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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사유의 페이지들
- 표순복의 『세 그루 빈손』을 중심으로
김영(전북문학관장, 전북문인협회장)
1. 시인 표순복의 문학적 영토에 대해
필자는 문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고창문협에 ‘표순복’이라는 시인이 있고, 문단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것 정도를 풍편에 듣고 있었다. 전북의 모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고, 그 단체 행사에 시 낭송으로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 정도를 이런저런 경로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2022년 고창에서 발간하는 동인지 『시맥』을 받아 읽게 되었다. 당시에 박종은 고창예총 회장님이 쓰신 표순복 시인에 관한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표 시인의 물리적인 나이며 문단 활동의 저력이 그냥저냥 시를 써온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기 때문이다.
표순복 시인은 1980년대 ‘모양문학회’의 홍일점 여성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문학활동을 해온 사실상 우리 고창의 여성시인 제1호라고 생각한다. 너그러운 성품과 적극적인 문학활동으로 고창문학이 발전하는데 항상 중심에서 노력해 왔으며 전라북도의 문단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박종은, 고창시맥회 동인지 《내 마음의 노래》 2022 제7호에서 따옴)
박종은 고창예총 회장님의 글을 읽고 나서야 알아챈 사실들이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한번쯤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있던 차에 표순복 시인의 시집 『세 그루 빈손』 에 짧은 감상의 글을 쓸 기회가 생겼다. 시인으로서의 표 시인을 들여다보고 싶었고 표 시인의 작품 전체를 읽어보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덥석 받아 안았다.
인간의 욕심은
자연과의 공존을 넘어서고 침범하여
그들과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대가代價는 변종이 판치는 혼돈의 시대.
한 편의 시詩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시인의 말 (표순복 시집 『나무 곁으로 가다』 )
표 시인의 시적 영토와 시의 값어치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시인의 말’이다. 표 시인이 시를 대하는 자세는 이번 작품집에서도 한결같다. 표 시인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기저로 하여 작품마다 선명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시인의 이런 시적 행위는 오래 우리와 함께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존재해 있던 자연을 호명하여 일일이 눈을 맞추는 교류라고 할 수 있다.
2. 감과 나무를 통과한 사유들
표순복 시인은 긴 직장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갔다. 봄이면 매화꽃이 가득 피어나고 가을이면 감나무의 감들이 장관으로 익어가는 작가만의 공간이다. “매감원”이라는 이쁜 이름을 가진 공간에서 표 시인의 작품은 본격적으로 피어나고 제대로 익어갈 준비를 마쳤다. “매감원”의 생활과 표 시인의 시의 텃밭을 작품 몇 편을 통해 짐작해보려 한다.
돈이 된다고 일확천금을 꿈꾸었던가
머릿속 생각이 바로 행동인 그가
십 수 년 전 대책 없이 심은
삼천여 평 감나무 밭에서 이십 여일 붙들려 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안다
부자재 값 비싸고 인건비 높아
돈 안 되는 농사라고
마음 헤아려 주는 친구 덕에 감을 고른다
나무는 고목으로 늙어가지만
가지치기를 잘 하나 보다고
해마다 새순에서 좋은 감 무량이 내어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구경삼아 들른 사람들이 일손을 거든다
울고 웃으며 가슴 속 응어리 풀려
오늘도 감을 따러 밭에 들고 있다
- 「대봉감 이야기」 전문
“머릿속 생각이 바로 행동인” 표 시인의 남편은 감나무를 삼천여 평 심었다. 그러나 어디 농사가 그리 만만하던가? “돈이 된다고 일확천금을 꿈꾸”던 감 농사가 별로 신통하지 않다. “나무는 고목으로 늙어가지만/가지치기를 잘”한 덕분인지 “해마다 새순에서 좋은 감”이 많이 열린다. 이런 감나무 밭에서 “이십여 일을 붙들려 있”으면서 “울고 웃”는다. 생산량이 많을수록, 일거리는 많아지고 수익은 적어질 수밖에 없는 농사의 원칙 때문이리라. 이런 매감원의 생활은 원래 자연 친화적인 표 시인의 시적 감성을 돋아주는 시의 원천이 되고 사유의 수원지가 된다.
생전을 자식위해 진 다 빼시고
앙상히 늙으시던 부모님
휑한 들판에서 하늘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가
빈 밭 지키며 찬바람 맞고 있다
- 「감나무」 일부
“빈 밭 지키며 찬바람 맞고 있”는 감나무를 보며 시적 자아는 “앙상히 늙으시던 부모님”을 떠올린다. 일반적인 부모님의 생이 다 그렇듯 시적 자아의 부모님도 “생전 자식위해 진을 다” 뺀 삶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모습을 “휑한 들판에서 하늘로 가지를 뻗은 감나무”와 일치시켰다. 이 작품 속의 부모님과 감나무는 둘 다 “앙상”하다. 부모님은 뼈만 남아 마른 몸으로 자식들을 우러렀을 것이고 감나무는 빈 가지만 남아 하늘을 받들었을 것이다.
표 시인의 시적 기조는 생활 속 체험을 통해 구축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사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곶감의 주름을 펴는 일/내 마음의 주름을 지우는 것 같아/손가락 아프게 정성의 매무새를 갖춘다.” ( 「곶감 주름 펴기」 ) 마르고 단단한 곶감을 보기 좋게 매만지는 일도 감 농사의 일부분이다. 감나무를 가꾸고 그 소출인 곶감을 다루면서 시적 화자는 마음도 보살핀다. “손가락 아프게” “곶감의 주름”을 반듯하게 펴는 일이 “마음의 주름을 지우는” 일로 확장된다. 시인의 삶은 이렇게 일상이 시적 기조가 되고 마음 수양의 원천이 된다. 자연을 통해 구축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표 시인의 작품 하나를 더 소개한다.
내장산 단풍나무 터널을 지나 절에 오르니
대웅전 불타 없어진 검은 자리에
서너 평 초라한 조립식 건물
큰 법당 대신 나그네를 맞는다
전생의 업보인가
나도 잿더미로 주저앉는데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독경소리만
서래봉 골짜기를 타고 오른다
나무의 슬픔을 다 가져다 놓은 듯
내장산은 녹음으로 흐느끼는데
인적 끊긴 고요가 후회스럽게
인간의 오욕을 짓누르고 있다
단풍나무 세 그루 빈손을 들고
인간 대신 불경죄를 용서받고자
불타버린 대웅전을 향해
조사를 올리고 있다.
- 「조사弔辭 올리는 단풍나무」 전문
몇 해 전 내장사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술에 취한 승려가 저지른 일이었다. 단풍 든 내장사의 가을 경치는 너무 유명해서 더 거론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부담스럽다. 시적 자아는 불이 난 후의 내장사를 방문한다. “대웅전 불타 없어진 검은 자리에/서너 평 초라한 조립식 건물”만 우두커니 서 있는 법당 앞에서 시적 자아도 “잿더미로 주저앉는”다.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불경죄를 용서받고자/불타버린 대웅전을 향해/조사를 올리”는 단풍나무 세 그루를 만난다.
여기서 시를 읽는 독자는 “내장산은 녹음으로 흐느끼는데”라는 구절과 “단풍나무 세 그루 빈손을 들고”라는 구절의 계절감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화재 이후의 내장산은 아랑곳없이 계절을 따라 녹음이 짙다. 그러나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에도 대웅전 앞의 단풍나무 세 그루는 아직 잎을 내지 않고 있다. 불 먹은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적 자아는 불타 없어진 대웅전의 모습을 “잿더미”가 되어 보고 있다. 대웅전 앞의 단풍나무 세 그루도 완전히 소실된 대웅전 앞에서 새잎을 낼 힘을 잃었으리라. 아직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시적 화자와 단풍나무는 물아일체가 되어 슬프고 참담하고 후회스러웠으리라. 용서하실 때까지 빈손으로 조사弔辭를 올리리라. “인간의 불경죄”를 용서받기 전에는 저 단풍나무에는 새순이 돋지 않으리라. 왜냐면 시적 화자가 보는 나무의 새순은 그냥 계절이 바뀌면 의례적으로 돋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가 새순을 내는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감격할 의미를 지녔는가에 대해 표 시인의 「첫 잎 만나던 날」을 읽어보면 “한 해의 첫 잎을 만나는 일이/나를 개벽하는 일처럼 신선하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나무와 시적 자아가 일체의 경지까지 다가간 언술이다.
이는 이충이 평론가가 “표순복은 자연과 그 풍경 속의 풍경과 사물을 모두 의미 있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일련의 시에서 사유적 체험이 솔직한 자기표현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과 세련된 정서로 전개되고 있다.” (2012년에 발간한 표순복의 제1시집 『특별하지 않은 날의 주절거림』에서) 라고 서술한 구절과 맥락이 닿아있다.
3. 사람과 환경을 아우르는 사유들
표순복 시인의 삶은 자연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들도 자연과 유리된 작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표순복 시인의 작품에서 자연과 교감한 흔적들을 찾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만지는 격’이다. 그만큼 표 시인의 작품은 자연과 단단히 손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정군수 평론가가 “표순복 시인의 많은 시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내적 감동을 표현한 정서로 나타나 있다. 그분의 자연은 시를 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찾아 나선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자아 성찰의 길이었다.” (2020년에 발간한 표순복의 제2시집 『나무 곁으로 가다』에서)라고 서술한 맥락과도 일치한다. 정군수 평론가의 언술대로 표 시인의 시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표 시인에게 다가온 순간들을 성실하게 받아쓴 결과로 여겨진다. 물과 관련된 작품 두 편을 소개한다.
농막 앞마당 분가루 같은 눈가루 푹푹 퍼
냄비에 녹여 꽁꽁 언 수돗물 마중물을 만든다
분가루가 몇 방울 물이 되기까지
지지직거리며 야단법석 하더니
간신히 냄비 밑바닥 물을 만들어낸다
몇 번씩 끓여 만든 눈물로 수도관을 달래면
남극 물보다 귀한 물이 드디어 몸을 푼다
십년 치 눈이 한꺼번에 내린 듯
과수원이 눈의 나라로 옷을 바꾸어 입자
하룻밤 새 영하의 추위가 수도관을 얼리고
한 방울 물도 준비되지 않은 계절 한가운데
농막 가득 쌓인 눈가루 눈을 보며 궁리하던 중
사십 년 전 육백 고지 방장산 정수리에서
코펠에 눈을 담아 라면 끓여 먹던 생각이 나서
눈이 좋아 눈에 묻혀 산 보름 동안
개수대는 저녁이면 똑 똑 똑 링거액을 맞고
링거 조절 실패로 관 속의 물이 여러 번 죽고
그릇 그릇 챙겨 둔 물로 새 물씨를 만든다
물씨를 지키는 철없는 여인은
그래도 눈이 좋아 눈 바라기하며
너른 창문 활짝 열고 펑펑 쏟아질
함박눈을 기다리고 있다
- 「물씨 살리기」 전문
물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모든 “숨 탄 것”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물 없이는 단 하루도 지내기 어렵다. 생존에 절대적이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은 물이 기본조건 중의 기본이다. 새로 이사 갈 집을 둘러볼 때 수도꼭지를 틀어 수압을 점검하는 것은 기초상식이다. 물은 생존에 절대적이어서 흥정하거나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물의 소중함을 자주 잊고 산다.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농막에서 물씨를 간직하는 일에 실패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놓아야 수도가 얼지 않는데 “링거 조절 실패로 관 속의 물이 여러 번 죽”은 것이다. “사십 년 전 육백 고지 방장산 정수리에서/코펠에 눈을 담아 라면 끓여 먹던 생각이” 난 시적 화자는 “농막 앞마당 분가루 같은 눈가루 푹푹 퍼/냄비에 녹여 꽁꽁 언 수돗물 마중물을 만든다” 물씨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물씨로 수도관을 녹이면 수도관 속에 얼어있던 “물이 드디어 몸을 푼다” 이렇게 물씨를 지키는 일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어서 시적 화자의 이런 행위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다.
긴 가뭄 주말농장 고추밭은 누런빛이다
감 밭의 풋 열매도 주름을 새기고 있다
물기 마른지 오래
핏기를 잃어버린 생명들
(중략)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룻밤 새 이리 달라질 수 있다던가
푸른빛으로 일어서는 고추밭
수런수런 생명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주름 편 풋감들이 탱글탱글하다
- 「꼭, 거짓말 같아」 일부
위 작품의 시적 화자도 가뭄으로 밭아가는, 고추와 감을 “핏기를 잃어버린 생명들”이라고 언술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핏줄로 살아가고 있다는 시적 화자의 생각이 무의식중에 발화한 것이라고 본다. 식물의 잎을 잘 살펴보면 식물의 잎맥과 사람의 혈맥은 매우 유사하다. 갯벌에 난 물의 길도 마찬가지로 혈맥이나 잎맥과 닮아있고 더 나아가 한 그루 나무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사람 몸속의 신장을 구성하는 혈관이 한 그루 나무 같아서 외경심을 가지고 오래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굳이 애써 강변하지 않아도 자연도 선연한 “핏기”를 지닌 생명이라는 것이다. 다 죽어가던 생명들이 “꼭, 거짓말 같”이 일어서는 일, 물기 없어 자글자글 밭아가던 것들이 “탱글탱글” 부풀어 오르는 일이 다 물의 ‘가피’라고 할 수 있다.
표 시인은 주변 생명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이 있다. 관심이 있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간다는 것이고 알아간다는 것은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딸아이는 물을 챙겨주고 살피지만
나는 감정 없이 흘려보낸 눈 오는 계절
아기 고양이 내 차 아래 몸을 누이고
매일 길나서며 녀석과 눈빛 더한 어느 날
아기 고양이의 흰빛에 홀려
찬 가슴에 온기가 내려 관심 갖기 시작한다.
- 「관심 갖기」 일부
위의 작품 속 시적 화자는 새끼고양이에게 관심이 없다.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다. 새끼고양이는 시적 화자의 “차 아래” 잠을 자거나 논다. 그러다 보니 매일 차를 쓸 때마다 새끼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는 것은 “찬 가슴에 온기가 내려 관심 갖기 시작한다”라는 것이다. “아기 고양이의 흰빛에 홀려”라는 언술은 굳이 새끼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를 찾아낸 정도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새끼고양이’를 ‘아기 고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새끼’와 ‘아기’라는 말은 똑같이 ‘어리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엄연히 구분해서 써야 하는 낱말이다. 또, 이 두 단어가 갖는 어감의 차이와 정서적 거리도 실로 엄청나다. ‘새끼’를 ‘아기’라고 호칭하는 순간 고양이를 대하는 시적 자아의 자세는 같은 혈육으로 여기겠다는 선언과 같다.
자연은 표 시인의 작품의 수원지다. 이는 자연을 문학적으로 경험한다는 말이다. 문학적 경험이라는 말은 문학을 통해 존재의 저쪽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확산한다는 말과 상통하고 확산한다는 말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말과 이음동의어다. 또한 본질이라는 말은 본향이기도 하고 본향은 고향과 정서적 맥이 닿아있는 단어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시인의 사고가 확산된다는 것은 개인에서 사회로 시적 정서가 뻗어간다는 말이다. 혹은 주관에서 객관으로 확대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는 시적 자아에서 타자로의 확대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확대가 가능하다는 것은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 밥 한번 먹자 말을 듣고
기다려 본 적 있나요
그 밥 먹기 위하여 한 달 넘기고 일 년을
그 사람 얼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대가 없이 발급 받은 면죄부 같은 약속
뭐 그리 대수인가 넘길 수 있지만
연리지 같이 마주 앉아 밥 먹는 일
전생의 연이 닿아야 되는 일 아닌가요
- 「밥 사는 일」 일부
시적 자아는 보통의 사람들이 빈말로 건네는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곰곰 되새긴다. “연리지 같이 마주 앉아 밥 먹는 일/전생의 연이 닿아야 되는 일이 아닌가요”라고 반문하고 있다. 표 시인의 작품들은 보통 화려한 수사나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시가 시인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에 기댄다면 이런 작품은 표 시인의 심성을 반영한 작품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위의 작품 속 시적 화자도 마찬가지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그냥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리지 같이 마주 앉아”야 가능한 일이 밥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생의 연이 닿아야 되는 일”이 밥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표 시인은 자연과 소통하는 법도 이미 체득했지만, 자연의 중요한 일부분인 사람과의 소통도 허술히 하지 않는다. 이는 시인의 성품이 진솔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적 화자를 통해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4. 나눔과 깨달음에 대한 사유들
표순복 시인은 자연과의 오랜 소통의 경륜으로 ‘꽃이 어떤 말을 하는지’, ‘나무가 어느 방향으로 가지를 내는지’ 잘 알아챈다. 다음에 소개하는 표 시인의 작품을 보면 교감의 기본이 적절한 간섭이라는 표 시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빈 몸으로 가벼운 혹한의 겨울
절기 흘러가 봄이 자라면
특별한 방식 없이 여기 저기 뻗는 가지들
나무의 새해 설계는 가지치기로 시작한다
- 「가지치기」 일부
봄이 되면 겨울을 견딘 나무들이 새로운 가지를 내기 시작한다. 가지는 햇볕이 잘 드는 쪽이거나 공간이 좋은 쪽으로 자라기 마련이어서 나무들은 서로 양보 없이 햇볕과 공간을 다투며 가지를 뻗는다. 이때 시적 자아는 “가지치기”를 시작한다. 적절한 간섭이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세계가 비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일이 얼마나 가능한 지 등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시적 화자의 ‘가지치기’에 깃든 자연에 대한 간섭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수행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볼 수 있다.
표 시인의 시는 비교적 리듬과 메시지가 일관된 편이다. 야단스러운 과장도 없고 이리저리 비튼 수사도 없다. 그저 담박하고 진솔한 문학적 메시지가 작품의 주조음이다. 묵묵히 자연과 교감하면서 얻어진 성찰을 존재에 대한 사유로 확산시킨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표 시인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한 편의 풍경화를 감상하듯 시를 읽다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노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 시적 화자는 이리저리 제 방식을 고집하는 가지를 쳐낸다. 그러고는 “널브러진 굵고 가는 가지들/따뜻한 지면 위로 일어서는 잡풀/널려 있는 잔가지를 끌어안는다”( 「가지 줍기」 )처럼 다시 그 가지들을 수렴하는 것이다. “널려 있는 잔가지를 끌어안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자연에 대한 적절한 간섭과 소통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질서의 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를 먹어 박피 수술 중인 우리 집 감나무
껍질 속에 해충 숨어들어 알을 낳고
가려운 몸으로 십 수 년을 살아온 나무
낫 같고 호미 같은 칼날 연장을 들어
갑옷 된 두꺼운 껍질 빙 둘러 벗겨내어
미학의 시술로 박피 단장을 하고
큰 가지에 새 살이 올라 노화를 늦춘다.
각질을 벗은 감나무 뽀얀 속살에
엷은 고동빛 차림으로 봄맞이를 하고
허물 벗는 동물처럼 껍데기 벗어
가뿐해진 몸 비바람 불러
달콤한 열매를 매달 연구 중에 있다.
- 「박피 단장」 전문
표 시인은 지역 문단의 오래된 노거수처럼 보배롭고 귀하다. 이제 직장 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표 시인은 “껍질 속에 해충 숨어들어 알을 낳고/가려운 몸으로 십 수 년을 살아온 나무/낫 같고 호미 같은 칼날 연장을 들어/갑옷 된 두꺼운 껍질 빙 둘러 벗겨내어/미학의 시술로 박피 단장을 하고” 더께가 덕지덕지 낀 도시 생활과 이별하고 “달콤한 열매를 매달”것이다. “하루하루 허술한 삶을 씻고 닦아서/내 오두막에 갈무리한다/가끔 먼 길을 헤매다가도/쓰다만 시들이 기다리는 내 집으로 온다”( 「시를 찾아서」 )처럼 웹상에 지어놓은 오두막에서는 아직 발아하지 않은 표 시인의 사유들이 발화를 기다릴 것이다.
감과 나무, 사람과 환경 그리고 나눔과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표순복 시인의 사유 체계는 유난히 윤리적이다. 표 시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표 시인만의 감성으로 구축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사유의 페이지들이 반짝인다. 표순복 시인이 자연과의 교감으로 정갈하게 차려낸 성찬에 초대받은 우리는 이 작품집을 읽는 내내 표 시인의 시적 영토를 부러워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