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창세기 제 29 강 '맹세'
본문: 창 21:22-34
22-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27-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30-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날을 지내었더라
Introduction: 저는 한 주에 이틀이나 사흘은 집에서 자지를 못합니다. 이런 관계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가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있을 때 아이들을 제가 재울려고 노력합니다. 큰 딸 수현이는 제가 꼭 재웁니다. 이 녀석이 낮잠을 잘 안 자기 때문에 저녁 7-8시 사이에 잡니다. 쭈쭈 한통 들고 불끄고 잠자리에 눕습니다. 그런 다음 같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묻습니다. '수현이, 아빠 사랑해' '응' '아빠도 수현이 사랑해. 자, 약속' 하면서 새끼손가락 걸고 손도장을 찍습니다. 사랑의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큰 딸은 이내 잠이 듭니다. 제가 이런 맹세를 하는 이유는 이런 약속의 행동이 아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러고 나면 곧 새근거리며 잠을 잡니다. 맹세는 안정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이 '화이트데이'였습니다. 그날 저는 쇼핑을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가판대에서 사탕을 파는 곳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보석가게는 커플링을 특별상품으로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부부는 니트를 하나씩 구입했는데 디자인을 보니까 커플니트였습니다. 니트 때문에 나름으로 의미 있는 화이트데이였습니다.
왜 이런 징표들을 주고받습니까? 서로의 사랑을 서로 약속하고 맹세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의 지속을 확인하고 싶은 맘 때문입니다. 서로의 마음에 대해 확신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는 확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맹세가 국가간에 일어나면 그것을 treaty, 조약이라고 부릅니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급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남한은 북한과 진일보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합니다. 북한은 미국과 관계개선이 시급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새로 들어선 부시행정부는 북한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최근 북한은 남북장관급회담을 돌연 연기시켰습니다.
이 급변의 핵심에는 평화협정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의 휴전선은 1953년 정전협정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세기동안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작년의 남북정상회담이후 새로운 흐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한반도에 좀더 안정되고 영구적인 평화공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남북한 평화협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정부는 군비축소, 대량 살상무기 폐기 및 공격용 무기 우선 감축, 주한 미군의 역할 변경등의 내용을 가지고 4월이나 5월로 예정되어 남한에서 열릴 2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의 이유가 뭡니까? 한반도는 지구상의 유일한 냉전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체하고 어떡하든 한반도에 안정을 가지고 오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안정과 평화와 상호교류가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협정이라는 조약의 배경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바로 이런 맹세에 관한 것입니다. 조약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공동체와 팔레스틴 왕 아비멜렉간의 맹세이니까 조약이라고봐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두 공동체간에 두 종류의 조약이 체결되어집니다. 하나는 아비멜렉이 제안한 조약입니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제시합니다. 이 두 맹세가 오늘 말씀의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Point 1: 맹세I
첫 번째 맹세는 아비멜렉조약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 아비멜렉이 제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팔레스틴의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요즈음의 국방부장관이라고 할 군대 장관 비골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불가침조약입니다.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서로 공격해서 좋을 것 없지 않느냐. 우리 서로 조약을 맺어 굳은 맹세를 지키자.'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23절에는 그 조약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달리보면 아비멜렉의 바램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아비멜렉이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먼저 그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을 거짓으로 다루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 배경이 무엇입니까? 20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애매한 거짓말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습니다. 싸그리 죽을 뻔했습니다. 사라를 데리고 살려다가 공동체가 멸절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한테도, 내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거짓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책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은 대단한 분인데 그런 너를 잘못 대했다가 우리가 큰 위험을 당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그런 내용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좀 투명해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면 믿음의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돌려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소금이니까 소금으로 살고 빛이니까 빛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를 알고 그것만 제대로 드러내도 자기 할 일은 한다는 것입니다. 빛인데도 빛인줄 모르고 검은 수건으로 가리고 삽니다. 소금인데도 소금인 줄 몰라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면 그 신분에 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깜깜해도 성냥불 하나면 볼 것은 다 봅니다. 염분 2-3%가 물의 썩는 것을 막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면 좀 단순하고 투명하게 살아야합니다.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말씀 플러스 자기 욕심 하니까 애매해지고, 갖은 자기 합리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투명해지는 것은 딴 길 없습니다.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내 공동체를 살리는 길입니다. 말씀대로가 윈-윈 전략입니다. 그래야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결혼해서 내가 전도하지' 이것만큼 교만한 것 없습니다. 구원도 얻고 내 욕심도 차리고.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까? 말씀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방결혼은 재앙입니다. 말씀이 반복하면 분명히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한 잔 정도야. 이 사이트 이번만 보고 다음엔 안 봐야지.' 그러면서 죄는 자랍니다. 커져갑니다. 강력해 집니다.
양심에 죄의식을 느낄 때 돌아서야 합니다. 전혀 딴 길로 가야합니다. U-turn 해야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이때까지 나를 지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사라를 통해 약속의 씨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 신실하신 분이다.' 하면서 사라를 당당히 자기 아내로 소개했으면 오늘 본문의 창피는 다시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투명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과연 우리는 누구입니까? 말씀 앞에 투명한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이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23절 후반부를 보세요.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내가 준 만큼은 너도 우리에게 주라는 요구입니다. 적어도 give and take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준 만큼은 돌려도.' 그런 말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세상에서도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take and forget it! 받고서 받은 것도 까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고서 입닦아 버립니다.
여러분, 믿음의 성숙이 뭡니까?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뛰어난 영성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경건함이 뭡니까? 야고보서 1장을 보세요. '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당시 배경으로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 가장 부족한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그들을 세워주는 것. 이것이 경건의 모양입니다. 다시 말해 Give and forget it!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give and take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줌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왜 아비멜렉은 자기에게 거짓말해서 자기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자기가 이것 저것 많이 주어 베풀기까지 한 아브라함과 조약을 맺기를 원할 것일까요? 아무리 보아도 강자는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이 꿀릴 게 전혀 없어 보입니다. 거기다가 군대 장관까지 옆에 있습니다. 그가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외관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브라함에게 와서 조약을 맺자고 먼저 청합니다. 이것은 분명 주도권이 아브라함에게 있음을 의미합니다. 되려 아비멜렉이 아쉬운 게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행동은 안정과 평화의 주도권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고백의 행동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22절 후반부를 보세요.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God is with you in everything you do.'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그 원인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하려던 그 날, 꿈에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겁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온 몸이 다 떨리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신이 계시다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세를 보았습니다. 왕이라는 권력은 그야말로 장난입니다. 그 분 앞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겁이 난 것이지요. 그래서 군대 장관까지 대동하고 아브라함에게 제발 평화조약을 맺자고 온 것입니다.
힘이 없는 나라는 힘있는 나라에게 빨리 가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나라를 보세요. NMD, 즉 국가미사일방어체제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사이에서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 가서 장관이, 대통령비서가, 결국에는 대통령마저도 사과를 하는 경우를 당합니다. 힘의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쟤가 모시는 하나님, 겁나는 분이시다. 잘못 건드리면 큰일난다.' 그래서 이런 조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맹세의 배경인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실수가 없습니까? 그에게 허물이 없습니까? 실패가 없습니까? 죄가 없습니까? 그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보세요. 아비멜렉에게 지적까지 당하는 허물 많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에게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아브라함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의로움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는 전능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는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겁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다스리고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용기와 담대함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세상 끝날까지 가는 믿음입니다.
모세의 떨기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평범한 떨기나무입니다. 광야에 늘려있는 떨기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나무에 하나님께서 불로써 임재하심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그 나무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 떨기나무는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그 분의 동행하심을 나타냅니다.
보세요, 여러분, 그 광야의 떨기나무같이 모세도 별 사람 아닙니다. 테러범 신세가 되어 광야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도 허물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왜 그렇게 놀라운 사역을 감당합니까? 그가 잘 나서 입니까? 천만에요. 떨기 나무에 불꽃으로 오신 이가 떨기나무같은 모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떨기나무같은 인생 아닙니까? 별난 것 있습니까? 탁월한 것 입니까? 자랑할 만 것 있습니까? 지극히 평범한 사람 아닙니까? 허물 있는 사람 아닙니까? 실수 많은 인생 아닙니까? 죄에 약한 삶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떨기나무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불로써 임재하시는 삶입니다. 독생자의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선물로 성령을 허락하신 믿음의 삶입니다.믿음의 약속이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삶입니다.
맥스 루카도는 그의 저작 '예수님처럼'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하는 모든 일에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을 향한 성경의 너무도 분명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조약입니다. 그 맹세의 내용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는 그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우리와 동행하는 그 하나님을 소망하십시오. 그 분의 인도를 간구하십시오. 그 분은 참으로 신실히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더더욱 소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Point 2: 맹세II
이제 두 번째 맹세입니다. 이 조약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제안합니다. 25-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당시의 우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물은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엄청나게 큰 손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동안 잠잠히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비멜렉이 조약을 맺자고 왔습니다. 그러자 이 사건에 대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정중히 항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교훈 하나가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낼 만한 상황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 때 어떠해야 합니까? 성질대로 가서 다 따지고 밝혀야 합니까?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많이 없습니다. 성질대로 하면 일은 더 꼬여가기 일쑤입니다.
아브라함의 방법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집니다. 그리고 말을 조심하십시오. 경우를 살펴서 말을 하십시오. 잠언의 말씀대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의 금사과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배우는 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유로움입니다. 믿음의 넉넉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세요. 27-31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이 우물에 관해서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습니다. 양과 소를 주면서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조약을 맺으며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놓습니다. 이것이 아비멜렉에게는 좀 의아하게 보입니다.
당시 고대의 조약과정에는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15장에 이미 나온대로 짐승을 죽여 놓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맹세입니다. 죽을 각오로 이런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결사적인 맹세입니다.
또 다른 것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식탁교제를 함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음식을 나눔으로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평화의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싸운 사람과 화해할 땐 말만 가지고 잘못했다 해선 부족합니다. 걸하게 식사 대접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과 떡을 나눔으로 평화조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다른 하나가 본문의 장면입니다.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조약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높은 사람에게 아래 사람이 하는 맹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양과 소를 줌으로 아비멜렉과 평화의 조약, 우물을 보존하는 조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두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오늘 말씀의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맹세, oath라는 말은 원어로 '솨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일곱이라는 단어 '쉐바'와 어원이 같습니다. 다시 말해 맹세는 7 이라는 숫자와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일곱은 완전함과 불변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31절의 '브엘세바'라는 말은 '일곱개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란 뜻인데 완전한 맹세, 완전한 조약을 맺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레과 조약을 맺으면서 그 마음에 있는 생각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가 일곱 마리의 암양새끼를 따로 두고 그곳을 브엘세바라 부르는 이유는 뭡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분명 조약을 아비멜렉과 맺고 있습니다. 그와 평화협정,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그의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지금 그의 마음은 이 상황을 인도하신 그 분에게 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마저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게 인도하신 그 하나님께 가 있습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과 그 분의 섭리에 아브라함의 시선이 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한 나라의 왕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 왕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분, 참으로 평화되시는 분, 진실로 방패되시는 분, 그 분을 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이번 조약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은 참으로 크신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크신 분이구나. 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광대하신 분이구나. 너무도 엄청난 분이시구나. 한 나라의 왕조차 이렇게 다루시는 분이구나. 그 분은 참으로 완전하시고 너무도 신실하신 분이구나.'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이 조약사건을 통해 다시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두는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그 곳을 브엘세바, 일곱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사고에, 여러분의 이성에, 여러분의 감정에 하나님을 제한해 두고 계시진 않습니까? 빙산의 일각을 보고서 그 일각을 하나님의 전부로 여기진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참으로 크신 분입니다. 그 분은 너무도 크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되 그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끝없이 쏟아나는 샘물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셔도 마셔도 넘쳐나는 샘물 같으신 분입니다. 그 샘물에 혹시 쓰레기를 넣어놓진 않으십니까? 돌무더기를 던져놓은 것은 아닙니까? 다 걷어내십시오. 샘물이 샘물되게 하십시오. 생수가 흐르게 하십시오. 생명이 생명되게 하십시오.
부흥이 딴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샘물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 분이 주시는 온전한 샘물을 지키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 분은 그 분의 약속과 맹세에 너무도 신실함을 믿는 것이 부흥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지금 중동의 상황을 살펴보세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많은 나라의 외교노력으로 이미 평화조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그 과정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노벨상을 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평화가 있습니까? 끝없는 분쟁만이 있습니다. 돌팔매질과 총격이 있습니다. 피흘림이 있을 뿐입니다. 최근 강경파인 샤론 총리의 등장으로 예측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평화조약이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서를 보세요. 이사야를 보세요. 호세야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유다가 애굽으로 달려가고, 앗수르로 달려가서 조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의 말과 병거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잘 했다 칭찬하십니까? '왜 창녀같은 짓을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에게 평화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신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신뢰와 믿음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나무를 심습니다. 에셀이라 불리는 나무를 심습니다. 이 나무는 아주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이곳 저곳을 떠도는 나그네 신세의 유목민이 오래 사는 나무를 심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맹세와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서 여유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만이 참으로 평화를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께 마땅한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까? 누가 우리에게 여유를 주십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참 안식을 허락하십니까? 오직 영생하시는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의 부활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만이 참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 분의 맹세만이 참된 맹세입니다. 그 분의 약속만이 가장 신실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너무 다르다.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주님의 평안이, 이 주님의 안식이, 이 주님의 용기가, 믿음의 사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헛되고 거짓된 평화를 바로 알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만 굳게 붙들기를 소망합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 보기를 원합니다. 은혜로 인도하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