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는 음악사
중세 / 중세 초기 기독교 음악 :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됨
유태교의 낭창은 독창 형식이었고 솔로만 부르다 보니 단조롭게 느껴진 예배음악 형식이 느린 템포의 제창으로 바뀌게 됨 단선율 성가라고 불리는 이 형식은 영어로는 플레인 송 이라고 하며 흔히 들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불린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단순한 느낌을 주고 남성들만의 제창이었고 선율도 복잡하지 않았다
[낭창에서 제창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단선율 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 탄생 - 중세초기]
그레고리안 성가가 알려진 중세초기에서는 기악반주가 없었다. 악기 중 에서도 오르간이 혐오의 대상이었다. 오직 사람의 소리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였다.
중세 초기 - 십자군 전쟁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국적인 음악과 악기에 매료 되었다.
칠현 악기 [ 지금의 바이올린의 조상]
중세 중기 : 제창으로 넘어 가면서 3성 4성의 오르가눔을 도입했다 [노트르담 악파]
오르가눔이란 9세기 경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초기 다성부 음악을 말한다.
한 가지 선율만을 제창으로 부르다가 몇 가지 서로 다른 선율을 겹쳐 부르면 훨씬 듣기 좋다는 것을 깨달음
다성 음악은 북쪽지방 세속음악에서 비롯되었다. [북쪽지방 여기서 말하는 북쪽지방은 겨울이 길고 춥고 허허벌판인 지역]
단선율이 아닌 3개 4개의 성부가 예술과 개인의 창작품으로써 세상에 발표되었다는 것은 음악사 상 획기적이며 뜻 깊은 일이었다. 노트르담 악파가 발전시킨 오르가눔은 그 후 더 개량 되면서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화음으로 이어졌다.
[오르가눔은 캐논과 비교하여 무척 복잡했기 때문에 악보의 발달을 촉진 시킬 수밖에 없었다]
노트르담 악파시절에 이르러 악보의 횡선은 오선으로 통일 되었다 . 그러나 조성기호를 비롯한 음역의 확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중세 후기
카르미나부라나는 중세시대 후기 음유시인들이 나긴 귀중한 재산이다. [당시 서민들의 애창 가곡으로 널리 알려짐]
음유시인 트루바두르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나름대로의 긍지를 같고 서민들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에 걸쳐 프랑스 북부에서 활약한 음유시인들을 트루베르라고 불렀다 이들은 트루바두르의 흉내를 내기는 했으나 훨씬 대중적은 무곡풍의 노래들을 만들어 오락에 굶주린 농민들과 서민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민스트럴 [봉건 영주에 예속된 전문음악인] ; 하층 계급 출신의 전문음악인들로 주로 귀족들에 예속되어서 귀족과 민중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신비극의 등장 : 교회음악의 예찬논자들은 점점 입지가 약해지자 할 수 없이 민중음악의 결합을 꾀하였다. [중세초기 딱딱한 교회음악과 대중음악의 결합이 신비극이다.]
페스트가 가져온 새로운 음악 아르스 노바 : 대재앙 페스트가 유행할 당시 사회불안을 반영한 새로운 예술이 아르스 노바였고 리듬이나 멜로디가 까다로워 여간 능숙한 사람이 아니면 연주 할 수도 이해 할 수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낯설어 하고 당혹감을 느끼듯이 지금의 현대음악 느낌처럼 다가왔다.
아르스 노바 시대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프랑스 작곡가 겸 시인인 기욤드 마쇼
[중세의 마지막 대 음유시인 마쇼] 그는 서양음악의 모험적인 리듬과 하모니를 도입한 서유럽 최초의 작곡가였다. 그는 중세음악의 대미를 훌륭하게 장식하고 르네상스로 길을 열어준 사람이다
르네상스
초기 르네상스
중세의 종교체제가 14세기가 가까워지자 밑바탕부터 흔들리지 시작. 흔들리는 중세의 체제의 틈새를 뚫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임대 혁신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르네상스’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르네상스의 물결은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스나 로마 전성기의 그 늠름하고 질서 있는 인간중심이었던 찬란한 문화를 본받아 개인의 해방과 새로운 자연의 발견을 토대로 문예 부흥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었다.
악보 인쇄술 발달 - 음악의 대중화 시대의 막이 오름
음악가들의 지위가 일개 장인에서 명예로운 예술가로 격상되었다. 악기 제조 기술도 연주 기술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르네상스시대에서 음악은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로 자리 잡아갔다. 세속 음악 뿐만 아니라 종교 음악도 좀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도록 작곡 스타일이 변화했다.
죠스깽 데프레 - 음악의 군주
무곡의 범람 - 현재에도 최상급 예술성을 지닌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는 바하의 모음곡은 대부분 르네상스 시대의 무곡에 기원을 두고 있다.
루터의 종교 개혁
마틴 루터의 음악 개혁 - 루터는 새로운 찬송가를 만듦. 루터의 찬송가는 노랫말이 신선했을 뿐 더러 화성이 비교적 간단해 일반 대중도 쉽게 배워 부를 수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 - 초기 기독교 시대에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자취를 감추었던 오르간. 이 건반악기가 다시 등장한 것은 8세기 무렵이었다. 콘솔형으로 발전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
후기 르네상스 음악
종교 음악의 대가 조반니 팔레스트리나
역대 교황을 모시면서 반 종교개혁파의 대표적인 작곡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서 개혁적으로 종교 음악을 반전시킨 그의 명성을 바로크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훗날 르네상스 음악이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때도 팔레스트리나만은 바하 이전에 활약한 최대의 작곡가로 숭앙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은 종파를 초원해 수많은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다.
마드리갈과 칸초네
마드리갈 - 14세기부터 17세기 전반까지 널리 보급된 이탈리아의 세속성악. 가축의 무리 만드라에서 나온 말. 민중 음악에 기초를 둔 사랑노래이었지만 14세기 경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2성, 혹은 3성으로 처리되어 서민들이 부르기에는 다소 복잡한 형식이 되었다. 종교마드리갈이 등장해 교회에까지 전해졌다.
칸초네 - 성악적 칸초네, 기악적 칸초네 2가지가 있다.
성악적 칸초네는 16세기 이전에 프랑스에서 성행한 독창과 기악반주를 위해 쓰여진 세속가요이었다. 샹송과 같은 뜻이지만 사랑의 노래 이외에 종교적인 노래도 있다.
기악적 칸초네는 성악적 칸초네를 오르간용으로 편곡하여 기악적 칸초네로 변화하였다. 다른 기악곡으로도 발전하면서 뒷날 생기는 소나타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바로크 음악의 태동
서유럽에서 기악 연주로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등장했다. 인가느이 목소리가 바야흐로 기악곡에 우위를 빼앗기기 시작한 것ㄱ이다.
이탈리아에는 2 주류가 존재했다. 하나는 성악만으로 이뤄진 복음악적 교회음악을 완성시킨 로마 악파였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마치 경쟁 하라도 하듯 기악만으로 극적이면서 색채감이 풍부한 근대적 음악을 확립시킨 베네치아 악파였다.
바로크
바로크시대- 1600년부터 1750년 사이의 약 150년간을 말한다. 1600은 바로크 음악의 진정한 선구자 몬테베르디가 33세로 한창 창작열을 불태운 해였고 1750년은 바하가 세상을 뜻 해였다. 바로크 음악은 르네상스 양식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고 다이내믹하여 장식이 많았다.
푸가 - 바로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 형식. 이론적으로 까다롭게 작곡하기 어려운 형식. 복잡함은 복잡함으로 드러나지 않고 절제되고 통일된 아름다움으로 표출 되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듣는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
통주저음 - 비올라 다 감바 같은 낮은 음 현악기나 쳄발로 등으로 저음 성부를 받쳐주는 것 통주란 독주 파트가 쉴 때도 저음은 연주를 계속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통주저음은 르네상스나 이어서 오는 고전파 시대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바로크만의 독자적인 음악 형식이었다.
모노디 - 단순한 선율에 간소한 화음 반주를 붙이는 양식. 단음악의 출현은 바로크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오페라의 시작
바로크의 장대함과 넘칠 듯한 활기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은 표현 수단은 단연 오페라였다. 바로크 음악의 진정한 선구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다.
몬테베르디
몬테베르디는 마드리갈, 음유시인들의 노래. 대중적인 판토마임과 신비극, 급속하게 발달한 화성법, 대위법 등의 테크닉을 뒤섞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오페라는 가장 인기 있는 대중오래 이었고 오페라의 개척자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아버지 혹은 바로크의 선구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스카를라티
나폴리 악파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듦. 다양한 양식을 종합해 오페라 형식을 확립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그는 서곡에도 많은 수정을 가해 알레그로- 아다지오-알레그로, 빠-느-빠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작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른바 이탈리아풍 서곡, 신포니아라고 불리는 그의 3개 악장 편성방식은 다음 시대까지 이어졌다.
바이올린 - 오페라의 발달과 더불어 관현악단의 규모가 커지는 한편 악기의 발달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악기 중에서도 특히 바이올린족 악기의 눈부신 발달은 독주용이나 기악 앙상블용 걸작을 만들어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바이올린은 비올족 악기에 비해 소리가 밝고 잘 울려 보다 빠른 템포, 더 큰 울림, 기민한 테크닉, 보다 화려한 장식음, 보다 명확한 리듬을 요구하는 바로크 시대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바이올린이 음색을 선도하자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들도 더불어 개량되면서 음역이 넓어지고 울림도 커졌다.
로코코
음악사에서 말하는 로코코 음악은 장식적이며 우아 세련되었으며 하지만 나약한 스타일이 있는 음악양식을 말한다. 숭고하고 정열적 이고 힘찬 바로크 양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다. 로코코 음악 양식이 바로크의 막내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로코코 음악은 바로크 음악을 프랑스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든 형식이다. 로코코음악은 표현력이 강한 바로크 양식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로코코는 바로크와 고전주의 사이에서 다리역활을 하는 과도기적 음악이다.
1 이탈리아의 로코코음악가들: 쳄발로의 명수 스카를라티는 헨델과 바하와 동갑내기 오르간 주자로 두각을 나타냄. 그리고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2. 독일의 음악을 주도한 마하임 악파 텔레만의 기악합주곡은 순수 로코코음악으로 뽑힌다. 바하의 종교적인 깊이와 헨델의 장려함은 없지만 다양한 악기 편성으로 관현악 모음과 실내악을 중심으로 작품성이 재조명 되고 있다.
만하임 악파 : 독일의 만하임 악파는 베토벤 모차르트 초기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고 유럽의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18세기 중엽 독일 서 남부의 요충지 만하임의 뿌리를 둔 일단의 기악작곡가들을 의미한다. 만하임 악파는 교향곡 양식의 기초를 닦았다.
만하임 악파의 음악 특징
1. 대위법적이 아닌 화성적 구성 선호
2. 바이올린 선율을 우세하게 둠
3. 목관악기를 중요시함
4. 소나타 형식의 2 주제를 뚜렷하게 함.
5. 포르테와 크레센도 음력 처리를 사용함
6. 통주저음을 없애고 반주를 일일이 쓴 것으로 바꿈
7. 분산화음형태로 넓은 음역 사용
[독일에 있어서 순수한 로코코 음악은 텔레만의 기악 합주곡]
고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빈 중심으로 발달한 화성적 단성음악 시기를 말한다
1. 형식미 존중 작풍 스타일은 단순 명쾌 간결 하다
2. 객관적이며 균제적이다
3. 소나타 형식 완성 되었고 실내악 협주곡 및 기악곡조가 많이 발달
빈 고전악파
옛 그리스나 로마의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고전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을 신고전주의라고 불렀다.
고전주의 음악의 3 명의 대표 작곡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들이 주로 활동한 무대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다.
빈 고전악파의 기질은 자유롭게 다감하며 관대한 빈 특유의 정서를 말한다.
서양 음악사에서 고전주의의 시발은 대체로 1750년으로 잡는다. 편의상 바로크 음악의 최후의 대작곡가 바하가 죽은 해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다.
1750년경부터 1850년경까지 약 1세기 동안에는 갖가지 예술양식, 즉 로코코양식과 고전양식, 낭만주의까지 혼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혼재된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그를 로코코 양식의 작곡가라고 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음악이 고전주의 양식을 비교적 엄격하게 지켰고 가장 세련된 소리로 고뇌에 찬 심정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고전주의를 최고 경지까지 끌어올렸고 그가 사망한 해인 1827년을 편의상 고전파 음악의 끝으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바로크 시대와 고전시대의 차이
바로크 시대에는 분산화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된다. 그것이 전면으로 나서서 특별히 교태를 부리지는 않지만 차분하게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또한 가락에 다른 성부들이 복잡하게 엉키면서 진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듣기에는 멋스럽지만 따라가며 함께 흥얼거리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고전시대는 저음으로 쉬지 않고 깔리는 화음은 없어졌다. 가락도 엉키지 않고 뚜렷해 맞추어 흥얼거리기가 비교적 쉽다. 또 그 뚜렷한 가락에 풍요로운 화음이 수반되고 소나타의 형식이 엄격한 소나타형식을 취하고 있어 대체로 논리적이고 정돈된 느낌을 준다. 소나타 형식은 빈 고전악파 음악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양식이다. 또한 몇 개의 성부나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는 이른바 대위법 기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전주의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폴리포니[다성음악] 로부터 호모포니[화성음악]로 전환된 것과 통주저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쳄발로에서 피아노로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건반악기의 주류가 오르간이나 쳄발로에서 피아노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쳄발로부터 현대의 피아노로 옮겨가는 중간 단계에는 피아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포르테피아노’가 많이 쓰였다. 현대식 피아노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19세기 말 경 리스트가 등장한 이후였다.
소나타 형식
소나타 형식의 역사
소나타는 애초에는 특정한 음악형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기악곡 일반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소나타 형식이 오늘날의 개념으로 굳어지게 된 데는 바하의 둘째 아들 에메누엘 바하와 요제프 하이든의 공로가 크다. 특히 하이든의 공이 커 그를 소나타 형식의 확립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소나타 형식에는 반드시 두 개의 주제가 있다
소나타 형식은 이원론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소나타 형식에는 반드시 주제가 두 개 있다. 제1주제는 율동적이고 씩씩해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럽게 노래하듯 이어지는 제2주제는 다분히 여성적이다. 소나타 형식은 크게 제시부-전개부-전개부-재현부-코다[종결부]의 4부로 이루어진다. 악곡 맨 처음에 두 가지 주제의 맛을 보여주는 부분을 제시부 라고 한다. 제시부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제2주제는 조성이 달라진다. 장조의 악곡에서는 제2주제가 제 1주제보다 완전 5도 올라간 딸림조로 바뀐다. 단조의 곡에서는 평행조로 나타난다. 제시부 뒤에 이어 전개부가 나온다. 전개부에서는 제시부에서 선보인 두 가지 주제의 모티프란 음악구조에서 최소의 독립단위를 의미하는 용어로, 우리말로는 동기라고 번역된다. 전개부는 작곡 기법을 가장 멋지게 과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나타 형식의 음악들
일반적으로 피아노 소나타라고 하면 피아노가 독주악기로서 독립적으로 연주되어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으로 된 곡을 말한다. 혼자 풍부한 화음을 내기 어려운 선율악기, 이를테면 플룻, 바이올린, 첼로 등은 피아노 같은 악기의 반주로 연주되는데, 각각 플룻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등으로 불린다. 또 선율악기이기는 하지만 반주 없이 혼자 연주하는 곡을 무반주 소나타라고 한다. 무반주 소나타는 보통 중음으로 많이 쓰는 난이도가 높은 곡이 많다.
고전파의 주역들
글루크
제자도 변변히 없었고 외톨이었던 글루크는 빈 고전파의 대열에 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오페라의 최초의 대개혁을 시도한 음악가로서 글루크는 오페라를 노래, 가사, 연기, 무용, 무대장치가 거의 같은 수준으로 결합하는 종합예술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글루크는 바그너의 정신적 선조라고 할 수 있었으며 직간접적으로 후배 음악가들에게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이든
젊어서는 고전파의 탄생에 기여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 양식의 생성, 발전을 인도했으며 만년에는 스스로 쌓아올린 고전파의 종말을 지켜보면서 고전주의 장로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정직, 근면하고 관대했으며 유머를 즐겼고 평생 크게 앓은 적도 없었던 건실한 삶을 반영하듯 그의 작품은 대체로 밝고 건강한 것이 특징이다. 100곡이 넒은 교향곡과 80곡 이상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함으로써 두 장르의 발전에 지대한 고을 세운 그를 ‘교향곡의 아버지’ 혹은 ‘현악 4중주의 아버지’등의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현악 4중주곡의 3악장[혹은2악장]에 무도곡인 미뉴에트를 포함시켜 4개 악장의 표준적인 양식으로 굳힌 것도 그였다.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작품에 불필요한 부제 붙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에는 규율과 질서, 즉 형식이 가장 중요하므로 다른 예술 분야의 힘을 빌ㄹ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이른바 ‘절대 음악’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음악은 자필 악보만큼이나 청산유수 막힘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나 단순히 화미의 극치라고만 표현될 예술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하모니 속이 인간의 기쁨과 슬픔, 고뇌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베토벤
고전주의 음악가들 가운데서도 베토벤이 계몽주의에 가장 경도 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계몽주의적인 요소들을 뚜렷이 읽을 수 있다. 특히 말기 작품에서는 그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평생 굳건히 지켜왔던 고전주의의 기본양식인 소나타 형식마저 과감히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뒤따르는 낭만주의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베토벤을 낭만주의의 첫 주자로 보기도 하는 것은 그때 문이다. 편의상 베토벤이 사망한 1827년을 고전주의가 막을 내린 시기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약 75년 동안 꽃을 피운 고전주의는 베토벤의 죽음과 더불어 막을 내린 것이다.
고전주의의 종말
고전주의 마지막 거장 베토벤이 탄생한 1770년경에는 고전파 시대 중에서도 특히 감정표현이 풍부한 작품이 많이 쓰여졌다. 이 시기를 독일 문학사에서 차용해 ‘슈트룸운트 드랑’[질풍노도] 시대라고 한다. 그 무렵 예술가들 사이에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봉건적인 낡은 사상을 혁신시켜 사회를 리드해야 한다는 사상, 즉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한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간 것은 각국의 엄청난 사회적인 변혁과 무관하지 않았다.
낭만주의
19세기 전반을 거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시기를 말한다
로맨티시즘 - 로망스어로 씌어진 이야기 [로망스어 :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자유롭고 신비하며 개성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는 풍조가 바로 낭만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낭만주의의 음악 분야는 뒤늦게 1820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낭만파 예술의 특징은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기 낭만파[베버 슈베르트]
오페라를 통하여 초기 낭만주의를 유도한 베버[마탄의 사수]
19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융성한 음악사조를 지칭하며 전반에 활약한 음악가를 전기낭만파, 후반에 활약한 음악가를 후기 낭만파 라고 부를 것이 보통이다.
음악의 대량생산, 소비 시대
낭만주의 음악의 출발이 된 작품은 베버가 작곡한 오페라 마탄의 사수였다
낭만파 작곡가들은 베토벤 시대에 이미 이전 시대보다 훨씬 확대된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더욱 확장시켰다. 한 예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는 기악주자 467명에 합창단 360명의 어마어마한 오케스트라를 꿈꾸었을 뿐만 아니라 1844년 개최된 파리 공업박람회 연주회에서 그 꿈을 현실로 옮겼다.
19세기에는 악기도 많이 개량되었다. 바이올린족 악기들의 활이 지금의 모양으로 바뀐것도 이 시기였다. 관악기에 키나 밸브 등을 부착해 연주하기가 더욱 편리해졌으며 음정도 정확해졌다.
성악분야에서도 19세기 초 독일에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아마추어 합창단이 융성함에 따라 합창을 통해 독일정신을 드높이자는 움직임이 확산된 것이다.
시가 있는 음악
전기 낭만파 음악의 특징은 음악과 언어와의 결합이다. 슈베르트가 18세때 작곡한 마왕 겨울나그네, 슈만의 시인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과 생애 등은 여러 개의 노래를 하나로 묶은 연가곡 이다.
기악곡에는 표제가 붙은 곡이 많아졌다. 베버의 무도회에의 권유,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등이 예이다. 이 분야 역시 고전주의 시대에는 주로 피아노 소나타가 중심이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리스트는 관현악곡에서도 교향시를 확립해 이전의 교향곡과는 사뭇 다른 음악을 만들어냈다. 반주를 맡은 피아노도 단순한 반주가 아닌, 좀더 표현력을 높이는 역할을 맡아 훨씬 복잡해지고 전주와 후주 등이 길어지기도 했다.
표제가 붙은 교향곡과 관현악곡도 많아졌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등이 있다.
낭만주의는 개성이 뚜렷한 사조였지만 초기 단계에는 아직 고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가령 선율은 민요곡풍이나 지방색을 나타내면서도 진행방법, 즉 음정을 쓰는 법이나 동기의 배열, 매듭을 짓는 법 따위는 고전주의적이었다. 화성도 고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형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기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의 줄기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셈이었다.
1830년 경부터 1850년 무렵에 이르는 기간, 곧 전기 낭만주의 후반부터 비로소 진정한 낭만주의 음악이 뿌리를 내렸는데, 이 시기를 중기 낭만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멘델스존, 쇼팽, 슈만 등을 들 수 있다.
전기 낭만파의 거장들
베버
마탄의 사수가 베버의 대표작인 동시에 낭만주의를 꽃피우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오페라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베버는 그 가극말고도 오리랸테, 오베론등 더욱 발전된 양식의 가극들을 썼다. 독일의 민족성을 내세운 그의 가극은 바그너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거의 방랑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정식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으나 각지의 수려한 풍취와 아름다운 지방의 민속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얻어들은 극에 대한 지식들이 모여 그가 낭만주의 오페라를 작곡하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클라리넷과 호른, 바순의 표현력을 개발한 공로가 컸다.
슈베르트
짧은 일생동안 슈베르트는 무려 1000곡이나 되는 곡을 썼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출판된 악곡 수는 극히 적었다.
그는 모차르트와 더불어 음악사상 최고의 속필가였다. 작품을 머릿속에서 완성하고 곧장 악보에 옮기는 작업 방법도 서로 비슷했다.
그는 가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탐욕도 출세욕도 없었다. 겸손하고 유순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슈베르트 주위에는 당연히 친구들이 많았다. 화가, 시인, 가수 등 예술가이거나 예술 애호가들이었던 친구들의 모임에서 슈베르트는 이따금 작품을 연주했다. 그 연주회를 슈베르티아데 라고 불렀을 정도로 친구들은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의 재질을 인정하고 그를 아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를 흔히 가곡의 왕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600곡이 넘는 많은 가곡을 썼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고전파에서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가곡 장르를 작곡가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예술수단으로까지 끌어올렸지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이탈리아 가곡의 영향에서 벗어나 순 독일식 가곡을 확립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피아노 반주에 큰 역할을 주는 슈베르트의 기법은 슈만을 비롯한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낭만 주의 [멘델스존 슈만 쇼팽]
1.주관주의 음악
2.다양한 표현법이 구사되었다
베를리오즈
그는 생김새나 인생역정, 작곡스타일까지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환상교향곡은 그 시대의 교향곡 스타일과는 전혀 딴판인데다가 초연 당시 찬반 양론이 벌어져 일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타고난 반골정신과 지나치게 격정적인 성격으로 인해 기복과 변화가 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당당히 낭만파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기질 덕분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보수적이었던 모국 프랑스에서 보다 낭만의 회오리가 거세던 독일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는 낭만파의 기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출생연도가 독일 낭만파와 비슷하고 바이올린 연주기법과 고난도의 작품들이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지나 칠 수 없는 음악가이다.
2중 트릴, 2중 플라지올레트 등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도 바이올린 연주기술을 개발해 후세에 남긴 것은 그의 위대한 공적이었다. 그는 리스트,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 당시 신진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감화를 주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의 작품은 파가니니를 알기 전과 후에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로시니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과 혁명으로 인해 일반 대중은 지칠 대로 지쳐 화끈한 볼거리가 있거나 그저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로시니의 가극은 바로 그런 시류를 탄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단순히 그렇게 혹평할 수 만은 없다. 그의 낙천적인 음악관과 19세기 초의 새로운 기법을 충분히 구사한 관현악법, 생동감 넘치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등장인물 묘사 등은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매력이 있었기에 로시니의 오페라 작품은 오늘날 까지 걸작 오페라의 대열에 당당히 끼여 스탠더드 목록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낙천적인 로시니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작품을 써서 거금을 축재할 수 있었다.
도니제티
음악사에서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3 사람을 이탈리아 벨 칸토 오페라의 삼총사라고 한다.
벨칸토 가극의 대가
벨칸토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이다 딱딱 끊기지 않고 부드럽고 감미로운 가락을 뽑는 일종의 가창법으로 특수한 기술이 요구된다. 현대 가수로서는 1977년 작고한 명소프라노 칼라스, 아직도 노익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테너 파바로티가 벨 칸토의 대가로 꼽힌다.
도니제티의 대표적인 가극 사랑의 묘약, 세빌리아의 이발사,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돈 파스콸레 등이 있다.
관현악 수법상으로는 도니제티는 로시니를 따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로시니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종횡으로 구사하면서 극적인 박력을 가미해 가극을 흥미롭게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벨리니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를 논할 때 로시니, 도니제티와 함께 항상 손꼽히는 음악가이다.
벨리니의 음악은 언제나 애수와 정감이 넘친다.
벨리니와 낭만주의 피아니스트 쇼팽은 남다른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음악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애수 어린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쇼팽의 야상곡에는 벨리니풍의 선율과 저음부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둘다 미남에 귀족적인 풍모였고, 로맨틱한 질명, 결핵을 앓았으며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마이어베어
후기 낭만파 시대에 와서 바그너와 그의 아류들이 미래의 음악 이라고 하면서 원대한 비전, 대담한 화성, 까다로운 이론, 큰 스케일의 오케스트라등으로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인들은 대중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술책을 구사했다. 단지 즐기기 위한 음악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마이어베어야 말로 이른바 그랜드 오페라라고 일컬어지는 장르를 확립시킨 장본이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큰데다 눈요기가 되기에 충분한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속적으로 펼쳐 관중을 압도하는 가극이 바로 그랜드 오페라였다.
유럽각지를 무수히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양식을 섭취하고 큰 스케일의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동시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열심히 연구하고 장점을 흡수해 잘 소화시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경향이 지나치다 보니 개성이 없는 음악을 만들고 말았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그의 작품이 상연되는 일이 별로 없는 형편이다.
오펜바흐
파리의 뒷골목 소극장에서 그랜드 오페라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은 것이 바로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였다.
천국과 지옥이 그의 대표작이었다.
가볍고 생기발랄 하며 풍자적이고 간결한 그의 음악극은 독일에까지 전해졌다. 뒷날 빈이나 베를린에서 대유행한 오페레타들은 모두 오펜바흐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
구노
그의 예술의 근원 주제는 천상의 미였다, 주요 작품 역시 종교 음악과 가극이었다.
구노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가극 파우스트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고 다른 작품은 거의 잊혀져 가고있다. 구노의 파우스트는 바그너가 같은 소재로 한번 기량을 겨루어 보려다가 결국 단념하고 말았을 정도로 걸작이다.
구노의 공로로는 아리아 중심이었던 로시니와 마이어베어의 가극을 개혁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투명하고 신선한 선율, 섬세한 독창성, 균형잡힌 구성 등으로 압축되는 그의 음악적 특징은 뒤를 이은 프랑크, 비제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멘델스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다리 역할을 한 음악가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 싶다.
그가 평생 모차르트 등 고전파 음악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낭만주의자 라기 보다 신고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기도 하다.
멘델스존은 음악외에도 어학, 문학, 철학, 그림에까지 소질을 보인 만능재사였다.
20세 때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는 그는 특히 영국을 10차례나 방문해 빅토리아 여오앙의 극진한 총애 속에 영국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단정한 몸매, 예의 바른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 온건한 음악이 영국 국민의 성격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멘델스존은 누이 파니가 있었다. 그녀도 음악적 재능이 풍부해 작곡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동생이 극구 만류해 포기했다. 작곡가의 길을 포기한 파티는 자기 작품을 남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발표한 경우도 있었다.
쇼팽
일생동안 쇼팽은 거의 피아노곡만 작곡했다. 그의 피아노곡은 이전의 어느 작곡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연주법과 화성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없이 다채로운 색채와 세련된 시정을 담고 있다. 피아노 음악가로서 쇼팽이 후대에 남긴 영향은 참으로 지대했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일컫는다.
쇼팽의 음악에는 극히 서정적인,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센티멘탈한 정서가 넘쳐 흐른다. 낭만파 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이 대부분 표제적, 혹은 회화적 요소를 앞세운 데 비해 그의 음악은 표제가 붙은 것도 감정적이며 내면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유해는 저명한 예술인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들이 묻히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슈만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은 많은 음악가들 중에서도 슈만은 대표적인 인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그런 불행이 마치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인양 비쳐지기도 한다.
슈만은 최초의 반 고전주의 작곡가였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형식이란 것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슈만은 문학적인 소양도 깊었고 특히 잔 파울 등 독일 낭만파 문학에 심취했다. 낭만파 음악의 이상 가운데 하나의 음악과 시의 결합이었던만큼 그런 자질은 그가 낭만파 음악의 기수가 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슈만의 공적 중 1834년 창간한 잡지 신음악 시보를 통해 브람스 등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를 소개한 일이었다. 동년배인 쇼팽을 세상에 처음 소개한 사람도 슈만이었다.
슈만은 작곡의 터전은 피아노곡에 두었다. 그의 피아노곡은 화려한 기교를 과시며 청중을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는 피아노라는 악기로 시적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했다. 매우 개성적이기는 하지만 객관성이 부족한 탓에 그의 작품이 오늘날 연주목록에 오르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어렵사리 결혼에 성공했던 1840년에는 가곡을 집중적으로 작곡했다.
후기 낭만파
낭만주의 음악이 결실되는 시기로 여러 가지 세부 형식 즉 표제 음악이 발달 교향시 악극이 창시됨 관현악이 발달되고 이 시기는 오페라가 전성기를 맞는다 후기 낭만에 이르러 무조적 경향이 시작 되었다.
후기낭만파 시대의 작곡가는 독일 출신으로 집중되면서 보수파와 급진파 두방향으로 나뉘었다. 보수파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등이었다. 그들은 교향곡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급진파의 음악가로는 리스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이 있다. 그들은 교향곡이라는 굴레를 아예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형식의 새로운 표제 음악을 만들어 이른바 교향시라고 명명했다. 시나 소설 극 같은 음악 이외의 요소를 음악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가극 분야에서도 바그너는 시와 미술과 음악이 무대 위에서 완전히 합쳐지는 음악극을 만들어 악극이라고 이름지었다. 너무나도 혁신적이었던 그들의 주장을 일컬어 신 낭만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19세기 후반의 서양 음악은 바그너에 의해 지배되다시피 하여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현대의 음악가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마저 했다. 보수적인 진영에 속한다는 브루크너나 말러도 신낭만주의를 채용했고 후기 낭만파의 가곡왕이라 불리는 볼프는 바그너에게 완전히 심취한 작곡가였다.
브람스는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추종하는 무리를 비난했다. 음악다운 음악을 하려면 슈만, 베토벤, 바하까지 거슬러 올라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빈 음악계를 휘어잡고 있었던 대음악 비평가 한슬리크는 브람스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바그너파를 맹렬히 비난하고 혹평했다.
세기말이 되면서 초기 낭만주의의 순수했던 이념은 퇴색하고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기서 파생된 것이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였다.
후기 낭만파가 근대 및 현대 음악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혁명적인 작곡가라고 할 쇤베르크도 처음에는 바그너풍의 음악을 썼으니 말이다. 또 이 시대에는 왈츠같은 댄스뮤직이나 오페레타 등 희가극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는 낭만주의의 거창한 음악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후기 낭만파의 거장들
리스트
악기의 눈부신 개량이 그의 멋진 연주를 한 한 몫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현재와 같은 우수한 성능의 그랜드 피아노가 그의 절정기 무렵에 개발되었던 것이다.
핸섬하고 화술에 능한데다 음악적인 재능가지 있었던 리스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그 자신도 다분히 바람둥이 기질이 있었다. 리스트의 엽색행각은 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었으나 노후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삭발하고 서품까지 얻어 신부가 되었다.
리스트의 작품은 대체로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과장되어 있기는 하나 강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4개 악장을 원칙으로 하는 소나타 형식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유롭게 단악장으로 만든 그는 새로운 형식을 교향시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교향시의 핵심은 문학적, 혹은 시적 내용을 교향 관현악에 의해 표현하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교사로서 우수한 피아니스트를 많이 양성했고, 문필가의 재질을 발휘해 쇼향을 평전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국적은 헝가리였으나 독일계 혈통이었다. 그는 분명한 헝가리인으로서 헝가리 광시곡 같은 명곡을 작곡해 모국의 후배 작곡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는 점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바그너
19세기 전반부의 음악을 지배한 작곡가가 베토벤이었으면 후반부에 군림한 음악가는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음악의 진로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갖가지 혁신을 일으키면서 주위에 자신을 맹종하는 추종자들을 수없이 거느렸다.
바그너는 독일 민족주의를 견지하며 전대미문의 악극을 창시하였다.
취리히 망명시대에 미래의 예술작품, 가극과 희곡 등 진보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편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는 이른바 종합예술 이론을 폈다. 희곡을 최고의 예술 형식으로 세우고 음악을 비롯한 다른 예술은 협력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것은 바그너의 작품이 가극이 아닌 악극으로 불리게 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37세 되던해 발표한 로엔그린을 스스로 낭만적 오페라로 규정한 바그너는 나는 이제 오페라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후 등장한 작품이 트리스탄과 이졸데 였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가극과는 판이하게 다른 획기적인 것이었다.
1. 시에 의해 음악이 통일되었다
2. 라이트모티프를 [지도동기]를 철저히 사용했다느 것이다. 라이트모티프는 바그너의 독자적인 개념은 아니었고 이미 베를리오즈가 환상 교향곡에서 채택한 고정관념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3. 무한 선율을 사용했다 [무한선율 : 마치 뜨개질에서 실이 다음 실과 꼬이면서 짜여 나가듯 선율이 쉬지 않고 성장하면서 융합하는 것
4. 반음게와 엔하모닉 체인지[이명동음적 전환]을 자주 썼다는 것
바그너는 또 자신의 작품을 이상적으로 상연하기 위해 직접 치밀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의 후원을 얻어 가극ㄱ장을 세우기도 했다. 유명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이다.
베르디
초기 낭만파 시절에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이 이른바 벨칸토 오페라를 만들어내어 전 유럽을 석권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런 기반 위에 후기 낭만파 시대의 또 한 사람 이탈리아 가곡의 거성 베르디였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가극 작곡가로서는 고금을 통해 제일인자로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이 전세계 가극장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고 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때 혁명파에 가담했다. 반면 베르디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오페라를 많이 써서 이탈리아 전 국민의 숭앙을 받으며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베르디는 긴 생애 동안 숨낳은 걸작 오페라를 서서 모은 돈으로 밀라노에 음악가 휴식의 집이라는 양로시설을 설립해 의지할 곳 없는 늙은 음악가들에게 바쳤다.
브루크너
베토벤처럼 그는 정식 넘버를 붙인 교향곡을 9곡썼다. 파이프 오르간과 같은 당당한 울림, 대성당을 연상케 하는 장대한 스케일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교향곡은 브람스의 곡과 쌍벽을 이룰 만 한 걸작들이다.
그는 청년기 대부분을 수도원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으며 32때 린츠 돔 전속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35세때 그는 런던에서 열린 국제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세계 일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장중한 교향곡을 작곡한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20년이나 지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 브루크너 협회까지 설립되어 해마다 그의 진가가 폭넓게 재조명되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와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름이 같은데다 두 사람 다 왈츠의 대가였으므로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아버지를 왈츠의 아버지, 걸작 왈츠를 더 많이 작곡한 아들을 왈츠의 와이라고 불러 구별하기도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당시까지만 해도 춤곡 정도라는 인식 밖에 없었던 왈츠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작곡가였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깨춤이라도 저절로 나올 듯한 곡들만 썼던 그가 시무룩하고 묵직한 곡을 쓴 브람스와 평생 친구였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왈츠의 왕이라고불렸던 그가 실인즉 춤에는 깡통이었고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한사코 추지 않았다.
브람스
가극이나 교향시와는 다른 소나타나 실내악, 교향악 등 구태의연한 추상적인 음악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베토벤, 멘델스존, 슈만으로 이어진 독일 교향곡의 전통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생상
척박한 프랑스의 음악 풍토 속에서 가극에서는 구노가, 기악곡에서는 까미유 생상이 프랑스 음악 부흥의 선구자 구실을 했다.
생상은 음악, 수학, 극작, 고고학, 점성술, 천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재능을 나타내었다.
가수 뷔신 등과 함께 국민음악협회를 창설하는 등 국민 음악 건설에 힘쓴 공로로 사망한 뒤 그는 국장의 예우를 받았다. 생상은 확고한 고전정신에 입각해 음악의 각 요소를 개척하면서 장려한 소리를 구축했지만 낭만주의 경향이 돋보이는 작곡가는 아니었다.
비제
그는 가극 카르멘 한 곡만으로도 독일의 바그너, 이탈리아의 베르디와 겨룰 수 있을 만큼 가히 혁명적인 오페라를 세상에 내놓은 청년 작곡가였다.
푸치니
1890년대로 접어들면서 베리즈모 작곡가들이 출현해 가극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베리즈모란 이탈리아어로 사실주의를 뜻한다. 주로 문학에서의 졸라, 플로베르, 입센 등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음악, 특히 가극에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의 가극은 신비적, 우화적, 역사적 소재에 중점을 두고 영웅적이며 숭고한 것을 보여 주었다. 반면 베리즈모 가극에서는 일상 생활, 특히 하층 계급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사건을 취급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비제는 카르멘 한 곡만으로도 거의 혁명적인 오페라를 이루어 낸 장본인이었다.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조르다노 등이 그러한 시류를 타고 활약한 오페라 작곡가들이었는데, 그들보다 한층 더 돋보이는 존재가 지아코모 푸치니였다.
푸치니는 평생 사냥과 쓸만한 오페라 대본, 매력적인 여자들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푸치니는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견식깨나 있다는 음악학자들로부터 이탈리아 전통 음악을 저버리고 신파조 가극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데카당파, 사기꾼 등으로 매도하는 극우파들도 있었다.
말러
말러는 살아 있을 때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지휘자로서 더 알려져 있었다. 슈트라우스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의 작품의 진가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후반, 즉 1960년대부터 브루크너와 더불어 세상에 알려졌다.
12음 기법의 정신적 시조이다,
쇼스타코비치도 말러의 음악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하는 등 말러는 20세기 음악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항상 의혹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인생을 보냈다. 첫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질적인 심장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유태인이면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종교적 콤플렉스, 즉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산의 정체성을 찾는 문제로 늘 고민했다.
20세기 음악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말러의 음악은 의문과 불안으로 가득한, 현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인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탑 속의 수인의 노래, 나는 세상에 버려져,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의 가곡과 대작 성악곡 대지의 노래 등은 모두 비관적인 특성을 진고 있다. 이는 그가 심취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볼프
그는 용모나 언행, 작품에서마저 광기가 넘쳤다. 이전에도 슈만처럼 만년에 정신질환을 앓은 음악가가 있었지만 볼프처럼 일생 동안 정상인과 광인 사이를 왔다갔다한 작곡가는 없었다. 마치 뮤즈신에게 농락당한 양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방황한 예술가가 볼프였다.
그는 43년 동안 살다 갔지만 작곡가로서 산 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았다. 1888년부터 1890년 까지 2년 동안 약 200여 곡의 가곡을 쓴 그는 돌연 음악적 영감이 정지했는지 작곡을 멈추었다. 다음 해인 1891년 11월 29일부터 끊겼던 창작력이 다시 샘솟았는데, 이번에는 한달도 못 채우고 뚝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5년이 지는 1896년 4월 그는 이탈리아 가곡집 제 2권 22곡을 완성함으로써 작곡 활동을 개시했다. 이듬해 가극 마뉴엘 베네가스에 착수했으나 제 1막을 절반가량 썼을 때 정신병이 도져 병원에 수용된 그는 6년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볼프는 작곡가로서 산 4년 외의 전 생애를 정신병자로 보냈지만 독일 가곡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야 말로 낭만주의의 최후를 장식하는 코다라고 할 수 있는 거물급 작곡가 였다.
독일의 나치 정권 아래서 그는 음악국 총재 자리에 올랐다.
그는 교향시 영웅의 생에, 가정교향곡, 알프스 교향곡 등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웅장한 곡들을 많이 써서 낭만주의의 극치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너무나 과시적인 낭만주의에 스스로 식상했는지 소규모의 실내악곡이나 가곡을 쓰는데 몰두했다.
민족주의 음악
낭만주의 시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조는 민족주의 음악이었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이탈리아, 줄기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큰 가지는 프랑스라고 할 수 있다.
모국의 풍경이난 전설, 민요 등을 채택해 그 나라만의 가지고 있는 특색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민족주의 악파
민족주의 악파의 움직임이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는 러시아였다.
글린카
글킨카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 음악의 횃불을 올린 작곡가 였다.
음악예술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러시아에서 1836년 글린카는 황제에게 바친 목숨이라는 애국적인 오페라를 발표함으로써 동토의 조국을 민족주의의 횃불로 녹이기 시작했다.
국민악파 5인조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그들은 제각기 다른 입장에서 글린카의 오페라 기법, 관현악 기법, 가곡 기법 등을 흡수, 발전시켜 독특한 음악을 만들었다.
발라키레프
5이조의 리더격인 발라키레프는 볼가강 유역을 여행하면서 민요를 수집해 러시아 민요집을 출간했다. 또 페테르스부르크에 무료 음악학교를 여는 등 민족 음악 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다만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운동의 선두주자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보로딘
현악 4중주곡 제 2번, 교향곡 제 2번이 유명 보로딘의 최대 걸작은 가극 이고리공이다. 12세기 때 유목민 적에게 포로가 되어서도 러시아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이고리공의 무용담을 노래한 것으로 타타르 아가씨들의 춤이 포함된 제 3막이 특히 우수하다.
큐이
오리엔텔 소품이 알려져 있는 정도
무소르그스키
러시아 국민음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소르그스키는 대담한 화성을 썼다. 이는 프랑스의 드뷔시가 인상주의 기법을 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 그는 리얼리즘 양식의 완성에 의해 러시아 예술의 한 정점에 선 작곡가이기도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교향조곡 세헤라자데,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 등 이국적인 걸작을 탄생시켰다. 가극으로는 사드코, 금계 등이 있으나 무소르그스키의 작품보다는 다소 낮게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색채감, 특히 관악기를 잘 살린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당대는 물론 이고 뒤따르는 작곡가들, 즉 스트라빈스키, 라벨 등에까지 큰 감화를 주었다.
차이코프스키
서구의 전통적인 고도의 작곡기법을 터득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면세계는 역시 러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음악이 러시아 민요를 직접 차용하지는 않았다 해도 밑바닥에 깔린 정감 풍부한 선율이나 관현악의 어둡고 차분한 울림은 바로 러시아 음악의 특색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러시아 국내에서 뿐만아니라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5인조에게는 부족했던 특성, 즉 감미롭고 극도로 관능적인 선율의 샘이 있었다. 거기에 서구적인 세련된 센스와 기법까지 갖춘 그는 그때까지는 무용의 반주 역할에 머물렀던 발레 음악을 예술적 작품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3대 발레음악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은 너무도 유명하다.
차이코프스키 이후의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대표작으로는 패아노 협주곡 제 2번 , 파가니닌의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이 있다.
스크리아빈
스크리아빈은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포착해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음악가로, 그년에 이르러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보헤미아의 민족주의 악파
보헤미안이란 국적에 관계없이 속세의 관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방랑자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슬라브인의 한 종족인 체코인은 원래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옛날부터 고유의 민족 음악이 전해져 왔다.
보헤미아의 오래 전통 위에서 근대적인 음악을 구축한 선구자가 스메타나였고 그것을 더욱 굳힌 음악가가 드보르작 이었다.
스메타나
체코 국민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드리치 스메타나는 뚜렷한 민족 의식의 바탕 위에서 근대 체코 음악의 특징을 극명하게 표출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19세기 국민악파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1866년 발표한 가극 팔려가는 신부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음악이 체코의 민족적 색채가 짙어 국민악파로서의 스메타나의 진면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섯곡으로 이루어진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도 민족의 전설과 보헤미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걸작으로 그의 전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제 2곡 몰다우가 유명하다.
드보르작
모든 형식을 구사하면서 독창성이 풍부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의 풍부한 멜로디와 조바꿈에 대한 우수한 감각은 슈베르트와도 닮은 데가 있다.
1873년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착가가 음악계의 인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작곡에 전념했다.
어린 세 아이를 연달아 잃는 슬픔도 겪어야 했으며 그 비탄 속에서 태어난 곡이 유명한 스타바트 마테르였다.
미국에서 3년동안 체류하면서 그는 교향곡 신세계로부터, 첼로협주곡,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작곡가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게 한 걸작들을 발표했다.
독일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해 국민악파의 작곡가로서의 드물게 소나타 형식을 취급하기도 했으며 큰 규모의 절대 음악 분야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북유럽의 민족주의 악파
민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린 그 음악에 민족적 의식을 불어넣고 활력을 주어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바로 북유럽 민족주의 음악의 대가 들이었다.
그리그
노르웨이 최초의 국제적 작곡가라고 할 그리그는 모국의 음악을 예술음악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음악은 조용하고 우아한 소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독일 유학의 영향인 듯 그의 초기 작품 가운데는 슈만이나 멘델스존 등 낭만파 작곡가 스타일로 씌어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21세 때 덴마크 유학 중 노르웨이 국민음악을 써야 한다는 선배와 친우들의 권유를 받고 그는 조국의 국민악파를 위해 진력할 것을 결심했다.
노르웨이의 대문호 입센에게서 희곡 페르 귄트를 위한 음악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유명한 솔베이그의 노래가 포함된 극음악 페르 귄트를 작곡했다. 1877년 부터는 표르드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서 작곡겡 전념하면서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그의 대표작으로는 극음악 페르 귄트, 피아노협주곡 A 단조 등이 있다.
시벨리우스
시벨리우스는 후기 낭만파와 러시아 음악의 영향 아래 핀란드 고유의 음악 어법을 소화 시킨 독특한 양식을 완성한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은 엄혹한 북구의 기후 풍토와 인접 강국의 침략으로 인한 불안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음울한 민족심리를 반영해 비장감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다. 널리알려진 교향시 핀란디아 작품 26은 그의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상징한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뭄ㄴ화운동의 일환으로 쓰여진 곡으로 작품에 숨겨진 뜻이 러시아 관헌에게 발각되어 국내연주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핀란디아찬가는 지금도 핀란드의 준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시벨리우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7곡의 교향곡에 있다.
시벨리우스를 가리켜 20세기 굴지의 교향곡 작곡가라 한다.
그의 고난도 바이올린 협주곡이 명협주곡의 하나로 꼽히게 된 것은 그의 바이올린 경력 덕분으리고 할 수 있다.
닐센
닐센도 북유럽 국가의 작곡가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곡가 이다.
절대음악 작곡가의 자리를 지켰으므로 그를 가리켜 한쪽다리는 19세기에 다른 한쪽다리는 20세기에 걸친 작곡가 라고 부른다.
근대 음악
낭만주의에 반기를 든 근대 음악의 특징을 잘 나타낸 최초의 대가는 역시 프랑스의 드뷔시 였다. 드뷔시는 처음에는 바그너의 신낭만주의에 기울어졌지만 오래지 않아 불만을 느끼고 이른바 인상주의 음악을 일으켰다.
드뷔시는 안상파 회화는 상징주의 문학과 같은 효과를 음악에서 끌어내려는 의도로 새로운 화성법을 구사했다. 악계에서는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드뷔시 자신은 그 호칭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차라리 상징주의 음악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근대 음악
인상주의 음악의 주역 역시 프랑스에서 배출되었다. 드뷔시와 라벨이었다.
라벨은 처음에는 인상주의에 가담했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지성적이며 명쾌한 양식으로 나아갔다. 그의 기법은 때로는 새롭고 때로는 보수적이었다.
드뷔시보다 3년 늦게 태어는 듀카스는 관현악법에 뛰어나 유명한 마법사의 제자등을 작곡했다. 그의 풍부한 화성과 관현악법은 드뷔시와 스트라빈스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의 6인조
미요, 오네게르, 풀랑크, 오리크, 타유페르, 뒤레
인상 주읭에도 반대한 그들은 절도있는 형식미로 불협화음을 피해 듣기 좋고 건강하며 밝고 쉬운 음악을 만들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른바 신고전주의 음악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음악은 일견 시대를 역행하는 보수주의처럼 보이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질서있는 형식을 희구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또 감성이나 지성을 앞세우는 경향 이외에도 카톨릭적인 신비 주의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이물로는 메시앙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리듬에 새로운 매력을 불어넣는 신기법을 구사했다.
프랑스의 근대 음악에는 여러 가지 유파와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프랑스 근대 음악사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음악가들 사이의 위계랄까, 영향이나 가름침을 주고 받는 계열이 반드시 연령 순서대로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드뷔시
드뷔시는 고금을 통해 프랑tm 최대의 작곡가이자 20세기 음악의 진로를 결정지은 혁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을 지배해 온 것은 이른바 기능화성법이었다.
빈 고전파 시대의 음악에서 악곡은 거의 장조 혹은 단조로 한정되어 으뜸음을 중심으로 안저오딘 주조가 곡마다 확립되어 있었다. 도중에 다른 조성으로 전조될 때도 유사한 조성으로 옮겨졌다가 결국 다시 주조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완전한 음악의 원리로 여겨져온 엄격한 법칙을 의도적으로 탈피해 새로운 음향세계의 탐구에 나선 작곡가가 드뷔시였다.
드뷔시는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시각적 이미지를 음의 움직임으로 포착하여 교묘하게 묘사하였다.
라벨
라벨은 드뷔시와 더불어 프랑스 근대 음악을 대표 하는 작곡가로 꼽히지만 종종 드뷔시의 아류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드뷔시가 끝까지 인상주의자였고 관점에 따라서는 말기적 낭만주의에 포함되는 데 비해 라벨은 좀더 명확한 형식을 갖춘 균형잡힌 형식미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드뷔시와는 확연히 다른 작곡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를 가리켜 신고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라벨은 감정 내키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을 아주 싫어해 항상 지성에 의해 감정을 적절하게 억제하며 작곡하는 스타일이었다.
라벨은 완벽한 오케스트레이션에 의한 관현악곡을 쓴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관현악곡으로 너무 유명한 볼레로가 있다. 라벨의 이 작품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작은 북으로 아주 여리게 시작하는 볼레로의 리듬주제는 340소절로 이루어지는 연주시간 약 15분 전 곡에서 무려 169회나 똑같이 되풀이 된다. 여기서 조금 풀려나는 것은 맨 끝의 두 소절뿐이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관현악법을 치밀한 계산 아래 채용한 그에게는 관현악의 마술사라는 별칭이 붙었다. 라벨은 감정에 치우치는 일 없이 균형잡힌 고전적 형식미를 지향하였다.
사티
프랑스 근대 음악을 논할 때 사티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상식을 벗어난 사티의 작품이나 언행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의 기행은 너무 유별나 때로는 고의적으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항상 순수했고 진지하며 단순했다. 그런 특성 때문에 그의 음악적 생명은 길게 이어져 근대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근대 음악
독일계음악은 선이 굵고 뚜렷하며 강렬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최초의 근대적인 음악 작곡가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그는 브람스를 따르다가 후에 신낭만파, 즉 바그너 쪽으로 전향해 강렬하고 묵직한 작품을 썼다. 때때로 다조, 혹은 무조주의를 시대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근대주의자였다.
다만 완전히 새로운 기법을 시대했다기보다 신낭만주의를 평생 고수하면서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한 것을 발표하는 정도였으므로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곡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쇤베르크
독일게 근대주의의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담한 혁명가였던 그는 처음에는 슈트라우스처럼 신낭만주의자였으나 곧 표현주의자로 바뀌었다.
빈의 유태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으며 9세 때 바이올린을 위한 습작을 작곡했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에서 12음 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을 착안하였다.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연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는 20세기 음악의 두 대들보이다.
쇤베르크는 순수하게 현대 음악의 격랑을 헤쳐 나가면서 새로운 세대의 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a
힌데미트
독일근대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의 거물이 파울 힌데미트이다. 그는 프로뿐만 아니라 아마추어도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거의 광적인 정열을 바친 음악가였다. 실용음악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사람도 그였다. 그는 신즉물주의자였다. 신즉물주의는 감정과 주관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마치 그것을 신봉하는 자만이 진짜 예술가이고 나머지는 우매한 열등족속이라는 관념이 팽배했던 표현주의에 대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실용성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 사조였다.
실용주의 음악은 확실히 단조롭고 강한 감동력이 부족했다.
헝가리 근대 음악
근대 음악을 논할 때 헝가리 음악을 제외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 명의 작곡가 바르토크와 코다이가 있기 때문이다 집시음악을 벗어나 진정한 헝기리 음악을 확립하고자 한 사람들이 바로 바르토크와 코다이 였다.
바르토크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대작곡가의 한 사람인 바르토크는 헝가리 농민음악이 자기 음악의 바탕이 되어야 함을 깨닫고 코다이와 함께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방 민요들을 광범위하게 채집했다. 민요에 근원을 둔 음악은 조성을 기본으로 하여 작곡해야 했으므로 당시 유행처럼 퍼지 시작한 쇤베르크 일파의 무조주의와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바르토크는 작은 체구에 일생의 절반을 병고에 시달린 허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격렬한 정신력과 완고하리만큼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바르토크는 민요의 음계와 리듬의 특징을 뽑아내서 독자적인 이론을 세우고 개성있는 음악을 썼다. 대표작은 현악기, 타악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의 소나타 등이다. 또 전 6권의 미크로코스모스는 현대 음악의 입문서, 뛰어난 피아노 교재로 유명하다.
코다이
바르토크는 타협을 불허하는 직선적이고 격한 성질로 근 현대 음악의 여러 가지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정공법을 섰다. 이에 비해 코다이는 타협을 할 줄 아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같은 민요풍의 소재를 가지고 쓴 바르토크의 무용 모음곡과 코다이의 갈란타 무곡을 비교해 보면 두 작곡가의 차이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코다이는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배우면서 부다페스트의 음악 아케데미에 입학해 작곡을 공부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헝가리 시편, 미사 브레비스등처럼 진지한 음악도 있지만 코다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곡을 관현악 모음곡 하리 야노슈이다.
너무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말단 감각에 사로잡힌 음악이 많은 현대를 살면서 서민적이고 소박한 언어에 바탕을 두면서도 결코 예술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코다이의 밝은 음악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높은 교양과 본격적인 민요연구, 훌륭한 교수활동 등의 기초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근대음악
러시아 강령
1제재는 사회주의적인 테마이어야 한다.
2 음악 용어는 사실적이어야 하며 불협화음을 써서는 않되고 러시아 민요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3. 오페라의 줄거리는 국가를 찬양해야 하며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미국에 망명했다가 스탈린의 특별 호의로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도 그 올가미에 걸려 만년에는 물에 물탄 듯한 작품밖에는 쓰지 못했다. 1948년에는 소련내 유수의 작곡가들이 악명높은 지다노프 비판대에 오르는 화를 입었다.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굳건히 창작활동을 지속한 작곡가들이 있었으니 바로 하차투리안, 카바레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등이었다.
스트라빈스키
스타라빈스키는 현대 음악을 구축한 첫 공로자이며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그를 제외하고 현대의 음악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를 그는 모든 나라의 진보적인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너무도 자주 바꾸어서 카멜레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 속에서 19세기적인 음악형식을 취했던, 소련을 대표하는ㄴ 작곡가이다.
그는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각 장르의 음악을 두루 작곡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 속에서 19세기적인 음악 형식을 취했다. 그의 작품은 내용 표현에서 현대적이고 다채로운 변화가 보였다. 특히 만년에 이르기 까지 작곡한 전 15곡의 교향곡은 새로 발표 될 때마다 찬반이 엇갈리는 평을 받았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교향곡임에 틀림없다. 또 15곡의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한 다른 실내악곡들도 그의 내면세계를 잘 표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