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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왕자'로 알려진 백제 제30대 왕 무왕(武王·재위 600~641)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깃든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佐平·백제 관등의 하나) 사택적덕(沙 積德)의 딸인 백제왕후에 의해 창건됐음이 19일 확인됐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서동요'가 전하는, 서동왕자(백제)·선화공주(신라)의 국경을 넘은 로맨스가 사실이었을까 의심하게 만든다. '서동요'는 백제의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향가다. 진평왕의 셋째 딸이 절색이라는 소문을 들은 서동이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맛둥 도련님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어 삼국유사는 무왕·선화 커플이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400년을 이어온 '그들의 로맨스'는 이번 주 월요일에 금이 갔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19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를 1370년 만에 발굴했다"며 현장에서 유물 505점을 공개한 것이다.
김 소장은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중심 기둥)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사리장엄을 안치하는 공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금으로 된 사리호(舍利壺·사리를 담은 병)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金板)인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원형 사리합 6개, 장식용 칼로 보이는 단도 2점, 은으로 된 관식(冠飾), 유리구슬 등 총 505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 등 전문가들은 "이 중 사리호와 사리봉안기는 국보 중의 국보"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리봉안기는 15.5㎝×10.5㎝ 크기의 금판에 한자 194자를 새겼는데, "백제 무왕의 왕후(사택씨의 딸)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절)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다. 선화가 미륵사를 지었다고 쓴 일연은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무슨 근거를 갖고 있었을까. 백제의 마지막 왕이자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아들인가, 사택씨의 손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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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최대사찰 '비밀의 문' 열렸다
기록 거의 없던 미륵사, 639년 창건 밝혀져
발굴된 유물들 1400년전 모습 완벽하게 간직
塔양식·금속공예사 연구에 기준 마련해줄 듯
설화에서 역사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 최대의 사찰인 전북 익산 미륵사의 창건 과정이 이번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통해 소상히 밝혀졌다. 이번 발굴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1400년 전의 타임캡슐을 꺼낸 것과 같다.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나온 것을 비롯해 사리를 넣은 병과 머리장식용 액세서리, 장식용 칼과 유리구슬 등 505점의 유물이 대량으로 한꺼번에 발굴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건 소장이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해주는 유물들"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륵사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무왕(武王)이 재위 35년에 왕흥사(王興寺)를 준공하고, 궁 남쪽에 못을 팠다는 등의 역사(役事) 기록은 있지만 초대형 사찰인 미륵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미륵사 창건설화가 간략히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석탑을 두고도 서기 7~8세기경으로 건립연대를 막연히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준 것이 가로 15.5㎝, 세로 10.5㎝짜리 금판에 쓰여진 한자 194자(字)인 것이다. 적어도 서탑(西塔)의 경우 건립된 때가 서기 639년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서동요, 사실 아니다" 학계서 계속 제기
"당시 백제·신라 관계로 볼 때 가능성 희박"
조선일보 200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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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와 삼국유사 해체 보수 과정에서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귀중한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발굴된 사리봉안기는 몇 가지 사실을 오늘에 전해주었다.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기록으로 최소한 미륵사 석탑이 이 때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사택적덕녀(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라는 글귀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서동요와 그 시가에 얽힌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 이야기를 실제가 아닌 것으로 해석토록 만들고 있다. 문화재연구소는 이 부분을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사택적덕의 따님으로서’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니 선화공주는 무왕의 왕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써 `선화공주 이야기는 가짜’ 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를 달리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실제 이 구절을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무왕의 왕후도 여럿일 수 있고, 미륵사는 3원 형식의 절인지라, 이번에 발굴된 서탑과 서쪽 절만 사택씨의 왕후의 희사로 짓고 다른 가람은 또 다른 왕후, 즉 삼국유사가 말하는 선화공주가 무왕 왕후로서 지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번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의 정확하다고도 할 수 없는 번역을 근거로 당장 선화공주는 무왕의 왕후가 아니었다거나,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는 허구라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삼국유사와 그 필자 일연스님을 배출한 우리고장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정재모/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