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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면류관이여
빌립보서 4:1-9
오늘 말씀을 나누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 중 하나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연애편지 같은 따듯한 사랑의 편지를 쓰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만큼 마음 가까이 존재한 교회는 없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최소한 세 번 방문하였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진실한 친구였다.
바울은 편지의 결론 부분인 4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렇게 부른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1).
“나의 기쁨”(1).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1).
바울은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결론처럼 당부하기를, 주님 안에서 굳게 서라(1),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안에서 기뻐하라(4), 나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고 부탁한다.
그 약속의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7) 또는 “평강의 하나님”(9)이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하늘의 면류관’으로 표현한다.
‘나의 면류관이여!’
면류관은 무엇인가? 당시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은 스포츠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면류관은 경기의 우승자가 머리에 쓰는 관으로, 올리브 잎으로 만든다. 또 큰 기쁨의 제사 때 식탁에 초대 받은 손님들에게 씌워주는 관이다. 사실 생일 맞은 아이가 쓰는 금빛 종이왕관일망정 얼마나 특별한가? 그는 잔치의 주인공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면류관이라고 부른 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그들은 경기의 우승자요, 특별한 축제의 주빈이요, 영원히 빛나는 상급이다.
1) 주 안에 굳게 서라
먼저 주 안에 굳게 서라고 한다. 주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는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의 천국 시민권에 근거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3:20).
또한 굳게 설 수 있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
굳게 선다는 무엇을 뜻할까? 사실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오죽하면 바울이 감옥에서 남들 듣기 어려운 말을 하는가? 아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지도적인 두 여성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바울은 먼저 두 당사자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다. 같은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굳게 서는 일이다.
사람의 갈등은 대개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이다. 서로 속셈이 다르니까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한다. 여기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일은 같은 반석 위에 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굳게 설 반석이시다. 그러므로 그 위에, “주 안에서” 굳게 설 것을 부탁한다. 비록 지금 서로 갈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의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교회 구성원들에게 이 여자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요청한다. 빌립보 교인들은 ‘같은 멍에를 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 한 겨리는 같은 멍에를 메고 일한다. 이인삼각 경기를 하면서 동반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같은 멍에를 멘 사람들은 한 마음을 품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흔히 인생의 성공요인은 사람 관계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문제는 다 알면서도 그렇게 못한다. 사람들은 대개 직무수행의 실패보다는 대인관계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데 누구와 멍에를 메고,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방법은 단순하다.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려면 ‘온유한 마음’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된다. 온유한 자란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다. 인간은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 따듯한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기에 쉽게 화를 내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온유한 마음은 황폐한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골고루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에게도 단점이 있고, 아무리 부족한 사람에게도 장점이 있다. 일방적으로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조금 더 섬기고, 더 많이 온유한 사람이 처음에는 바보스럽지만, 결국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 그 평가는 남에게 달려있지 않다. 자기 자신이 누리는 기쁨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그 온유하심 안에 자신을 굳게 세워보라.
2)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명령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특별한 기분이나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언제나, 어느 때든지 한결같은 기쁨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기뻐할 수 있다.
이 기쁨은 1차적으로는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쁨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기쁨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준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
무엇보다 기쁨은 염려를 없애준다. 염려는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된 상태를 말하는데, 기쁨은 마음을 주 안에서 머물게 한다. 더 나아가 기쁨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다.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더욱 더 기도와 간구를 하도록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
행복은 참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온다. 위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정상적인 위기와 우발적인 위기이다. 정상적인 위기는 아기가 젖을 떼거나, 청소년들의 사춘기, 결혼, 정년 퇴직, 노년 등 누구에게나 닥치는 불안전한 인생의 단계들마다 찾아온다. 우발적인 위기는 비정상적이어서 예기치 못하게 갑작스럽게 들이 닥친다. 감원의 대상이 된다든지, 암에 걸렸다든지, 사업이 실패한다든지, 화재를 당한다든지, 교통사고 등으로 피해를 입는다든지 하는 위기들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이다. 부정적으로 위기를 대응하는 사람은 삶을 파편화 시킨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극복하는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창조한다. 위기는 내 사정과 형편을 가리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인생은 성장하고 완숙하게 된다. 위기는 언제나 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그 위기를 관리하는 최고의 능력이다.
며칠 전 점심을 먹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오늘 스티브 잡스가 돌아가셨대”라고 하더라. 스마트 폰을 보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애도와 함께 상실감을 느낀다. 그의 인생에 대해 공감하기 때문이다. 잡스의 인생은 성공과 함께 많은 실패가 있었다.
어제 ‘한겨레’ 신문을 인용하면, ‘그는 자신의 딸조차 부정했던 비정한 아버지였고,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서 쫒겨난 실패자였다. 그는 기부에 인색하고, 자사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눈을 감았다. 스티브 잡스 대신 스티브 맙스(폭력배)라고 조롱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의 대표였지만 평생 아웃사이더의 면모를 지녔다고 한다. 자수성가한 그는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고 자신과 남을 부추겼다. 발상의 전환과 창조적 사고는 그를 오늘의 스티브 잡스로 만들었다. 자신의 췌장암을 알게 된 후 그동안 감춰진 자기 출생과 실패의 인생이야기를 세상 가운데 드러낸 일은 큰 감동이다. 특히 그는 죽음의 의미조차 다르게 사고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며 낭비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바울은 기쁨은 인간의 조건이나, 물질적 요인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은 법 이상의 은혜를 허락하셨다. 우리에게 언제나 기도할 수 비결을 주셨다. 그 특권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기도의 결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나쁜 환경이 아니라 기쁨임을 깨닫는다. 내 마음을 보초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라. 하나님의 평강이 더욱 그 마음과 생각을 굳게 할 것이다.
3) 주 안에서 행하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윤리적 교훈으로 권고한다. 그의 인격과 성품을 바꾸어 가는 일이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8).
이것은 내적인 믿음과 고백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올바른 열매를 맺도록 촉구한 것이다. 위대한 스승,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계속 행하도록 부탁한다. 여기에서 ‘배운 것과 받은 것’은 교회의 전승이고, ‘들은 것’은 바울의 선포이며, ‘본 것’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수고한 그의 모범이다. 이렇듯 믿음과 실천이 일치된 삶을 살 때에, 즉 주 안에서 행할 때에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굳게 서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행하라, 이 세 가지에서 “주 안에서”(4)는 평강의 보호벽이다.
사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다. 그는 사방에서 자기를 둘러싼 감시와 속박을 느낀다. 동시에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영적으로 자유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호벽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세상의 높은 벽이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평강으로 나의 보호벽을 삼으라.
빌립보 교인들은 ‘면류관’처럼 바울의 자랑이다. 아이들이 생일날 금빛 관을 쓰는 것은 무슨 업적이나, 훌륭한 태도 때문이 아니다. 그 존재 자체의 존귀함이다. 초대 교회는 이제 갓 믿음의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이다. 복음에서 아마추어일 뿐이다. 초대교회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교회의 모델이고, 모범인 까닭은 그들은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마추어일 때가 더 아름답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레(amare)에서 유래하는데, 그 말은 사랑하다를 의미한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 유명한 “당신의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그의 연설은 미국인들을 향한 도전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케네디는 ‘평화봉사단’ 설립계획에 서명한다. 봉사단은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한 비정부 기구이다. 미국인들은 당신의 조국을 위해 일하는 방식으로 제3세계의 개발을 돕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직업외교관이나, 전문가들의 영역이 아니라 해마다 수천 명의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봉사하는 일이다. 이렇듯 보통사람의 잠재력에 기초한 ‘평화봉사단’이 올해로 꼭 50주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2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평화봉사단’에 참여하여 139개 나라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며, 세상의 한 모퉁이를 바꿔가는 일을 한 것이다. 현재 주한 미국 대사 캐슬린 스티븐스도 대학시절인 1975년부터 2년 동안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참여하여 영어를 가르쳤다.
미국이 세계 속에서 양극단의 평가를 들으면서도 비교적 친밀한 이미지를 유지해온 것은 바로 이러한 봉사의 유산 때문이다. 케네디의 도전은 미국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만드는데 중요한 밑돌을 놓은 셈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은 하나님의 평화봉사단으로 초대한다. 그 부름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도전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류관으로 부름 받았다. 영어 속담에 “No Cross, No Crown”이란 말이 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아마추어들이다. 나를 든든히 세우시는 주님의 반석, 우리가 주 안에서 이루어 가는 깊은 사랑,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봉사단으로 일한다. 내가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내 가정, 일터, 지역 사회, 일상의 의무와 관계 속에서 그 봉사단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하나님의 면류관으로 산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성품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없다. “주 안에서” 가능하다. 바울이 여러분을 향해 도전한다. 먼저 하나님의 평화봉사단에 참여하고, 그 일원으로 살아가라. 가장 큰 기쁨은 가장 위대한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당장 실패로 보이든, 성공으로 느껴지든 내 인생을 산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필요하다. 그 평강이 나를 기쁨으로 인도하신다. 무엇보다 ‘기쁨의 영성’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하라. ‘나의 면류관이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나를 좌우하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이 언제나 은총을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