로 사탄아 내 돈 내어놓아라.”(162쪽).
11) “예수님의 피가 나의 모든 존재위에 흐르고 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아내 000, 자녀 000, 000, 000이 위에 흐르고 있다. (165, 187쪽).
12)<가계의 저주를 파괴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언>.
제1단계: 부모와 조상들의 죄와 죄악을 기억해 내고, 그것들을 자백하라.
제2단계: 개인적으로 조상들의 죄악을 용서하라.
제3단계: 현재 살아있는 조상들의 특별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제4단계: 가계의 죄악에 참여했음을 자백하라.
제5단계: 우리를 용서하고 깨 끗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하라.
제6단계: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시켜라.
제7단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마귀를 이기셨다.
제8단계: 하나님은 모든 권위를 소유하신다.
제9단계: 예수님의 이름의 권위를 사용하라.
제10단계: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선언하라.
제11단계: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깨졌음을 선언하라.
제12단계: 자신의 삶과 자녀들의 삶 위에 축복의 말을 선포하라.
13)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자원들이 세계복음화를 위해 사용될 찌어다.”(171쪽).
14) “이 몸을 만지는 모든 병균들과 바이러스는 즉시 궤멸될지어다.”(182쪽).
15) “내 혈관에 순환하는 썩은 피는 거두시고 예수님의 생명과 피로 수혈하여 주소서!”(194쪽).
나가는 말.
이런 식이라면 부흥되지 않을 교회가 없고, 가난한 목사나 교인이 없을 것 같은데 과연 그렇까? 하는 생각만 든다. 만일 어떤 빈 야드 목사가 이와 반대의 상태에 처해 있다면 예를 들어 병이 들었거나, 가난하거나, 부흥이 안되었거나, 고통의 문제가 따르거나, 부채가 남아 있거나, 중풍이 들었거나, 가족 중에 병든 자가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헌금이 왜 필요한가? 명령으로 다 될 수 있을 터인데? 남의 돈을 얻어 쓰고도 갚을 생각이나 노력보다는 명령기도면 다 될 일인데 사회적 책임이나 책임 있는 노력이 왜 필요하겠는가?
돈 없으면, “돈은 들어올 지어다. 사탄아! 내 돈에서 손을 떼라! 예수 이름으로 사탄아 내 돈 내어놓아라.” 명령기도 하면 된다고 가르쳐 놓고 그렇지 못하면 분명히 사기꾼이라 않겠는가?
우스운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한국교회 이단사(異端史)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정X은 이라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박X선에게 피갈음을 전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북에서 이X도 목사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평양 신비주의 일파인 김X도 권사의 성주교, 김X도의 충실한 추종자 허X빈의 복중교를 거쳐 마침내는 남한으로 와서 김X문의 상도동 집회소의 관리인이었던 방X동과 함께 삼각산에다 대성심 기도원을 차렸는데 재정이 어렵게 되어 반찬거리가 없게 되자 웃지 못 할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하루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에게 지게를 지게하고, 함께 시장으로 내려갔다. 시장 가게로 가서는 자기들이 쓸 것들을 주섬주섬 지게에 담아 짊어지고 가버렸다. 가면서 정여인이 하는 말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이 안다면 이것뿐 아니라 이 이상의 것도 내게 대접할 것이다. 이것 주었다고 후회하지 마라 더 주었더라면 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는 돈도 안주고 기도원으로 가버렸다.
그 뒤 삼각산에서 정득은 여인이 집회를 하고 있는데, 그 시장의 가게 주인이 집회에 참석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 가게 주인은 가만히 강대상을 보다가 언젠가 자기 집에서 돈도 안주고 주섬주섬 챙겨서 지게다 지고 간 그 사람이 설교를 하고 있으니까 그만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득은 여인은 유치장으로 끌려갔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어째 빈야드 교회에서 이런 교인만 생겨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아레오바고 사람들 / 이영호 목사
http://blog.daum.net/munje/11113180
“거짓 영을 분별하라-빈야드(Vineyard)운동”
1. 빈야드(Vineyard) 운동의 원류
빈야드 운동은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 (Anaheim)에 있는 \"빈야드교회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이끄는 죤 윔버 (John Wimber)에 의해 시
작되었다.그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밑에서 음악에 매료되어 대학을 졸업한 후, 1960년대 유명한 록 그룹
‘Righteous Brothers’를 조직하였고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나중에 퀘이커 교도를 만나 회심을 체험하고 아주사대학 성경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나중에 풀러신학교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면서 교회성장연구소와 오순절 성령파의 영향으로 \"빈야드 교회 연합 (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을 조직하여 은사, 치유, 능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토론토 축복\" 이라 불리우는 죤 아노트 (John Arnott)이다. 그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
하는 죤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현재는 죤 윔버(John
Wimber)가 이끄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죤 아노트(John Arnott)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은 분리되었다.
2.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1. 성령의 비인격화 현상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 현상적인 기적적인 일을 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 심령이 거듭나서(요 3:5)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며(고전12:3),
주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행1:8) 우리에게 임하신 삼위일체 성령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다양한 은사를 교회에 부어
주신다(참고: 롬12장,고전12장,엡4장).
그러므로 성령은 기적적인 무슨 능력이나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
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자로 변화받고 진리의 길에 따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의 핵심은 성령의 외적 은사를 성령받은 증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러한 외적 은사가 진정한 성령운동이라고 강조한다.
(1)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
-그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하지만 비성경적이다.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의 근거?: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 21:6)을 말하고 있고
주로 성경의 기쁨과 희락의 근거로 웃음이 나온다
고 한다. 분명히 웃음은 기쁨의 근거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지 꼭 성령받아야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비웃음이며
아들 이삭을 낳고 웃은 사라의 웃음(창21:6)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격과 기쁨의 웃음이다.
자연현상을 지나치게 성령운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2) 짐승의 소리들
-이들의 집회때마다 각종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다양하다. 특히 기도할 때에 나타난다.
-짐승소리의 근거?: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암3:8)
(The Father`s Blessing\" pp.172-173) *이것은 비유이 지 실제적인 사자울음이 아니다.
-닭소리는 재림의 소리라고 하며, 개소리는 사단의 소리라고 하며, 사자소리는 귀신을 좇아낼 때가 되어서 나는 소리
이며, 바람, 물, 새, 소나기 등의 자연의 소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찬양하는 바람에 자연도 함께 회복되는 은혜의 소리라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며, 비성경적이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3) 쓰러지는 현상
-존 윔버는 성령의 은혜가 너무 강력하면 쓰러지게 된다고 강변한다.
-쓰러짐의 근거?: 겔1:28; 단8:17; 요18:6; 마28:4, 행9:4; 계1:17등이다
(John Wimber, Kevin Springer, \"능력치유\" 이재범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359).
위에 언급한 성경의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쓰러짐의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너무 비약된 경우가 많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받으면 넘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본 경우이고, 다니엘은 엎드려 깊이 잠든 상태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은 예수님의 당당하신 모습에 넘어
진 것이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군사들이 넘어진 것은 천사를 보고 놀라서 넘어진 경우이며,
다메섹에서 사울이 넘어진 것은 강렬한 빛으로 인한 경우이며, 요한이 밧모섬에서 엎으린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다.
성령의 강력한 펀치를 맞으면 넘어진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엉터리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이다.
(4) 떠는(진동) 현상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66:5이나 렘5:22, 막 5:33, 눅8:47, 행16:29, 고전2:3, 고후7:15, 빌2:12; 히12:21 등을 인용하지만(\"능력치유\"
p.356), 거기에 나타난 것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 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현
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처럼 성령이 기름을 부으시는 현상이 아니다.
2. 무질서한 예배와 성령의 은사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들은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증을 위하여..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증거
하식 위하여.. 그렇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기 위하여..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바르게 세워지고 성장
하기 위해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사들은 특히 교회의 유익을 가져온다(고전14장, 엡4:11).
-빈야드 지도자들은 성령의 초월적인 기이한 현상들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내적 유익보다는 교회의 무질서 현상을 가져온다. 결국 영적 혼란을
부추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일찍이 고린도 교회에 경계한 무분별한 은사주의이다(고전14:5-40).
-빈야드 운동은 질서없는 무질서한 찬양인도, 웃음, 넘어짐, 소리지름, 방언기도, 예언 등으로 예배의 혼란을 가져온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운동이
아니다(고전14:33).
결론) 각 교파별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하나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계시관에 있어서, 빈야드 운동은 사도적 계시의 종료성을 불인정하고 있고,
성령론에 있어서, 사도적 이적과 섭리적 이적을 분별치 못하고 있으며,
예배에서 영적 자유와 무질서를 혼동하며 거룩한 웃음과 동물적 괴성의 비성경성, 옷차림의 부도덕성, 쓰러짐과 춤추는 찬양 등
불경건성이 두드러 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령의 역사를 비인격화 시키는 것이며
말씀선포가 중심이 되지 않는 은사주의는 위험스런우며 주관적 감각이나 신비적 체험과 경험만을 부각시키고 추구하는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4:23)라고 볼 수 없다.
“거짓 영을 분별하라-빈야드(Vineyard)운동”
1. 빈야드(Vineyard) 운동의 원류
빈야드 운동은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 (Anaheim)에 있는 \"빈야드교회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이끄는 죤 윔버 (John Wimber)에 의해 시
작되었다.그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 재혼한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밑에서 음악에 매료되어 대학을 졸업한 후, 1960년대 유명한 록 그룹
‘Righteous Brothers’를 조직하였고 라스베가스의 쇼에도 관여하였다. 나중에 퀘이커 교도를 만나 회심을 체험하고 아주사대학 성경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나중에 풀러신학교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면서 교회성장연구소와 오순절 성령파의 영향으로 \"빈야드 교회 연합 (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을 조직하여 은사, 치유, 능력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토론토 축복\" 이라 불리우는 죤 아노트 (John Arnott)이다. 그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언론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능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
하는 죤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하겠다. 현재는 죤 윔버(John
Wimber)가 이끄는 \"빈야드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죤 아노트(John Arnott)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은 분리되었다.
2.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1. 성령의 비인격화 현상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자체로 현상적인 기적적인 일을 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 심령이 거듭나서(요 3:5)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며(고전12:3),
주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행1:8) 우리에게 임하신 삼위일체 성령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심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기 위해 다양한 은사를 교회에 부어
주신다(참고: 롬12장,고전12장,엡4장).
그러므로 성령은 기적적인 무슨 능력이나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
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자로 변화받고 진리의 길에 따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의 핵심은 성령의 외적 은사를 성령받은 증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러한 외적 은사가 진정한 성령운동이라고 강조한다.
(1)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
-그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하지만 비성경적이다.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의 근거?: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 21:6)을 말하고 있고
주로 성경의 기쁨과 희락의 근거로 웃음이 나온다
고 한다. 분명히 웃음은 기쁨의 근거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지 꼭 성령받아야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창17:17; 18:12)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비웃음이며
아들 이삭을 낳고 웃은 사라의 웃음(창21:6)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격과 기쁨의 웃음이다.
자연현상을 지나치게 성령운동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
(2) 짐승의 소리들
-이들의 집회때마다 각종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다양하다. 특히 기도할 때에 나타난다.
-짐승소리의 근거?: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암3:8)
(The Father`s Blessing\" pp.172-173) *이것은 비유이 지 실제적인 사자울음이 아니다.
-닭소리는 재림의 소리라고 하며, 개소리는 사단의 소리라고 하며, 사자소리는 귀신을 좇아낼 때가 되어서 나는 소리
이며, 바람, 물, 새, 소나기 등의 자연의 소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찬양하는 바람에 자연도 함께 회복되는 은혜의 소리라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며, 비성경적이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3) 쓰러지는 현상
-존 윔버는 성령의 은혜가 너무 강력하면 쓰러지게 된다고 강변한다.
-쓰러짐의 근거?: 겔1:28; 단8:17; 요18:6; 마28:4, 행9:4; 계1:17등이다
(John Wimber, Kevin Springer, \"능력치유\" 이재범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359).
위에 언급한 성경의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쓰러짐의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너무 비약된 경우가 많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받으면 넘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본 경우이고, 다니엘은 엎드려 깊이 잠든 상태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은 예수님의 당당하신 모습에 넘어
진 것이고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군사들이 넘어진 것은 천사를 보고 놀라서 넘어진 경우이며,
다메섹에서 사울이 넘어진 것은 강렬한 빛으로 인한 경우이며, 요한이 밧모섬에서 엎으린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다.
성령의 강력한 펀치를 맞으면 넘어진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엉터리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이다.
(4) 떠는(진동) 현상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66:5이나 렘5:22, 막 5:33, 눅8:47, 행16:29, 고전2:3, 고후7:15, 빌2:12; 히12:21 등을 인용하지만(\"능력치유\"
p.356), 거기에 나타난 것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 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현
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처럼 성령이 기름을 부으시는 현상이 아니다.
2. 무질서한 예배와 성령의 은사들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들은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증을 위하여..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증거
하식 위하여.. 그렇게 하심으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기 위하여..지역 교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바르게 세워지고 성장
하기 위해서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은사들은 특히 교회의 유익을 가져온다(고전14장, 엡4:11).
-빈야드 지도자들은 성령의 초월적인 기이한 현상들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교회의 내적 유익보다는 교회의 무질서 현상을 가져온다. 결국 영적 혼란을
부추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일찍이 고린도 교회에 경계한 무분별한 은사주의이다(고전14:5-40).
-빈야드 운동은 질서없는 무질서한 찬양인도, 웃음, 넘어짐, 소리지름, 방언기도, 예언 등으로 예배의 혼란을 가져온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운동이
아니다(고전14:33).
결론) 각 교파별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은 바람직하나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계시관에 있어서, 빈야드 운동은 사도적 계시의 종료성을 불인정하고 있고,
성령론에 있어서, 사도적 이적과 섭리적 이적을 분별치 못하고 있으며,
예배에서 영적 자유와 무질서를 혼동하며 거룩한 웃음과 동물적 괴성의 비성경성, 옷차림의 부도덕성, 쓰러짐과 춤추는 찬양 등
불경건성이 두드러 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령의 역사를 비인격화 시키는 것이며
말씀선포가 중심이 되지 않는 은사주의는 위험스런우며 주관적 감각이나 신비적 체험과 경험만을 부각시키고 추구하는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4:23)라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