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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문명을 흔히 그리스와 로마문명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리스와 로마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연안에 있는 국가로 페니키아나 카르타고 등과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으나 결국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 함으로서 지중해 연안 국가 중에서도 중추적인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서양의 고대문명을 그리스 로마문명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나 로마도 동방의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는데 동방의 오리엔트 문명을 서양에 전파하는 데는 일찍이 지중해 해상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던 패니키아가 그 중심에 있었다.
페니키아가 오리엔트 문명을 크레타 섬에 전파한 것은 시기적으로 청동기시대였으며 활짝핀 크레타 섬의 청동기문명이 다시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어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핀에어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알프스산맥
그리스인들이 발달시킨 종교, 법률,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로마는 카르타고 한니발장군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일약 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로마제국은 4세기에서 6세기 경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받아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야 하였으면서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이슬람세력과 종교적 문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양의 고대문명은 지중해를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형성된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엎치락뒤치락하였던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전쟁은 결국 로마가 승리함으로서 로마제국 중심으로 세계질서는 개편되었다.
스페인 국제 공항에서 우정을 다지는 아름다운 손길
그 와중에서 카르타고 식민지였던 이베리아반도 남부가 로마 직속령으로 편입되었고 1차 삼두정치와 2차 삼두정치를 거치는 동안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브리타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 부를 장악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하여 로마 공화정의 정치지도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동부 에게해 악티온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격파할 수 있었다.
카탈루냐 광장
람불라스 거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유럽을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로마제국 황제로 부상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의 여러 식민지들을 제도권으로 수용하여 실질적인 지중해 중심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역대 로마 왕들은 전통사상과 새로운 사상인 크리스트교와의 정립문제를 놓고 갈등을 해오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더니 테오도시우스황 때 국교화하였다.
로마제국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히스파니아(스페인)를 참좋은 여행사가 기획 여행 상품으로 내놓은 것을 알고 기회는 이번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여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진한 이래 여타 종교 개혁운동이 유럽 각지를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유독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스페인만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정통 구교를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평소 많은 관심을 갖게 있었다.
그리고 구석기시대 역사의 중심지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던 곳도 스페인과 프랑스였다.
호기심이 가득하여 세계 각처로부터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람불라스 거리는 발디딜틈이 없었다.
소매치기 천국이라는 가이드의 엄포성 발언에
여권 제자리에 있나 확인도 해보고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뗀석기와 골각기를 이용하여 수렵과 어로, 채집을 하면서 이동생활을 하며 동굴에서 기거하였다.
아직은 가축을 기르거나 농경에도 서틀었으며 하루하루 사냥을 하여 동물을 잡아 불에 구워 섭취할 정도의 지능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류의 시초이며 그들의 생활 기반이 지구상에서 가끔 발견되기도 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 남부 라스코 동굴이었다.
바르셀로나 산호세 전통시장 과일가게 앞에 선 친구들
과일 종류에 놀라 일그러진 표정
아름답기만 하다.
참을 수 없어 과일을 사들고 맛을 보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던지 길을
잃을까 겁이나고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이나 프랑스의 남부 라스코 동굴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벽화를 남겼다는 것이 이미 학계에 보고되어서 알고 있었으나 실제 가서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벽화를 통해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벽에 많은 동물을 그리고 풍만한 여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던 것은 사냥을 통해서 많은 동물을 잡게 해주십사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고 동물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대가족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일손이 다양하게 필요하였기 때문에 어린애를 많이 낳게 해달라는 주술적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아한 가우디의 작품 카사밀라를 보고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업공간 구웰 공원에서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란 원리를 터득하고 이렇게 쭈글쭈글한 건축물이
자연과 친화적 천재적인 발상이라니 천재는 엉뚱하고
행동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을깨달았다.
구엘공원에서
들소를 바위에 그려 놓은 것과 풍만한 여인상을 표현한 것이 너무 사실적이고 주술적이어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감탄과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농경을 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수렵, 어로를 통하여 자연에서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산 등고선과 평행하게 하여 만든 교곽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구엘공원에서
코끼리 다리마냥 구부러진 모양 직선은
눈을 씻고 보아도없었다.
구엘공원에서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발상에 놀랑 표정들
천재는 언제나 엉뚱한 생각을 하고
의문을 갖는 자들이었다.
구엘공원에서
인간에게는 의식주 해결이 가장 큰 선결 문제였기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자나깨나 사냥감이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참좋은 여행사를 통해 많은 포획을 염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예수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였던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고보의 행적을 따라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아 여행을 못하고 있다가 참좋은 여행사를 통해 나의 평소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때나마 여유있는 표정을 지어보기도 하였으나, 행복이란 늘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중한 사람을 언제나 잊고 있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에서
또한 이베리아 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아프리카와도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같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라크나 이스라엘,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 거주하는 셈계나 아프리카 북단에 있는 함계 아랍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경 및 유목생활을 하거나 대상을 조직하여 무역 활동을 하였다.
6세기 후반 이란인이 세운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의 계속되는 전쟁 때문에 비단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상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로 가는 교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교역로가 개통되면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는 부유한 부족들이 저마다 자신의 신들에게 예배하였다.
구엘공원
구엘공원
구엘공원
마호메트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610년 경 유일신 알라를 받드는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다.
이슬람교를 창시하였던 마호메트는 초기에 박해를 받아 한때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망가기도 하였으나 다시 메카로 돌아와 알라신을 신봉하는 이슬람교를 전파하면서 정복전쟁을 추진하였다.
마호메트는 수시로 정복전쟁을 일으켜 전사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 중에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20명만 있어도 200명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구엘공원
구엘공원
100명이 있다면 1,000명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판단력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호메트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던 마호메트가 죽은 후 이슬람 교도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마호메트의 후계자 아부 바크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이슬람 교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호메트는 이미 죽었다.
구엘공원
구엘공원
그러나 알라는 살아계신다.
당신들이 믿은 것은 알라가 아니었던가?
이후 아랍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단기간에 광대한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유목민이었던 아랍인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사막에서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아랍인들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켰던 것은 무엇보다도 같은 믿음과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호메트의 사상이 급격히 팽창해가고 유대감을 강화시킨 것은 알라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고 정복민에게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미완의 대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 성당
완공은 100년 후에나
될지 모르겠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
이 밖에도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는 신분상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세금을 면제받는 등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 아랍인들은 정치와 경제권을 장악한 최고 지도자를 투표로 선출하였다.
이때 투표로 선출된 최고 지도자를 정통 칼리프라 하였다.
아랍인들은 정통 칼리프의 지도 아래 대규모 정복사업을 벌여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를 탈취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였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다.
아직도 건설이 진행중에 있었다.
그러나 정복지 확대와 아랍인 지도자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발생하여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정통 칼리프인 알리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옴미아드 왕조를 개창하였다.
옴미아드 왕조는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후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여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급성장하였으나 지금의 벨기에 지방인 투르∙포아티에서 프랑크 왕국에게 패배함으로서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밀려나야 하였다.
8세기 중엽 마호메트 일족인 아바스가 옴미아드 왕조를 타도하고 아바스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러자 옴미아드 왕조의 일족이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후 옴미아드 왕조를 건국함으로서 스페인의 남부는 한때 후옴미아드 왕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환상적인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
스페인은 기원전 3,000년 경부터 함족이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1,500년대 경에 켈트족이 프랑스로부터 이주해옴으로서 혼혈이 되어 켈트 이베리안이 형성되었다.
히스파니아를 지배한 카르타고의 영향을 받아 카르타고식 문명이 형성되기도 하였으나 곧이어 로마의 침략을 받아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제국이 무너질 무렵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여 서고트 왕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서고트족이 이주해오기 전부터 독실한 크리스트교도였던 스페인은 기독교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서기 600년대부터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무어인들이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였다.
이후 700년대 서고트족 귀족들이 이슬람에게 게릴라전을 펼쳐 험준한 북 이베리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그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나바라(아라곤), 레온, 카스티야 등이 독립하면서 기독교 왕국들이 남쪽의 이슬람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황영조마라톤 장면
이러한 운동을 레콘퀴스타(reconquista)라 하였는데 이것은 예전 서고트 왕국의 기독교 중심 세계를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 후 이베리아 반도는 수백년간 이슬람 왕국들과 기독교 왕국들간의 전쟁 중에 카스티야 귀족 일부가 자신의 권력을 믿고 카스티야에서 독립을 하였다.
이것이 포르투갈이었다.
레콘퀴스타 운동은 결국 성공해서 카스티야 이사벨라 여왕은 동쪽 아라곤 왕 페르디난도 2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에스파냐)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스페인의 역사를 알고 있었던 나는 이슬람과 끝까지 싸워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기독교를 수호한 스페인 사람들의 끈기와 자긍심을 알고 싶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그리고 그동안 스페인을 방문하지 못하였던 것이 늘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고 국내 성지 순례를 마친 이번 기회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방문해볼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인 것 같아서 스페인 여행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참좋은 여행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부부의 영향이 컸다.
국내 가톨릭 성지 순교지를 모두 순례하고 내 생애 일대 대사건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자 길을 걸어보는 것이 평소 나의 꿈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는 유럽 중세때부터 예루살렘과 로마에 비견되는 그리스도교 3대 순례지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스페인 관련 책자를 읽어보기도 하고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자 길 순례를 위한 루트를 여러 방면으로 탐색도 해보았으나 성지 순례자 길을 순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간 동안의 순례기간을 이겨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체력이었는데 그동안 꾸준히 등산을 하는 등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는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그러나 체력만큼 중요한 것 중의 또 하나가 동행인이었다.
동행인 문제는 집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였으나 집사람은 한사코 거절하였다.
그것은 장시간 동안 집을 비울 수 없다는 것이고, 어린 지우를 돌봐야 하는 처지였으며,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자 길 순례를 거절하는 이유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자 길 순례는 결국 꿈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집사람은 혼자서라도 여행을 가다보면 짝이 있지 않겠느냐 하고 말은 하고 있었으나 내심 걱정을 하고 있는 눈치여서 차일피일 여행을 미루고 있었다.
나는 꿈을 접어야하나 하고 실망을 하고 있었는데 2015년 4월 23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여행 패키지를 친구가 꺼내들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장시간 걷는 도보 순례가 아니라 패키지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보였다.
집사람은 친구의 얘기를 들은 후 승낙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여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출발 일자는 인천 국제공항에서 2015년 4월 23일 10:10분이었고 항공편은 인천 국제공항 발 핀란드항공 AY042였다.
이번 여행은 헬싱키를 경유하여 바르셀로나로 이동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헬싱키 발 핀란드항공 AY3269로 환승하여 다시 바르셀로로나로 이동하여야 하였다.
2015. 04. 23일 서울발 헬싱키행 핀에어는 09:30분부터 개찰이 시작하였다.
승객 모두가 스페인 여행을 위하여 그룹으로 이동하면서 나와 비슷한 옷복장을 하고있었기 때문에 친근감이 들었다.
핀 에어는 정확히 10:10에 이룩하여 황해도를 거쳐 북경과 울란바토르 사이의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항공기 바로 아래 지상은 중국 북경이었으며 자금성과 만리만성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듯하였다.
중국 상공을 지나 몽고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향하고 있었는데 고비사막의 고온 다습한 기류와 북쪽의 찬기류가 충돌하여 난기류가 형성되고 있느 것 때문인지 항공기가 아주 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기장은 기류 때문에 기체가 약간 흔들리고 있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자리이동을 자제하라고 수시로 방송을 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었으나 승객들은 자신의 용무 외에 방송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기장이 방송을 자주하는 것은 혹시라도 승객들이 넘어지기라도 하지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을 것이다.
항공기는 몽고 동부에서 서북부로 방향을 꺾어 러시아 영내 이르쿠츠크로 접근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북극도 멀지 않아 보였다.
난생 처음 광활한 러시아 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항공기는 현재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상을 내려보니 호수가 빤히 내려다 보이기도 하였다.
항공기는 호수를 지나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니 지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러시아 영토의 대부분은 눈으로 덮여있는 동토라더니 이런 모습을 일컬어 동토라고 하는 것 같았다.
러시아 지상의 이모저모는 육안으로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나 하얀 눈밭에서 순록이 뛰어다니는 러시아 삼림지대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공기 창문을 통하여 파란 북극해가 보이고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 삼국이 완연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9~11세기에 노르만족의 이동 경로와 활동을 학생들에게 지도하였는데 마침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바라보니 노르웨이와 북아메리카로 이동하였던 노르웨이족과 영국 북부와 덴마크로 이동하였던 데인족, 러시아 노브고로드와 키에프로 이동하였던 루스족이 생각났다.
그들은 게르만민족 이동 이후 또 한 차례 인류 생존에 위협을 주었던 민족이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한 식량의 부족 때문에 일찌기 바다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노르만족을 흔히 바이킹족이라고도 하였으며 장두, 장신, 백색피부, 금발, 파란 눈을 특징으로 하였다.
몬세라트 수도원
이들은 본래 항해술에 능하고 모험심이 강하여 영국을 공략하여 노르만왕조를 건설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왕국도 건설하였다.
초기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정복지에 정착하면서 원주민과 동화하여 중세 유럽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잘되어 있고 신기술과 IT, 자동차와 조선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어할 정도로 선진국으로 부상하여서 부러워하는 국가였다.
그 지역이 서서히 눈 앞에 다가오고 있어서 신기할 뿐이었다.
항공기가 한국 인천공항에서 출발한지 7시간이 되어가고 있어서 시간상으로 볼 때 거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 같기도 하였다.
지상은 갈색의 사막지대가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아름답게 보인 모스크바를 비롯한 북 유럽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이 공생하고 있는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하는데도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북극해의 차가운 기후와 대륙의 온난한 기후가 또 한 차례 충돌해서인지 항공기의 요동은 더욱 빈번해지고 있었다.
이제 러시아 영공에서 한 발만 내밀면 파란 북극해에 닿을 것 같았다.
북극해와 평행선을 그으며 항공기는 헬싱키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우랄산맥을 넘어야하는 하는 것 때문에 또 한 차례 난기류를 경험해야 할 것 같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거대한 우랄산맥이 항공기가 지나는 길목에 횡으로 놓여있었다.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항공기는 급속히 하강하면서 핀란드 헬싱키로 국제공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헬싱키 공항에 도착한 것은 헬싱키 시간 오후 13:40분이었으나 헬싱키 공항에서 다시 바르셀로나 행 AY3269편으로 환승하기까지는 거의 4시간을 기다려야 하였다.
3시간이 넘는 시간을 핀란드 국제공항 대합실에서 소일하다보니 무료하고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나마 공항 대합실에서 티하나 없는 청명하고 맑은 핀란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날씨가 청명하고 자연이 깨끗한 것이 1960년대 우라나라 농촌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인 것 같아서 환상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몬세라트 수도원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러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었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를 뒤로하고 항공기는 다시 헬싱키 국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향하여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발트해 주변은 신이 창조한 조각품 같았다.
중∙고등학교 때 지리 교과서에서 배워던 발트해 주변 피요르드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많은 섬들이 바다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고 하얀 구름 속에서 잠깐잠깐 보이는 섬들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함부르크를 지나고 알프스산맥을 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얀 눈으로 덮힌 험준한 산맥을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이 로마를 공격하기 위하여 넘었다니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없는 것 같다.
드디어 14시간의 강행군 끝에 밤 10시에 바르셀로나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
한국 인천공항에서 출발할 때는 A380 에어버스여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는데 헬싱키에서 바르셀로나로 출발할 때는 동체가 작은 AY3269 기여서 왠지 요동이 많은 것 같았고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기장의 노련한 비행으로 바르셀로나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하였을 때는 안정감있고 부드러워 박수 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호텔은 바르셀로나시 외곽의 조용한 2층 건물로 TARRACO-PARK였으나 화려함보다는 실속있는 평범한 호텔로 보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이 진행되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스페인의 과거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의 스페인 역사와 문화를 찾아 보리라 다짐하였다.
지금까지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지도하였으나 현장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스페인에 대한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검증해보리라 생각하였으나 꿈속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오늘은 2일째 아침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본래 아프리카에 가까운 탓으로 기온이 상승하여 여름을 방불케하였고 얼굴이 검게 그을려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볼 때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려는 그들의 생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맑은 새벽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새벽 6시에 일어나 호텔 주변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약간 바람이 불고 기온이 차가워 걱정이 되었다.
스페인을 방문하기 전에 친구로부터 스페인은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예측하기 어렵다라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 스페인에 있어보니 날씨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이 맑아 별이 또렷하게 보였던 어제의 밤 하늘은 사라지고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웅크린 채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맑은 공기라도 마셔보려 하였던 생각을 접어두고 다시 현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밖에 나와보니 이른 아침에 보았던 구름은 사라지고 점점 날씨가 개기 시작하였다.
아주 상쾌한 공기가 코를 자극하였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르셀로나 시로 이동하였다.
숙소에서 바르셀로나로 이동하는 길은 편도 3차선 일반국도였는데 도로는 소통이 원활하여서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바르셀로나 시 카탈루냐 광장이었다.
카탈루냐 광장은 어린이나 청소년 및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아 찾고있는 명소였다.
바르셀로나 시에서 가장 고전적이면서 옛 모습을 잘 갖추고 있는 광장이었으나 소매치기들이 들끓는다는 가이드의 세심한 주의에 여권을 자꾸 반지작 거릴 수밖에 없었고 마음껏 활보해보고 싶었던 행복한 순간이 몸을 사려야하는 것 때문에 위축되고 말았다.
카탈루냐 광장을 차창 안에서 눈으로만 확인하고 곧장 람불라스 광장으로 이동하여 직접 걸어보았다.
우리나라 서울 명동거리를 걷는 것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람불라스 거리는 우리와 동행한 참좋은 여행사 소속 여행자 뿐 아니라 스페인 사람, 타국인 등 수많은 인파들이 넘쳐나고 있었는데도 한국인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봇물이 터지듯 람불라스 거리로 쏟아지는 군중의 무리들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을 일으키면서 람불라스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전세계 각지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파가 람불라스 거리를 메워서 범람하고 있었다.
람불라스 거리의 붐비는 인파들 속에 소매치기들이 여행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다니 여권을 분실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서 여권을 거머쥐고 과일과 하몽 등 온갖 먹을거리로 가득한 산호세 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산호세 시장 관람 후 스페인 최고의 건축가 가우디의 걸작이자 바르셀로나 관광의 백미라할 수 있는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으로 이동하였다.
에스파냐 동북쪽 카탈루냐 지방은 예로부터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 카탈루냐의 중심은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였다.
카탈루냐 사람들의 독창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예술 분야였다.
미로나 달리 같은 화가를 비롯하여 음악가 카살스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곳도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사랑하고 바르셀로나 역사를 창조한 사람이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였으며 바르셀로나를 대표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안토니 가우디는 개성이 넘치는 창의력으로 새로운 건축 양식을 개척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최초의 작품인 가로등부터 공동 주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카사 밀라, 자연 친화적인 주택 단지 구엘 공원, 빛의 질서를 보여 준 구엘 저택, 그리고 아직도 공사가 지속되고 있는 성가족 교회에 이르기까지 가우디의 대표적 작품은 모두 바르셀로나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성가족 성당을 바라본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예술성은 차치해두고라도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안토니오 가우디는 미쳤거나 천재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구리 세공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1852년 바르셀로나 남서쪽에 위치한 레우스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태어났다.
가우디는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구리 세공에 종사하였다.
가우디의 건축물에는 구리와 철을 이용한 독특한 조각과 장식이 많았는데,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기를 레우스에서 보낸 가우디는 1869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로 오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하여 공부를 마친 뒤 1874년에 다시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 학교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가우디는 건축 학교를 다니며 1878년 비로소 건축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후부터 가우디는 독창적인 건축 세계를 거닐며 자신의 이상을 펼쳐 나가게 되었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바르셀로나를 사랑했듯 개성이 넘치는 도시 바르셀로나에 에 살고 있는 것을 긍지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시민들이 이런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재 안토니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에 있는 성가족 교회였다.
성가족 교회는 1883년 11월 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1926년까지 작업이 진행되었고 지금까지도 공사가 지속되고 있었다.
공사를 시작한 지 100년이 훨씬 넘었으나 앞으로도 100년은 더 걸려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성가족 교회 역시 전체적인 모습은 자연에서 얻은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으나 부분적으로는 성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었다.
12사도를 의미하는 독특한 종탑, 믿음과 희망과 자비를 상징하는 탄생의 문, 가우디가 죽은 뒤 완성된 수난의 문 등 곳곳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가족 교회는 가우디가 어떤 건축물보다도 더 정성을 쏟아 부은 작품이었다.
가우디는 16년 동안이나 공사 현장에 머물며 공사를 지시하고 때로는 직접 성당을 건축하거나 조각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가족 교회 납골당에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시신이 잠들어 있었는데 지하에서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건축에서 독창적인 창의력을 발휘한 건축가였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은 자연에는 곡선이 없다라는 진리를 바탕에 두고 있었는데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독실한 신앙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이며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다.
구웰공원으로 이동하면서 잠깐 직선을 없애려 한 카사 밀라를 바라보니 흥미롭고 독특한 장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 카사밀라는 개성이 강해서 당시 사람들은 저런 것이 어디 건물인가 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으나 스페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방인인 나에게는 건물이 독특하여 잠깐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카사 밀라를 구경하고 곧바로 구엘 공원으로 이동하였는데 구엘 공원의 도로와 콜로네이드 홀 위의 테라스를 보면 진정한 건축물은 자연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구엘 공원은 안토니오 가우디가 건축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던 모든 것이 드러나 있었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건축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자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카사 밀라와 구엘 저택 등에서도 안토니오 가우디의 사상을 엿볼 수 있었으나 가장 상징적으로 그의 사상을 잘 드러낸 곳이 구엘 공원이었다.
가우디는 건축을 하면서 원칙을 하나 정해 놓았다.
가능하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건축을 진행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로를 만들 때도 자연 파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등고선을 따라 만들었고, 커다란 웅덩이와 능선 사이도 흙으로 메우는 대신 육교를 놓는 방식으로 자연의 모양을 유지하려 하였다.
안토니오 가우디 건축의 핵심은 자연을 주제로 한 장식과 구조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구엘 공원에 세워진 건축물도 이런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원 입구에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를 연상시키는 경비실과 방문객 대기실에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었다.
모든 건축물과 시설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돌과 흙에 유약을 칠하여 만든 다양한 타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그의 내면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엘 공원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콜로네이드 홀과 야자나무처럼 생긴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8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콜로네이드 홀은 시장으로 활용하려고 만든 곳이었다.
시장은 물건을 거래하는 곳인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정보를 교환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가우디는 이런 점을 고려해서 일반 시장처럼 넓게 펼쳐진 공간이 아니라 아늑한 공간에서 서로 정감을 나눌 수 있는 시장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콜로네이드 홀은 구엘 공원에서 가장 큰 건물이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고 포근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콜로네이드 홀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얼핏 보면 모두 비슷해 보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깥쪽 기둥들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화려한 색상의 유리와 타일 조각을 이용한 원형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우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콜로네이드 홀 위쪽에는 마치 물결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의 넓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화려한 세라믹 타일로 만든 테라스의 난간과 의자는 모양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게 하였으며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독특한 형태와 문양의 건축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바탕에 자연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구엘 공원에서 자연을 잘 드러낸 곳은 야자나무 모양의 기둥이 늘어선 길이었다.
돌로 만든 기둥으로 이어지는 길은 수백 미터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구엘 공원은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져 보였다.
다시 몬주익 언덕으로 이동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몬주익 언덕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호화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또한 도로 왼쪽에는 1988년 올리픽 당시 모습 그대로 스타디움이 남아 있었는데 우렁찬 함성이 지금도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몬주익 언덕 오른쪽에서 밑을 내려다버니 바르셀로나 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몬주익 언덕의 도로에서 1988년 올림픽 경기 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마라톤이 진행되었다.
마라톤을 진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언덕인데다 약간 가파른 곳이어서 마라톤 선수들이 달리기에는 최고의 난코스이자 악마의 코스로 보였다.
우리나라 황영조선수가 이러한 난코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세계 선수들을 제치고 따돌리는 짜릿한 역전의 순간이 현재 내가 보는 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외롭게 호흡을 조절하며 이곳 몬주익 언덕을 달리고 있는 황영조의 숨소리가 들이고 있었다.
아무튼 황영조라는 영웅이 탄생하였던 곳이 몬주익 언덕이었다.
다시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이동하였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800m 암봉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근이 그리 쉬지 않았다.
몬주익 언덕으로부터는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어느 중세 도시를 연상하게 하였다.
몬새라트 수도원은 986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서쪽에 있는 험준한 산간에 건립되었다.
산간 준령에 포진하고 있었던 만큼 그 경치는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고 수려하였으며 능선에 가려져 있어서 밖으로 쉽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15세기에서 16세기 경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단행된 종교개혁은 이곳 몬세라트 수도원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수도원에서도 개혁이 단행되어 성가대의 교육은 충실해지고,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와의 전쟁, 내란 등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의 활동도 저조하였으나, 대전 후 현재의 지도자 세가라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본래의 영광을 되찾게 되었다.
880년, 한 무리의 목동 아이들이 하늘에서 몬세라트 산 아래로 빛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노래를 하니 아이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천사들의 방문은 한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산속의 동굴로 이어졌다.
마을 사제들도 이곳을 둘러보다가 우연이 동정녀 마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였다.
훗날 11세기 경에 올리바 수도원장이 이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운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고 현재 80여명의 베네딕토회 수사들이 바위투성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하여 환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순례자란, 영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몬세라트의 수도사들은 그들과 기도하며 식사를 함께하고 있었다.
방문객은 박물관 투어도 할 수 있었다.
박물관 건물은 "네 마리 고양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레스토랑 라 카사 마르티를 포함,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랜드마크를 설계한 조셉 푸치 카다파르크의 작품이었다.
이 박물관에는 이집트의 석관부터 21세기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1,3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전부 관람하지 못하고 돌어선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또 몬세라트 소년 합창단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그러고도 남을 듯 싶었다.
산세가 험한 준령에 수도원이 건립된 것은 이슬람교와의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어떠한 외부 세력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수도사들은 있는 듯 없는 듯 하였으며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외롭고도 쓸쓸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묵묵히 수도자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있는 것은 없는 것과 같고 실체는 곧 무이다라는 말과 같이 이곳 수도사들이 예수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보고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다.
인생 백년에 고락이 상반아란 말처럼 삶에서 즐거움이나 괴로움 그자체는 삶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도 잡념을 버리지 못한 채 고통을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수행한 수도사들의 달관적인 태도를 보면서 마음이 어느 정도 평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갑자기 나에게 도움울 준 참좋은 여행사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의 감흥이 담긴 몬세라트 수도원을 관람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산세의 빼어남과 자연의 풍광에 넋을 잃었는데 여기에 중세풍의 몬세라트 수도원을 관람할 수 있어서 내평생 최대의 영광이었다.
자연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수없이 있었는데 실제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속세를 버리고 은둔하면서 도덕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수도사들의 노력이 결실을 보고 있다고 동감하였을 때 무한한 감명을 받았다.
기독교의 어려운 시련기마다 종교가 무엇이고 인간이 나가야 할 방향은 어떤 것인가 하고 고심하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둔하며 자신을 산화시켰던 수도사들의 노력이 오늘따라 횃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Montserrat는 카탈루냐어로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몬세라트 수도원을 감싸고 있는 산은 톱니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대개는 바르셀로나에서 오는 당일치기 여행이겠지만, 좀더 오래 머물면서 이곳의 매력을 즐기고 싶었다.
마침 의자에 앉아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는데 배낭을 짊어진 등산객 두 명이 하산하고 있었다.
배낭을 바라보다가 일반 산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산행 장비는 등반용이었다.
만약 내가 이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면 몬새라트 수도원을 경유한 산행을 즐겨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하산을 위한 발걸음을 독촉하였다.
오후 5사가 넘어서야 우리 일행은 사라고사로 이동하였는데 사라고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태양은 이미 서산으로기울고 있었다.
사라고사는 바르셀로나 서쪽 250km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본래 이베리아족의 도시였으나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에스파냐 통일 이전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으나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을 당시에 사라고사에서 맹렬한 저항이 이루어져 스페인의 자존심을 고수하였던 곳이었다.
다음 여정지는 사르고사에 있는 필라르 성모성당이었는데 A.D.40년 경에 스페인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야고보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초기 기독교도가 예배당을 세운 그 자리에, 현재 모습의 성당이 17세기에 건립되었으며, 채색 타일로 장식된 둥근 지붕은 18세기에 추가되었다.
스페인 여행은 그 어느 여행 때보다도 값지고 보물과 같은 역사 유적지가 많았다.
그래서 매우 만족하고 있었는데 현지 한국인 가이드의 완곡한 성품이 옥에 티였다.
물론 현지 가이드였기 때문에 현지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스페인 역사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으로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나이가 지긋한 연배의 퇴직자들이었다.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인생 최고 배태랑들이었다.
그런데 스페인 현지 가이드어 언어가 듣는 입장에서 약간 거북하였다.
현지 가이드의 언어와 행동이 순화된다면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지적한 것은 참좋은 여행사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도약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반우용 가이드님은 시종 표정 변화없이 잠잠하게 웃고 넘어가려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반우용 가이드님이 현지 가이드에게 지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한 사소한 행동은 회사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그외 다른 것은 모두 좋았고 이후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한 번 참좋은 여행사와 동행하여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어제보다는 낳은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 사라고사 REY FERNANDO 호텔에서 숙박하고 다음날은 산 세바스티안을 거쳐 빌바오로 이동하게 된다.
다음날은 보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몰래 꿈나라를 해메게 되었다.
아직도 바르셀로나를 완전히 섭렵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였으나 나그네의 유랑길을 떠나야 하였기에 아무런 미련 없이 다음 단계 여정을 살펴보면서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세계적인 휴양지 산 세바스티안의 모습은 어떤 형태일까 자꾸만 산 세바스티안이 머리에 떠올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