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리영희 선생님과의 첫 인연
어느 날 김병곤 선배가 방마다 철문을 두드리며 외치고 다녔다. “단식 준비하세요! 영치금 다 털어서 달걀 구입하고 돼지 수육 많이 사 두세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옆 동에 사시는 리영희 선생님 전향 공작이 너무 모욕적이어서 그것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단식투쟁(?)이 시작되었다. 소지(掃地. 모범수 중 선발되어 잡일을 거드는 사람)가 식구 통으로 밥을 넣어주면 밥을 복도로 힘차게 뿌린다. 식판을 든 채 변기 칸 뒷벽까지 물러섰다가 김 선배의 구호에 맞춰 일시에 식판으로 철문을 때린다. 그리고 힘껏 소리를 지른다. “리영희 탄압 중단하라!” 아마 광주교도소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다. 알다시피 교도소 건물은 한쪽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게 설계되었을 테니 말이다.
나를 포함해서 7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감명받지 않은 젊은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 책이 없었다면 베트콩이 “무찔러야 할 공산당”이 아니라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약자이고 월남 전쟁이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주었겠는가. 8억 인과의 대화 역시 전작만큼이나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문화혁명이 병든 중국 역사를 뒤엎는 대역사(大役事)이며, 세계 민중의 귀감(龜鑑)이 될 것이라는 리영희 선생님의 예언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방(下放)”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인간의 사상과 양심을 법으로 재단(裁斷)한다는 것이 황당하지만, 반공법이라는 희한한 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갖거나 동조・찬양・고무라도 한다면, 반공법에 걸리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 법의 황당무계함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형기를 다 마쳤어도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수형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소위 사회안전법 때문이다.
1975년 제정된 이 “법도 아닌 법”은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누구나 사상전향을 증명해야 했다. 사상전향을 증명하지 못하면, 설령 이미 석방된 자라고 하더라도 사상을 전향할 때까지 청송교화소에서 “교화” 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이미 형기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던 6・25 이전 좌익사범이나 빨치산들은 청송교화소에 들어가서 지독한 전향 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향 공작은 주로 보안사가 주도했는데, 그 잔인무도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전향 공작은 그들의 신념을 신앙 수준으로 높였을 뿐이었다.
김병곤 선배가 특사 2동 소지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리영희 선생님의 전향을 담당한 자는 광주보안대 중사였는데, 광주교도소에서 전향을 잘 시키기로 악명이 높았다. 선생님은 사상전향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선생님은 훗날의 회상에 따르면 “나는 중국 문화혁명의 실상을 외신에 바탕을 두고 한국민들에게 알려주자는 것이었지, 중국공산당을 찬양하자는 의도는 없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적이 없다. 그래서 사상전향을 할 것이 없다. 나에게 사상을 전향하라고 하면, 공산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냐?”라고 버티셨다고 한다.
당시 50이 넘은 사회적 명사를 차마 폭행할 수 없었던지 보안대 중사는 식사 때마다 소지가 식판에 밥을 담으려는 순간 그것을 발로 걷어차서 강제 단식을 시켰다. 2~3일 굶은 상태에서 중사는 선생님을 자기 사무실에 불러놓고 곰탕을 대접하겠다고 했단다. 너무 허기진 상태에서 탕 냄새에 끌려 한술 뜨려는 순간 그자는 선생님의 뒷머리를 눌러 국물에 얼굴을 처박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리영희 선생님에게 직접 사태의 진상을 듣기까지는 말이다. 중사는 실제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병곤 선배가 이성재 선생님과 상의하여 단식투쟁을 결행했고 특사 1동의 모든 수형자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딱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그분은 내 바로 오른쪽 방에 사시는 고영근 목사님이었다. 고 목사님은 끊임없이 나와 통방을 시도했는데, 나는 좀 시큰둥했다. 그분은 항상 내가 운동시간에 황 선생님과 붙어 다니는 것을 염려했다. 그분은 나에게 인혁당과 같은 좌익인사들에게 조종당하는 김병곤 같은 위험인물과 어울리지 말고 함께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충고하셨다. 날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특사 1동의 옥중투쟁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소문은 교도소 전체로 퍼져 나가 미결사, 기결사 할 것 없이 곳곳에서 애국가 소리가 넘쳐났다. 광주교도소에서 죄수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교도소장이 특사 1동으로 달려왔다. 김병곤 선배가 대표로 교도소장과 협상했다. 김 선배는 당연히 리영희 선생 전향 공작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소장은 그것은 내 선을 넘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김 선배는 다시 보안사에 연락해서라도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하루 말미를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시는 계엄령 상황이었고 보안사는 권력서열 1위 조직이었다. 그런 조직이 더욱이 사회안전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외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최악은 리영희 선생님이 전향서에 서명하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선생님으로서야 그러한 모욕을 견뎌내시기가 힘드셨을 것이다. 더욱이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도 하릴없이 여전히 철판 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선배가 갑자기 형집행법을 들고 와서 단식투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형집행법’의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조항’에 따르면 일주일에 돼지고기 80g(?)을 제공하게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부족한 듯하니 그걸 조건으로 내걸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장에 구호를 바꿨다. “수용자 처우 개선하라.” “형집행법 준수하라.” 이 소식은 빠르게 교도소 전체를 장악했다. 일반 재소자들에게는 더 와닿는 구호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을 따라 애국가를 제창했다. 교도소 복도를 타고 쩡쩡 울리는 애국가 소리는 장엄했다.
놀랜 교도소 간부들이 다시 특사 1동으로 몰려왔다. 공동목욕장에 임시 회의실이 마련되었다. 수감자 쪽에서는 김 선배, 한신대 출신 어떤 학생(아무리 해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민주당 보성지구당원, 막걸리 반공법 한 사람, 그리고 나, 교도소 당국에서는 양정계장, 보안과장 등 대여섯 명의 간부들이 참석했다. 김 선배는 형집행법 조항을 펼쳐 보이며 따졌다. “우리가 매주 받는 돼지고기는 엄지손가락 정도에 불과한데, 그 정도가 80g일 리가 없다.” 양정계장은 절실한 얼굴로 말했다. “육류는 규정대로 제공한 것이 틀림없어요.” 한신대 출신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담 당장 돼지고기 80g을 잘라서 가져와 보세요. 저울에 달아보게.” 얼마 안 있어 양정계 직원이 돼지고기와 저울을 가져왔다.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 두께는 돼 보이는 살점이었다. 우리는 득의양양하여 저울에 올려보니 딱 80g이었다. 우리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고 외쳤다.
그런데 양정계 직원이 가져온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버너와 냄비도 함께 가져온 것이다. 양정계 직원은 익숙하게 돼지고기를 삶았다. 삶은 돼지고기는 엄지손가락만 해졌다. 우리는 머쓱했다. 김 선배가 여전히 기죽지 않은 소리로 물었다. “일반 재소자에게도 모두 이 무게가 제공되는 거요?” 양정계장은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그럴 거예요.” 김 선배는 엄한 목소리 명토를 박았다. “재소자 전원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는다면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보안과장이 김 선배를 향해 애원하다시피 간청했다. “당장 내일부터 재소자 전원에게 똑같은 양의 육류를 공급할 테니, 제발 단식투쟁을 풀어주세요.” 김 선배는 논의해서 오후까지 통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일단 각자 방으로 들어가 통방으로 상의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김 선배가 복도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논의해서 교도소장이 확인한 서류를 작성한다면 단식을 끝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79년 말 광주교도소 옥중투쟁은 끝났다. 이 소식은 광주교도소뿐만 아니라 전국 교도소로 퍼져 나갔고 대한민국 교도 행정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승리했지만 김병곤 선배나 동참한 우리 모두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리영희 선생님에게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훗날 리영희 선생님은 이때를 회상하며 김병곤 선배를 “지도자로서의 모든 자질과 능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잔잔하고 부드러운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평가했다. 나는 답답한 정치 상황을 볼 때마다, 지도력과 인품이 못 미치는 정치 지도자가 행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미 고인이 된 김병곤 선배가 그립다.
어찌 되었든 리영희 선생님은 얼마 안 돼 만기로 출소하셨다. 나와 선생님의 첫 번째 인연은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12월에 들어서자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긴조 위반자들은 모두 석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병사로 옮겨갔던 손주항 의원이 기름기가 번질거리는 얼굴로 운동장에 나타나 교도소장에게서 들었다고 확언했다. 이 소문을 듣고 황현승 선생님은 역사적 유물론 강의를 속성으로 마친 후 내게 당부하셨다. 철학 전공자로서 공부를 계속할 것과 국내에서는 헤겔을 공부하고 독일에 가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삼아 정치철학을 연구하라고. 나는 선생님의 당부를 지키려고는 했지만, 어떤 사정으로 끝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